- 김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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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지쳐 혼자만의 안식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정작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면 그 평화로움을 누리기보다 가슴 한구석에 밀려오는 외로움에 치를 떤다.
이러한 외로움을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신혼 초 3개월 간이었다. 새 가정을 꾸리기 전 우리집은
늘 북적거렸다. 창밖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김없이 귀가를 독촉하는 전화벨이 울렸다. 주말에 한가하게 여유를 즐겨볼 참이면 엄마의 심부름과 막둥이 동생이 피아노 치는 소리에 잠시도 평화로울 틈이 없었다. 그 시절 나는 북적거림으로부터의 탈피와 내 마음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유를 갈망했다.
그런 내게 아무도 없는 깜깜한 집에 혼자 들어서는 경험은 생소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에 들어선다는 생각은 아득한 공허함에 빠져들게 했다. 신혼 초 신랑의 귀가는 대부분 나보다 늦었고 나는 신랑이 올 때까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했다. 머리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잘 활용해야겠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러한 날들이 얼마간 지속되던 중 문득 한 글귀가 눈에 띄었다. 자세한 문구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내용인즉, ‘사람은 원래 고독한 존재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고독함을 느끼는 것은 상대방의 사랑이 부족함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고독함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고독함을 알고 그러한 느낌을 즐길 수 있을 때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였다.
이 글귀를 읽으며 결국 나의 느낌은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나는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외로움이 밀려올 때면 내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불안한가?’, ‘내가 불안하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화가 오고 갈 수록 수많은 관계에서 비롯된 역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진짜 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참 자아를 살펴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새롭게 만들어진 나의 역할, 한 집안의 맏며느리이자 아내, 그리고 부모로부터의 독립된 진정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여러 역할이 꽤나 버거웠다.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한 불안함은 혼자 있을 때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나의 불안함이 새로운 역할의 완벽함에 대한 집착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나자 나의 나약함에 대해 인정할 수 있었다. 나의 불안함을 알고 나약함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는 다음과 같다. 내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나(참 자아)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다. 이때 참 자아라는 것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인 나와는 구분이 된다. 수 많은 역할 속에 뭍힌 참 자아는 나를 알아달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이는 마치 아기가 엄마에게 요구를 알아주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 아기가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듯 참 자아 또한 그의 요구를 알아듣지 못할 때 불안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같은 형태의 느낌을 내보낸다.
따라서 진정한 관계란 나와 나의 관계, 즉 참 자아와 사회로 요구되는 역할에 대한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나와 나의 관계가 건강하게 구축되었을 때, 비로서 나와 남과의 관계 또한 건강해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말마따라 육체성에 주어진 공간적, 시간적 한계를 초월한 완벽함, 즉 지상의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에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관계를 멍들게 할 뿐이다. 나의 나약함과 상대방의 나약함, 인간이란 존재가 나약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공감이 형성되고 성숙한 관계로 발전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