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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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으로 특별해지고 싶은가.
어렸을 적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초등학생 사생대회에 나갔던 적이 있다. 가을 풍경이라는 주제를 듣고는 시골 할머니 댁 앞마당에 있는 작은 정원이 떠올랐다. 가을이면 형형색색 옷을 잎은 단풍잎 사이로 이름 모를 열매들이 탐스럽게 익어갔다. 나무들 사이에는 아담한 분수가 있었는데, 물 표면에 단풍잎이 가득 비칠 때면 어느 것이 금붕어 인지 구분이 안 갔다. 어린 시절 내게는 그 자그마한 공간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 아늑한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열심히 흰 도화지 위에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 남짓 흘렀을 까.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크레파스 작업이 모두 끝나고 붓을 들어 바탕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상에 대한 욕심도,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거웠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자기가 그린 그림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본인의 작품에 자신이 있는 듯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옆으로 한껏 펼친 채 들고 나갔다. 그들의 그림을 본 순간 그 자신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황금빛 벼가 펼쳐진 벼밭과 허수아비를 그렸고, 어떤 이는 수려한 단풍으로 우거진 신비한 숲길을 그렸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명암과 화려한 색채 기법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에 사는 그들이 제대로 본적도 없을 벼밭이 미술학원에서 배운 작품이라는 것이 이해되지만 그때는 너무도 멋져 보였다.
그들의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내 도화지를 바라보았다. 몇 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초라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미술학원에서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내가 덜컥 수재들이 가득한 대회에 참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감으로 대충 슥슥 빈 공간을 채우고는 누가 볼까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날의 기억을 잊은 채 여러 날이 흐른 어느 날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선생님 손에는 우수상과 함께 내 그림이 부착된 액자가 쥐어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라웠지만 마음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한 번 초라하게 보인 나의 그림은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았다. 할머니는 기쁨에 겨워 내 그림 액자를 자랑스럽게 거실에 걸어 놓았다. 그러나 그 그림이 몹시 부끄러웠던 나는 몰래 그림을 떼어내 창고 속에 넣어버렸다.
이러한 기억은 이후 중고등학교 사생대회에서도, 글짓기 대회에서도 반복되어 일어났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내노라하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나는 한껏 수그러들었다. ‘어쩌면 저 아이는 저렇게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나는 들어본 적 조차 없는 감미로운 글귀는 천재가 아니고서야 쓸 수 없을거야. 나같이 평범한 아이는 안돼.’ 즉, 보통의 사람들보다 조금 잘하는, 그러나 감히 특기로 내새우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그저그런 실력의 소유자였던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서 점점 내 자신을 잃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 진로를 결정할 때였다. 부모님의 기대에 따라 이공계에 있었지만 수학과 물리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나는 역사나 철학, 국문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배워 어디에 써먹느냐는 주위의 만류에 갈등은 깊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가깝게 지내던 영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선생님 제가 무엇에 소질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난 네가 국문과에 가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국어와 글 쓰기에 소질이 있는 것 같거든.”
“저도 글쓰기는 좋아해요. 하지만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걸요. 제게는 특별함이 없어요.”
“음……네가 네 재능을 위해 노력한 적이 있니? 그저 타고난 재주를 활용할 뿐 그를 갈고 닦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니? 재능은 타고 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단다. 안그래?”
그때의 대화는 충격으로 남아있다. 한껏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결국 나는 또다시 어른들의 기대에 따라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그때 그 대화의 여운은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지만 애써 덮어버린채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서른의 문턱을 막 넘어선 내게 다시 묻는다.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무엇으로 특별해지고 싶은가. 지금 당장 할 수 있고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을 물었다.
한참을 주저거리던 나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답을 한다. 나의 눈은 어렸을 적 그림을 그리며 그저 즐거움을 느끼던 그 때처럼 빛이 난다.
“나는 내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싶어.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며 그들이 그들만의 빛을 찾도록 도와주고 싶어.”
나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연구원에 도전하는 동안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지금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다시 길을 선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음에 아직 살아숨쉬고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위로를 건낸다.
5년 후, 10년 후 나는 어떠한 모습일까? 지금의 이 도전이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기점이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