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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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인데 남녀 주인공이 영화 끝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판타지인데 순수하고 감동스럽다.
얼핏 역설적인 일들이 가능한 일본 영화, "미래를 걷는 소녀"였다.
SF 소설가 지망생인 미호는 어느 날 빌딩 계단을 내려가다 지진의 흔들림으로 핸드폰을 떨어뜨리게 된다. 떨어진 핸드폰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되고, 간신히 전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기 너머 상대방은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구시가지 주소를 알려주며 찾으러 오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는 두 사람..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상황을 파악하게 되는데..
미호의 전화를 받은 미야타 토키지로는 1912년을 살고 있다.
당대 유명한 소설가이자 미호의 시대까지도 잘 알려진 나츠메 소세키의 문하생으로서
집에서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원하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소설을 쓰고 있는 문학도.
자그마치 100년이란 세월을 건너 이야기를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어쩐 일일까.. 서로에게 끌리는 묘한 감정이 일기 시작한다.. 시간의 거리를 뛰어넘어서일까. 두 사람간의 전화는 달이 보일 때만 가능하다. 아마 달의 에너지가 무언가 작용을 일으키는 듯 하다. 그런 달의 힘을 빌려 두 사람 낮에 100년의 시간을 두고 같은 곳, 같은 레스토랑에서 (100년 전통의 카레 집에서) 각각 식사를 하는 정말 흔치않는 데이트를 하기도 한다.
한편 미호가 미래의 사람임을 알게 된 토키지로는 출판사로부터 늘 거절만 당하는 자신의 소설이 미래에 과연 존재하기는 한지, 단 한 줄만이라도 자신의 일이 미래에까지 남아있는지 알아봐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한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미호는 현재 시점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나서지만 안타깝게도 소설가로서의 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중간 이상한 일이 내게 일어났다. 미호와 토키지로가 100년 세월을 건너뛰어 데이트를 하던 바로 그 날이었다. 토키지로는 1012년 선물 가게로 들어가 거울을 사서 100년 뒤 누군가 찾으러 오면 전해달라 신신당부를 한뒤 미호에게 찾아보라고 한다.
설마..했는데, 그날 그 상점에 있던 어린 꼬마가 아주, 아주 나이많은 노인이 되어 미호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워낙 장수하는 인구가 많으니 아주 허황된 설정은 아니다 싶었다. 근데, 이 노파 전화로 토키지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아주 진심을 담아 전한다. 그런데 웬지 내가 찡...하다.. 나이 든 노파의 연기가 너무 실감나서인가.. 이 감동은 뭐지.. 예상하지 못한 장면에서의 찡..함에 스스로 좀 놀라면서 지나갔다. 그런데, 그런데 여기에 사연이 있었다!
토키지로의 흔적을 찾던 미호는 우연히 토키지로의 사망 소식이 담긴 오래된 신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도 바로 토키지로가 죽은 날!
간신히 구름 뒤에 가려졌던 달빛이 모습을 드러내 겨우 그와 전화 연결이 되어 다급함에 그 사실을 알리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전하는 미호. 그런 미호에게 그는;
"내겐 반드시 태어난 이유가 있고, 지금 그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리 하겠어."
다름아니라 그는 그날 연못에 빠진 그 어린 꼬마를 구하다 죽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노파가 100년 뒤 과거의 그와 통화를 하며 그리도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할 수 밖에..
신기한건, 이 사실을 모르고 그 장면을 보았는데도 알 수 없는 찡...함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역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크게 울림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토키지로는 그날 이제 막 새로 완성한 "미래를 걷는 소녀"라는 소설을 출판사에 가져다 주려는 길이었다. 출판사는 늘 그에게, 그의 소설에는 스스로 느낀 감동이나 무언가가 빠져 있다고 지적했는데,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토키지로가 미호를 향한 마음을 담아 쓴 소설이다. 그렇지만 그 꼬마를 구하기 위해 그의 원고는 물가에 버려둔체 그는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토키지로가 소설을 완성한걸 알고 있는 미호. 토키지로의 여동생 집을 수소문해서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후손들도 몰랐던 그의 유작 소설, "미래를 걷는 소녀" 원본 원고를 발견하게 되고.. 드디어 100년이 지난 21세기 그의 소설은 세상과 만나게 된다..
영화가 감동스러운건 아마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이유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거. 그게 사실 그렇게 쉽지 않은 일임을 이제쯤은 알기에..
게다가 그것이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 타인을 위해 내 삶을 바쳐야 한다면 더더군다나..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100년이란 긴 시간을 한 점으로 몰아보면
토키지로의 소설은 21세기에 빛을 발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토키지로와 그 꼬마. 그리고 미호 세 사람이 운명적으로 얼키고 설켜서
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그러니까 한 순간도, 어느 한 사람의 삶도 그냥 일어난 일은 없었던 게다.
다만 한시적 삶을 사는 우리가 그 때 당시는 모를 뿐..
신은 늘 인간에게 있어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점과도 같다고 하지만
시공의 한계를 지닌 우리에겐 그렇지 못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현존하는 당대에 가능한 많은 걸 누리고 싶어한다.
물질적인 성공도 명예도 세상모든 권력도..
그래서 어쩌면 길게 펼쳐놓고 보았을 때 길이 아닌 길을 가기도 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며 결국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오기도 하고..
오늘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우주에 분명 흔적을 남기는데, 그걸 헤아리기에 나는 너무 한계적이다..
나 자신 또한 그렇게 살아왔기에 어린 남녀 주인공들이 나와 한 번도 만나지 못하며 설레임만으로 사랑을 주고 받는 이 영화에서 순수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수함을 바탕색으로 보이듯 보이지 않게, 판타지라는 형식을 빌어 관객에게 이야기하는 감독의 메시지가 현실처럼 다가온다.
과연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난 그것을 받들 준비가 되어 있을까.
내 자신의 에고를 넘어 보다 한 차원 높은 자기실현의 길 말이다..
또 한번 특이한 일본영화를 만났다.
분위기이던 소재던, 일본 영화는 그 나름의 독특함이 만나는 영화마다 조금씩은 베어있는 것 같다.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발달해서인지, 자칫 유치하거나 황당할 수 있는 판타지 장르를 감동 멜로로 잘 만들어낸 것 같은 일본 영화, "미래를 걷는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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