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1년 12월 26일 10시 3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신영복 교수님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에 신영복 교수님께서 작성하신 몬드라곤 방문기가 있어서 아래에 전문을 소개합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제가 기업의 대안으로써 인상 깊게 자료를 정리해두었던 대상이라 더욱 반갑기도 하였습니다. 과연 신영복 교수님은 몬드라곤을 방문하고 어떤 느낌을 가지셨는지 궁금하여 천천히 읽고 보았습니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협동조합 또한 생존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몬드라곤의 이런 변화가 협동조합 최초의 정신을 잊고 경쟁력이라는 현대 기업의 정신으로 변모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같이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몬드라곤 방문기

 -신영복 교수-

 

- 우리는 우리가 현재 서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고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면서 길을 만듭니다. -

 

스페인의 역사는 크로마뇽인이 그린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처럼 오랜 역사 속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한니발, 시저, 나폴레옹과 같은 전쟁영웅에서부터 사도 바울, 세네카, 프란시스 베이컨,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이슬람과 카톨릭 등 인류사가 보여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근대사의 출항지(出航地)이며 참혹한 내전이 휩쓸고 간 시련의 땅이기도 합니다. 세계사의 증인(證人)같은 땅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스페인이 모색하는 21세기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특히 몬드라곤 생산자 협동조합(Workkers Coorperation)에 대해서는 그것을 어떤 대안적 의미로 읽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엽서를 받고 느낄 당신의 실망이 마음에 걸립니다. 나 역시 비 내리는 빌바오 공항에서 몬드라곤을 떠나면서 'Making Mondragon'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그곳에 묻어두고 돌아온다는 것이 무척 서운하였습니다.

 

1956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신부가 5명의 노동자와 함께 그들의 이름자를 따서 울고 (ULGOR)생산협동조합을 만든 것이 오늘의 몬드라곤의 효시입니다. 폐업한 작은 주물공장에서 석유난로를 만들기 시작한 지 40. 지금은 무려 3만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협동조합 그룹으로 눈부신 성공을 이룩하였습니다.

협동은 인류의 원초적 정서이고 공동체는 오랜 삶의 틀입니다. 20세기 역시 다른 세기와 마찬 가지로 그 엄청난 격동의 파고를 헤쳐오면서도 이러한 공동체적 이념이 포기되지 않은 세기였습니다. 인간적인 정서가 파편화되고 공동체적인 삶의 틀이 심하게 상처받을수록 오히려 귀소본능(歸巢本能)과 같은 그리움을 키워내기도 하였습니다.

유럽 각국에서 광범하게 일어났던 60-70년대의 협동조합 운동이 또한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협동조합 운동은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세를 잃게 됩니다. 혹은 이상주의로 말미암아, 혹은 현실의 높은 벽으로 말미암아 결국 실패하거나 변질되어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MCC(Mondragon Collective Corporation)가 보여준 성공은 당연히 20세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들이 자본가나 국가관리자들보다 더 효율적이고, 더 정의롭고, 더 인간적인 경제활동을 조직할 수 있다는 사례로서 이른바 '대안(代案)의 맹아(萌芽)'를 만들어 내는 운동적 의미로 읽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몬드라곤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척 무거웠습니다. 실망의 상당부분은 어쩌면 나의 과도한 기대 때문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초기의 많은 가치들이 포기되었다고는 하지만 몬드라곤이 지향했던 협동의 가치에 대한 신뢰는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물론 MCC가 헤쳐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무한경쟁의 높은 파도를 모르지 않습니다. 몬드라곤의 헤수스 이 힌또(J. E. Ginto)이사 역시 민주, 자치, 협동의 원리를 원칙적으로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생산과 고용규모, 수출량 등의 통계치를 들어 MCC가 스페인 10대 그룹으로 성장한 사실을 앞세웠으며 교육과 기술투자를 바탕으로 한 경쟁력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경쟁력'이라는 단어를 또다시 스페인의 몬드라곤에서 들었을 때의 착잡한 심정을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쟁력이라는 요건은 자본주의의 바다에서 협동조합이라는 작은 배가 침몰하지 않기 위한 일차적 조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엄습해오는 경쟁의 높은 파고는 가히 사활적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이 아닌 경우는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 중에서 가장 정곡을 찌르고 있는 답변은 '협동조합이 회사가 되는 경우'라는 ICA(국제협동조합연맹)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협동조합과 회사의 차이는 제도 면에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수롭지 않은 차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은 '경쟁' '협동'이라는 아득한 거리를 두고 갈라서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오냐티의 ETEO(몬드라곤 경영기술대학)에서 만난 호세 루이스(J. Luis)학장은 바로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비교적 솔직한 견해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효율성에 밀리는 인간적 관점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회사와 협동조합의 차이는 '로봇' '인간'의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21세기에는 민족이라는 혈연적 공동체나 국가와 같은 공간적 공동체 대신에 '고도신뢰 집단(高度信賴集團)'을 핵으로 하는 어떤 공동체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의 구심력이 되는 신뢰의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간주의에 대한 신뢰를 구심력으로 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경쟁력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대상화되고 인간의 삶이 파편화된 냉혹한 시장(市場)현실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현실을 통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각이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을 재구성하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비록 인간주의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관계와 신뢰집단이 밖으로는 편협한 집단이기적 집단으로 경원 시 되고 안으로는 신앙촌의 헌신성으로 맹목화되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별 공동체를 넘어서는 연대(連帶)에 대한 전망을 잃지 않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른 공동체를 향하여 변함없이 창문을 열어 두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한 경제적 약자들이 견딜 수 있는 물심양면의 힘을 모을 수 없을 것이며 무한경쟁의 세계 체제 속에서 20세기의 수많은 집단들이 보여준 공격과 방어의 역사를 청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몬드라곤은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미리뫼'(龍山)입니다. 몬드라곤이 있는 이곳 바스크 지역은 산세와 기후는 물론이며 역사와 민족과 언어에 있어서도 스페인의 보편적 문화와는 구별되는 비스페인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이유가 납득이 갈 정도였습니다. 몬드라곤의 이러한 역사와 전통의 특수성이 오히려 대안적 의미를 낮추는 요인으로 여겨졌습니다.

특수한 사례가 보편적 교훈이 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떤 특수한 전형(典型)을 만들어내는 노력보다는 저마다의 역사와 현실을 이루고 있는 가장 보편적 정서와 가장 현실적인 삶의 틀에서부터 출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 실천과 그 일상적 실천을 부단히 축적해간다면 전형은 사후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가장 친숙한 생산, 소비, 학습, 문화의 틀에서부터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틀을 주어진 조건으로 인정하고 그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대상을 좀 더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나가는 평범하면서도 꾸준한 노력에서 시작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카소는 그 개인의 생애가 곧 현대 회화의 역사가 될 만큼 언제나 새로운 미학의 선두에 서 있었던 행복한 미술가임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의 명화 '게르니카' 앞에 서면 그가 말라가의 메르세데츠가에서 키워온 지극히 서민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말가가 해변의 눈부신 햇살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메르세데츠 광장과 그 광장의 비둘기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풍경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피카소의 생가 바로 앞에 펼쳐져 있는 이러한 일상적이고 평범한 서민적 정서가 때로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기도 하고 때로는 서민적 현실을 뛰어 넘는 이상과 추상의 세계로 비약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찾아 관광객들은 한결같이 가우디의 천재성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가우디의 천재적인 건축물 역시 스페인의 도처에서 만나는 스페인의 보편적인 전통미학을 형상화한 것임을 있습니다.

 

어떠한 시대의 어떠한 천재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오랜 전통과 서민적 정서로부터 그들의 천재를 길어 올리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넓게 그리고 오래 공감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안은 차별성에 열중할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보편성에 충실해야 옳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피카소가 어린 시절에 햇빛을 나누어 받았던 메르세데츠 광장에 앉아서 다시 몬드라곤을 생각합니다.

스페인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과거의 중압 속에서 몬드라곤의 이상을 개척해간 호세 마리아 신부의 이야기를 상기합니다. '우리는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나아가면서 길을 만든다.' 그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나아가면서 길을 만드는 실천'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마저도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승인한 것이라 믿습니다.

 

 

 

2. 가슴에 무찔러 드는 글귀들

 

1. 서론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16)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18)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20)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시한 문안도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

 

주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의 종법 질서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무한 경쟁 시대입니다. (22)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 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23)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24)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누님들의 영어 교과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서는 길게 탄식하셨지요. 천지현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교과서와는 그 정신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천지현황과 “나는 개입니다. 나는 짖습니다”의 차이는 큽니다. (27)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기만 하면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27)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본질적 차이가 지적된다 하더라도 이른바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의 본질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28)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28)

하지만 차이라는 것, 특히 나라는 관점을 중심에 두게 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에 대한 대입이고 이것은 비교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열등감이 생기는 것이고,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가치를 망각하게 된다.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는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 궁극적으로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29)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여기서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비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고전 강독의 화두인 관계론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9)

 

근대사는 서구 문명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이 지난 몇 세기 이래 줄곧 서양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30)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30)

 

종교의 과학에 대한 억압이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가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의 경이적인 발전이 인간적 가치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요. 신무기나 신상품의 생산 기술이 과학 발전의 동기가 되고 있으며, 과학은 다시 자본 축적의 전략적 수단이 되어 사회 변화를 증폭하고 미래에 대한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31)

그렇다고 해도, 과학의 발전은 사회적인 현상의 하나인데 이것을 늦출 수는 없다. 특정 목적에 맞춰 속도를 조절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선생님은 과학은 희망을 주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말씀하신다. 과학에 대한 어떤 사회적 고찰을 하여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부분이다.

 

서구문명의 구성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거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면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32)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최근 동양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이와 같은 성찰적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가 인문주의인 것은 사실이며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는 구조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양에 대한 관심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대륙에 대한 콜럼버스의 관심입니다. 과도하게 축적된 초국적 자본이 자본주의 시장권에서 분리되어 있던 동구권과 러시아 대륙에 이어서 다시 광범한 중국 시장에 쏟는 관심, 이것이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3)

 

엄밀한 의미에서 일면성을 띠지 않는 시각이나 관점은 없습니다.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 그렇게 때문에 객관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반론이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입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실천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을 참여점으로 하는 고전 독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3)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4)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한마디로 적게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여 자본 축적으로 이루어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 제도를 가능하게 했다는 논리입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금욕주의가 바로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라는 논리입니다. (34)

 

자본주의가 과연 프로테스탄티즘의 근검절약에 의해서 성립하고 발전해왔는가,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기준으로 동서양을 비교하는 방식이 근본에 있어서 비대칭적 구조가 아닌가를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버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를 개진한 것이기보다는 자본 논리를 합리화하는 맥락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35)

 

동양 사상은 물론 사후의 시공에서 실현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세를 신의 소명과 직선적으로 연결시키는 단선적인 신학적 사유 체계가 아닙니다. 비종교적이고 현실주의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버의 주장이 틀린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형식주의와 체면에 대하여 지적한 것 역시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담겨 있는 의미를 온당하게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지요. 체면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관계를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체면은 사회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35)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베버의 체계에는 동양 사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관계론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고 있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36)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37)

 

그릇이 진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생성의 질서가 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진흙이 그릇이 되고 그릇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를 고집한다면 생성 체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39)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39)

 

생기의 장으로서의 자연 개념은 현실적인 삶에서 욕망의 절제로 나타납니다. 절용휼물, 안빈낙도하는 삶의 철학으로 나타납니다. “봄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 않고 촘촘한 그물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맹자) 것이지요. 동양 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0)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동양 사상의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인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41)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동양적 인간주의는 이처럼 철저하게 관계론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42)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을 인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 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는 쌀을 함께 먹는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

 

동양 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 산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43)

 

동양적 구성 원리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나타나는 그러한 모순이 없다고 했지만 이것은 동양 사상의 내부에 모순 구조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

 

유가와 도가는 이로써 서로 견제하고, 이로써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동양 사상에 관한 설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된다는 원칙론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44)

 

동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란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의 논리를 화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46)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정의가 언이 되고 언이 부족하여 가가 되고 가가 부족하여 무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는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하여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55)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56)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사실과 전설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2)

 

시경에는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저항시와 노동요가 대단히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편향된 여과 장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과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매우 귀중한 정신세계가 왜곡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세계와 시적 정서, 나아가 시적 관점은 최고의 정신적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64)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로 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이지 않습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64-65)

 

누가 누구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개인적 세계를 열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 ‘시경’의 세계는 그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짓없는 애환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매몰되고 있는 허구성입니다. 미적 정서의 허구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66)

 

1957년과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던 하방운동의 사상적 근거가 바로 이 무일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방 운동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당 간부, 정부 관료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내려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군 간부들을 병사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운동이었지요. 간부들의 주관주의와 관료주의를 배격하는 지식인 개조 운동으로, 문화혁명 기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하방 운동에 동원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71)

 

신세대 정서로는 그러리라고 생각됩니다.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2)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74)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75)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75)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노인들의 위상이 급격하게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 (76)

 

인류의 정신사는 어느 시대에나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모색하게 마련입니다. 농본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77)

사회의 노령화를 걱정하는 것은 경영학, 경제학에서 생산의 관점에 몰입된 편협한 사고이다.

 

노인 세대의 비율이 급증한 시기는 바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인류가 장신구를 사용하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장례 행위를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77)

인구구조의 변화, 즉 노령화 사회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노령화는 염려해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인문,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사회적 지혜의 깊이가 깊어진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저자가 염려하는 과학의 일방적이고 기형적인 발달이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게 하였다면 노령인구가 청년인구를 넘어서는 인구통계의 변화가 어쩌면 희망이 될지도 모르겠다. 경영의 현장에서 의미에 집중하고,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도 이런 인구통계의 변화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런 경향은 더욱 가속이 붙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 오기 때문입니다. (77)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詩 세계임에 비하여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입니다. ... 굴원이 중국 시인의 대표인 것도 처음으로 그 이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78)

 

굴원이 밝힌 유배의 이유는 다소 엉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다 부패했는데 자기 혼자만 깨끗했기 때문에 추방당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깨끗했기 때문에 추방당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했다는 것입니다. (80)

 

청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81)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82)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왔기 때문입니다. (83)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계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 기제를 드러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 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84)

 

굴원은 동정호 남쪽에서 방황하다 기원전 295 5 5일 멱라수에 돌을 안고 투신하여 59세로 일생을 마칩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단오절인 이 날을 시인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84)

굴원에 대한 내용을 TOPICA로 잘 정리해 둘 것

 

 

3. 주역의 관계론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 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그릇이 집집마다 있었지요. 여러분도 물 긷는 그릇을 한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서로 비슷한 그릇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87)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89)

 

의난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 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들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에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 (90)

 

텍스트로서 경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였지요. 유구한 삶의 역사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시민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점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내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자의성을 지적하여 미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괘의 구성과 쾌사, 효사에 동양적 사고의 원형이 담겨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공자학파의 철학적 해석 방식뿐만 아니라 경 속에 담겨 있는 관계론에 주목해야 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91)

 

주역을 읽고자 할 때는 십익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십익은 해설서기 때문에 ‘주역’의 전체 구성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92)

 

여담이었습니다만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와 실위의 개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과는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입니다. (102)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주역의 관계론적 철학사상이 이러한 사회 역사적 지반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107)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131)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133)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춘추전국시대의 사회 경제적 특징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사회 경제적 배경은 사상사의 이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도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0)

내가 기업문화를 바라볼 때도 문화적 측면에서 이상으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현대 사회 그리고 대한민국 그리고 중소기업이라는 사회 경제적 현실을 무시하고서는 공염불에 그치는 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려면 기업에 국한된 공부와 사유도 필요하지만 좀 더 큰 맥락과 관점에서 사람, 사회, 경제, 경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연구원 상반기에 읽었던 책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인권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서의 노예관을 이유로 들어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에 대한 담론이든 민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141)

고전을 읽을 때 중요한 관점. 시제를 생각한다.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몇 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분의 주인공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아픔 때문에 다시 고통 받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등불처럼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옛 친구를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나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147)

 

시간을 객관적인 실재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 형식일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200, 300살이라고 대답한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47)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긴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148)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를 전하는 것만으로는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150)

 

베버가 강조하는 직업윤리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전문성에 대한 거부가 동양 사회이 비합리성으로 통한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입니다. ‘군자불기’를 전문성과 직업적 윤리의 거부로 이해했습니다. 분업을 거부하였고, 뷰로크라시를 거부하였고, 이윤 추구를 위한 경제학적 훈련을 거부하였다고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양 사회가 비합리적이며 근대사회 형성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151)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동력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151)

 

춘추전국시대는 법가에 의해 통일됩니다. 춘추전국시대 같은 총체적 난국에서는 단호한 법가적 강제력이 사회의 최소한 질서를 유지하기 우해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치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의 학이라고 한다면 행정명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치는 난세의 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3)

 

첫째는 형과 예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입니다. ... 사회의 지배 계층은 예로 다스리고 피지배계층은 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나라 이래의 사법원칙이었습니다. 형불상대부 예불하서인이지요. 형은 위로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예는 아래로 서인에게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154)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4)

조직문화를 생각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가르침, 예와 형의 적절한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다. 특히 과거에 비해 예의 개념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현상이다. 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듯이 조직에서 형을 기준으로 직원들을 움직이려 한다면 형에서 제한하는 범위 이상의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부끄러움에 관한 것입니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교통순경이 교통법규 위반 차량 네다섯 대중에서 한두 대만 끊자 적발된 차량 운전자가 당연히 항의를 하였지요. 저 애도 위반이라는 것이지요. 교통순경의 답변이 압권이지요.

어부가 바닷고기를 다 잡을 수 있나요?” 처벌받은 사람은 법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다만 운이 나쁜 사람인 것이지요. (155)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156)

너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잘못된 위로 같은 것. 너도 그러는데 내가 느끼고 있는 나의 부정을 위로하는 것. 내부에 마련된 도덕률, 삶을 살아가는 기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등등....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156)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158)

 

그러나 인간의 의식이란 어차피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 대한 일차적 인식으로서의 이른바 감성적 인식은 부분적 인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로부터 유리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161)

 

'논어의 화동론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162)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소인동이불화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3)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163)

군자가 많은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군자는 스스로 되어야 하지만 군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들어 주는 것은 조직, 사회의 몫이다. 소인만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을 만들어 두고서 군자가 없음에 대해서 땅을 치고 한탄한들 나아지는 것은 없다.

 

중국의 중화주의는 철저히 문화적인 것이며 결코 패권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설령 그러한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화주의란 군사적 강제나 정치적, 경제적 강제를 배제한다는 의미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다른 문화, 다른 가치,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관용과 공존을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근본에 있어서 얼마든지 또 하나의 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구성 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64)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 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화의 논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6)

 

신체가 건강한 것보다는 마음 좋은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루쉰이 의사 되기를 포기하고 문학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가 그렇습니다. ....우매한 대중의 각성이 더욱 시급한 중국의 과제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무쇠 방에 갇혀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중국인의 각성을 위하여 치열한 일생을 살아갑니다. (167)

기업의 재무상태가 좋다고 해서 그 기업이 각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숫자만을 바라보고 있는 기업이라면 그들의 번영이 얼마 가지 못한 것이다. 무쇠 방에 갇혀 죽어가고 있는 꼴이다.

 

변혁기의 수많은 실천가들이 한결같이 경구로 삼았던 금언이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는 것이었어요. 운동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것은 인간관계로서의 덕이 사업 수행에 뛰어난 방법론으로서 검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169)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는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 “만약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170)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 (172)

 

번지가 인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이다.” 이어서 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란 지인이다." (172)

 

각각 다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안연에게는 인이란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답변하였고 중궁에게는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사마우에게는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173)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3)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174)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상품 가치와 자본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지는 지인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한 사회일 뿐입니다. (175)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176)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요지는 적어도 사가 관념적 사고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학이 보편적 사고라면 사는 분명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180)

 

반대로 자기 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일을 처리하면 위험한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이론을 이끌어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현장 활동가들은 대단히 완고합니다. 자기 경험만을 고집합니다. .. 경험적 지식은 매우 완고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181)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주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은 멀고 소이는 가깝지요.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과 사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182)

 

그가 부럽다고 하는 이유는 선생에게는 방학이 있다거나 칠판에 쓰는 것이 전기배선 작업보다 힘이 덜 든다는 것도 아니었어요.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 일해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교실보다는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지요. (183)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184)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다. 퇴각할 때는 (가장 위험한) 후미를 맡았다. 그러나 막상 성문에 들어올 때는 (화살을 뽑아) 말에 채찍질하면서 “내가 감히 후미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말이 나아가지 않아서 뒤처졌다”고 하였다. (187)

 

공을 숨기도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188)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징역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192)

 

과거의 사상을 비판할 경우 우리가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바로 비판의 시제입니다. 고대 사상을 오늘의 시제에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어떠한 의미로 진술된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사상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묻히는 것이지요. 당시의 가치, 당시의 언어로 읽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입니다. (193)

 

바탕이 문채보다 승하며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194)

 

우리의 삶과 우리 시대의 문화를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고 카피의 문장과 표현이 도달하고 있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누구나 감탄하고 있는 일이지만 광고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소비자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사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회운동 단체의 성명서처럼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을 전개하는 형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질이 승하여 야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195)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199)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200)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201)

 

지자는 눈빛도 총명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자는 일단 앉아 있는 사람으로 형상화됩니다. (201)

 

 

5. 맹자의 의

 

공자는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춘추시대의 군주는 지배 영역도 협소하고 전통의 규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특히 군주 권력이 귀족 세력들이 제어를 받는 제한 군주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전국 시대의 군주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 군주였습니다. 춘추시대에 비하여 국가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211)

 

공자의 仁이 맹자에 의해서 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2)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에 비하여 사회성이 많이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213)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득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이나 서민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 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213)

경영자가 마음에 담아두어 할 가르침. 리더의 마음 가짐.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임금을 몰아내고 현인을 세 임금으로 세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직단도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직단은, 비유한다면 로마교황청입니다. 그로부터 임금의 권력이 나오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민본 사상입니다. (217)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219)

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적 정서, 아이들을 키울 때도 관계보다는 아이 하나의 존재에 모든 것을 강조하고 가르친다는 느낌이다. 이런 일반적인 경향은 어쩌면 앞으로 20~30년 후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줄듯하다. 관계와 공감.

기업 문화에서도 '스타시스템'만이 성과를 만들고 미래 경쟁력을 만드는 것으로 기형적 가치부각이 되고 있다. 똑똑한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논리이다. 장자의 무용지용을 생각나게 하는 문화의 기형이다.

 

우선 맹자의 논리 전개 방식과 그 비유의 적절함이 어떻습니까? 문장의 간결함, 흐름의 유려함, 대비의 명쾌함, 그리고 한문 특유의 농축미가 서로 어울려 이루어내는 격조를 나로서는 생생하게 살려낼 방법이 없습니다. (222)

 

화살 만드는 사람은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 봐 걱정한다. 무당과 장인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기술(기술)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230)

직업을 선택하는 시점에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것을 잠시 관리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해보자. 내가 하는 일이 직원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인지 감시하는 역할, 내가 하는 일이 직원들의 일이 제대로 이루어 지도록 하는 스폰서의 역할 그런 관점에서 직업을 해석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인식이다.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232)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안다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237)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237)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의 하나로 수오지심, 즉 치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39)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 (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가지 않는 법이다. (불영과불행). (243)

가치의 포용력. 현대 경영이 만들어 놓은 웅덩이는 무엇이 메꿀 것인가. 그것은 사람에 대한 가치를 재정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 ★★★★★★★★

개인에서 모든 조직에 적용해 볼 수 있는 귀중한 가르침. 나는 어떠하며, 나의 조직은 어떠한가.

 

** 논어와 맹자는 조직문화의 재발견을 위해서 꼭 정독해서 가르침을 정리해야 하는 고전이다. 1~3월 자유독서에 꼭 2번 이상 읽을 수 있도록 할 것.

 

6. 노자의 도와 자연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입니다. 노자의 귀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3)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254)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할 것과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노자의 반문화 사상이 지배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비판 담론뿐만 아니라 나아가 저항 담론과 대안 담론으로서 그 지반을 넓혀가게 됩니다. (256)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의식구조에 있어서 엄청난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가 구축됩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물리적 강제를 은폐하고 유화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현대 자본주의는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대중 조작 체계를 장악하고 이성의 포섭뿐만 아니라 감성의 포섭까지 완성해놓고 있습니다. ... 이런 맥락에서 해체주의자로서의 노자가 생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257)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닙니다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264)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269, 270)

 

<노자>의 제1장은 무와 유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계론의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노자의 무는 ‘제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무라는 것이지요. 도는 천지 만물의 생성과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노자의 철학적 체계입니다. 도가 작용하여 만물이 생성 변화 발전하는 것 그것이 유입니다. 형이상학적 체는 무이지만 형이하학적 용은 유라는 것이지요. ‘도무수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도는 없고 물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형인 도체가 유형인 도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로써 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270-271)

 

무위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입니다.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272-273)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277)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284)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284)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曲流)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285)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286)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낙수가 댓돌을 뚫는 이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288)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289)

조직은 우리라는 힘을 이용할 수 있을 때 정의가 되고 진정으로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쉬운 방법을 택한다. 똑똑한 사람을 외부에서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약발이 다 하면 조직은 급격히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라는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가 떠내려 간들 얼마나 멀리 가겠는가. 파선되어 어느 강 기슭에서 쪼가리로 남아 있는 존재일 수 밖에.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289)

 

그 자명한 사실의 배후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유의 배후로서의 무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293)

 

백성들이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임금을 믿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지요. (296)

 

분명히 변화합니다. 변화하는 이유는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이러저러한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가기 때문이지요. (297)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301)

 

 

7. 장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309)

 

제도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310)

기업문화 변화의 방향성은 전체적인 문화적 질을 감안하면서 개인의 작은 변화들을 끊임없이 시도하여야 한다. 제도와 환경을 만들고 그것의 가치와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작은 것들을 계속해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열정 문화, 자율 문화, 협력 문화는 인위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장자’ 독법입니다. ... 결론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혹시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과도기는 언제나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많은 담론의 와중에서 우리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패권 경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장자’ 독법의 핵심적 과제라고 생각하지요. (310)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311)

 

당신이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소? 하여 돌려보냈다는 일화입니다. (313)

 

노자는 도의 존재성을 전제합니다. 도를 모든 유의 근원적 존재로 상정하고 이 도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314)

 

그 사람의 절실한 현실인 ‘옷’과 장자의 고답적인 사상인 ‘무시비관’을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장자 철학의 관념성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의 정점은 장자기 미친 듯이 호루라기를 불어 순경을 부르고 순경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대목입니다. 루쉰의 대가적 면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장자와 호루라기라는 극적대비를 통하여 장자의 허구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장자의 무시비란 결국 통치자에게 유리한 논리임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호루라기는 권력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16)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319)

 

장자는 약소국의 가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사상을 키워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자유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상 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1차적 가치는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반생명적인, 반자연적인 그리고 반인간적인 모든 구축적 질서를 해체하려는 것이 장자 사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신의 자유입니다.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320)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생기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가 사람이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仁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326)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을 피하려는 둔천의 형벌이다. 천인합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천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는 일화가 수긍이 갑니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입니다. ...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328)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의 차이.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력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경영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 효율과 이익이 아니라 더 큰 무엇을 위한 가치. 그것을 찾아내어 공유하고, 공감하고 실행하는 것. 그것이 경영이 아닐까. 아니타로딕이 생각난다.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노동이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닌, 노동이 놀이가 될 때, 소요할 수 있는 대상이 될 때 그것은 삶이 되고 도가 되는 것이구나.

 

...윤편이 말했다. "....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 그것은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 받을 수가 없습니다. .... 옛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책의 한계에 대해서 이보다 더 명쾌한 비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337)

책을 읽을 때 텍스트에만 몰입되어서는 안 된다.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을 생각하지 아니한다면 그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그저 찌꺼기만 만지작거린 셈이다. 그가 이야기 하고 싶은 더 큰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표현되지 못한 그것!!!!!!!!!

 

세상에는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하다는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과 색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과 성일 뿐이다. (338)

 

쓸모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의 하위개념입니다. 다른 것을 만드는 데 유용한가 유용하지 않은가 하는 수준의 것이지요. (340)

인사제도는 어떠한가. 유용한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 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342)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 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을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헤칠 수 있겠는가? (343)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라 한다. (345)

 

장자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나비 꿈’은 인생의 허무함이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일장춘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345)

 

지식이란 의거하는 표준이 있은 연후에 그 정당성이 검증되는 법인데 문제는 그 의거해야 하는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350)

나는 어디에 표준을 두어야 하는가. 내가 이야기하고 싶고, 주장하고 싶은 것의 표준과 의거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누구의 사상이기에 앞서 반드시 무엇에 관한 사상이게 마련입니다. 사상이란 일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생성되는 것이지만 그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면 사상도 사상사의 장으로 물러납니다. .... 사상이란 독자성에 앞서 시대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시대가 사상을 낳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363)

 

묵가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묵은 성씨라기 보다 학파의 집단적인 이름이라는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묵자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백성이 국가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태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당시는 혁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혁명적 상황에서 묵가는 통치 권력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좌파 조직의 좌파 사상이었으며 묵적이란 이름은 그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65)

 

공자와 묵자는 다 같이 춘추전국시대이 사회적 상황을 ‘사회적 위기’로 파악했습니다. 무도하고, 불인하고, 불의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자와 묵자는 현실 인식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묵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세 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보더라도 묵자가 기층 민중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묵자는 겸애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라는 상생 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라는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겸애와 반전 평화를 묵자 사상의 핵심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370)

 

묵가는 그 사회적 기반이 와해되면서 함께 소멸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기층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을 조직하여 세습 귀족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최초의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배 집단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소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후인 19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유교사회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여 재조명됩니다. 그래서 2천년만의 복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요. 묵자의 기구한 운명은 민중들의 그것만큼이나 장구한 흑암의 세월을 견뎌온 셈입니다. (371)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379)

 

1929년의 세계공항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케인스의 처방 때문이 아니라 2차 대전이라는 전시경제 덕분이었다는 것이지요. 2차대전의 엄청난 파괴가 최대의 은인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마치 소비가 미덕이듯이 전쟁이 미덕이 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 대체로 10년 주기로 경제공항이 반복되어왔으며 대규모 전쟁 역시 10년을 주기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의 전쟁사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383)

 

"내게는 선생을 이기는 방법이 있으나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초왕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은 공수반이 아니라 묵자가 했습니다.

공수반의 말은 나를 이 자리에서 죽이면 송나라를 공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의 제자들은 금활리 이하 300명이 이미 저의 방성 기구를 가지고 송나라의 성 위에서 초나라 군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저를 죽인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385)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친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386)

 

묵자가 반전평화론을 전개하면서 부딪친 가장 힘든 장애가 당시 만연하고 있던 사회적 관념이었습니다. 부국강병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쟁이라는 패권 시대의 관념이 최대의 장애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387)

 

묵가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묵자 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묵가의 조직과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391)

 

묵자 사상은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철학적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적 입장에 있어서 어느 학파의 사상보다도 관계론에 철저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이 겸애와 교리라는 사회적 가치로 구현되고 다시 이 겸애와 교리가 당대의 사회적 조건에서 반전 평화, 절용이라는 실천적 과제와 통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93)

 

비명이란 하늘이 정한 운명과 숙명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화복은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며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은나라와 하나라의 시를 인용하여 “천명이란 폭군이 만들어 낸 것이다”... 하늘의 뜻은 상애상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형식으로 그의 사상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지요. (395)

 

 

9. 손자, 유가와 법가 사이

 

일반적으로 유학은 객관파와 주관파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의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와 이학파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404)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 천과 인은 서로 감응하지 않는 별개의 존재입니다. 천은 자연이며 음양일 뿐입니다. (405)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울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이 무슨 일인가 한다.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천지와 음양의 변화이며 드물게 나타나는 사물의 변화일 뿐이다. 괴상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두려울 것은 없다. (406)

 

순자의 ‘능참’은 ‘실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408)

 

인간의 적극 의지와 능동적 실천에 근거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의 질서와 도로 돌아갈 것을 설파했던 노장과는 반대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409)

 

따라서 여러분은 ‘천론’과 ‘천명론’의 차이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자가 천명론에서 명을 제거함으로써 인을 제자리에 놓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410)

 

순자의 예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를 곧 법과 제도의 의미로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순자의 인문철학이 이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421)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성인이나 폭군이나 군자나 소인이나 그 본성은 같은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 (423)

 

 

10. 법가와 천하통일

 

우리가 법가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구사회 종법 구조가 이완되고 보수적 저항성이 약화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공간을 충분히 향유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관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미래사관과 변화사관이 그것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이 과거의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구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개념입니다. 법치주의는 이러한 개혁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의 법치주의는 먼저 성문법의 제정과 신상필벌 원칙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발전입니다. 군주의 자의적 폭력에 대한 제도적 규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적 예측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나라는 작은 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시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법령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써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좇고, 대부의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으며,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놓고, 백성들이 곤궁하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 의복, 가구들을 호사스럽게 하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재화를 낭비하며 나라는 망한다. 날짜를 받아 귀신을 섬기고, 점괘를 믿으며 제사를 좋아하면 나라는 망한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르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한 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면 나라는 망한다. (449)

 

 

11. 강의를 마치며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사상 투쟁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는 사상 체계의 완성으로 일단락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연속과 단절, 계승과 비판이라는 중층적 과정을 경과하는 것ㅇ 사상사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지만 이처럼 복잡한 전개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체적 입장과 실천적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504)

 

고전강독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창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508)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서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09)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510)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510)

 

'‘그림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511)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515)

 

 

3. 내가 저자라면

 

저자의 오랜 세월 고충이 고전문학을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고, 인간을 조명하는 거울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쉬운 내용들은 아니었지만 담담하게 읽어갈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 책을 읽고 나니 인간관계, 사회구조, 나아가 경제와 정치까지 나 또한 사회를 보는 눈이 조금은 깊어진 듯하다.

고전학자가 아님에도 책의 곳곳에서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고전에 저자의 관점을 제시하는 부분들은 저자를 더욱 존경스럽게 만든다. 세상에 이미 진리처럼 굳어진 곳에서도 나의 눈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새싹처럼 새로운 이치들이 들어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다.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논어와 맹자 부분은 조직문화를 해석하고 재정립하는데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고전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 경영석학들이 내어 놓은 전문서적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논어와 맹자를 통해서 사람,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을 정리하고 접근하는 것이 더 나은 순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IP *.163.164.176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052 [Sasha] 35th - 강의 두번읽기 file [1] 사샤 2011.12.26 3540
» 35.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신영복, 돌베게 철학하는 인사쟁이 2011.12.26 2898
3050 [리뷰] <강의>_신영복, 두번째 읽기 file 양경수 2011.12.26 5220
3049 35. '강의' 두번 읽기 file 미선 2011.12.26 2554
3048 35.강의 두번읽기 file 미나 2011.12.25 2716
3047 북 No.35 - 신영복 '강의' 두번 읽기 file 재키 제동 2011.12.25 2859
3046 [Sasha] 34th Review 코리아니티 - 구본형 file 사샤 2011.12.19 2792
3045 34. 코리아니티, 구본형, 휴머니스트 file [1] 강훈 2011.12.19 2702
3044 코리아니티 - 구본형 [1] 루미 2011.12.19 2718
3043 34. 코리아니티_구본형 file [2] 미선 2011.12.19 2752
3042 북 No.34 - 구본형의 글로벌 경영전략, 코리아니티 file [2] 유재경 2011.12.19 6098
3041 34.<코리아니티> 구본형 file 미나 2011.12.18 2234
3040 [리뷰] <코리아니티 Coreanity>_구본형 file 양갱 2011.12.18 5515
3039 [북리뷰14] <아프니까 청춘이다> 김난도 [1] 2011.12.15 3513
3038 [북리뷰13] <아내-순종 혹은 반항의 역사> 메릴린 옐롬 2011.12.15 2837
3037 [Sasha] 33rd Review - 주역철학의 이해 (고희민) 사샤 2011.12.13 3627
3036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 신정근 루미 2011.12.13 3150
3035 33. [고전 중에서 한권] 맹자, 맹자저,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강훈 2011.12.13 5877
3034 [리뷰] <중용>_자사_이동환역해_현암사 양경수 2011.12.12 5601
3033 33. 맹자 file 미선 2011.12.12 3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