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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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망각되기 마련이다...이 책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인 헤로도토스가 이 망각을 염려하여 자신이 직접 연구조사한 것을 적은 것이다.
<헤로도토스 역사> 들머리 첫구절
경상북도 문경군 출신인 나도 인간세계에서 일어나기 마련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망각을 염려하여 자신이 직접 연구조사해서 적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그건 1950년 음력 6월 2일 하루 동안 문경군 저부실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과 가족의 이야기다. 그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있는 그대로 연구 조사해서 적어보고 싶다. 내가 태어나 자랐고, 아버지가 50년 이상 살고 있는 고향동네 자연부락에서 같은 날 9명의 청년이 죽었다. 우리집에서는 두 사내를 잃어버렸다. 60년이 지나도록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날의 장면 속에 있던 이들은 거의 노환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자손들이 몇 남아 살고 있다. 보도연맹 사건의 진상규명을 원하는 단체가 있다는데 아버지가 가입을 안 하는 건 우리 막내동생이 아직 직장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얽어서 고생하고 욕먹고 피해를 입었던 경험이 많았던 이들은 혹시 아들이 공무원이나 군인, 경찰이 되려 하면 그런 것이 장래를 방해할까봐 가슴 속에 머금고 있다. 내가 이 일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며 어떻게 사용되든 있었던 일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된 것에는 이런 저런 계기들이 있었다.
헤로도토스 역사에 관련된 칼럼으로 이걸 써야지 맘 먹었을 때 이런 꿈들을 하루 이틀 사이에 꾸었다.
나는 증조할머니 방 문을 연다. 증조할머니는 나를 업어서 키워주신 분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20년이 지난 때다. 할머니 방바닥의 장판 무늬와 이불의 색깔이 기억에 선명하다. 할머니 앞에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 두 사람이 누워있다. 어디가 아파서 간호를 하는지 할머니가 한 다리를 세우고 걱정스럽게 앉아 두 누운 이의 이마를 짚어보고 손을 잡아보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준다. 나는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깜짝 놀란다. 누워있는 이는 백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가 죽은 줄 모르는 지 살아있는 아들인양 걱정스레 간호하고 있다. 해골이 누운 채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하면서 빙긋 웃는다.
나는 무쇠를 두드려 만든 조선칼로, 오래 써서 가운데가 움푹 패인 나무 도마(이런 건 도마가 아니라 도매기로 불러야 어울린다)에다 금방 삶은 살코기를 놓고 썰고 있는 할머니 옆에서 빨래를 빤다. 할머니는 잔치에 오신 손님에게 대접하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제사 음복음식 같기도 했다. 양념없이 담백하게 삶은 돼지고기다. 맛있게 삶아졌고, 딱 먹기좋게 식었다. 할머니더러 빨라 달라고 간 건데 할머니가 바빠보여서 어쩐지 내가 해얄 것 같아서 엉거주춤 애벌빨래를 한다. 손의 감촉이 명주수건이다. 다섯 장을 빨았다. 나는 거기 묻은 얼룩이 눈물이나 피같다고 느꼈고, 애벌빨래를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개운했다.
이건 신탁도 아니고, 이걸 해석해줄 무녀도 없기 때문에 내 맘대로 내 꿈을 생각한다. 우선 그날 어머니 뱃속에서 아버지를 잃었던 내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듣겠다고 작정하는 것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써보겠다고 하는 것이 오래 동안 내버려둔 피눈물 닦은 수건을 애벌빨래하는 행위일까? 그건 모르겠다. 나는 아부지한테 술을 한 잔 받아드리면서 지나간 이야기를 들어볼 요량으로 과메기를 주문했고, 주말에 내려가겠다고 전화를 했다. 하지만 이 칼럼과 독후감 마감 1시간 전까지 지금까지 머리를 쥐어뜯고 미간 세로주름을 세우며 간당간당 타이핑을 하고 있다. 금요일 주문이 늦어서 과메기는 다움주 화요일에나 택배가 발송된다고 한다. 아버지는 포항 과메기를 생김에 싸서 쪽파와 마늘을 얹어 소주를 한 잔 하시는 걸 육회 다음으로 좋아하신다. 내가 늘 이렇게 느리다. 하지만 어른들한테 분면히 물어볼 것 같다. 아버지한테,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다른 분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들어 볼 것이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다고 해도 어른들은 잘 말씀해주실 것 같다. 또 그 일이 일어났던 그 곳에 한 번 가보고 싶다. 뮤즈의 건드림이든 뭐든 누군가에게 감흥이 주어지고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여 뭔가를 하게 된다면 가능한 일이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이런 걸 이미 하고 있을 것 같고, 앞으로 누군가가 해야할 일 같다.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똑 떨어지게 대답한다면 그건 과거에 있었던 일이면서 나와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일어났던 일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나는 그것과 깊이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들어보고 칼럼을 썼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라도 동네방네 떠들어두면 정말 시작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