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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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구본형의 <깊은 인생>에 등장하는 인물 중 내가 홀딱 반해버린 아니타 로딕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나 일과 마찬가지로 인생도 복잡한 것이 아니야.”
나에게도 물론 남과 다른 인생의 역사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사리 속 고사리처럼 끝없이 장황해지겠지만, 나는 대체로 복잡할 건 없었다고 기억한다. 정신과를 전공하는 친구는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나의 강박증을 이해하고 싶어서 정신과 의사가 되었지. 공부해보니 내 강박증은 초등학교 때 리코더 시험을 볼 때 받았던 트라우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나도 나를 정신분석하기 시작한다면 각주를 여러 개 단 긴 글을 쓸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나를 정의하는 것에 도움을 줄지 의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종족으로서 가지는 공통점이 그보다 훨씬 많다. 사람들의 행동 및 사고 방식은 개인 본연의 고유함에 기한다기 보다는 상황의 결과물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낼만한 상황에서 화를 내고 웃을 만한 상황에서 웃지 않는가?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지구를 모래알로 보았을 때, 우리 은하계는 여의도이며, 이 은하계가 우주에 수억 개가 존재한다. 인간을 모래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모래 간의 크고 작음을 백사장에서는 분간할 수 없다. 파도가 부서지는 한가로운 백사장이 우리가 구성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언젠가 밀려오고 또 언젠가는 왔던 곳으로 다시 밀려갈 뿐이다.
나는 그냥 똘망하고 평범한 모래알이 되고 싶다. 무색 무취의 감촉까지 고만고만한 우묵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저 수묵화의 밋밋한 배경 같은 사람이어도 좋다. 그것이 자유의 다양한 방법 중 하나라면. <깊은 인생>을 읽고, 비전으로 닳아 오른 열락의 새가 될 줄 알았더니 나는 우드스턱의 오두막에 가만히 내 배낭을 내려놓았다. 나 역시 스피노자처럼 과거에는 부모에게 사랑받는 자식이었지만 사실 그건 너무 재미가 없는 역할놀이였다. 내가 신을 부정하고 렌즈나 닦는 청초한 이단자가 되어도 이 우주는 눈도 꿈쩍 하지 않는다는 걸 이젠 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나는 마냥 자유롭다. 나는 태생적 열등감도, 그에 기인한 출세의 야망도 다 관두기로 했다. 직장에서 상사의 눈치야 보겠지마는, 그냥 진심을 다해 일할 뿐 떳떳하기만 하니 신경쇠약에 걸리는 건 너무 억울하다.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고 퇴근하면서 마저 읽으니 이 어찌 뿌듯하지 않을까? 그리 무겁지 않은 음악이 있고 농담을 주고 받을 친구가 있다. 이루고 싶은 바들이 있지만,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또 다른 멋진 목표들을 세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성공에 대한 강박은 지난 30년의 고질병이었다. 그러니 인생은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의 연대만을 기록할 수밖에. 실패가 상실이 되고 내가 우울함에 지쳐갈 때 내 서재의 책들은 그저 이렇게 위로했었다. 이상이란 유년기의 특징이며, 어른이 된 이후에는 현실과 이상 간의 괴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그 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순순히 자신이 범인에 불과했음을 받아들이라는 조언이다. 아, 그런 건가? 그래 그랬던 거로구나. 나는 그 말이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라면, 이 또한 그리 힘든 일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 <깊은 인생>을 읽고 보니, 나의 문제점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성공과 실패의 이진법밖에 알지 못하였으며, 또 성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나의 문제는 그저 단순한 무지에 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남들과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
장독에 새로운 술이 있는 걸 알면 퍼서 마시는 법이다. 나는 요즘 책을 쓰고 싶어서 연구원 선발 과정에 열심히 참여 중이다. 긴장도 되고 흥분도 된다. 너무나도 재미있다. 좋은 책을 엄선하여 읽으라고 권해주는 벗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잠시 현업에 종사한다는 핑계로 멀리하였던 책들 - 밥벌이의 냄새가 전혀 배지 않은 책들 - 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배낭을 맨 모래알갱이다. 우드스턱에는 나의 종이벗들이 많이 있다. 언제고 초대하리라. 꼭 함께 하자.
내가 그러하였듯이, 지구에 잠시 머물다 가는 히치하이커라면 누구라도 이 <깊은 인생>의 매뉴얼을 참고해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