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펄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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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모님이다. 나의 신체와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그들의 유전자를 나는 물려받았다.
나의 역할들이다. 나는 엄마이고 아내이고 딸이자 며느리이고 선생님이고 이웃사촌이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나를 보여준다. 내가 좋아하는 책, 내가 좋아하는 옷, 내가 좋아하는 차...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여준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 내가 좋아하는 선배, 내가 좋아하는 직장동료, 내가 좋아하는 후배... 내가 자주 만나고 교류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뢰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통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재미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몰입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장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구본형의 ‘깊은 인생’에서 제시한 깨우침, 견딤, 넘어섬의 3단계에 나를 대입해보기로 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깨우침
나에게 깨우침의 시기는 직장생활 5년차에 찾아왔다. 9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낸 첫 번째 직장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나는 직장 생활 중에 완전히 다른 산업분야의 안정적인 기업에 지원을 했고 합격통지를 받고 난 후 퇴직의사를 밝혔다. 퇴직과 동시에 새로운 직장에 입사하게 된 나는 연수과정중에 그 일이 별로 그렇게 나의 흥미를 끄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아니라는 느낌을 알면서도 다른 것들로 위안을 받으면서 꾸역꾸역 일을 해나갔다.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하는 것이 우선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을 견딘 나는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출근 전철 안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현기증이 횟수가 늘어서 한의원을 자주 찾게 되었고 잦은 위장질환으로 소화제를 달고 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결혼을 하고 원했던 인력팀으로 부서이동을 하게 되면서 뭔가 다시 희망이 보이는 듯 하였다. 그런데 환경만 바뀌었을 뿐 내가 바뀌지 않았으니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매일 반복되는 업무라는 점은 같았다. 단지 하는 일이 바뀌었을 뿐. 어느날 전철을 타고 가면서 피곤한 가운데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다가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얼음덩어리속에 갖혀서 꼼작달삭을 못한 채 둥둥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온몸에는 하얀 붕대를 칭칭감고 있고 눈은 감고 있었다. 그렇게 꽁꽁 얼은 얼음속에서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그렇게 천천히 따라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한가지 희망적인 것은 한 쪽손에 가위를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붕대를 감고 가위를 쥐고 있는 그 사람은 분명 알고 있었다. 이 가위로 내 자신이 붕대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또한 알고 있었다. 그 가위로 무언가를 할만큼의 힘조차 자신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더군다가 그 사람은 얼음 덩어리 속에 갖혀있었다. 바깥에는 화창한 봄날씨라 햇살도 좋고 꽃도 피었고 잎사귀들이 푸르른 빛을 더해가고 있는데 그 사람만 얼음덩어리속에 있으니 한겨울같이 추워서 꼼작달삭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그렇게 나자신을 떠올린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그 뒤로 나는 의사결정을 다소 급하게 하였고 그 결정으로 5년간 견디어오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었다. 나를 데려갔던 학교선배인 상사는 마음이 상해서 내 환송회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왔다.
견딤
나의 정체성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내가 어느 어느 학교를 다녔고 어느 어느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껍데기 일뿐이라고 냉소하면서도 그것은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어릴 적부터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주위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학교, 어느 회사 사람이 아니고서는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못생기고 못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정말 속속들이 나를 보여주게 되면 나를 싫어하고야 말거라는 불안감이 항상 내 안에 있었다.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서열을 매기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나 자신도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사람들로부터 낮은 서열로 평가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속한 조직이 없이 개인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춥고 외로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딱히 내가 가야할 곳이 없고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도 없다는 것이 참 어색하고 난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혼자 밥을 먹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책을 보고 잠깐 마트에 갔다오고... 하루종일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남편이 퇴근해오면 그제서야 이야기를 하는 날들도 있었다. 회사에 다닐때보다 오히려 더욱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가는 듯 했다. 그렇더라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끈을 놓치는 않으려고 했다. 심리학 스터디를 나가고 대학에 가서 심리학 수업을 청강하고 대학원에 지원하는 일들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굉장히 몰입도가 낮았다. 수업을 듣는 것으로 그뿐이었고 스터디에 나가서도 그 시간이 다지 다시 복습하거나 집중하여 그 내용들을 되새김질해보진 못했다. 뭔지 모르게 불안하고 긴장되면서도 산만하여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것 자체로 다행이다 싶은 날들이었던 것도 같다. 생각했던 자유와 해방감은 정말 잠시였다. 그 뒤로 개인미술치료를 마무리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실제로 미술치료사가 되기 위한 공부와 수련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던 것 같다. 나를 돌아보고 내가 그동안 편안하게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부분들을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미술작업을 통해서, 많은 책들과 수업들을 통해서, 따뜻한 관계들을 통해서...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바쁘고 급했고 실습을 할 수 있는 곳들이 나오면 꼭 그걸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무리스럽게 강행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어딘가 나를 있는 그대로 풀어놓고 표현할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대학원이라는 곳도 하나의 조직이고 힘든 면이 있었다.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 나의 미숙함이 그대로 드러나 몇몇 분들과는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그 분들을 어려워하고 또 그분들의 인정에 목말라했는지 좀 안쓰럽기도 하다. 그냥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 분들로부터 어떤 가르침들을 받으려고 했다면 좀 더 편안할 수 있었을텐데... 인정받고 싶고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실망감도 크고 그로 인해 분노감이 생기고 어찌할바를 모르고 그랬던 것 같다. 그분들도 나름대로의 힘든 상황이 있었던 것 같고 나는 나대로 그 상황에서 그분들이 의도하였든 의도하지않았든 상처받고 그랬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대학원 생활의 마지막에는 처음시작만큼 따뜻하고 아름답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논문을 쓰게 되었을 때는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최악의 상태였던 것 같다. 최악의 상태에서 나는 바닥을 찍으면서 논문을 썼던 것 같다. 한의원에 몇 번씩 드나들고 링겔을 맞으면서... 나 혼자의 힘으로 뭔가를 해내야한다는 압박이 엄청나게 나를 힘들게 하였고 그 시간들을 버텨낸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건널수 없는 강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내 이름을 건 무엇인가가 나오는데 잘하고 싶은데 마음은 급하고 그만큼의 준비는 안된것같고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없고 내가 뜻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고 계속 다른 대안을 모색해봐야하고 선택해야하는 상황들의 연속...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결국은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 희열감은 굉장히 컸다. 아 정말 이게 나의 논문이구나. 그 안에 나의 모든 것을 담았구나. 그동안의 인생사에서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대충은 다 담았구나... 그래서 그 논문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런데 사실 그 논문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오직 엄마만이 “수고가 많았고 고생했다. 장하다 내 딸” 하면서 나를 응원하고 격려해주었다. 시댁식구들은 자기 아들이 힘들게 번 돈으로 공부했다고 오히려 그것을 고깝게 생각한 것 같고 남편 또한 읽어봤을지 의문이다. 이렇게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미술치료사로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정말 기쁜 마음이었지만 몇 개월 후 적응을 하고 나자 이제는 조금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 즈음 해서 임신이 되기도 했다. 아이들과 만나서 씨름하고 헤어지고, 그 아이들의 부모를 잠깐 만나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좀 답답하게 느껴졌다. 매일 미술치료실 안에만 머물러 있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는 알기도 어렵고 알 필요도 없는 상황. 옆방의 놀이치료사, 인지치료사 선생님들과 만나서 대화는 하지만 별다른 성장이라는 것이 없을 것만 같고 지루해지기 시작했던 것같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았고 약속했던 대로 3개월 후에 다시 치료사로 출근을 하였으나 엄마젖을 매일 먹던 아이가 그 젖을 냉동하여 녹여주니 먹지를 않는 일이 발생했다. 연세가 있으신 시어머니가 융통성있게 대처를 못하신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내가 없는 상황에 대한 대비를 했으면 별일없이 계속 미술치료사를 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긴 하다. 결국 치료센터에 시어머님이 아이를 데려와서 젖을 물리고 데려가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보니 한달 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한달 간을 가라앉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집안에 우여곡절 및 아이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우리는 친정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렇게 8개월을 지내면서 친정엄마와는 그간 하지 못했던 엄마의 인생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항상 바쁘게 밖으로만 나돌던 딸과의 시간이 나와 엄마에겐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도 잠시 엄마가 건강상의 이유로 우리 식구가 나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선언을 하였고 우리는 다시 시댁으로 왔다. 그렇게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시댁과 친정 가족들과의 갈등과 화해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경험하면서 1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미루던 청소녀상담사 연수를 시작으로 친구따라 직업상담사 자격을 취득하고 교육과정을 들으면서 조금씩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이를 맡기고 나가서 있는 자유시간이 너무나 달콤했다. 그렇게 나에 대해서 조금씩 더 알아간 것 같다.
나는 사회 속에서 내 자리가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내 일로 인정받고 싶고 내 자신을 갈고 닦아 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나는 내 이름 석자를 통해서 명예를 얻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깊은 교류를 하면서 나와 그들의 성장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들었던 교육과정에 특강강사로 오신분이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정보를 주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 나는 거기에 선발이 되어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무섭고 어려웠다. 그런 모습을 다 드러내고 너무 챙피하기도 하고 서럽기도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적응해나갔다. 상담은 어느 정도 편안해졌지만 강의를 나가야할 때는 몇 주 전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결국 강의가 있는 주말쯤에는 하루종일 강의준비를 하면서 온갖 히스테리는 남편에게 다 부르고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조급해하면서 모두 다 하려고 하기보다는 내 페이스대로 조절하면서 천천히 나가고자 하게 되었다. 너무 질려버리면 금방 떠나고 싶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다가 또 우연히 기회가 왔다. 내가 원하던 대학교의 경력개발센터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겁이 났지만 내가 하고 싶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도전했다. 그리고 일년 뒤 다시 또 내가 원했던 자리에 기회가 왔을 때 나는 도전했다. 큰 기대없이...
그런데 나는 내가 기업을 떠나올 때 팀장님께 이야기했던 그 꿈을 다른 기업에서 이루게 되었다. 상담가가 되어서 다시 이 회사의 인력팀으로 돌아오겠다고. 그 때 당시에는 그런 자리가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냥 그건 나의 생각 속에 있는 꿈일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상담심리대학원으로 진학했어야하는데 나는 엉뚱하게도 미술치료를 배우는 곳으로 진학을 했었고 그로 인해 경로가 더 헝클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상담심리대학원을 간다고 하더라도 기업에 상담가로 있는다는 것은 그냥 이상일뿐 그게 현실이 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단 10년만에 그런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 현실에 나도 가담하게 되었다. 가서 하게 될 일이 어떤 일일지, 또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겠지만 나는 이제 믿는다.
견디다보면 나름대로의 길이 보이고 나는 그것을 견딜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 다시 이 길이 내 길이 맞을까, 내가 잘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방향이 이게 맞나, 내가 이 일을 할 만한 그릇이 되는 사람일까 등등 여러 가지 회의가 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회의를 통해서 나는 성장할 수 있는 것임을 알기에 전보다는 덜 두렵다.
넘어섬
아직 넘어섬에 단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견딤의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동안 따뜻하게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해준 고마운 스승님들이 여러분 계신다.
우선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 수줍음도 많고 약간은 냉소적이었던 나에게 글쓰기 훈련을 시키셨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항상 글쓰기 과제가 떨어지면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 그러면 나는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면서 나름 기뻐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였고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알아봐주셨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대학교때 지도교수님. 대학시절의 나는 고등학교때까지 억눌려 있던 나자신에 대한 탐색을 엄청나게 적극적으로 열심히 했었다.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녔다. 이런저런 동아리나 학회활동부터 문화기획단 참여까지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는 곳에는 한 번씩 발을 담궈봤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뭔가 내가 주도하는 입장이 되는 것에는 두려움이 생기게된 것 같다. 고등학교때까지 줄곧 반장과 학생회장을 했던 나이지만 대학에서는 그럴 상황도 안되었거니와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자라는 내내 뭔가 책임을 맡아야하고 앞에 나서야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잘 맞지 않는 옷같았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익명성속에 뭍힐 수 있다는 것이 편안하고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또 너무 나라는 존재의 존재감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은 싫었기에 나는 머리를 탈색 후 녹색, 빨간색 등으로 염색을 하거나 폭탄맞은 것 같이 뽀글뽀글하게 파마를 하면서 나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지도교수님은 항상 내게 “너의 감성으로 신촌거리와 학교주변에 대한 느낌을 써서 가져오라”는 과제를 이야기하셨었다. 함께 책을 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교수님의 그 말씀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가장 크게는 내게 글을 쓸 수 있는 어떤 영감이나 능력이 있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해서였다. 나에 대해서 뭔가 큰 기대감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그것을 채워드리지 못할 것 같고 그다지 재능이나 창의성이 없는 나의 속내를 들켜버릴 것만 같아서 두렵기도 했던 것 같다. 또 한 편으로는 그냥 교수님이 책을 쓰고 싶으셔서 그러시나보다 라는 짧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쩌면 나에게 왔을 인생의 첫 번째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 수백명의 학생중에 그런 제안을 받은 학생은 아마도 몇 명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왜 그 때는 진지하게 책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때는 모든 것이 너무 혼란스러운 때였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감도 못잡고 있을 때였고, 또 너무 이런저런일로 바빴던 때였고... 생각하자면 이유는 많지만 많이 아쉬운 기억이다.
교수님은 나의 어떤 면을 보고 그 때 그 당시에 그런 과제를 내주셨을까?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나는 직장생활을 하였고 직장생활 중에는 나를 알아봐준 스승을 만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진정 나 자신으로 있어본적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첫 직장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전의 나는 모두 버리고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바꾸어 적응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 온전한 나로 있기보다는 그래야할 것 같은 모습으로 있었기에 좋은 분들은 많았지만 나를 알아봐주고 나의 성장에 좋은 영향을 받았다는 기억은 크게 있지 않은 것 같다.
대학원에 가기 전에 받았던 개인미술치료에서 만났던 미술치료사 선생님. 껍데기를 벗은 내 모습을 따뜻하게 감싸안아주셨던 분이다. 그 분과 그분의 스승님을 모델로 나는 미술치료사라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게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주셨다.
대학원에서 만난 교수님. 그 분은 자기애적이고 자기연민에 잘 빠지는 나를 사랑스럽게 보아주셨다. 다른 어떤 교수님은 그런 나를 짜증스러워하셔서 힘들었던 대학원 생활이었는데 정교수님은 따뜻하게 감싸안아주셨다. 그리고 미술치료사로서 내가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신다는 느낌을 주셨다. 대학원 생활내내 내가 미술치료사의 자질이 있는것일까? 없는 데 억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질문에 시달리던 내게 교수님은 좋은 기운을 주셨다. 그리고 내가 한걸음씩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마다 항상 교수님이 옆에 계셨다. 분노라는 감정을 누군가가 받아준다는 따뜻한 느낌, 내가 지금까지 애써서 움켜쥐려고 했던 것들을 놓아버리고 새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동화로 만들고 엉엉 울 때 곁에서 따뜻하게 지켜봐주셨고 공감해주셨다. 또 소록도라는 낯설고도 무섭기도 한 공간으로 우리들을 이끌고 가셔서 인간으로서 소통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한단계 성장할 수 있도록 몸소 보여주셨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집에서만 아등바등하고 있을 때는 교수님께서 집으로 아이와 함께 나를 초대하여 주셨다. 그리고 따뜻하게 아이와 나를 맞아주셨다.
커리어상담이라는 영역으로 들어서고 나서 만난 선생님들. 내가 갈 방향을 잡고 힘든 순간들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조언과 격려를 주셨다.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나에게 필요한 질문을 던져주신다.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조언을 주기도 하신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롤모델을 가수 이상은이다. 사실 이제는 내가 아이돌 스타인 그녀를 좋아할 때만큼 가슴이 뛰거나 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사실 지금은 그녀가 DJ를 하고 있지만 그 라디오 프로를 챙겨듣거나 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녀의 삶의 여정이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과 닮아 있고 그것이 나의 20대를 가득채우고 있었다는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의 그녀 자체가 나의 모델이라기보다는 나의 마음속에 이상향으로 품고 있는 삶의 모습이란 그녀같은 모습이라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을 찾아서 끊임없이 탐색하고 그 과정들을 음악, 책, 미술 등의 형태로 표현해가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내가 바라는 내 삶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것이 나와는 백만킬로미터 이상의 거리가 있는 아주 먼나라 이야기였다면 지금은 “그래, 나도 언젠가는” 이라고 희망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조금씩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고 있고 또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가고 있다. 그 속도에 대해서 많이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나가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줄줄도 알게 되었다. 이제 조금씩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 같다.
선배님들의 추천대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고 있다. 그러면서 글쓰기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부담감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었다. 뭔가 의미있는 말을 해야하고 뭔가 압축적인 말을 해야하고... 그런 부담감에서 벗어나서 그냥 손가는대로 쓰다보니 분량이 많아지고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편집이 어렵다. 그래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이야기해야할 것 같은데... 이번 컬럼에서는 여기까지 해보고자 한다. 어차피 나에 대한 질문이므로 조금은 편안하게 내 이야기를 써도 되는 것이 아닐까하면서...
상담치료선생님...하시는 일을 이렇게 이야기하나요?
눈을 감고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려보는것.
저도 해 보았습니다.
내모습도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모습도
그러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도
가까운사람과의 관계도...모든것이 생각보다 선명해 졌습니다.
하고싶은 것도 많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많고 그런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곁에있는 분이 좀 힘들겠지요...?
제가 그렇거든요
이번 레이스중에도 제 남편은 하지말지...그럽니다.
그렇게 온통 시간을 거기다만 쓸수 있겠느냐고...
좀 협상이 필요한 상황이지요.
연배가 어떠신지는 몰라도 제가 지나온 생활들을 아주 살짝 였보는 것같습니다.
저는 요즘은 많이 편안해 졌거든요.
언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겠지 싶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를 읽어가면서...모든 분들과 한가지 이상씩의 저와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있어요.
참으로 놀랍지요. 인연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같은 기질들....^^
저도 이상은씨가 롤모델은 아닌데...이상은씨 같은 재능이 없다뿐이지...기질적으로 참 많이 닮았다ㅡ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인데...
첫 데뷔할 때 담다디를 어찌나 좋아했던지...음치임에도 불구하고 반친구들 앞에서 그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사 안보고 부를 수 있는 노래 중에 하나이지요....(앗...너무 오랫동안 안불러봐서...가능할지 모르겠다.ㅎㅎㅎ)
우리 이런 인연 모아, 같이 뼛속까지 내려가 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