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윤정
- 조회 수 2598
- 댓글 수 10
- 추천 수 1
나는 누구인가?
<깊은 인생전>이 열리는 전시실의 관객 노선도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평범한 삶이 아주 특별한 삶으로 바뀌는 7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거기에는 각각 네 개의 영역으로 구획된 일곱 개의 방이 있었다. 방은 둘 셋 둘 씩 묶여서 깨침, 견딤, 넘어섬이란 팻말을 달고 같은 제목의 방들은 같은 색으로 벽이 칠해져 있다. 깨우침은 비둘기같은 흰색과 연보라색, 견딤은 성실하고 신뢰로운 파랑 계열, 넘어섬은 더불어 숲을 의미하는 초록색이었다. 나는 방마다 걸어가며 듣고, 보았다. 마리츠버그역의 간디, 춤공연 포스터 앞의 열일곱살 마샤 그레이엄, 해군장군 전용선 마녀에 올라타고 북해를 질주하는 처칠, 우드스탁의 수도도 안들어오는 아파트에서 최최최저 생계비만 지출하고 서점에 ‘내 앞으로 달아두라’고 말하고 가져온 외상책을 5년 동안 종횡으로 신나게 들이파는 이십대의 조셉캠벨, 안경알을 연마한 후 돌아와 안온히 책을 읽던 온화한 스피노자의 다락방, 뜰 앞의 잣나무를 가리키는 조주선사, 환경, 인권운동을 위해 강남역 보디숍을 팔고 떠나는 아니타 로딕의 짧은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찻집의 등나무 의자에 앉아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저음의 구수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저자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흥미로왔다. 그런데 일곱 개의 방마다 텅 빈 영역이 있었고 이렇게 적혀있었다. “당신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게로 물음이 되돌아온다. 어쩐지,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데 너무 많은 것이 거저 오고 있더라니......나는 빈 벽에다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포스트잍으로 붙여 놓기로 한다. 많은 다른 방문객들도 그렇게 할 거다. 그것이 이 전시 기획자가 방문객들에게 관람료를 받는 방법이었다. 한편 그것은 보너스 경품을 되주는 방식이기도 했다. 나는 기꺼이 그의 의도에 동참한다.
첫 번째, 과연 나에게는 소명을 깨닫게 하는 그늘체험이 있었을까?
두 번째, 나의 야생의 재능은 무엇일까?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사람은 다르지만 침묵, 고독의 10년을 견디는 이야기다. 나에게도 침묵의 1만 시간이 있었나? 아니면 어떻게 1만 시간을 해 나갈건가?
여섯 번째, 스승을, 사람을 얻었는가?
일곱 번째, 나는 무엇으로 세상에 공헌할 수 있을까?
나는 비범하고 성공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인데 국빈급 위인전 옆에다 내 얘기를 적어 붙어두어도 불경죄에 해당 안될까? 나이가 적고, 내 인생은 아직 진행형인데 이건 인생을 다 살고 나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닐까? 살아온 만큼만 살펴보고, 없으면 없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지. 그래서 짧은 동안에 나의 40년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나의 그늘체험
두 가지가 떠오른다. 나에게 메리아나해구같은 그늘은 스물한살 어느 가을날이었다. 언젠가 쓰레기통과 진분홍 티셔츠를 그린 적이 있는데 이건 그 날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다시 그린다면 쓰레기통과 진분홍 수건을 그릴 거다. 이 때 나를 구원해야할 절실한 필요가 생겼다. 자신을 구원하든가 폐기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재수를 마친 후 대학에 들어갔지만 학교를 잘 가지 않고 나는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남은 채 여러 날 잠을 잤다. 잠만 잤다. 어느 날 일어나서 씻으러 가려고 쓰레기통 옆의 바닥에 두었던 수건을 집어들었는데 하얀 벌레들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진저리를 내면서 뒷걸음질로 저쪽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가서 서둘러 싸서 버렸다. 그 간단한 동작이 대단히 지구를 떠받치는 것만큼 힘이 들었다. 며칠을 잔 걸까? 바깥은 화창한데 나는 동서울터미널 근처 반지하방에서 지하실 멀미를 하면서 자신을 종신형 죄수처럼 가두고 있었다. 젊음은 찬란하지도 발랄하지도 싱그럽지도 않았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 아니 죽어야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어나서 절에 갔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있어 하는 종교를 들이팠다. 그건 치유를 위한 안간힘이었고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렇게 20대가 갔다. 와중에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시간제를 거쳐 일자리를 갖기 시작했지만 직업탐색은 여벌이었다. 사랑하고 결혼하는 일도 여벌이었다. 그걸 다룰 만큼 에너지가 없었다. 나의 어둠 중 가장 짙은 그늘에 그 쓰레기통과 진분홍수건이 있다. 나는 다시 나의 그런 모습이 드러날까봐, 또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될까봐 대단히 두려워한다. 하지만 내 안에는 그런 상황을 만나 싹틀 수 있는 씨앗이 내장되어 있는 듯 하다. 둘러보면 나 말고도 이런 요소를 가진 이들이 보인다. 이걸 잘 다루는 것을 평생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을 할 여력이 안되면 안해도 괜찮다. 이건 어린왕자가 아침마다 제 소혹성의 바오밥나무를 자르고, 화산을 청소하는 것과 같은 작업이다. 안 그러면 마구 자라는 뿌리가 작은 별을 폭파시킬거라는 그의 말도 나는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30대는 빚을 갚은 시간이었다. 나는 늘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에 시다렸다. 부모님집에 집사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결혼하려고 몸부림치던 날이었다. 남들에게는 쉬웠던 일이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이 두 가지 만으로도 마음이 꽉 차서 바빴다. 직업에 대한 것은 출근해서 일하고 전철을 타고 서울로 퇴근하면 잊어버렸다. 월급을 받아 나를 부양할 수 있고, 집에 보내고 동생들과 사는 집의 자질구레한 지출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또 '우리 권선생'으로 통화 호칭을 쓰는 부모님을 보는게 기뻤다. 그런데 어느 날 필요없다고 나가달라는 통고를 집에서 받았다. 나는 서른여덟이었다. 한 동안 그 휴유증에 시달렸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모르겠다.
두 번째 그늘은 지금이다. 서른아홉 2월에 처음으로 내 명의의 전세계약서를 쓰고 독립을 한 후다. 나의 독립과 동시에 나를 그 학교로 불렀던 이는 다른 데로 발령이 났고 나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상황과 직면했다. 낯선 곳에 혼자 남는 것, 내가 제일 싫어하는 무서운 상황이다. 영화 만추를 보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면서 영화 속 안개 도시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곳 같았다. 전세 가격이 제일 싼 우리 동네에서는 3교대로 돌아가는 제철공장에서 나오는 오염물질 때문인지 새벽에 매캐한 황냄새가 난다. 환기는 해가 뜨면 시켜야한다. 주변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가족과도 거의 단절된 상태였다. 바리케이트이자 총을 든 계엄군은 ‘쫒겨났다’는 내 분노였다. 서흥도, 이 섬에 갖혀서 나는 스물한 살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듯 했다. 하지만 마흔 가까이 나이를 먹는 동안 내 별의 지각은 좀 더 안정되었고, 나는 내 별의 토양과 기후 특성을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노련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이제 내 정신을 온통 가져가던 세 가지-종교, 동생들,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이 모두 없어졌다. 나는 직업과 단 둘이 남았고 시간이 있으니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특수교사로서 나는 정말로 형편이 없었다. 아이들은 사랑스럽지만, 1년을 가르쳐도 자기 이름을 쓸 수 없고, 3까지의 수개념을 형성하기 어려우면서 반복되는 수업은 재미가 없었다. 쉬는 시간마다 내가 좋아하는 사이트 웹써핑을 했다. 첫 해는 보조원한테 얻어터졌고, 둘째 해는 옆반 교사한테 얻어터졌다. 학부모한테 치여서 심장 벌렁거리며 퇴근한 후 가위에 눌렸다. 폭식을 하거나, 숨어 우는 날, 남 얘기를 잘 들어주는 다른 학교 특수교사한테 전화 걸어 하소연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우울했다.
10년동안 내 교실에 같이 지내는 보조원과, 옆반 특수교사와만 소통하면 지냈는데 그 두 가지가 다 막혔다. 살자니 특수학급이 아닌 일반학급 교사와 친하게 지내야 했다. 학교에서 가장 사람 좋아보이는 선배샘한테 찰싹 붙었다. 승진을 위한 연구점수가 필요한 그 선배샘이 수업실기대회에 나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통합학급 수업실기대회는 통합교사와 특수교사가 같이 준비해서 통합반에서 수업을 한다. 그러니까 특수교사는 내 교실이 아닌, 우리 교실에 공부하러 오는 장애학생네 담임선생님과 함께 그 반에서 수업을 한다. 이걸 2년 연속 했다. 2년차인 두 번째 수업실기대회는 정말로 준비를 많이 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다. 좋은 점수를 내고 싶었다. 그 선배샘한테도 이익을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멘토, 저 분같은 특수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분이 심사위원 3분 중 한 분으로 그 수업을 보러 와서 뒤에 앉아 있는 데서 나는 아주 죽여주게 형편없는 수업을 했다. 한 마디로 죽을 쒔다. 기본도 되어있지 않은 개떡같은 수업이었다. 시작시간은 10분 늦었고, 끝나는 시간이 또 10분 늦었다. 아이들이 와글거리기 시작했을 때 어찌 할 바를 몰라 망연히 서있었다. 다른 안면없는 이들은 그냥 나가고, 내가 멘토로 생각하는 분이 악수를 청하면서 ‘어려운 수업 준비하느라 수고많았다’고 격려를 해 주시는데 나는 그 자리에 땅을 파고 숨고 싶었다. '멀리에 있지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어요'라고 내게 말해준 적도 있는 분이었다. 그 날 나는 소주 1병을 마시고 엉엉 울고, 선배샘은 소주 2병을 마시고 속상함을 나눴다. 참가상을 받았지만 수치심에 몸을 떨어야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내 교실에서의 내 수업에 자신이 없고, 거기서 훈련과 연구가 되어 있지 않아서였다.
그 해에 시도했던 2개의 협력 현장연구는 1년 내내 시작한 나를 미워하며 질질 끌어서 푸다닥 제출했다. 내가 주무였던 것은 도착하자마자 쓰레기통으로 갈 보고서였고, 한 개는 공동연구자를 잘 선택한 덕분에 나는 타이핑 한 번 안하고서 프리 라이더로 갈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실망스러웠다. 생각해보면 그토록 거센 보조원, 옆반교사의 문제제기는 나의 체계적이지 않은 일처리 방식에서 연유되었다. 나는 10년간이나 해온 이 일을 틀어쥐고 있지 못하고 신규같은 10년차였다. 그것이 내가 존중받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장애학생 가족지원에 대한 것은 숙제였다. 서흥도는 안팎으로 내게 그늘시절이다.
나는 우연히 인연이 되어 들어온 단군의후예 프로그램을 듣고, 필살기 책을 읽으면서 지금 나에게 어떤 힌트를 주고 있음을 본다. 소 발에 쥐잡는 식의 직업탐색을 거쳐 ‘어라, 얼렁뚱땅 왔는데 이 곳이 내 관심사와 영 딴 곳은 아니었네. 나는 측은지심이 있고,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이 일을 평생 해도 좋겠다’며 공립학교로 와서 11년차였다. 이건 이 책의 저자가 뜻을 세운 시기와 공교롭게도 일치한다. 나도 내 직업에서 전략적인 태스크에 집중해서 1만시간을 보내면 어영부영 그냥 보낸 10년과 어떻게 달라질 지 실험을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50살을 기준으로 나의40대를 돌아보는 글을 써 보았다. 순전히 예제를 보고 내 인생의 문제를 푸는 흉내고 모방이다.
1. 나는 마흔살에 나를 안온히 보호해주던 특수학급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현장연구하는 교사가 되어 퇴직할 때까지 1년에 한 편씩 현장연구논문을 쓰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해마다 가장 나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가지고 집중했던 것을 성과로 묶어냈다.
2.내가 새벽푸른빛 속에 건설한 안전기지가 이제는 굳건하고 안전한 성이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침형 인간이었다. 나의 정체성을 살리는 일과를 새벽, 가장 나답고 창조적인 시간에 배치하고 날마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태에서든 그 일을 했다. 먼저 모닝페이지를 하고 새벽기도를 하고 읽었다. 그것은 모두 나는 누구인가에 관련이 있는 것이었고, 실행함으로써 내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나는 남몰래 매일 새벽마다 사부작사부작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한 뒤 출근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나를 행복하고 기쁘고 부유하게 했다. 나는 누가 나의 동행인지를 알고 있었다. 대륙과 인종을 달리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3. 나는 좋은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한다. 함께 산책을 하고, 밥을 먹고, 이야기하고, 웃기고, 싸우고, 장난 치고 놀 때 마음이 편하다. 내가 비맞은 어린 새가 되어 품을 찾아들 때 그사람은 큰 나무로 덥석 품어주고, 그사람이 기댈 대상이 필요할 때 나는 그의 비빌언덕, 굳건한 반석이 되어준다. 우리는 자연스런 호흡처럼 만났다. 우리는 빛과 그늘, 후미진 오솔길과 깊은 어둠속 절벽, 꽃길을 동행했다. 우리의 사랑이 서로의 삶을 풍요롭고 따사롭게 했다.
4.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집에 살고 있다. 따뜻하고 볕이 잘 든다. 군더더기가 없고, 깨끗하고 쾌적하게 정돈되어 있다. 나는 텃밭과 정원을 가꾼다. 거기에는 평생 나를 동행한 엄마 채마밭의 정구지와 동북아3성에서 흔히 보는 우리꽃들과 꽃나무들과 유실수가 있다. 주변에는 갈 만한 도서관과 달릴 만한 로드 또는 운동장, 그리고 산책로가 있다. 그리고 밥이 식지 않을 거리에 지인이 살고 있어, 나는 김치전을 부쳐놓고, 특별히 맛난 수제비를 끓인 날 전화를 건다. 지인은 입은 옷채로 온다.
5. 나는 학교 교실에서 나의 취향과 창조성이 드러나는 장치를 갖추고 있다. 학교를 옮길 때는 이사가는 사람들처럼 이 모든 것을 싸들고 갔다. 하루 8시간 이상을 보내는 직장을 나는 나답게 만들었고, 편안하게 만들었다. 거기는 제 2의 내 집이었다.
6. 나는 거의 매일 노을을 보러 갔다. 나는 어린 왕자처럼 수우족인디언 노랑종달새처럼 노을을 좋아했다. 노을은 하늘이 내게 준 일종의 힌트다.
여기까지 적어난 뒤 to be comtinued~라고 적어 이것이 진행중임을 나타내고 싶어진다. 제법 길어서 이 글은 포스트잍에 못 쓰고 한 장으로 쓴 뒤에 쪽지편지처럼 꽁기꽁기 적어서 붙어두었다. 나머지는 노랑 포스트잍 한 장씩에 써서 붙여 두면 될 것 같다.
나의 야생의 재능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을까를 찾아보려고 한다.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도 열심히 찾아볼 것이다.
침묵, 고독의 1만 시간
나는 업 관련해서 1만 시간을 해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출발선에 섰다. 나는 열심히 해 나갈 것이다.
스승을, 사람을 얻었는가?
얻기 위해서 이 과정에 지원을 했다. 어찌 될 지는 모른다.
나는 무엇으로 세상에 공헌할 수 있을까?
열심히 찾을 거다. 그리고 ‘이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이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되겠습니다’는 식사기도를 내 깜냥만큼 실현시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