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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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축제란게 있었다. 남녀공학은 아니었지만 우리 학교는 여학교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강당을 같이 썼다. 거기서 우리 학교와 여학교가 한 번씩 축제를 한다. 축제의 꽃은 시와 그림이다. 그 당시 학원에서 알게 된 여자친구가 옆 학교에 다녔고 그 애가 시를 써냈다는걸 알게 되었고 나는 시를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래야 나도 그녀에게 꽃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시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쓴 시와 방명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시절 쓴 시를 보면 나의 주제는 '허무', '절벽' '행군' 등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경쟁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 내 시는 뽑혔고 방명록 첫 장에 그녀가 글을 남겼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축제 내내 여학생들에게 내 시를 설명해 주느라 바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낯뜨거운 일인데, 그녀 친구가 남긴 글에 그녀가 내 얘길 많이 한다고 해서 너무 신이 났었나 보다.
그 후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 되었고 그녀와 나는 흔한 연애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대학에 합격한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가끔 학원에서 보고 영화, 연극을 보러 가고 할 때는 그냥 편한 친구처럼 생각되던 그녀가 이제 일 년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보고 싶은지. 나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사실 시라기보다는 낙서에 가까웠지만 지금 옛날 일기장을 열어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한걸음 나의 감정에 벗어나 있기보다는 그 속에 빤히 보이는 내 모습이 민망해서이다. 그래도 나에게 시는 그 시절의 분출구였고 그래서인지 나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녀도 그랬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떨어진 우리는 나의 허무한 편지에 그녀가 지친 것인지 내가 먼저 지친 것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연락이 끊어졌다. 그 후에도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나는 낙서처럼 시를 끄적거렸다.
회사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시를 잊고 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주로 문학을 많이 읽었고 시는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가끔 가슴에 와 닿는 구절에 가슴을 치기도 했다. 다음은 무라카미 류의 성장소설 69에 나오는 랭보의 시 구절이다.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내 인생에서 시는 한바탕 지나가는 열병과 같았다. 시를 생각하면 무모하기도 했지만, 자신감에 넘쳤던 고교시절이 기억난다. 그 당시 썼던 내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아아, 이 시공간 속의 모든 발버둥은 절벽을 향한 행군
시작은 끝이 있고 우리의 인생도 여러 번의 시작과 끝을 거친다. 삶의 끝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나는 계속 발버둥 칠 것이고 나는 이 시공간 속에서 쉬지 않고 뭔가를 시도하고 시작할 것이다. 절벽의 끝에서 두려움 없이 자신 있게 날아가리라 다짐하며 오늘도 허리를 곧게 펴고 의자를 당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