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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2일 00시 20분 등록

나는 영이가 잘 되는 게 싫다. 내가 듣는 노래를 듣고 영이가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내가 공부하는 걸 영이가 보는 걸 싫어한다. 공부는 스스로 해야지. 한글도 배우기 싫어하는 내 동생, 그런 동생을 가르쳐주는 것은 좋지 않다. 공부는 혼자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 하기 싫어하는 동생을 억지로 가르치기 싫다. 요즘 애들은 똑똑하다. 그래서 영이가 더 똑똑해질까 봐 두렵기도 하다. 언니인 내가 더 똑똑해야 한다.

 

나현이 핸드폰에 들어 있는 글. 나현이가 망설이다 보여준다. 마음이 괴로워서 핸드폰에게 이야기한 것이란다. 순간 당혹감이 들었다. 나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지 머리 속이 복잡하다. 나는 나현이 마음을 안다. 나 역시 어릴 적 나보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여동생 때문에 우울했다.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에게 열심히 한글을 가르쳤는데 결국 어깨 너머로 보던 여동생이 먼저 한글을 깨치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한글을 알게 되었다고.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동생은 경시대회에서 상을 타오고 특목고에 진학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만 나는 지방 중소도시 여중, 여고 반에서 상위권에 들 정도의 성적을 유지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부모님의 기대 또한 달랐으니, 아버지는 여동생은 의대에, 나는 교대에 진학하길 바라셨다. 아버지는 여자의 최고 직업은 교사라고 나를 설득해놓고 여동생에게는 왜 의사가 되라고 하셨을까? 여동생도 여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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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의 나와 여동생 - 그래도 내가 훨씬 더 이쁘니 미모에는 자신감을 가져도 될 듯

 

사실 아직도 그 우울감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다섯 살과 일곱 살인 동생 아들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한글은 물론 한문까지 줄줄 읽는다. 하지만 일곱 살인 우리 둘째는 아무리 가르쳐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다. 다섯 살 때 왜 언니 선생님만 오고 내 선생님은 안 오냐는 성화에 한글 선생님을 모셨지만 아이가 글자에는 관심이 없고 선생님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선생님의 하소연에 공부를 중단하고 말았다. 작년 말 한글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만 내 자식이지만 가르치고 있자면 속이 터진다. 결국 똑똑한 동생의 아이들은 동생을 닮아 똑똑하고 아둔한 내 아이들은 나를 닮아 아둔한 것인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만 한글을 알면 되니 서두르지 말자고, 아이들마다 속도가 다르니 묵묵히 기다려주자고, 출발이 빨랐다고 결승점에 빨리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고 수없이 다짐하지만 마음 속 불안감은 계속 자라난다.

 

우리는 왜 불안한가? 위트와 지성이 넘치는 심리철학서로 평가 받는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지위에 대한 불안(Status Anxiety)에 대해서 논한다. 드 보통은 불안의 원인으로 다섯 가지를 지목한다.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 그것이다. 그는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때,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고 분석한다. 결국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질투하지는 않는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 예를 들면 영국 여왕이나 연예인을 질투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은 상황에 있는 사람, 예를 들면 형제자매나 친구, 동창생의 성공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얼마 전 모성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시한 EBS 다큐멘터리 마더 쇼크에서 제작진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한국 엄마와 미국 엄마 22명을 대상으로 카드 게임 실험을 진행한 결과, 미국 엄마들은 자신이 점수를 땄을 때만 보상 뇌(측핵)가 활성화되는 반면, 한국 엄마들은 자신의 점수가 이익일 때가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보다 더 많은 점수를 냈을 때만 보상 뇌가 강하게 활성화 되었다. 즉 미국 엄마들은 절대적 이익에, 한국 엄마들은 상대적 이익에 민감했다. 한국 엄마들은 미국 엄마들에 비해 비교 성향이 강하다. 이 실험 결과는 동서양인의 차이를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서양인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지만, 동양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자신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엄친아, 엄친딸을 들먹이며 아이들을 압박하는 이 땅의 엄마들은 자기 자식이 도태될까 불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교로 인한 불안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원인을 다섯 가지 제시했듯이 그 해법으로 역시 다섯 가지를 제안한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안.  그가 제시한 해법들은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위계를 재구성하려 했다. 나는 그의 해법 중 철학이 마음에 든다. 저자는 철학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 만한 것인지 자문해보라고 충고한다고 강조한다. 철학자들은 마치 함께 모여 연구를 한 듯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불안했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을까, 실패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성과를 내지 못할까, 경쟁에서 도태될까 불안했다. 나보다 잘난 것 없어 보이던 직장 동료가 나보다 잘 나가가자 우울했다. 추운 겨울 남들은 밍크 코트를 입고 뽐내고 있는데 나는 무릎 나온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보다 능력 있는 팀원이 사사건건 따지고 덤벼들자 두려웠다. 어찌된 일인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전의는 찬물을 끼얹은 듯 흰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가끔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면 기분이 좀 나아지곤 했다. 타인과 비교하며 나는 울고 웃었다. 타인의 인정은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그들의 평가가 곧 나의 평가였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의 방향과 속도보다는 그들의 그것에 맞추어 출렁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의 삶이었다. 하지만 이제 불안하지 않다. 내 길을 찾았고 내 속도로 내 길을 가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행복이고 나의 만족임을 이니 타인의 인정이나 평가 따위가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나현이에게 말해줘야겠다. 엄마는 나현이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엄마도 어릴 적에 이모 때문에 괴로웠다고. 하지만 동생과 너를 비교하며 동생이 나보다 잘하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엄마에게는 누가 잘 무얼 잘 하든 모두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딸들이라고. 엄마가 바라는 것은 너의 행복이라고. 엄마는 네가 너의 행복을 슬기롭게 찾을 거라 믿는다고. 그리고 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는가?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 , 상아, 작은 꽃 한 송이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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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09:40:13 *.166.205.132

아이들을 통해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보게 되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고,

상처를 보게되고,

또 토닥이게 되는 등...

아이들 덕에 삶을 곱씹어 보게 되요.

 

* 제목에서 기대하게 만드는 '불안의 원인'에 대해 더 깊게 파고 들면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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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15:41:49 *.143.156.74

그래, 아이들을 키우며 많은 것을 배우지.

그래서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를 키우는 건가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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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12:25:37 *.163.164.177

재경아 휴식이라는 1차주제에서 조금은 확장된 느낌이다.

여유있어진 관점때문인가

휴식과 연관하여 성취주의자들의 심리적 요인들을

하나씩 들추어가는 것도 재미있고 유익할 듯...

 

확장과 깊이를 잘 조화시켜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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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15:40:52 *.143.156.74

2장 삶에서 덜어내야 할 것 중 '인정욕구'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에요.

쉬지 못하는 심리적 이유들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요즘은 주제 탐구에 약간의 재미가 붙은 듯.

이렇게 꾸준히 쓰면 책 나오겠지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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