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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3일 01시 33분 등록

 

임신 테스트기의 빨간 줄이 두 개가 되는 순간의 장면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결과였고 나는 엄마가 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어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 순간 나에게는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듯 보였어요. 그건 그냥 당연한 순서 같은 거였죠. 환영받지 못해도 나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한 어린 애가 엄마가 되겠다는 말에 모두가 패닉이었지만 나는 상관없었어요. 낳기까지 열 달은 결코 순탄하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나는 다 잘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제 자식을 낳아 기르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냐면서 부른 배를 쑤욱 내밀며 당당했죠. 나만 당당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요.

 

당장 아무런 능력이 없었어요. 이거다 싶은 바퀴 세 개 유모차는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고, 이쁘다 싶은 유아용품의 가격은 모두 다 ‘0’이 하나씩 더 붙어 있었지요. 모아 놓은 돈이 없는 나는 그저 부모님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능력으로는 무언가를 해 줄 수가 없었어요. 잘 어울릴 것 같은 핑크 드레스의 끝자락을 만지작 거리며 그걸 입은 하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뿐이었지요.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이보다 빨리 나가고 아이보다 늦게 들어올 수 밖에요.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이런 저런 것을 해주는 것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어요. 출근 전에 아이가 일어나주면 고마워 하고 야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잠든 아이에게 뽀뽀를 해주는 것이 고작이었지요. 난 엄만데 아빠가 된 기분이었어요.

이제 제법 자란 아이가 하니 아빠는?” 처음 물었을 때. 나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의 결정이 아이에게 한 쪽을 부족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아이를 꼭 안아줄 수 밖에 없었지요. 머릿속에는 어떻게 말을 하는 것이 아이에게 좋은 일일까를 생각했죠. 아직까지 답이 나지 않은 그 문제를 말이예요. 길거리를 걷다보면 아빠의 목마를 타고 가는 아이들. 그 장면을 편하게 보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를 낳으면 봄날이 올 것 같았어요. 따듯한 햇살이 차가운 북풍을 몰아내 줄 것 같았지요. 거짓말처럼 행복이라는 놈이 내 삶에 주렁주렁 메달려 줄 것 같았어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 계속 될 줄 알았어요. 하나가 부족해도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슈퍼에서 사탕 하나를 쥐어 줄 뿐인 엄마, 아침 일찍 나가서 밤이 되면 기어들어오는 엄마, 아빠에 대해서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한 엄마는 불행했어요. 능력이 좋아서 예쁜 원피스와 구두도 사주고, 직장일이 바빠도 어린이집 행사도 참여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신화 속에 데우칼리온과 퓌라처럼 돌을 휙휙 던져 아빠를 만들어 가족 등반대회에 참여하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집에 엄마가 없는 날 밥을 차려줄 재간이 없어서 하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갑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곱빼기를 시켜서 나눠 먹어요. 대충 찾아 입힌 후줄그레한 옷을 입고 빗어주지 못해 산발인 머리를 한 하니가 입주변 가득 짜장면을 묻힌 채 나를 보며 말합니다. “엄마 좋아. 엄마 최고.” 순간 가슴 가운데서 따뜻한 기운이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기분이 듭니다. 씨익 웃으며 짜장면 그릇에 머리를 박은 하니를 바라보며 눈물이 찔끔합니다. 그 순간 나는 하니에게 좋은 엄마이며 행복을 안겨준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인해 나도 행복한 엄마가 되었습니다.

 

제 자식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요? 어떻게 얻은 자식이든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그런 마음 한 자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엄마나 아빠라는 호칭을 붙여준 꼬물거리는 아이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끼게 되지요.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도, 꺼릴 일도 없는 슈퍼맨이 되어 주고픈 생각이 들어요.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게 해주고픈 부모의 마음엔 욕심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그런 거죠. 하지만 막상 부모가 되어 보니 부모 노릇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살아가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누군가를 건사한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고 그런 내 욕심에 아무 죄도 없는 내 새끼만 고생시키고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됩니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현실 사이에 나는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었어요. 오늘 아이가 나를 보며 웃어주기 전까지는요.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기억하시나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스케치북에 그린 남자의 고백이 유명한 영화죠. 이 영화에는 한 부자가 나옵니다. 엄마, 아내의 재혼으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로 묶인 사람들의 이야기죠. 엄마이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어 보입니다. 어느 날 아들의 사랑 고민을 들은 아버지는 안도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인 줄 알았다는 거죠. 그러자 아들이 말해요. 사랑보다 더 큰 고통이 있더냐고. 그때부터 아버지는 아들의 사랑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아들이 그애와의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하는 거죠. 결국 전학 가는 그녀와 포옹을 하며 아들은 아버지를 보며 씨익 웃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되었든 그 순간 그는 아들에게 좋은 아버지였죠.

 

사랑하는 내 아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아주 간단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바로 누구나 알고 있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주는 일이지요. 아버지는 아들의 고민을 함께 해 줍니다. 처음에는 그도 웃었지요. 어린아이가 하는 풋사랑같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쩌면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웃기기까지 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이의 한 마디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하는 사랑과 아들이 하는 사랑의 차이가 없음을 느끼게 된 거죠. 그 순간 그는 좋은 아버지로 가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진심으로 아이에게 조력자가 되는 거죠. “나도 어릴때가 있었어라며 아버지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아이는 나에게 비싼 유모차를 사 달라 이야기 한 적 없습니다. (실제로 키워 보니 유모차보다는 애기띠가 훨씬 더 유용한 아이템이더군요) 머리를 묶어주지 않는다 불평하지도 않았고, 내가 늦게 들어온다고 나무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아침에 날 발견하고 좋아해 주었을 뿐이지요. 좋은 부모의 기준은 철저히 나의 개인적인 기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내가 맞지 않는다고 아이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정작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이를 사랑한다면서 나는 또 이기적인 나의 기준을 세워 놓고 스스로 못난 엄마가 되어 아이를 못난 엄마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네요.

 

내가 찾아다녔던 행복한 엄마는 아이의 씨익 웃는 눈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먹거리를 사준 날 아주 만족스런 표정으로 나를 좋다고 말해주던 아이의 모습에 좋은 엄마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뭐든지 해주고픈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보다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인생이 힘들어.”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쪼끄만게 인생타령이야.”라고 말하기 전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시험 전날 음악프로를 꼭 보고싶다는 아이에게 잔소리 한바가지를 퍼 붓기 전에 오늘 누가 출연하는지 물어봐주는 건 어떨까요? 부모라서 때로는 쓰디 쓴 말 한마디도 해야 하고 울리기도 해야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많이 함께 웃기를 다짐해 볼 수도 있겠지요. 언제나 좋은 날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이와 함께 웃을 무언가를 고민하는 우리가 좋지 않은 부모일리 없잖아요.

어쩌면 좋은 부모란 끝내 될 수 없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가진 부모만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한 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일테니까요. 한발 한발 다가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도 정말 다행인건 나 역시 그 어린 시절을 살아본 경험을 가지고 있고 내 아이인만큼 나와 닮은 부분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내가 아이를 이해하지 못할 확률은 이로 인해서 낮아지겠죠? 당신의 아이는 언제 웃는 눈 속에 당신을 담아 두나요? 멋진 당신의 모습을 말이예요.

 

난 아직도 아이 아빠의 이야기를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믿게 되었어요.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눈을 맞추다보면 나에게도 방법이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을요. 내 눈속에서 자신의 웃는 모습을 확인한 아이가 내가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모습을 눈속에 담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예요. 힘든 내용의 그 말을 꺼내게 되는 순간이 우리에게 찾아오겠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아이에게 눈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의 아이는 서툰 방법으로 나의 눈을 맞추려 노력할 것을 믿습니다. 내가 그랬듯 말이예요.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요.

원하는 것을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때로는 자신도 잘 모르고 있기도 하지요.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경청과 표정살피기입니다. 무엇에 대한 화제에 눈을 빛내는지, 어떤 화제를 지루해 하는지. 살펴보는 거죠. “뻔한거 아냐? 공부는 지루해 하는거지.”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어지는 군요. 좋아하셨나요? 공부를 말이예요. 하니는 짜장면을 좋아하고 짱이 누나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며 합리화를 잘합니다. 얄밉도록 말이죠. 나의 어린 시절 역시 그랬습니다. 당시 900원짜리 짜장면을 좋아했으며, 어른인 척 하고 싶었고, 합리화의 달인이었지요. 물론 지금도 그렇구요. 여러모로 나와 닮은 녀석입니다.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잘 떠올려 보세요. 당신의 어린 시절과 당신의 아이가 참 많이 닮아 있을지도 몰라요.

IP *.246.7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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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09:34:19 *.166.205.132

루미가 나를 울리는구나. ㅠㅠ

넌 좋은 엄마야. 끊임없이 노력하는 훌륭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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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12:30:56 *.163.164.176
여러모로 좋은 엄마 아닐까?

자책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고, 사랑할 수 없는 순간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엄마니까

그래서 하은이가 당신이 말대로 당신을 닮게되면

좋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엄마는 엄마의 이야기를 엄마의 마음을

첫책이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선물로 ....

아이의 눈을 맞추고 아빠를 이야기해야할 때 그냥...

건네주기만 해도 될테니까.... 그래서 서로 더욱 사랑하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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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15:43:40 *.143.156.74

하은이가 루미를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루미가 하은이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은이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해주었고 엄마 자리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루미는 좋은 엄마다.

언니는 그리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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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4 17:06:23 *.69.102.245

읽으면서 목울대가 몇차례씩 뜨거워졌습니다. 당신은 좋은 엄마일 뿐만 아니라, 하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세상에 쉬운 부모는 없겠지요. 힘내세요. 이 말은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좋은 부모가 되길 노력하는 엄마가 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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