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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9일 09시 56분 등록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나를 스쳐 지나갑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어대며 뛰고 걷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생동감이 흐린 날씨에도 빛을 발하네요. 교복 입은 모습이 예뻐보이면 늙은 거라는데 예뻐보이는 군요. 인정!!!!!!!

 

나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요. 아무리 봐도 촌스럽기만한 교복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치마단을 내릴까 올릴까 고민하던 때가 말이에요. 학생의 악세사리는 가방과 신발이라며 이 지긋지긋한 교복을 벗어던질 날을 기다리던 때.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는 그때. 당당함을 넘어 무모하기까지 하던 시절의 기억이 나에게도 있네요. 별것 아닌 일에도 호들갑스레 웃고 고민하며,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굴기도 했지요.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친구들과 별 할 일 없이 노닥거리던 그때의 모습이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에 겹쳐집니다.

 

얼마 전 하니와 이런 저런 장난을 치고 있을 때였어요. 많아봐야 초등학교 1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폰을 가져다 줬어요. 좀 전에 있던 자리에 놓고 왔던가봐요. “아줌마라고 하면서 폰을 쑤욱 내밀더군요. 매우 고마웠지만 머릿속에는 아줌마라는 말이 네버엔딩 돌림노래가 되고 있었지요. 나이는 서른, 아이도 있으니 당연히 아줌마겠지요. 아니라는 건 아니예요. 하지만 처음 들어본 그 말에 나도 놀랬어요. 내가 혼자 생각하다가 그래 그렇지.’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누군가가 나를 그리 불렀을 때의 기분은 다른 거잖아요. 처음 들어보는 그 당연한 단어는 나를 멍하게 만들었죠. 신분증 없이 피시방도 못 가던 동안 소녀는 이제 젊음이 자신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바람이 나를 통과하고 지나가는 듯 한 서늘한 느낌이 들었죠.

 

젊음, 청춘. 이 단어들이 주는 미묘한 떨림을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옛날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시켰다지요. 춘추전국의 혼란기를 잠재우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던 그도 나이듦 앞에서는 약해질 수 밖에 없었나봐요. 젊음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건 보편적인 건지도 모르겠네요. 할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요 할 수만 있다면 말이예요. 이제는 촌스러워 보일 듯한 옷을 입고 어설픈 화장을 하고 다니던 그때의 내가 다시 한 번 되어 보고 싶어요. 그땐 짧은 치마 불편한 줄 모르고 높은 구두 발 아픈지 몰랐죠.

 

간만에 새빨간 코트를 꺼내어 봅니다. 몇해 전 새빨간 강렬한 색감에 이끌려 이 코트를 샀지요. 그때 엄마는 몇 번이나 입겠냐며 퉁박을 주었더랬죠. 엄마 말처럼 시간이 지나자 그 화려한 빨강이 남사스러워 한동안 입을 엄두를 못 냈습니다. 오랜만에 남사스러운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가봅니다. 까망의 일색이던 겨울이 빨간 물이 듭니다. 하루가 빨개지고 명랑해지는 기분입니다. 코트의 색깔처럼 나의 마음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네요.

 

대학교의 교정은 총천연색의 집합소입니다. 겨울에도 그들은 여러 색으로 빛납니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어휴.. 이런 걸 어떻게.” 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지요. 그런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 빌딩 숲에서 까만 개미군단이 되어갑니다. 마치 다양한 색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톤이 약간만 다른 색상에 자신을 밀어 넣지요. 그 순간 화려한 색상은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됩니다. 무채색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색감있는 시절을 그리워하지요.

 

나이가 들면서 잃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좋았던 시력은 나빠지고, 100 미터를 15초에 주파하던 체력도 저하되지요. 기억력은 떨어져 어느 광고처럼 전화기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버지는 아들이 무거운 짐을 드는 장면을 보고 있어야 할지 모르고 어머니는 딸에게 이게 무슨 글자인지 봐 달라 해야 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간은 우리를 스치며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경험일 수도 있고, 지혜일수도, 지식일 수도 있어요. 혹은 실패일수도 후회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시간은 우리에게 표시를 하지요. 우리는 이미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나의 시간과 나만이 아는 표시. 그 안에서 나는 울고 웃으며 지금의 나를 키워왔죠. 지금 나의 모습은 나와 지나간 시간들이 만들어낸 하모니일테죠.

 

미하엘 엔데는 <모모>에서 시간의 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꽃은 한 번에 한 송이만 피며 항상 새로운 꽃이 피어나죠. 그 어느 누군가와 같은 꽃도 없고 그 이전과 같은 꽃도 없습니다. 꽃은 지고도 또 피어나고 그 아름다움은 앞선 것과 같지 않아요.

우리의 시간이 이런 모습이겠지요. 젊은 날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말을 하더라도 그때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피울 능력은 없으니까요. 혹여 그 꽃과 아주 비슷한 꽃이 피어나더라도, 말도 안 되게 똑같은 꽃이라 해도 그 꽃을 보는 당신은 다른 사람일 겁니다. 이미 그 꽃을 한 번 본 경험이 그 꽃을 색다르게 보이게 할 테니까요.

 

젊음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재잘대며 지나가는 여고생들을 볼 때 화려하게 치장한 대학생들을 볼 때, 서로를 쓰다듬는 연인들을 볼 때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상의 뭉게구름이 피어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나이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 옛날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느라 부러워하느라 지금의 아름다움을 보내지 마세요. 그때의 젊음처럼 지금도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답니다. 우리의 손에는 여전히 시간의 꽃이 들려있습니다. 예전에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꽃이 보이시나요?

 

우리는 우리 몫의 젊음을 살아야 합니다. 그건 예전과는 다른 모습의 젊음이겠지요. 시간이 흘러 단발머리 여고생이 파마머리의 아줌마가 되었더라도 우리에게는 포기하지 못할 한 시간, 하루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젊음을 누리고 살아내야 하는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나이가 드는 일은 유쾌할 일이 아닐지 모르나 나이 뒤에 숨지는 마세요. 나의 나이 안에 나를 가두지 마세요. 살아가며 나를 꾸며야 할 때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때도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나이던지 나를 꾸미고 다른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20살의 정열적인 사랑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사랑은 우리가 떠날 수 없는 생의 즐거움이며 나를 꾸미는 것 역시 포기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한 살한살 먹어가는 나이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 나이가 당신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 있답니다. 그 나이가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총천연의 화려한 색상과 함께 할 수 있어요. 당신의 마음이 막아서지만 않는다면. 조금은 밝고 화사한 색감의 옷을 입어 보세요 덩달아 마음이 화사해 지는 걸 느낄 수 있답니다. 나이가 먹었다는 게 슬픈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었다고 느끼는 내 마음이 나의 행동을 막아설 때 슬퍼지는 건지도 몰라요. 시간에서 얻은 교훈을 듬뿍 함유한 나와 함께 나의 젊음을 살아 보기로 해요. 정말 별것 아닙니다. 아직 우리도 빨간 코트를 입을 수 있고, 화려한 프린트의 옷을 소화할 수 있어요. 그 날의 발걸음이 나를 조금 더 활기차게 만들어 줄 거예요. 삶의 다양한 색깔들을 떠나 보내지 말아요. 그 색깔을 즐겨요. 나를 막아서는 건 나이가 아니라 나이가 들었다는 나의 마음입니다.

문득 배우 안나 마냐니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나의 주름살을 수정하지 말아요. 오랙 걸려 만들어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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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0 18:12:24 *.143.156.74

루미야, 나는 루미의 칼럼에서 '루미의 민간요법'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요즘에는 그것이 칼럼에 녹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구나.

루미체로 발랄하게 민간요법을 계속 들려주면 좋겠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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