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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9일 11시 08분 등록

#38. 숨은 봄 찾기

1년 전부터였다. 매 주말을 책과 노트북을 애인 삼아 지내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이런 시간 덕분에 주말에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연구원을 시작하기 전의 주말을 떠올려보자면. 새벽에 일어나 늦게 자느라 충분하지 못했던 잠을 보충하기 위해 모든 알람을 끄고 늦잠을 잔다. 그리고 눈을 뜨고 부시시한 얼굴로 밥을 차려 먹으며 종일 티비와 함께 보낸다. 말 그대로 뒹구르르르르나무늘보처럼 늘어져 그저 먹고 자기를 반복하며 푹 쉬고나면 또 다른 한 주를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되곤 했다. 이랬던 나의 주말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 바로 연구원 생활이다.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저자에 대한 정보를 찾고, 밑줄 그은 내용들을 정리하고, 책을 재구성한다면 어떻게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하나의 문장이나 주제를 찾아 그것과 관련된 글을 써 내려간다.

2012 3월의 첫 째주. 마지막 수업을 남겨둔 주말. 나는 어김없이 늦은 저녁 샤워를 하고 책가방을 매고 동네에 있는 카페를 찾는다. 이번 주 과제도 폭풍처럼 마무리하고 마을버스요금도 아끼고 운동도 할 겸 집까지 걸어간다. 이미 해는 지고, 어둠이 세상에 내려온 지 오래다. 매번 지나는 같은 길인데 오늘따라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입춘도 지나 겹겹이 입은 옷들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처럼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짚 사이로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있을 것만 같다. 매달린 마른 낙엽들도 이제 겨울과 인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집에 가는 길 담벼락에 엉켜있는 담쟁이 덩굴들 역시 마른 잎에서 새파란 잎들로 바뀔 준비를 하고 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빠르게 움직이기만 하던 내 발은 어느 새 음악소리에 맞춰 경쾌하고 춤추고 있었다. 그 음악에 맞춰 내 손도 주머니를 벗어나 자유를 찾았다. 손끝에 부딪히는 바람이 한결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진짜 봄이 오고 있나 보다.

주변에 걸어 다니는 이들의 가벼운 옷차림에서도 봄을 발견한다. 차의 창문을 내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운전자들의 모습에서도 봄을 발견한다. 길가에 늘 한결같이 서 있는 나무에서도, 늘 나무 곁을 함께 하는 풀들에서도, 담쟁이 덩굴에서도 웅크리고 있던 몸을 쫙 펴고 기지개하는 것마냥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곳곳에 숨겨진 봄들을 찾는 15분의 귀가길에 내 인생의 봄은 언제일까? 생각한다. 내 인생에 봄이 찾아 온 적이 있던가? 지금이 과연 봄일까? 인생의 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인생의 봄을 알려주는 단서들은 무엇일까? 지금 내 인생은 겨울일까? 아니면 봄일까? 그것도 아니면 뜨거운 여름인가, 시원한 바람이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가을일까?

내 인생의 봄. 시작. 웅크리고 있던 몸을 쫙 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봄일까? 항상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내 인생은 언제나 봄이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나를 마음껏 펼쳐볼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때론 봄 사이로 차가운 꽃샘추위가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꽃샘추위는 금새 지나버린다. 청춘. 찬란한 봄. 자연이 봄으로 바뀌는 것처럼 나의 내면도 봄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것 하나 정해지지 않은 미래, 쥐꼬리만한 월급, 세상에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사회 경력 등.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내 인생은 겨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가볍고, 두둥실 떠다니고 있으니, 나는 지금 봄이다.

#39. 임원의 뒷담화

내가 하면 스트레스 해소 남이 하면 스트레스의 원흉. 뒷담화를 즐기지 않는 내가 비서가 되면서 임원에 대한 뒷담화가 엄청 늘었다. 물론 임원의 뒷담화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지만 말이다. 늘 마주하고 있는 비서와 틈만 나면 뒤에서 오징어다리마냥 그렇게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다. 뒷담화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내 뒷담화 덕에 임원의 귀가 근질거렸는지 임원도 나에 대한 뒷담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뒷담화의 영향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게 들려오고 있다. 얼마 전 옆방 비서실 대장 언니가 놀러 와서 한 마디를 흘리고 간다.

미나야, 감사님이 니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지위로보나 나이로 보나 위인 임원이 내 눈치를 본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지만, 정말 임원은 내게 불만족스러운 부분들을 내가 아닌 임원들끼리 모인 곳, 감사실장님과의 미팅 등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비서실장님이 내게 와서 버럭 화를 냈다.

비서실장님이 내게 화를 내게 된 상황은 이렇다. 금요일 휴가를 떠나기 전날 임원이 지나가는 비서실장을 불러 세워 감사님 방에 불이 완전하게 꺼지지 않으니, 조치를 취하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때 담당 부서에 전화를 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이 내게 돌아왔다. 이미 퇴근시간이 지났기에 나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휴가였던 금요일에 마주하고 있는 부사장 비서가 대신 일처리를 해 주었다. 그리고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월요일 오전에 비서가 일처리가 끝났다고 내게 얘기를 했는데, 잊어버리고 임원에게 전달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화근이 된 것이다. 매주 월요일마다 있던 회의에서 우리 임원이 본인이 이야기 한 부분에 대해서 피드백이 왜 없는지, 또 그것에 대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냐고 기분 나빠한 것이 분명하다. 그 자리에 있던 비서실장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와서 감사님 비서인 내가 아닌 부사장 비서에게 얘기를 한 것이다.

지은씨, 감사님한테 전깃불 관련해서 해결됐다고 얘기했어요?”

“(부사장 비서 당황하며) , 오전에 말씀드리라고 했는데, 지금 말씀 드릴게요.”

나 때문에 욕 먹는 부사장 비서에게 미안해서 나는 비서실장님에게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린다. 그러자 비서실장님은 내게 버럭 화를 내며 한 마디 한다.

비서는 임원이 얘기한 것에 대해 바로 피드백을 해줘야 합니다. 내가 준 책 읽어봤어요?”

비서로 일하기로 하고 처음 인사하러 온 날, 비서실장님은 내게 비서처럼 하라는 비서업계의 메뉴얼인 책을 읽어보라고 준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책 외에도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았기에 대충 훑어보고는 집안 구석에 쳐 박아 두었다.

, . 그 책이요? 아직 정독은 못하고, 대충 읽어보긴 했는데요.”

“(또 다시 한번 버럭하며) 비서는 대답이 명확해야 합니다. 그 책 다 읽고 나서 되돌려 주세요.”

한바탕 허리케인이 지나간듯 정적만이 흐르는 비서실. 나는 도대체 나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비서실장의 말에 화가 났다.

아니 비서의 기본을 갖춘 사람을 원하면 비서과 출신을 뽑아야 하는 거 아니야? 비서과 출신을 뽑으려면 그 사람들이 일하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 주면 될 거 아니야?’

비서과 출신인 부사장 비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이 회사처럼 비서들을 무시하는 회사는 보기 드물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회사의 비서들에 비해 급여가 너무 적어 그 동안 비서과 출신의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금방 나가버렸다고 한다. 이런 환경을 만들어 놓고,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일 잘 하는 사람을 채용하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

임원의 뒷담화 덕분에 이 회사에서 더 이상 비전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회사를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40. 주객전도-비서업무에 대하여

비서처럼 일하라는 책을 읽기로 마음 먹었다.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덮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억누른다. 잭 웰치식 경영 방식을 전제로 하고, 비서의 업무를 정의하고 있다. 전제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책을 읽는 내내 두드러기가 일어난다.

비서가 되고 2주 정도 지났을까? 사장님처럼 수행비서가 없는 나의 임원은 사장님과 같은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이미 어떤 요구를 할 것인지를 부사장 비서와 다른 직원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언제쯤 이야기할 것인가였다. 어느 날 아침 임원이 나를 불렀다.

아침에 1층에서 전화오지?”

그렇다. 임원이 도착하면 1층 로비에서는 감사님이 도착했다고 친절하게 내게 전화를 해 준다. 그러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임원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

전화오면 앞에 나와서 문을 좀 열어다오. 내가 카드를 안 가지고 올 때가 가끔 있거든.”

, . 알겠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듣고 나서,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까지 몹쓸 지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일주일간은 임원이 시키는 대로 하지 못했다. 지각을 하지 않은 셋째 날부터 이틀간 전화가 오면 나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나가 임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친절하게 문을 열어 드리고,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임원은 주머니 속에 있는 출입 카드를 꺼내려다 말고, 환하게 웃으며 내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들어온다. 그 상황을 보며 생각한다.

뭐야? 카드도 있는데 왜 문은 열어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다음 날부터 전략을 다르게 하기 시작했다. 일단 1층에서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그 때부터 무언가 책상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임원이 들어오면 엉거주춤 인사를 한다. 그렇게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기 시작했다. 임원은 분명 이런 나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전과 오후 하루 두 차례에 걸쳐 미팅을 하는 실장님에게 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그리고 결국 실장님이 점심을 사 주면서 인사 얘기를 꺼내셨다. 아침에 임원이 카드를 꺼내지 않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아도 되게 문을 열어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퇴근하실 때에는 가방도 들어 드리고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하라는 주문까지 하신다.

하하하하하하물론 이렇게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다.

, 뭐 인사하는거 어렵지 않죠. 알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해서는 이해가 필수이다. 하지만 나는 임원의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내가 과연 비서를 계속 잘 할 수 있을까?

물론 <비서처럼 일하라>에서는 나의 상식이 아닌 내가 모시는 임원의 상식대로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나의 상식처럼 비서의 역할 중에 중요한 것이 일정관리이다. 그래서 매일 저녁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이면 나는 임원에게 물어본다.

오늘 저녁에는 어디로 가세요? 몇 시쯤 차를 대기하라고 할까요?”

비서가 해야하는 당연한 업무를 위해 묻는 나의 대답에 황당무개한 답변이 돌아온다.

그걸 왜 묻니? 내가 빨리 가야 좋지?”

당연하지. 비서는 임원이 퇴근한 후에나 퇴근할 수 있으니 당연히 일찍 가는 것이 좋다. 하지만 내가 일찍 가고 싶어서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이 양반아!!!

아니오. 뭐 제가 특별히 좋을 건 없죠. 몇 시에 나가시는 줄 알아야 차를 대기시켜놓을 수 있으니까요.”

비서의 주요한 임무에 대해 대단히 다른 생각을 가진 임원. 물론 지각하고, 임원이 시키는 걸 하기 싫다고 하지 않는 나 역시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비서일 것이다. 비상식적인 임원에 비상식적인 비서. 어찌 보면 찰떡 궁합일지도 모른다.

#41. 임원들의 생일 파티

임원 티타임을 알리는 메일이 왔다. 매주 1회씩 실시되는 임원들간의 티타임. 보통의 티타임에 내가 모시는 임원은 참석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임원들의 생일인 경우 생일파티를 위해 참석을 한다. 이번에는 이사님의 생일이다. 점심을 먹고 각자의 업무들을 처리한 후, 적당히 허기가 질 시간인 오후 4. 각 층에 있던 임원들이 하나둘씩 사장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비서들도 모였다. 사장실 옆에 있는 탕비실에서 케잌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인다. 케잌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임원들이 앉아 있는 사장님실로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케잌을 들고 비서들이 서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임원들은 점잖게 앉아 그 노래를 듣고 있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자 생일인 임원이 촛불을 끈다. 그리고 사장님이 한마디 한다.

아가씨들이어쩌고 저쩌고…”

당황스럽다. 아가씨들? 비서들을 아가씨들이라고 칭했다. 도대체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뇌구조가 궁금하다. 아가씨라는 단어를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내 뱉는 그 사람의 머리 속에 비서라는 존재는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했던 비서는 파트너였다. 임원이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손과 발이 되어주는 그런 존재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비서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 같다. 무슨 기쁨조 쯤으로 생각하는 걸까? 케잌을 들고 나오는데, 얼굴 근육이 나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것이 느껴진다. 케잌을 잘라 임원들에게 주고 남은 케잌을 먹어 치우고 부사장 비서와 함께 우리들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아까 들었어? 아가씨들이라고 하는 거?”

, 완전 어이없죠?”

그런데 말이야. 다른 회사에서도 임원들 생일에 비서들이 노래 불러주고 그래?”

아니오. 이런데 없어요. 저도 여기와서 완전 당황스러웠어요. 도대체 누가 이런 걸 하라고 한건지 이해가 안 되요. 저는 임원 생일파티하는 이 시간이 너무 싫어요.”

싫을 만도 하다. 나의 상식과는 전혀 멀게만 느껴지는 비서의 역할과 비서의 존재. 우리 나라에서만 비서들에 대한 인식이 이런 것일까? 갑자기 서비스업으로서가 아닌 전문직이자 훌륭한 파트너같은 비서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한창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꿈을 쫓아가야 할 20대의 젊은 여성들이 백화점 주차장 안내요원 등의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나라가 많지 않다는 내용이 생각난다. 비서라는 직종도 우리나라에서는 젊고 전도 유망한 20대 여성들을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많은 대기업에서 인정받고 높은 직위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비서실을 거쳐간 사람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남자들일 경우에 비서실을 통하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자 비서인 경우에는 그런 기회가 되기란 쉽지가 않다. 그저 비서는 젊고 이쁘고, 임원의 비위를 잘 맞추면 그만이다. 대부분의 비서들이 계약직이라는 것도 비서라는 직업이 큰 비전을 가지고 할 만한 일이 아님을 반증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늘 대체인력이 존재한다. 잭웰치의 비서같이 항상 늘 곁에서 인정 받는 비서들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우리 나라에서 비서에 대한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앞으로 내 삶에서 비서라는 직업을 다시 가질 일은 없을 것 같은 강한 확신이 든다.

 

#42. 하가노주방 사장님보다 감사님

지난주 수요일 점심시간. 한 차례 미뤄졌던 실장님 그리고 부사장 비서와의 점심약속이 있는 날이다. 지하 1층에 있는 고급 일식당에서 회정식 3인분으로 뜻하지 않게 점심부터 비싼 음식들로 배에 기름칠을 하면서, 실장님은 그 동안 내게 말하고 싶었던 감사님 출퇴근 시간에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서 인사를 해 주기를 다시 한번 당부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황금 같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임원들이 돌아오기 전인 1시까지 사무실로 가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나를 인도했던 회사 맞은편 건물로 담배를 한대 피러 갔다. 처음 비서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용역직원인 비서에 대한 최소한 배려를 보여주지 않았던 실장님에 대한 폭발이 도화선이 되어 내 마음 속에는 이미 회사를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오피스텔 꼭대기층 계단에서 담배를 피며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 아무래도 더 이상 회사 다니기가 힘들 것 같아. 지난 주에 한 회사에서 면접을 봤어. 결과가 나오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결과에 상관없이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또 나가면 많이 힘들텐데 미안해. 대신 내가 인수인계는 확실하게 나가고 갈게.”

지난 번 팀에서 나갈 회사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했다가 헤프닝으로 끝나버린 퇴사상황 후에 절대 무언가 결정되기 전에는 회사 누구에게도 나갈 거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건만, 결국에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늘따라 손님까지 모시고 일찍 들어오신 임원님. 계속 울려대는 전화 덕분에 옆방에 있는 사장실에서 감사님 비서인 나도 부사장 비서인 지은씨 둘다 자리를 비웠음을 알게 되었다. 헐레벌떡 사무실에 도착해서, 감사님과 손님에게 커피를 내어 드리고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부사장 비서가 사장실에 갔다가 들어오면서 내게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한다.

언니 비서실 대장 언니가 화가 많이 나서 언니한테 오려는 걸 내가 붙잡아서 이야기하고 왔어요.”

그렇다. 잦은 지각과 감사님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는 나를 계속 눈에 가시처럼 보고 있던 비서실에서 드디어 나를 혼낼 수 있는 건수를 잡은 것이다.

오늘 감사님이 늦게 오신다고 해서 언니 은행 갔다가 왔는데, 1층에서 만나자마자 언니가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해서 얘기를 좀 하고 오느라 늦었다고 얘기했어요. 아무래도 얘기하는게 언니한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센스 있는 부사장 비서 덕분에 욕먹을 상황은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나의 퇴사가 일파만파 퍼질 예정이다.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기 전에 얼른 내 입으로 얘기해야한다.

다음 날 아침, 감사님이 출근하시자마자 차를 드리고 퇴사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감사실 주임님한테도 얘기했고, 이는 감사실과 인사팀에까지 일사천리로 전달이 되었다. , 이제 후임으로 일할 사람만 정해지면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비서업무를 끝낼 수 있다.

금요일 휴가와 주말을 마치고 돌아온 월요일. 인사팀과 감사실은 후임자를 찾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무거운 짐을 지고 목줄에 이끌려 가던 나귀가 짐을 내려놓고, 목줄이 풀려 자유를 얻은 것마냥 가볍기만 하다. 공기업이라는 장점과 요즘 20대 구직자들의 취업난 덕분에 이력서는 꽤 들어온 모양이다. 그리고 수요일. 드디어 세 명이 면접을 보러 왔다.

첫 번째 면접자가 10시에 도착했다. 지금 나와 비슷한 헤어스타일의 단발머리이고, 나이는 20대 후반 이나 3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20여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두 번째 면접자. 비서 면접이라 하기에는 외모가 그리 단정하지는 않지만, 왠지 순박해 보이는 것이 감사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면접자는 긴 생머리에 깔끔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외모가 단연 돋보였다. 두 명의 면접자와는 달리 세 번째 면접자가 들어가자마자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면접을 끝내고 돌아가는 이에게 적극적으로 오후에 연락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실장님과 감사님에게는 아무래도 세 번째 면접자가 가장 마음에 든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이력서를 보고 계속 고민중인 감사님이 부사장 비서와 나를 번갈아 부르며 누가 좋을 것 같은지 의견을 물어본다. 이력서를 보니 두 번째로 왔던 사람은 막 대학을 졸업한 신입이었고, 세 번째 사람은 이미 비서 경력이 4년 정도 있고,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감사님이 탐낼만 한 인물이었으나, 왠지 이 자리에 들어와서 오래 버틸 수 있는 사람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1년 정도의 경력은 만들어야 하는 신입을 추천했다. 이미 4명의 비서들을 내 보낸 전적이 있는 감사님은 이번에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드디어 내 후임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마음 같아서는 오전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인수인계를 끝내고 얼른 퇴근하고 싶었으나,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오후 3시 반경. 인수인계를 거의 마쳤다.

인수인계를 하기 전날 하루 종일 나는 감사님께 어떤 선물을 드릴까 고민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터가 그가 사랑하는 로테와 그녀의 약혼자 알베르트와 산책을 할 때 즐겨 읽었던, 하지만 들고 다니기 불편했던 호메로스의 에르네스티 판을 눈여겨 보고, 가지고 다니기 편한 아주 작은 판형의 호메로스 책 두 권과 그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던 로테의 분홍리본을 선물했던 것처럼 허영심이 깃들지 않은, 한 달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감사님과의 우정이 깃든 호의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선물을 찾고 있었다. 고심 끝에 결정해 산 책에 부사장 비서와 감사님에게 편지를 썼다. 특히 감사님께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어떻게하면 예의바르게 나의 메시지를 전달할까 고민을 하며 한 단어씩 적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감사님.

한달 짧은 시간이지만,

제 생에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비서 일 하면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했습니다.^^ 그 동안 편안하게 못 모신 것 같아서 죄송하구요..;;

, 감사님~

주변 사람들(임원님들, 비서실, 감사실 식구 등등)에게 감사님 비서를 많이 칭찬해 주세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니까요~!

그리고 혹시 비서에 대해 못마땅한 점이 생기면 비서에게 직접 얘기 해 주세요.

당장은 쓴 약일테지만, 비서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약이 될테니까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일 가득하시길 빌겠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나의 멘토이자 스승의 책인 <사람에게서 구하라>는 책에 적어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감사실로 들어갔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자 감사님이 내게 말씀하신다.

너는 잘 될 것 같다. 돈도 많이 벌 것 같고. 가서 열심히 하고, 나중에 잘 되면 나 모른척 하면 안된다?’

그러면서 내게 흰 봉투를 건네신다.

어머니, 고기라도 사다 드려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에 당황스럽다. 이미 전날인 수요일에 감사님은 내게 수고했다며 무선 마우스와 usb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시는 성의는 감사하게 받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동안 친한 몇몇의 사람들에게 감사님 뒷담화를 너무 심하게 했나?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간다. 감사님께 예상 밖의 선물을 받고 나오는데 왠지 코끝이 찡하다. 그렇게 욕을 하고 싫어했어도,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건가? 싶다.

순간 다시 백수가 되는 이 시점에 타이밍 좋게 연락이 왔던 하가노주방 사장님과 주고받은 문자가 생각났다.

미나~ 오늘 알바 좀 해줘. 7시부터 10

, 사장님. 저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그렇군!! 알았어 수고해

 . 죄송해요~~^^

토욜은 안될까?”’

ㅋㅋㅋ. 네 주말에 계속 일정이 있어서.

바쁘신 분한테 괜한 부탁을~~”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하가노주방 아르바이트를 끝낸 후에 친한 후배를 직원으로 소개해 줬다. 하지만, 그 후배도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는 다시 사람이 필요해진 모양이다. 오래간만에 주고 받은 문자에서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른다는 느낌은 받은 건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일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다양한 경우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게 될 때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달라지는 사람도 있지만, 금새 또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음을 안다. 지난 며칠간 있었던 상황들을 돌아봤을 때, 나를 포함해 4명의 비서들을 내 보낸 감사님의 경우에는 다행히 나 때문인가?’라는 생각을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노력은 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그만둔다고 이야기한 이후에 내게 나 때문에 나가니?”라는 질문을 여러 번 했었다. 물론 아니요라고 대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감사님이 변할지도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반면 하가노주방 사장님의 경우에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아르바이트생이기는 하지만 많은 이들이 떠나가도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노력은 많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하가노주방 사장님보다 감사님이 더 좋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 사람들을 떠나오고 떠나 보냈던 나를 되돌아 본다.

과연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변하려는 사람인가? 아니면 금새 잊고 전과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인가?’

 

IP *.70.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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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12:27:25 *.223.3.136

읽느라 숨차다... 쓰는 넌 숨 안차냐? ㅋㅋㅋㅋ

이 자식.. 이렇게 길게 올려서 계속 부끄럽게 만들테냐?????

오늘부텀 더욱 분발이닷!!!!!!!!!

넌 역시 대단한 녀셕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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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0 18:10:54 *.143.156.74

미나야, 이 언니가 마흔이 되고 보니까 말이야 예전에는 '왜 내가 그런걸 해야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생각했던 것들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내가 해주지 뭐. 뭐 힘드 일이라고 못해주랴'하는 생각으로 변하더라.

미나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던 간에 탁월함(excellence)를 보인다면 너는 기회라는 놈의 뒷덜미를 잡게 될 것이다.

다음 job에서는 그런 쾌거를 한 번 만들어 봄이 어떠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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