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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어느 날 사촌누나 손을 잡고 미문화원이라는 곳을 방문 하였습니다.
무엇하는 곳일까 둘러보는 와중에 까만 어둠의 공간으로 이끌려 들어가니 그곳에는 흑백 필름 하나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알렉스 헤일리 원작의 ‘뿌리’라는 영화. 노예 신분인 주인공 쿤타킨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외롭고도 긴 여정의 몇몇 장면은,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문득 문득 기억이 나곤 합니다.
연어가 자신의 태어난 곳으로 언젠간 돌아오듯이 뿌리를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중 하나일까요.
3월 봄비가 살포시 내려앉는 가운데 군산의 거래처로 향하였습니다. 업무를 마친 후 기차시간의 여유가 있어 가보고 싶었던 빵집 한군데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서울에도 넘치는 곳이 케이크점인데 웬 빵집이냐고요?
찾아간 곳은 군산시 중앙로에 위치한 ‘이성당’ 이라는 곳입니다.
상호명이 특이하죠. 성당을 다니시는 분이 사업주인가하여 알고 보니 이씨 성을 가진 분이 창업한 곳이라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식 베이커리라는 곳으로 소문을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정말 빛바랜 시간인 1945년에 개원하여 3대째 지역 명품 빵집으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랍니다.
1945년이면 가만있어보자. 세상에나. 일제 강점기에서 대한민국이 해방된 해가 아닌가요.
호기심으로 방문 하였지만 매장 안은 나처럼 타지에서온 관광객 등으로 사람들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한참이 걸려 계산후 구입한 빵과 딸기 셰이크를 사들고 구석 자리에 앉아 시식을 하였습니다.
빵맛이 다똑같지 도대체 얼마나 맛있으면 하는 의문을 가지고요.
조각 하나를 포크에 찍어 입안에 넣고 조금씩 장인의 솜씨를 음미해 보았습니다.
맛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경쟁업체들이 생겨남에도, 아직도 이곳을 꾸준히 방문하는 분들이 있는 것에는 어떤 까닭이 있을까요.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고 있는 와중에 마침 학교가 파했는지 학생들의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에 함께 취하다보니 그때 그 시절 한낮의 꿈을 잠시 꾸게 됩니다.
“아그들아 소문 들었니.”
“무슨 소문?”
혼자 비밀을 간직한 냥 나는 어깨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짜식들. 아직 못 들었구나.
“빵집이 생겼데.”
“빵집이 뭐더냐? 먹는 거여. 먹는 거라면 빈대떡이 최고인디.”
무식한 짜슥들. 혀를 끌끌 차본다.
“왜 경시청 나카무라 상이 귀한 거라고 들고 다니면서 입에 침을 튀겨가며 자랑하던 것 기억 안나?”
“아! 불그스레한 껍데기 속에 하얀색 무엇인가 잔뜩 들어있어 달달 하다는 맛 말이지.”
“와타나베 상이 몰래 먹던 것을 나도 훔쳐봤었는디.”
“맞아. 우리 한번 가볼래. 우리 누나도 한번 다녀왔는디 죽여준데.”
우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반나절의 시간이 걸림에도 머리털 나고 처음인 곳을 본다는 설렘에 발이 부르트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사람들이 워째 이리 많더냐.”
“우리처럼 처음 와보는 이들이 많은가 보다.”
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와중에 드디어 고대하던 순번이 돌아왔다.
엄니를 졸라 반짝반짝 빛나는 동전을 한 움큼 코묻은 바지에서 애써 추슬러 꺼내 멋있게 차려입은 주인장에게 내밀었다.
“무슨 빵 줄까?”
한 가지가 아닌가보다.
“그냥 여기에서 겁나게 맛난 것 주세요.”
책에서 보던 서양 코쟁이 놈들이 즐겨 먹는 거라던데 도대체 무슨 맛일까.
우린 게걸스럽게 빵을 찢어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오묘하다.
우와. 희한하다.
워떡케 이러코롬 단맛이 난다냐.
거시기하네이~
그냥 사르르 녹는구나. 녹아. 우와 천국의 맛이다.
쌀이 귀하던 시절임에도 빵과 케이크 하나로 세상 모든 걸 가진 냥 행복했던 시절.
그것으로 인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던 시절.
아이의 생일잔치, 여드름투성이 남자 학생과의 수줍은 미팅, 아리따운 처자와의 맞선 자리, 부부싸움후 토라진 아내가 갈 곳이 없어 머무르던 그곳의 장소…….
정신을 차려보니 아직도 줄을 선 이들이 많았습니다.
수많은 커피숍과 환락의 즐길 거리가 많아진 세상이지만, 기억 편린의 한곳에 머무르며 가끔씩 소박한 사연과 세월이라는 그리움을 풀어놓는 그곳.
그곳은 단순한 빵집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추억의 뿌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