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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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연 입학여행을 다녀왔다. 나에게는 입학여행겸 장례식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총회였다. 떠날 때 마음이 무겁다. 이번 주 과제인 변신이야기를 다 읽지 못했다. 2권 중 한 권만 읽었다. 신화는 내가 좋아하는 읽을꺼리다. 게다가 저 사람을 전작주의해볼까나 맘 먹었다가 그가 번역한 책이 200권에 달한다는 걸 듣고 냉큼 꼬리 내린 이윤기씨 번역이다. 내 독서력, 집중력에 저런 거물을 첫 전작주의 작가로 뎀볐다가는 초전박살나리. 내겐 성공경험이 절실하다. 한 줄도 안 읽을 걸 알면서도 책을 가방에 챙기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가족여행에 책 한 권 지고 다녀야 공부 안한다는 죄책감이 무마되는 수험생 같다. 책 무게는 신경안정제 기준용량이다. 죽은 내게 10분이 더 주어져서 읽게될 장례식 송별사는 미완성이다. A4 2장을 써 오랬는데 분량미달에 어쩌고저쩌고 불만스럽다. 장기자랑도 문제다. 춤을 추어야 하는데 연습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태원프리덤은 나의 프리덤을 상당히 억압한다. 2주째 장기결석 중인 아이의 어머님한테 전화를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있다. 마의 백일 노란색 경계경보가 왱왱 울리기 시작한 저것은 또 어떻하고. 취약한 운영체계, 시스템 다운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 감지 않은 머리로, 가방에는 입던 옷을 구겨서 넣는다. 내 사랑 식전 모닝커피를 평소보다 2배 마셨더니 카페인음용후심장벌렁증이 수전증을 동반시키는 걸 느낀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고, 자고, 지내야 하는데 뻘쭘해서 어떻하지?
이것도 저것도 다 떠남에 대한 거부반응인 걸 나는 안다. 나에게는 떠남이 불편하고 불안하다. 교사에게 한 달짜리 유급휴가가 있는 걸 부러워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긴 휴가가 생기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로 여행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내 주변에도 방학마다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 나는 22번의 긴 방학을 집 주변에서 어정거리며 보냈다. 어쩔 수 없어서 해외여행 가본 적이 있다. 1번의 고구려발해 유적지순례와 2번의 불교성지순례 패키지였다. 둘 다 병 나서 얼굴 반쪽이 되어 돌아왔다. 그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한 도시에 머물러 있던 한 나절로 기억한다. 중국에서는 길림성, 인도에서는 타지마할에서 한 나절을 햇볕 속에서 어슬렁거렸다. 사람을 정주민과 유목민으로 나눈다면 정주민과에 들어서일까? 내가 진정 정주민과라면 집을 사면 좋겠다는 깨달음이 최근에 있었다. 살고 싶은 곳에다 원하는 대로 집을 꾸며놓고, 집에서 하고 싶었던 걸 일상에서 하면 정주민이라는 정체성을 살게 되리라. 이게 진짜 내 모습일까, 어린아이들의 발달단계를 배우면서 자신에 대한 신뢰가 생기면 자율성이 다음 과제가 된다고 하는 걸 보면 좀 더 내가 안정되면 좀 더 잘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다.
버스 한 대가 1박 2일 동안 나를 여기저기에 부려놓았다. 두부부침이 맛있던 식당에서, 죽으려면 든든하게 먹어둬라, 서흥도가 어디냐고 묻던 말에 낮술을 마시고 찔끔 울었다. 내 눈은 아직 터널시야였다. 장례식에서 거기에 싸안고 갔던 두 가지가 한 큐에 정돈되었다. 다시 살게 된다면 나는 사랑에서 도망치는 비겁을 버리고 두려움을 견디며 거기 머무르리라. 그리고 장애자녀를 기르는 어머님들과 한 편이 되어 장애와 싸우기 보담 지닌 채 행복하게 지내는 방향으로 가리라. 장례식 장면에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8기 동료들과 앉았던 횟집에서는, 높아진 안압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초고추장에 비빈 세꼬시가 맛있었다. 하모니카와 기타에 맞춰 노래가 불리워지는 자리가 좋았다. 숙소였던 여성수련원은 뒤가 바다였는데 바다가 아니라 솔밭이 보이던 방에 배정된 나는 떠나기 10분 전에야 바다의 존재를 알았다. 바다의 얼굴만 힐끗 보았다. 출발 전에 네 강사에게서 첫 책 쓰기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연구원 선배님들이었다. 게시판에서 이름으로만 보던 분들을 직접 만난 감격이 크다. 나도 봄 행사의 하나로 ‘총회’에 오고 싶다. 완주해야겠지. 중간에 그만 두지 말고 완주만 하자 다짐한다. 모페 대모인 로이스님이 시칠리아 여행에 대해 알려주신다. 설레임보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 여행을 반길 한 사람에게 전도했다.
다음 날 한숨 자고 났더니 수양버들에 물이 오르는 아우라지다. 아이폰에 담긴 정선아라리를 들으면서 거기 와서 냇물에 발을 담근 적이 있었다. 서른 일곱 생일 선물로 내게 사주었던 책 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을 읽고서다. 정선아라리 채록본을 구했고, 정선 장터에서 수수부꾸미와 메밀전을 사 먹었다. 이 소설은 중년기 전환을 맞은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다. 사랑의 불능에 대해 다룬다. 그 소설의 한 축 세진은 몸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정신분석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다시 돌아본다. 내게 천 만원이 생기면 무얼 할까, 그녀처럼 마흔 즈음에 정신분석을 받거나, 변경연 연구원에 지원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터닝포인트의 원리를 설명하며 아우라지 물굽이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본다. 여기서 시작했던 여정이 한 맴을 도는 걸 본다. 웅덩이를 만나면 채워서 넘쳐라, 자신의 진로를 막는 것과 싸우지 마라, 자기 원칙을 지키며 돌아가라, 채우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 나는 지금 천 만원을 날려도 좋으니 꼭 하고 싶어했던 연구원 입학여행에 왔지. 그런데 아우라지에 왔구나. 그럼 나의 주제는 마흔 즈음 (사랑 못하는) 여자의 사랑인가? 이미 뛰어난 소설가가 탁월하게 다 이야기한 걸 또 다뤄서 뭣하게? 이건 지나치게 개인적이어서 부담스런 주제구나. 싫다. 하지만 책으로 쓰지 않아도 물밑에서 내가 계속 노력해 왔고, 애쓸 부분이지. 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하는 그녀에게서 작년에 받아둔 전화번호로 전문가를 찾아가는게 낫지 않을까? 좋은 책들이 나를 갈아엎게 하고, 절을 하고, 달리기를 하면서 자기를 깊이 살펴보는 글을 써 나가는 게 셀프 정신분석이 될 수 있으려나? 50권의 책을 깊이 읽기 위해서 인용문 50개에 자신만의 주석을 다는 과정은 채우기면서 비움이 될 지 모른다. 물이 되어 흘러가며 지켜야 할 나의 원칙은 무엇일까? 일어나자 마자 언제 어디서든, 내 상태가 어떠하든 첫 시간을 나를 아름답게 하는 일에 쓰는 게 아닐까? 모닝페이지, 새벽정진, 하루 몇 쪽 읽기를 사수하자면 몇 시에 일어나지? 사실은 어떨 지 모른다. 다 나의 추측이고 물음이다.
버스에서 첫 책에 대한 강연을 질겅질겅 되새김질 한다. 섞어서 씹고 나눠서 우물거린다. 연구원 과정을 마치려면 2년 안에 첫 책을 써야 한다. 작가가 되어도 좋고 안 해도 상관없지만 첫 책은 써야한다는 말씀을 떠 올린다. 첫 책 쓰기는 나에게 통과의례가 되리라. 책쓰기는 매우 쉽다고 한 한명석님은 절실함을 자기 인생의 질문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구성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구성력은 문요한님의 ‘전체적 시야와 일관성’과 통한다. 그 주제는 이왕이면 독자와 출판사의 요구와도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내게 첫 책의 키워드는 뭘까? 나는 무엇을 간절히 해결하고 싶을까?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이라는 말, 내 안에 그런 것이 있나? 그걸 만들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일지가 첫 책이겠지.
나머지 방법론에 대한 것들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 문요한님이 눈사람 같은 초고작성을 하라는 말은 홍승완님의 일단 하나를 끝까지 써봐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망설이지 않는다, 선제한다, 정면으로 승부하라고 한 무사는 성실한 태도로 반복하는 한편 확실한 목표의식을 가지라고 집중해서 시작한 건 끝장을 내라고 했다. 자주 뻗는 잽을 날리라는 말도 세 분 사이에서 비슷하다. 그러니까 나는 되든 말든 한 개를 완성을 해야 하고 일과 속에서 쓰고 읽는 시간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집에 돌아왔다. 장례식을 마치면서 생각했지. 새로 산다면 가족들과 더 많이 표현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겠다, 사랑에서 도망치지 않겠다, 장애자녀를 기르는 어머니들과 한 편에 서서 장애와 싸우기 보담 가진 채 행복하게 지내는 쪽으로 일하겠다고. 그 방향에 서서 나는 상상한다. 달동네 가장 높은 곳에 내가 짓는 집이 있다. 슬레트 지붕의 무허가 건물이다. 방 두 개에 부엌 하나다. 덜 마른 벽 색이 진하다. 시멘트가 마르면 벽에는 올리브그린색 페이트칠을 하고 창틀에는 흰색으로 칠하자. 나무 무늬가 바로 보이는 상에 밥상을 차리자. 그 집이 초라하지 않는 것은 제 손으로 지어서다. 그리고 내 손으로 수를 놓은 커튼이 두 장 걸려 있다. 돈을 주고 드르륵 남의 손으로 박아온 것이 아니라, 딸의 짝이 정해지기 이태 전부터 목화를 심어 기르던 외할아버지 옆에서 시간과 공력을 들여 엄마가 혼수로 만들어 온 십자수 옷장 가리개 같은 커튼이다. 사랑에서 적극적으로 도망친 건 저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는 자기사랑, 그게 내가 지을 첫 집이며, 내 첫 책의 키워드다. 날림으로 지어낸 허술한 집이라도 내 지붕이 있으면 더 이상은 한뎃잠을 자거나 남의 세를 살지 않으리라. 내가 나의 집이 되리라. 가족, 직장, 사랑......삶의 1순위는 바뀔 수 있고, 어떨 때는 취사선택 되겠지만 0순위는 변함없이 자기사랑일테지. 이 목적의 첫 새벽활동은 지금까지는 모닝페이지와 절하기였다. 요것도 용을 써야 확보가 가능하다. 연구원 과정과 첫 책을 방편 삼아 읽기와 쓰기를 일과로 들여오려는 찰라다. 새로운 장기 하나를 이식하려는 거지. 이것이 나를 인가에 살게 할까? (이 말 말고 '나를 구원할까?' 라고 저기서 베껴온 말로 물으며 멋을 부리고 싶었다. 개발의 편자처럼 거창해서 괄호 속에 넣는다. 살게 할까 보담 인공관절 시술 후기처럼 '불편을 없애줄까' 정도가 낫겠다) 모르겠다. 생착되기까지는 거부반응이 한참 일어나겠구나. 엄마의 십자수 커튼에서는 붉은 모란꽃과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쌍을 지어 새들이 날고 있었다. 내가 만드는 커튼은 어떤 문양일까?
그대가 쓰는 글은 자신있게 혼수에 내놓을 만한, 평생 간직해도 좋을, 사랑이 품은 그대의 진화하는 모습이겠지요.
이번 기회에 반드시 기필코 꼭 쓴다로 시작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겸양이 아닌 비겁한 게으름을 더 이상 피지 않는 것도 원하는 사랑에 이르는 길이 아닐 런지요.
사부님과의 연으로 맺어진 우리들의 좋은 만남이 볼 수록 더 좋은 관계가 되로록 함께 노력합시다.
글고 4월 모임은 총회가 아니라 더 먼저 연구원 새내기들을 맞이하기 위한 전체 모임이랍니다. 12월엔 해당 기수 연구원이 주축이 된 전체 변경연 송년의 밤(연구원 송년의 밤의 발전)이 또 있지요.
한 해에 두 번, 이 때는 반드시 변경연이 모이는 날로 기억해 두어야 한답니당. ^-^*
콩두 나도 생각난다. 엄마의 가리개.
광목에 놓여진 수. 문양은 나는 생각이 안나네..
중학교아니 고등학교때까지 였을까? 우리집에는 장농 하나, 서랍장하나
그리고 벽에 못을 박고 옷을 걸고 그 위에 엄마의 혼수품.. 그 가리개가 있었지
어딘가에 있나 모르겠다. 엄마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
몇해전 혼수로 가져온것이라고 하시면서 명주로된 스카프를 하나 만들어주셨었다. 엄마가
학교 과제물하면서 제일 잘 만든것 큰딸 준다고...자주색에 홀치기로 문양을 넣어주셨단다.
요즘도 겨울이면 잘 하고 다녀...뭔가 모르겠다.
제 앞가름도 잘 못하면서 콩두가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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