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 조회 수 2391
- 댓글 수 12
- 추천 수 0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
두 번 숨을 들이쉬고 두 번 내쉰다. 발이 땅과 맞닿을 때마다 호흡은 리듬이 된다. 새벽 공기는 머리카락을 스치고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부딪쳐 내 몸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지금은 매일 아침 글을 쓰고 있지만, 12년 전만해도 새벽을 깨우며 뛰어 다녔다. 그리고 결혼을 한달 앞두고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었다. 42.192km였다. 그 때는 결혼 전에 다시 출발선에 서고 싶은 생각이었다. 나 홀로 이겨내야 하는 도전이었다. 준비서부터 참가까지 혼자였다. 아내와 장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완주하고 나면 결혼 생활을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끝내 설득은 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춘천마라톤 대회였다. 출발선에 서서 생각했다. ‘초반에 오버 페이스 하지 말자, 중도에 개 거품 물 수 있다.’ 그리고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쌀쌀한 바람으로 긴장한 근육들을 풀어주었다. 출발 신호와 함께 뛰었다. 4시간대 페이스 메이커 뒤로 호흡의 리듬을 타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25km 지점까지 최고의 컨디션이었다. 대회를 준비했던 훈련량이 나를 뒷받침 해주었다. 특히 오르막길이 나올 때는 거침이 없었다. 4년간 산 길을 오르내리며 연습했던 터라 오르막길이 나타났을 때는 더욱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25km 지점, 내리막길에서 다리에 경련이 오기 시작했다. 우측 종아리의 통증이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머리와 가슴은 결승점을 넘어 100km넘어서까지 뛸 기세였지만, 소용없었다.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웠다. 도저히 내딛기 힘든 순간이었다.
문득 누군가 옆에서 손짓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에는 하얀 장갑을 끼고, 이마에는 푸른 색 밴드로 하얀 머리카락들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단단한 체구의 할아버지셨다. 힘들면 페이스를 늦추라며 두 손을 가슴 아래로 움직였다. 완주가 목표였지만 내심 ‘걸으면서 완주하지는 말자’였다. 하지만 걷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일단 멈춰서 근육을 풀어야만 했다. 나는 서서, 우측 종아리와 허벅지를 두 손으로 잡고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앞서 뛰어간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내 등을 치면서 누워보라고 손짓했다. 나도 모르게 누워서 오른발을 할아버지에게 맡겼다. 나의 오른발을 죽 펴게 하고는 발바닥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경련이 심한 다리를 누르고 펴주었다. 계속된 스트레칭으로 한결 나아졌다. 나는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페이스를 잃어버린 할아버지에게는 너무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 동안 나는 혼자서 생각하고 달려왔었는데, 할아버지 앞에서 한 없이 부끄러웠다. 계속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자, 할아버지는 나의 어깨를 쳐주면서 말했다.
“젊은 양반, 죽자 살자 뛰면 정말 죽는 수가 있어, 즐기면서 뛰게나”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할아버지와 호흡을 맞추면서 알게 되었다. 인생은 혼자서 외롭게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달리면서 옆을 바라보는 여유와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깨닫게 되었다. 30km 지점에서 할아버지는 조금씩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숨이 차다면서 더 이상 힘들겠다는 손짓을 보였다. 그리고는 달리기를 멈추셨다.
“나는 이제 그만 뛰어야겠네, 자네는 끝까지 완주하게, 내 몫까지 말이야”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말했다. 나는 응급차가 있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고는 다시 뛰었다. 뛰는 내내 할아버지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즐기면서 뛰자’는 생각이 조금씩 에너지를 가져다 주었다. 35km 지점에 이르자, 주변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나에게도 할아버지처럼 주변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그 동안 아무 소리 없이 뛰던 나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힘내세요, 조금만 가면 됩니다.’ 목소리도 우렁찼다. 나도 나 자신한테 놀랐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누군가를 격려하면서 박수치고 소리치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줄 몰랐다. 그 마음이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을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박수를 쳤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도 박수로 응원을 보내주었다. 조금 전에 고통스러운 표정들이 하나 둘씩 웃음으로 바뀌었다. 나에게 일어난 조그만 파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달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었다.
38km 지점에 이르자, 체력이 점점 소진되더니 또다시 발이 무거워졌다. 영양분과 수분이 몸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눈 앞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인공 비였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힘이 느껴졌다. 비를 맞으면서 물방울이 그대로 내 몸 속에 흡수되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나를 꼭 감싸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거운 발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나는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을 벌리고는 빗방울을 느꼈다. 생명수였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나는 무사히 40km지점을 통과하고 결승점에 도착했다. 이 대회의 완주는 나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준 빗방울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때의 완주 메달을 내 책상 앞에 걸어두고 쳐다 본다. 내 삶의 의미 있는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영웅의 출발, 입문, 귀환이라는 순환을 보면서, 나는 이 대회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결혼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출발로 생각했었지만, 결국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돌아보고 기꺼이 나를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영웅은 집으로 귀환하면서 말했다.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라고 말이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 #3.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 [12] | 한젤리타 | 2012.04.23 | 2391 |
2931 | 영웅이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4] | ![]() | 2012.04.23 | 2519 |
2930 |
인디언 민간 이야기로 본 ‘영웅의 여정과 7가지 가르침.’ ![]() | 샐리올리브 | 2012.04.23 | 3121 |
2929 |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나이까 [3] | 백산 | 2012.04.22 | 2230 |
2928 |
단상(斷想) 97 - All together now ![]() | 書元 | 2012.04.21 | 2414 |
2927 | 장미 18. 밥 프로젝트 [10] | 범해 좌경숙 | 2012.04.18 | 2347 |
2926 | 리더들이여, 조직문화를 정의하라 [5] | 열정조직연구가 | 2012.04.18 | 6281 |
2925 |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10] | 루미 | 2012.04.18 | 2352 |
2924 | #26. 신치의 모의비행-고독한 시간을 찾아서 [8] | 미나 | 2012.04.18 | 3623 |
2923 | 쉼표 셋 – 행복하지 않는데 왜 도전할까? [3] | 재키 제동 | 2012.04.17 | 2440 |
2922 | 쌀과자 #2_가치투자 [1] | 서연 | 2012.04.17 | 2656 |
2921 | 첫 책, 혼수 [6] | 권윤정 | 2012.04.17 | 2365 |
2920 | 흐르고 흘러라 [2] | 장재용 | 2012.04.17 | 2141 |
2919 | 질투... 그 헛된 감정에 대하여 [1] | 터닝포인트 | 2012.04.17 | 2418 |
2918 | 내 나이 오십에 읽는 변신 이야기 [3] | 학이시습 | 2012.04.17 | 3325 |
2917 | #2. 탐욕의 신화 [3] | 한젤리타 | 2012.04.17 | 2164 |
2916 | 아이아스와 오뒤세우스의 스피치 배틀 [3] | 샐리올리브 | 2012.04.17 | 2445 |
2915 | 칼럼 2 리더의 조건-바른 가치관 [1] | ![]() | 2012.04.17 | 2538 |
2914 | #2. 한해살이의 변신이야기 [2] | 세린 | 2012.04.17 | 2261 |
2913 |
단상(斷想) 96 - Statement ![]() | 書元 | 2012.04.15 | 2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