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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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집 2세대의 할 일
괴룡과 압제자는 그 전 세대, 즉 구세주를 맞던 그 이전 세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원이 될 생명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441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폭군이 된다. 44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 비에 벚꽃, 살구꽃이 지리라. 대신 사과꽃 맹아리가 벌겠지. 올해는 꽃길 한 번 걷지 못했다. 둥싯 환하게 떠오른 꽃나무 아래에서 속편한 사람과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깔깔 노닥거리고, 도시락을 까먹고, 마시고, 읽고, 졸았으면 좋겠다. 손을 잡고 거닐면 금상첨화. 작년에는 자유공원 백살 넘은 벚나무 할머님들을 독대하러 아침마다 달리러 갔다. 다음 주에 사과꽃이 피기 시작하면 문경 찻사발 축제를 하고, 꽃적과가, 본격적으로 과수원집 농사가 시작된다. 11월 중순에 따서 창고에 넣을 때까지 정신 없다. 엄마하고 통화하면서 벚꽃 길을 걸어보시라 말했다. 엄마는 그깟 벚꽃이야 안봐도 된다, 우리 집에는 쫌 있으면 사과꽃이 핀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꽃이라고, 내게는 아직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 엄마 마음의 여유는 생겨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만 부모님이 일하러 가지 않고 쉬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사과나무를 질투했다. 내 부모를 통째로 차지하는 것들. 밥, 옷, 땅, 학비가 되고, 집안의 희망, 자존심의 바탕이 된다는 걸 알긴 했다. 우리 형제들은 그래서 내내 기다렸다. 아이들에게 ‘너를 위해서 돈 벌러 간다’는 부모의 말은 그다지 설득력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우리집이 과수원집이 된 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였다. 광산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뽕나무밭을 샀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부부는 포크레인을 불러올 돈이 없어서 땅 속에서 괴기스런 모양으로 자라는 뽕나무 뿌리를 일일이 괭이로 캐야 했다. 저녁밥을 지어놓고 부모님을 기다렸다. 동생들이 밥 먹자고 했지만, 안된다고 엄마아빠 오면 같이 먹자며 달랬다. 태레비 파란 불빛 속에서 동생들이 잠들었다. 그러고도 한참 지나서 경운기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사람도 안 사는 집처럼 왜 불도 안켜고 있었냐고 역정을 냈다. 나무를 심은 지 3년 만에 수확했던가? 증조할머니 제삿상에 그 첫 사과를 올릴 때 추수감사의 제물에 부모님은 기꺼워했고, 우리도 아이였지만 숨죽여 그 뿌듯한 감격을 공유했다.
그 전에는 동네 과수원집에 사과를 사러 갔다. 세 집이 생각난다. 한 집에서 겨울에 국광 꼬다마를 오천원어치 한 자루 사서 이고 오면서 이십 대의 젊은 엄마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형제들과 쪼르르 따라 가서 과수원집 안주인이 따라온 아이들 손에 개평으로 쥐어주는 사과알을 들고 기뻐했다. 국광 꼬다마는 푸르댕댕하고 야물고 뻑뻑했다. 어떤 것은 무우처럼 시원한 거 빼면 니 맛도 내 맛도 없었다. 여름에 엄마가 그 집 일을 해주고서, 반은 썩은 자리를 뾰족하게 도려내고 한 소쿠리 얻어올 때가 있다. 썩은 사과가 더 맛있다는 엄마 말을 믿었다. 그 진리를 혀로 확증하듯이 나는 시고 달콤한 홍옥 사과를 좋아했다. 이가 없는 증조할머니는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서 즙을 맛나게도 드셨다.
한 집은 가운데 공동샘가에서 윗샘에 걸쳐 있었다. 그 과수원은 내가 최고로 사랑하던 쓰레기장 바로 뒤에 있었다. 나는 작대기를 하나 들고 쓰레기장을 뒤지며 노는 걸 좋아했다. 끈 떨어진 삐딱구두를 찾아 신고, 주막집 술병처럼 생긴 구루무통 뚜껑을 살살 돌려서 빼면 소꿉놀이 살림살이가 되었다. 우리는 그걸 빵깨라고 불렀다. 빵깨 산다고 했다. 검은색 열매도 따먹었다. 까마중이라 했던가? 그 쓰레기장 옆에 두부집이 있었고, 쓰레기장과 두부집 사이에 있던 컴컴한 수로에 어느 날 우리 개 흰둥이가 쥐약을 쳐먹고 죽어있었다. 어른들은 개의 내장만 발라내고 먹었다. 그 집에서 푸른 색 여름 사과를 철조망 사이로 기어들어가 서리하다가 현장에서 걸렸다. 엄마는 그 때 샘에서 탄복 빨래를 하고 있었던가? 배추 고갱이를 씻고 있었던가? 나는 엄마한테 끌려왔다. 주인은 뭐라고 나를 더 어떻게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 많은 데서 엄마한테 한 소리를 한 것 같다. 그날 집에 와서 엄마한테 매타작을 했는지 어쨎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빨래터로 가던 순간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소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세번째 집은 철길 너머에 있었다. 여름에 냇가에 가는 길에 쥬부를 울러맨 이들 꽁지를 따라갔다. 나는 튜브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거 얻어 타보고 싶어서, 집에서 생라면을 들고 따라 나선다. 하도 많이 뽀샤 먹으니까 엄마는 아침에 상자에 남아 있는 생라면 개수를 헤아려놓기도 했다. 우리 형제 3명이 빼나르다 보면 어떤 날은 6봉이 없어지기도 했다. 나는 안 가져가는 척하면서 잘 가져갔다. 이 집 총각이랑 맞선을 본 적이 있다. 두 어머니가 동네 마을 회관에 앉아 있다가 우리집 노총각이랑 그집 노처녀랑 한꺼번에 처리해보자는 묘안을 냈다. 아주 곤욕스러웠다.
나는 자수성가형 과수원집의 부모님 밑 딸래미로 열한 살부터 살았다. 우리가 사과를 사러 갔던 과수원집은 국광, 홍옥을 키웠고, 우리집은 후발주자답게 부사, 아오리, 감홍, 홍로를 키웠다. 훨씬 맛있고, 키가 작아서 기르기 쉬운 나무였다. 결혼할 무렵 부모님의 목표 두 가지, 과수원을 하는 것과 자식을 모두 대학에 보내는 것은 달성되었다. 시전제물이었던 밭 서마지기와 논 너 마지기는 인제 중농에 들게 많아졌다. 옆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달려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 눈에,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살펴지지 않았던 부분이 일으키는 문제들이 2세대들에게 나타나 있는 게 보인다. 그 선발 과수원집 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일하러 가야 해서 돌보지 못했던 자식 대에서 일어나는 문제였다. 저 위의 과수원집에서도 뼈아픈 일들이 많이 있었다. 다 그렇진 않다. 내 부모님은, 또 다른 과수원집들은 분명 가난에서 집을 일으킨 영웅이었다. 희생제물을 드리는 걸 않고 사유하려 했던 미노스 왕은 괴물 자식 미노타우로스를 두었다. 그걸 감추려고 목수를 불러다 미궁을 지었다. 미노타우로스 신화는 내부에서 변화가 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혜택 받은 내 몫인 것 같다. 그건 손에 피를 묻히며 한 길로 갔던 태종을 이은 세종이 문화를 꽃피우고, 다윗을 이은 솔로몬의 손에서 여러가지 아름다운 것들이 만들어진 것과 같다. 내 부모님에게는 뭐랄까? 자수성가형이 공유하는 어떤 특징이 최대의 장점이 또한 최대의 단점이 되어 작용하는 듯 하다. 참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