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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d: 문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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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30일 01시 58분 등록
 

 

이류 인생도 나쁘지는 않아! 그렇지만

    

  텅 빈 운동장에 그림자를 앞세우고 그녀가 들어서면 우리는 곧 4교시의 마침 종이 울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계단을 올라 온 그녀는 우리 교실 뒷문에 서 있다. 드디어 4교시 마침종과 동시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부산하게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는 동안 그녀의 도시락은 급우인 G에게 전달된다. 우리의 싸늘하게 식어빠진 도시락과는 달리 G는 금방 해 온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열어 제친다. 우리는 G가 부러워 쳐다본다. 그때 문득 G가 우리 반에서 학업에 관한한 거의 꼴찌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에서 경멸과 부러움이 한꺼번에 일렁인다.


  부진한 성적인데도 날마다 집에서 정성스레 준비한 도시락을 가져온다는 것이,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고 있을 것 같은 G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이다. G는 부진한 성적 때문에 한 번도 기가 죽거나 풀 죽어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참으로 당당했다. G의 당당함은 극진하게 대접하는 G의 부모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G는 집에서 작은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당시 우리 집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의 나의 위치를 생각하면 ‘대접’이라는 호사스런 단어를 쓸 수가 없다. 앞집 뒷집 옆집 해서 우리 동네엔 그야말로 영재, 수재들이 넘쳐났다.  최고 학부인 S대를 비롯하여 명문고와 명문대 출신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동네를 원망했고, 미워했다. 한 가지 좋았던 것은 S대 출신으로부터 과외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류 인생을 지닌 그들 사이에서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나는 기가 세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의 주눅 듦이 시작되었다. 자신을 많이도 미워했다. ‘머리가 나쁘면 얼굴이라도 예쁘던가, 머리가 나쁘면 하고야 말겠다는 독기(毒氣)라도 있던가’ 뭐 이런 류의 한탄이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고, 너무 일찍 세상으로부터 주눅들었다고 해야 하나.


  내 머릿속에는 무엇을 해도 일류가 되지 못하고 이류에 속한다는 재수 없는, 기분 나쁜 암시 혹은 선입관이 뇌 주름 사이사이에 새겨졌다. 이런 것들이 뇌 주름 사이사이에 새겨졌다고 해서 살아가는 것에 별 어려움도 없었고, 별 지장도 없었다. 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류로 살면 되니까. 그런데 이류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한 때는 이류, 삼류의 인생에서 벗어나 변신하겠다는 야무진 생각으로 발버둥쳐 보았지만 그것은 멀고도 먼 길이었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방법을 몰랐다. 변명하자면 지금이야 구체적으로 길을 제시하는 자기계발서가 넘치고 넘치지만, 그땐 그러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안다. 이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변명, 넋두리엔 뛰어나다는 것을.


  한 때 ‘생긴 대로 살자’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말 같았고, 나는 그 말에 쉽게 복종했다. ‘더 좋게 되려고 노력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능력만큼만 살아내자’는 그 속뜻이 퍽이나 자조적이었지만 나에겐 위안을 주었다.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다행히도 중간 중간에 나에게 이카루스의 날개와 비슷한 것을 달아 준 스승들도 만났다.


  그러다 늦은 나이에  조셉캠벨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萬神殿)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나를 방치해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온 몸에 수많은 신들이 가졌던 꿈과 희망이 프로그램화되어 살아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내 삶이 바로 내 신화임을 몰랐고, 내가 그 신화의 주인공인 영웅임을 몰랐던 것이다. 난 드디어 이류에서 일류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쓰는 신화, 날마다 새롭게 탄생하는 신화의 주인공인 나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다. 지금 컴퓨터 앞에서도 나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문윤정의 아테나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문윤정의 아르테미스의 신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肉化)시킬 때’ 영웅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던가. 똑같은 행위라 할지라도 자신이 영웅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행하는 행위와 자각하고 나서의 행위는 다른 것이다. 그 행위 속엔 자신감과 자부심이 들어있다는 것이 다르다.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절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소명, 좋은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라는 소명, 그리고 우리 아들, 딸을 잘 키워내라는 소명, 자신의 유전자를 업그레이드 하라는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나에게 ‘영웅 임명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누가 무어라 해도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마음가짐에 대해 기특함을 임명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IP *.85.24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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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30 12:23:25 *.229.239.39

가슴을 확 ~ 트게 만드는 글 입니다. 지금 나이는 나를 알기 위한 시간이였다면, 다음 나이는 "나이가 경쟁력"이 되는 신화를 만들어 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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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4.30 23:28:54 *.85.249.182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조셉캠벨보다 더 멋지고 뜻 깊은 말씀, 가슴을 칩니다.

"나이가 경쟁력"이 되는 신화를 만든다는 말슴 두고두고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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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30 15:12:30 *.114.49.161

수재 많이 나는 동네에서 태어나셨나봅니다.

지금까지 중에서 '나는'이 가장 많이 나온 글인듯 합니다. 

나의 작가론에 다신 댓글 생각도 막 나구요.

어떤 '나의 이야기'를 앞으로 풀어나가실 지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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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4.30 23:33:34 *.85.249.182

이번엔 제가 주인공이 되어 글을 써보았습니다.

쉽지가 않더군요.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보려고 합니다.

응원에 힘입어 열심히 해야지요.

책 읽는 기쁨, 날마다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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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30 15:38:36 *.51.145.193

깔리 여신이잖아요.

누님께서는 이미 일류니 이류니 하는 가치를 존재 너머로 날려버리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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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4.30 23:38:14 *.85.249.182

재용! 정말 고맙다.

깔리여신은 시간과 생명을 관장하는 여신이니,

그 아래 뭇생명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

여신 앞에 일류, 이류가 없다는 재용의 깊은 생각에 화들짝 놀랐지.

그런데 깔리는 시바의 두 번째 부인이야.

첫번째 부인은 파르파티인데,

 깔리여신도 자신을 이류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파르파티를 질투할지도 모르지.

시간, 항상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그 시간을

잘 쓰고 싶어서 깔리여신이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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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1 05:25:36 *.47.75.74

감동입니다, 누님~^^

저도 임명장 하나 주세요!

누님이 말씀하신 소명 모두가 제가 가져야할 소명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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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1 11:50:31 *.36.72.193

칼리여신 윤정언니의 글은

책에 한 꼭지를 읽고 있는 듯한 그런 맛.

문단과 문단사이에 긴밀한 연결성이 부럽습니다.

 

신기한 것은 길수행님 걸 읽으면 길수행님이 시 읽던 밤이 생각나면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칼리여신 글을 읽어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인상적인 여신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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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1 22:05:23 *.39.134.221

칼리여신 그리고 저 샐리올리브 우리 한살씩 많이 적게 그렇습니다.

남편과 나는 동갑내기입니다.

글을보다보면 같은또래인데 자란환경은 아주 많이 다름을 알게됩니다.

남편과 이야기해도 그렇습니다. 어렸을때 아마 세린이정도 나이인걸로 생각되는데

잠시 부모님 원망을 한적이 있더랬습니다.

살기가 고달퍼서 였을겁니다. 아주 잠시였지만요.

이만큼 살아보니 일류 이류는 없는것 같습니다.

나 스스로 일류인것이 분명 있을테니까요...가끔 명품에 집착하는 여인들을 봅니다.

요즘은 남정네들도 그렇기는 하더만...

명품은 무슨. 내가 명품이면 되지...끝간데 없는 잘난척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존감이 떨어져서 살기가 힘들때도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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