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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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가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쓴 자화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는 가끔 서울 집근처 선바위에 올라 고향 개풍을 생각하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하염없이 생각하곤 했다고 고백한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야무지게 일 잘했던 그 많던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조직에서 사라진 그 여직원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나는 1997년 2월부터 직장생활을 했다. 안식년으로 보낸 2011년을 제외하고는 크고 작은 조직에서 회사원으로 살았다. 그러니 내 인생의 15년을 조직에서 보내고 있는 셈이다. 새파란 새싹이었던 사회 초년생이었던 20대 중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혈기왕성했던 30대 초반, 안팎으로 시달리며 시들어가던 30대 중반, 그리고 깨달음으로 조금은 더 성숙해진 마흔까지 나는 조직에서 여직원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을 보아왔다. 왜 여자들은 사라지는 것일까?
전직장은 다국적 제약회사의 한국지사였다. 전직원이 600명이 넘는 큰 회사였지만 여성 임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여성임원들도 대부분이 미혼이거나 결혼을 했어도 아이가 없는 DINK(Double Income No Kids)족이었다. 워킹맘 여성임원은 딱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호주에서 온 교포였으니 외국인으로 봐야 했다. 그룹에서는 한국지사에 여성임원의 수가 턱없이 적은 것에 대해서 반갑지 않은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수를 늘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직원에서 여성 팀장을 거쳐 여성 임원이 될 때까지 여자들은 버티기 힘들어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그녀들이 거쳐가야 할 ‘관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차 관문은 <결혼>이다. 사실 요즘은 결혼을 했다고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전처럼 결혼한 여직원에게 퇴사 압박을 넣었다가는 고소 당하기 십상이다. 또한 혼자 벌어서는 집 장만은커녕 아이 키우기도 힘들다는 현실을 파악한 영악한 남자들이 맞벌이를 적극 권하니 결혼을 빌미로 일을 그만두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네가 벌어봐야 얼마나 버니? 그냥 집에서 살림이나 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집안으로 운 좋게 시집 간 여자들에게 결혼은 지긋지긋한 조직을 떠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또한 백마 탄 왕자를 만나지 못한 여자들 중에서도 가지가지 이유로 영원한 직장인 가정에 안주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1차 관문을 통과한 여자들이 거쳐야 하는 2차 관문은 <임신과 출산>이다. 이 관문에서는 몸이 약한 여자들이 대거 탈락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임신이 되지 않거나 어렵게 얻은 아이를 유산한 경우에는 아이를 갖겠다며 조직을 떠난다.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여직원은 임신 중에도 야근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미숙아를 출산하고 약간의 위로금을 받고 조직을 떠났다. 임신과 유산을 반복하던 여직원도 있었다. 시험관 아이로 얻은 딸 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회사의 배려로 휴직 중이다. 입덧이 너무 심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여자들도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헛구역질이 나고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결국 회사를 떠났다. 이렇게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을 겪으며 아까운 여직원들이 사라진다.
근성 있고 건강한(?) 여직원들은 1,2차 관문을 지나 제일 힘들다는 3차 관문 <육아>에 다다른다. 3차 관문에 이른 여자들은 그 동안 통과한 1,2차 관문이 정말 별 것 아니었구나 싶다. 이제 내 한 몸 돌보는 것에 벗어나 남(?)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이니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더구나 그 챙겨야 하는 대상은 내가 낳은 젖먹이가 아닌가? 3개월의 출산 휴가 후에는 결국 조선족 아주머니든, 시어머니든, 친정 엄마든 누구에겐가 아이를 맡겨야 한다. 믿고 맡길 사람을 구하는 것도 힘들거니와 맡겼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다. 조선족 아주머니에게 150만원이 넘는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월급이 몇 푼 되지 않는다. 이게 남는 장사인가 싶다.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는 어떠한가? 형편이 좋건 나쁘건 아이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에게 수고비를 안 드릴 수는 없고 명절이다 생신이다 신경 써 챙기다 보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도 있다. 아이는 또 얼마나 자주 아픈가? 지난 밤 모유수유를 하겠다며 잠을 설친 덕에 사무실에 비몽사몽 상태로 앉아 있는데 아이가 아프다는 전화가 온다. 팀장의 눈치를 보며 헐레벌떡 집에 도착하니 아이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잘만 논다. 왜 아이는 엄마가 집에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괜찮아지는 것일까?
제일 어려운 3차 관문은 결혼이나 임신, 출산처럼 1-2년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건 정말 긴 싸움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 된다. 하지만 영아기를 지나 유아기에 들어서면 엄마가 해줘야 할 일의 난이도는 더 높아진다. 자녀교육에 열성적인 전업주부 이야기가 들리면 워킹맘은 문득 불안해진다. 내가 내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것인가? 내 아이만 뒤쳐지는 것은 아닌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에는 역시 학습지 만한 것이 없다. (나는 큰 아이를 두 돌 때까지 시댁에 맡겨두는 것이 불안해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한글과 영어 학습지를 시켰다.) 그렇게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가 되면 엄마의 불안감은 최고조가 된다. 특히 옆집 아이가 한글을 줄줄 읽고 영어를 술술 하면 더욱 그렇다. (나 역시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둘째가 한글을 떼지 못해 한글 학습지 특별 훈련을 진행 중이다.) 여직원들이 많이 탈락하는 3차 관문의 핵심은 바로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다. 요즘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다 떼야 한다. 그래야 알림장을 써올 수 있다. 알림장이 있어야 숙제야 준비물을 챙길 수 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평일 오후에 교실청소를 하러 가거나 학부모 참관 수업에 참여해야 한다. 그 때 가지 않으면 아이 기가 팍 죽는다. 학습 도우미로도 참여하고 체육대회와 같은 학교 행사 때 담임선생님께 눈도장을 잘 찍어놔야 내 아이가 소외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일하랴 아이 챙기랴 여자는 도저히 쉴 틈이 없다. 집에 돌아오면 투 잡이 시작된다. 아이 숙제검사하고 학습지 시키고 씻기고 재우면 10시가 훌쩍 넘는다. 그렇게 했는데도 아이가 받아쓰기 60점은 받아오거나 담임선생님이 아이의 교우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그렇게 잘 버티던 여직원들도 이 즈음 조직을 떠난다.
혹시 그대는 여성을 위한 자기계발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책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꼭 등장한다. ‘책상에 아이 사진은 두지 마라’ ‘가족과의 통화는 들리지 않게 하라’ ‘전체 회식은 꼭 참석하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라’ ‘음주토그, 흡연토크에 빠지지 마라’ 등등. 사실 나는 직장 생활 14년 동안 이러한 조언들을 충실히 이행하며 살았다. 그렇게 살면 성공하고,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살면 행복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기에는 체력과 능력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전업주부 생활도 해봤다. 하지만 그것은 직장생활보다 더 고되고 힘든 노동이었다. 나의 성취가 없는 삶은 무료하고 권태로웠다. 결국 나는 나에게 맞는 직장,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 다시 사회로 나왔다.
나는 조직에서 사라진 여자들이 어디에서든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고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큰 조직에서 별을 달아야만 성공한 인생인 것은 아니다. 맛있는 토스트를 굽고 향이 좋은 커피를 내리며 작은 카페의 주인이 되어도, 아이와 온종일 씨름하며 목 늘어진 셔츠에 밥풀을 붙이고 살아도, 일과 삶의 조화를 위해 작은 회사에서 예전보다 적은 월급을 받아도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면 성공한 인생일 수 있다. 리더십의 대가 마커스 버킹엄의 말대로 행복한 삶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조직에서 이를 악물고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워킹맘이건, 아이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여기며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전업주부이건, 인연을 만나지 못해 일에 올인하고 있는 올드미스이건, 나는 그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한지 불행한지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들에 자문해보라. 마커스 버킹엄은 『나이 들수록 멋지게 사는 여자』에서 행복하고 성공한 여성이라면 다음 네 개의 질문에 ‘매일’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 얼마나 자주 기분이 좋아지는가?
- 하루를 고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는가?
- 시간 가는 것도 잊을 만큼 일에 몰입하는 일이 잦은가?
- 길고 분주한 하루를 마무리할 무렵 상쾌한 기분을 자주 느끼는가?
-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할 때가 많은가?
만약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데도, 아이가 잘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훌훌 떠나라.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지며 ‘나는 어느 때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라.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도하라. 단 한번뿐인 그대의 인생이지 않은가? 그러니 어느 곳에서 어떤 옷을 입던 행복하게 살아라.
이 칼럼은 반드시 일을 하라고 권하는 칼럼이 아니군요.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게 자기한테 맞는 지 다른 방식이 맞는 지 저 파랑 질문에 답해보라는 거군요.
관문, 결혼, 임신과 출산, 육아...험난무시무시하네요. 휴~~~
저는요 (우리나라 상황에서 참 요원하겠지만) 애착형성에 중요한 생애 초기 기간을 엄마든, 아빠든 육아휴직을 할 수 있고,
엄마든 아빠든 출근하는 직장에 딸린 (질높은) 어린이집이나 탁아소에 취학전 아이를 맡길 수 있고,
13세 미만 어린이를 데린 부모에게 아이가 혼자 있지 않도록 뭔가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결국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지난 번 칼럼처럼 아웃소싱을 해야)하는 건가보네요.
여성인력이 매우 중요한 회사에서는 저런 것 좀 해 주면 안될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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