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 조회 수 2308
- 댓글 수 14
- 추천 수 0
눈을 감고 느껴보세요
호메로스는 장님이다, 아니다.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나는 그가 장님이라고 믿고 싶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꿰뚫어보고 말 한마디의 표현으로도 한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창조했으며, 인물 각각의 특성, 배역, 의미, 모습을 다르게 서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호메로스는 어떤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사람들이 '호메로스는
장님'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1년 전에 클레임처리로 어느 고객을 방문하게 되었다. 고객을
방문하러 가기 전에는 항상 긴장감이 흐른다. 모든 신경들이 예민해진다.
낯선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긴장이 풀리게 된다. 먼저 제품에 대한 불만으로 대화를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관심사가 하나 둘씩 나오면서 공감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초인종을 눌렀을 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다. 안쪽
거실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나무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거실 양쪽으로 늘어선 책장이 보였다. 그녀는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긴장감은 사라지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일반적인 고객과는 달랐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만 이야기가 중심이다. 하지만 그녀는
왜 이런 클레임이 발생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서부터 고객관리 시스템을
설명해주는 대목에서 그녀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설득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클레임을 제기하는 고객들은 어떤
유형의 사람들인지,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지 물어보았다. 마치 나를 인터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그녀는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를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는
글을 쓰는 작가인 것 같았다. 이번 호메로스 작품에 대한 '앙드레
버나드'의 해석을 읽으면서 그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듣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자신의 또 다른 감각을 이용해서 좀 더 리얼하게 세밀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순간, 나도 눈을 감아보았다. 컴컴한 어둠이지만, 시간이 흐르자 감각을 통해서 의식하는 모든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
끝에서 전해져 오는 컴퓨터 자판, 과거의 떠오르는 생각들이 자판을 통해서 타이핑 된다. 눈으로 보일 때보다 생각이 자유롭다. 두둥실 떠가는 구름 같다. 잠깐 동안 호메로스가 되어 <일리아스>의 '헥토르'를 떠올려본다. 헥토르가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마지막까지 가족을 생각하는 그의
음성이 들린다.
"운명이 나를 삼킨다. 그러나 나는 싸우지 않고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다음 세대들이 똑똑히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나는
완성할 것이다. 싸우고 사랑하다
가 죽을 것이다."
눈물이 뜨거워진다. 그의 안타까운 운명 앞에 나도 모르게 뜨거워진다. 가족을 돌이켜보고 나의 삶에 '사랑'이란 단어를 빼곡히 채워보려 한다. 이렇게 호메로스는 단순한 표현이지만
핵심을 찌르는 재능이 있다. 바라보는 대상이 누구이든 단 하나의 몸짓을 떠올리고, 본질을 드러내는 단어를 끄집어낸다. 마치 어둠 속에 빛의 근원을
발견하듯이 말이다.
호메로스의 두 번째 서사시,
인간이 이룬 것 가운데 위대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 <오뒷세이아>를 만든다. 그는 영웅의 관한 전설을 여기저기서 수집해서 그
중심에 오뒷세우스를 가져다 놓는다. 오뒷세우스는 <일리아스>에도 나오지만, 거기서는 웅변가이자 장수이고, 훌륭한 외교관이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를 로빈스 크루소와
같은 인물로 바꿔버린다. 그리하여 멀고 먼 바다를 떠돌면서 온갖 위험을 극복하여 결국, 집으로 귀환하는 영웅으로 만들어낸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도 누군가에게는 영웅의
이야기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료를 수집하는 그녀의 모습이 꼭 호메로스를
닮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의 움직임까지 잡아내려는 그녀의 노력이 나를 깨워준다. 앞으로 글을 쓰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세계가 내 마음에 들어오게
해보자.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호기심 가득한 이야기를 떠올리자.
어둠 속에서 호메로스는 나에게 말한다. "너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면, 너에게 살아있는 이야기를
선물로 주겠다" 그리고 눈을 뜨는 순간, 나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적어내려 간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072 | 혼자서 뭐하지? [12] | 루미 | 2012.07.03 | 2802 |
3071 |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기 [7] | 장재용 | 2012.07.02 | 2557 |
3070 |
내 고향은 아프리카 ![]() | 구라현정 | 2012.07.02 | 2102 |
3069 | 소크라테스 처럼 [14] | 세린 | 2012.07.02 | 2215 |
3068 |
#13 우리들의 이야기 ![]() | 샐리올리브 | 2012.07.02 | 2207 |
» | #13. 눈을 감고 느껴보세요 [14] | 한젤리타 | 2012.07.02 | 2308 |
3066 | 쌀과자#13 잉여와 결핍 [12] | 서연 | 2012.07.02 | 2292 |
3065 | 싫어요 [10] | 콩두 | 2012.07.02 | 2991 |
3064 | 시대를 가르는 Mind-Power 어떻게 키울것인가? [10] | 학이시습 | 2012.07.02 | 2119 |
3063 |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가 가져오는 결과는 [8] | ![]() | 2012.07.02 | 2533 |
3062 |
[일곱살민호] 힌트는 눈이야 ![]() | 양갱 | 2012.06.26 | 2453 |
3061 | 밥값도 못 하는 순간 [6] | 루미 | 2012.06.26 | 4648 |
3060 | 깨달음을 위한 프로세스 2 생각의 시스템1 시스템2 [6] | 백산 | 2012.06.26 | 2384 |
3059 | 쉼표 열 하나 - 그 많던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6] [1] | 재키 제동 | 2012.06.25 | 2814 |
3058 | 연구원 1년차 이후의 길잡이 [10] | 콩두 | 2012.06.25 | 2390 |
3057 | 아빠에게 [5] | 세린 | 2012.06.25 | 2341 |
3056 | 책은 선인가 악인가 [6] | ![]() | 2012.06.25 | 2176 |
3055 | 쌀과자 #12_단테와 프로메테우스 [3] | 서연 | 2012.06.25 | 2608 |
3054 | 파우스트 박사의 진실의 힘 [4] | 샐리올리브 | 2012.06.25 | 2588 |
3053 | 권위에 맞서는 자者 [10] | 장재용 | 2012.06.25 | 2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