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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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사람들처럼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는 침대에서 잠깐 쉰다는 것이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슬로모션으로 일어났다. 저질 체력에 야간 비행과 빡빡한 스케줄이 고되었는지 비염이 도져 시도 때도 없이 재채기가 몰고 오는 눈물과 콧물로 눈을 뜨고 있기 조차 힘들어 어디든 쉴 곳을 찾기에 바빴다. 사진보다는 눈에 담아두면 된다 생각했고 보고 듣는 것보다는 현장에서의 느낌이 중요하다 여겨 돌아오고 나니 사진 몇 장, 메모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다 평생의 동반자(남편)를 현장학습 목적으로 동반했으니, 말이 좋아 제2의 신혼여행이지 마치 재혼한 중년 커플의 모습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허우적허우적 걸어 다녔다.
아무튼 여행기 하나는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먹을 불끈! 이 글에서는 시칠리아의 사람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작년 여행기의 제목은 ‘바람과 몸, 그리고 사랑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칠리아에서 나는 몸 속 세포를 꿰뚫는 바람도, 건장하고 아름다운 남성의 육체(석상)도, 아득한 사랑이야기도 찾을 수 없었다. 시칠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유쾌하고 인심 좋은 ‘사람들’이었다.
티레니아 갑판에서 만난 푸른 눈의 피에트로 신부님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나폴리에서 시칠리아의 팔레르모(Palermo)행 나이트 페리 티레니아(Tirenia)를 기다렸다. 나폴리항은 당시의 영화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월의 고단함에 늙고 피로한 모습이었다. 항구 대합실에서 기다리는데 왼편에 어릴 적 유명했던 TV외화 ‘사랑의 유람선’에 나올법한 초호화 유람선이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선실에 위치한 방마다 전용 발코니에는 반라의 사람들이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배 이름은 CARNIVAL BREEZE. ‘와, 저 배인가 보다!’
우리의 여행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지. 우리는 순간의 행복감을 뒤로 하고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무거운 트렁크를 질질 끌며 이동해 티레니아에 올랐다. 티레니아는 각층에 에스컬레이터가 연결되고 자동차까지 수 십대가 들어가는 큰 배였다. (테레니아의 뜻이 궁금해 찾아보았더니 이탈리아 반도의 서쪽 바다를 부르는 말이다. 지중해 중부에 위치한 테레니아는 코르시카, 사르데냐, 시칠리아 등 여러 개의 섬으로 둘러싸여 있다.) 방에 들어서자 벽에 붙은 4개의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대학시절 거하던 기숙사 방이 생각났다. 2개의 이층침대가 놓인 허름한 그곳에서 나는 스무 살의 빛나는 처녀였다. (지금은 애가 둘이 있는 마흔의 아줌마이지만.) 4인용 선실을 2명이 쓰게 배정받았으니 그다지 좁지는 않았다. 남편과 나는 1층 침대를 쓰고 2층 침대는 접어 두었다. 그러고 나니 선실이 더 넓어 보였다. 저녁은 로마의 한국식당에서 준비한 소박한 김밥도시락으로 때우고 7시쯤 잠시 쉴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다. 남편은 작은 방에 갇혀 있기가 답답했는지 우리에 처음 갇힌 햄스터처럼 선실과 갑판 사이를 수시로 오갔다. 그렇게 지중해 위에서의 첫밤이 지나고 있었다. 테레니아 선실에서의 잠은 왜 그리도 꿀맛 같은지, 나는 까무룩 잠이 들어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벽 4시가 되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초저녁부터 누워있었더니 허리가 아파왔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남편과 함께 방을 나셨다. 갑판을 향하다 보니 이 배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다. 지방 소도시 다방에 있을 법한 소파에는 방값을 아끼려는 여행객들이 이리저리 몸을 누이고 잠들어 있었고 복도에는 부스스한 머리로 이동용 매트리스의 바람을 빼고 있는 가족 여행객도 보였다. 갑판에 오르니 팔레르모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 왔다. 대형 선박과 최신식 항구 시설로 둘러싸인 팔레르모항은 언뜻 우리나라 부산항과 닮은 얼굴도 가지고 있었다. 시칠리아 최대의 도시라는 팔레르모는 안개 속에서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팔레르모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고 가자.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의 대표 도시로 그 역사는 시칠리아의 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팔레르모는 기원전 7세기경에 뛰어난 상인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레바논을 활동무대로 움직이던 페니키아인들은 무역과 식민지 확보를 위해 북부 아프리카와 지중해 주변을 장악했고 그때 팔레르모도 항구도시의 모습을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다. 이후 팔레르모는 그리스인들이 주인이 되었고 얼마간은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기원전 9세기에는 아랍제국이, 11세기에는 노르만족이 섬을 차지하여 12세기까지 다스렸다. 그 다음에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 민족이, 프랑스 중부의 중세 왕조가, 그리고 에스파냐인들이 팔레르모의 주인이 되었다. 마침내 19세기 중반에 북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인들과 가리발디에 의해 통일된 이탈리아에 속하게 되었고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특별자치구역으로 포함되었다. 그래서 팔레르모는 그 옛주인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또는 변형하여 간직하고 있다.
안개 속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데, 누군가 “Can you speak English?”라고 말을 건다.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은발이 섞인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슬리퍼 차림으로 갑판에 서있던 중간 키의 넉넉한 몸매의 남자였다. 뜻밖에도 그는 자신을 신부라고 소개했다. 이름은 피에트로 루이스. 나폴리 출신으로 팔레르모에서 2년간 일했던 그는 서강대를 방문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팔레르모의 주요 관광지를 조근조근 설명해 주었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성채는 역사적 유물인데 현재 개인 소유물이라고 한다. 팔레르모의 수호 성녀 로살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다. 로살리아는 17세기에 팔레르모에 죽음의 신 페스트가 찾아 왔을 때 도시의 주민들을 구해내었다고 한다. 팔레르모에 머물지 않고 체팔루로 바로 넘어간다고 하니 안타까워하면서 팔레르모는 시칠리아 제일의 도시이니 꼭 다시 돌아와 꼼꼼히 돌아보라고 당부했다. 이후 좌선생님과 최명애 선생님이 오셔서 잠시 함께 담소를 나누다 아래의 사진 한 장을 간직하고 신부님께 안녕을 고했다. 파란 눈이 푸른 지중해색 같던 피에트로 신부님, 건강하세요!
넉넉하고 소박한 체팔루 청년이 만들어 준 정겨운 점심식탁
작년에 갔던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밀라노, 볼로냐, 베르나, 피렌체 등)은 도시 전체가 잘 정돈된 영화 세트장 같았다. 거리는 말끔히 치워져 아스팔트대신 쓰인 반들반들한 돌들이 반짝이고 가정집 발코니에는 화사한 색깔의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면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피어나 태양과 숨바꼭질을 하고 넓은 평원에는 줄 맞추어 피어난 해바라기와 사이프러스 나무가 장관을 이루었다. 반면 시칠리아는 전혀 다른 풍광을 선사한다. 이 곳은 곳곳이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그림이다. 집집마다 발코니에는 뜨거운 햇빛을 가리기 위한 줄무늬 천막이 쳐져 있고 하얀 머리의 할머니가 낡은 수건이며 티셔츠들을 거꾸로 널고 있다. 좁은 골목에는 소형 승용차들이 다닥다닥 주차되어 있고 중세시대부터 단 한 번도 손질하지 않은 듯한 건물 외벽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도시 뒷골목에는 나뭇잎과 쓰레기가 한데 뒹굴고 버스 밖 풍광은 척박한 들판에서 드문드문 자라는 올리브나무가 주인공이다. 그런 시칠리아의 도시들 중에서 체팔루는 시칠리아와 중북부 지방의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보물 같은 존재다.
체팔루(Cefalu)는 팔레르모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나오는 작은 해안도시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광장과 영화관은 세트였다고 한다. 대신 청년 토토가 연애를 하던 바닷가와 골목, 기차역 등은 체팔루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체팔루 관광은 시칠리아 최고의 중세 성당인 체팔루 두오모가 있는 광장에서 시작했다. 체팔루 두오모는 노르만 왕 로저 2세에 의해서 12세기에 만들어졌다. 이후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내부에 아랍문양과 아라비아 문자가 남아 있다.
언제부터인가 성당은 건성건성 보기 시작했다. 독실한 크리스찬이 아니니 특별한 감흥도 없고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성당을 다니다 보니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체팔루에서는 성당을 건너뛰고 바로 골목 탐험을 시작했다. 그 날은 마침 내가 좋아하는 승호 선배의 생일이었다. 생일 턱으로 낸 팔레르모 부치리아 시장에서 산 신선한 복숭아에 감사하며 승호-보나 부부에게 점심을 한끼 대접하고 싶었다. 어떤 곳을 선택해야 할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광장 근처에 위한 레스토랑의 음식값은 비싼 경우가 대부분. 그래서 몇몇 일행들과 함께 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식사할 곳을 물색했다. 몇몇 식당을 지나쳐 걸어가는데 자그마한 키에 눈빛이 살아 있는 청년이 서빙하는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이라고 해봐야 좁은 테라스에 3개와 홀에 4개 정도가 전부였다. 테라스에는 유럽 관광객으로 보이는 젊은 무리 몇몇이 앉아 있었다. 레스토랑 이름은 AL RISTORO DE RE RUGGIERO. 특별한 정보가 없는 한 나는 손님이 많고 잘생긴 남자가 서빙하는 레스토랑을 선택한다. 이번에도 이러한 철학에 충실하게 선택. 이번에도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싹싹한 체팔루 청년은 몸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테라스에 우리 일행을 위한 테이블을 세팅해 주었다. 나는 그의 추천대로 해물이 듬뿍 들어간 시칠리아식 파스타와 미트볼이 들어간 피자, 그리고 약간의 샐러드를 주문했다. 요리만 해도 무려 7가지였다. 그러자 이 인심 좋은 체팔루 청년은 우리에게 하우스 와인 2병을 내밀더니 체팔루 시티맵을 무더기로 안겨주었다. 음식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가난한 언어로 어찌 그 맛을 형용할 수 있을까? 신선한 해물은 입안에서 바다 내음을 풍기며 툭 터지고 통통한 스파게티 면발은 입술 안으로 쪼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피자는 또 어떠한가? 토핑이 잔뜩 얹혀진 미국식 피자와는 달리 이태리 피자는 담백하고 바삭 했다. 화이트 와인이 목 안으로 들어가면서 음식의 풍미는 더하고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그 때 지중해에서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왔다면 금상첨화였을텐데.
그렇게 우리는 행복한 식사를 하고 청년에게 계산서를 요구했다. 청구된 식대는 90유로. 한화로 따지면 1인당 14,000원 정도의 금액으로 정통 이탈리아 음식과 와인을 즐긴 셈이다. 우리는 고마운 그에게 5유로의 팁을 주었다. 그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지면서 아주 고마워했다. 우리는 번갈아 그와 사진을 찍었고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안녕을 고했다. 시칠리아는 그런 곳이다. 넉넉한 인심에 소박한 행복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한없이 유하고 느긋한 선비 같은 남자, 쥬세페
이탈리아에서 쥬세페(Giuseppe)는 흔한 이름인가 보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름은 쥬세페 토르나토레, 오페라 <아이다>의 작곡가 이름은 쥬세페 베르디, 여행 초반 로마에서 우리를 안내한 운전기사 이름도 주세페였다. 그리고 잊지 못할 또 한 명의 쥬세페를 만났다. 5일 동안 시칠리아 곳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준 운전기사 쥬세페. 쥬세페는 여행 내내 핑크색 셔츠에 검정색 양복 바지를 입고 검은 선그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는 작년 토스카나 여행 때 운전기사였던 30대의 스테파노에 비하면 꽤 나이가 있어 보인다. 전형적인 시칠리아 남자답게 뱃살이 넉넉한데 머리 스타일도 시원하다.(?) 쥬세페는 약간 걸음이 불편해 보인다. 여행 가이드 신이사님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 발을 못에 찔리는 사고를 당해 그리 되었다고 한다. 그가 영어를 못하기도 하지만 여행 내내 그는 과묵한 아버지 같았다. 단 한 번도 환하게 웃거나 불같이 화를 내지도 않았다. 아버지 쥬세페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손녀같이 보일 그 부녀의 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졌다.
그의 진가는 돈나 푸가타(Donna Fugata) 와이너리 야간 수확 페스티벌에 참가할 때 드러났다. 돈나 푸가타는 이탈리아 말로 ‘도망간 여인’이란 뜻으로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를 뜻한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비운의 주인공 마리 앙투와네트 왕비의 언니로 이탈리아 부르봉 왕국으로 시집을 왔다. 이후 그녀는 권력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페르디난도 4세를 대신해 1792년부터 나폴리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가 나폴리를 장악하면서 마리아 카롤리나는 시칠리아 섬으로 도망쳐 지금의 돈나 푸가타 와이너리가 있는 지역에 머물렀다. 그래서 돈나 푸가타 레이블에는 마리아 카롤리나의 비극적인 운명을 뜻하는 슬픈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와이너리 입구에 도착하자 앉은뱅이 촛불들이 줄줄이 늘어서 환영을 해주었다. 손쉬운 전깃불 대신 하나하나 손으로 불을 밝혀야 하는 촛불을 사용한 와이너리 주인의 센스와 낭만이 느껴졌다. 아시아 세일즈 담당자라는 줄리아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와이너리 여기 저기를 돌아보았다. 줄리아는 검은 커트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키가 큰 시칠리아 처녀였다. 와인핑크색 원피스가 그녀의 큰 키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돈나 푸가타 와이너리에서는 야간 수확 페스티벌 때 화이트 와인 품종이 샤르도네이를 수확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낮에 수확하면 높은 온도로 인해 수확하자마자 발효가 시작되어 와인 맛에 영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의 장황한 설명에 사부님은 결국 “Let’s taste it!”라고 외치기 이르렀고 우리는 목에 큰 와인잔을 하나씩 메고 시음장에 들어섰다. 시음장은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맞아 와인에 취하고 싶은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잘 차려 입은 청춘남녀도 있었지만 유모차에 잠든 아이를 끌고 다니는 부부들도 눈에 띄었다.
그다지 와인을 즐기지 않는 나는 몇 번 시음하는 척하다가 지인에게 선물로 줄 와인 두 병을 구입하고 버스에 올랐다. 12시 전에 호텔에 도착하기 위해 버스는 서둘러 출발했다. 하지만 작은 차들이 줄줄이 늘어선 입구는 들어올 때 보다 훨씬 좁아져 몸집이 큰 버스가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몇 대의 차를 이동시켜야 하는데 와이어너리에는 방송 시설도 없고 차주인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그 날도 버스 안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놀이동산 야간개장의 레이져쇼를 능가하는 시칠리아의 별쇼를 마음껏 즐겼다고 했다. 그 즐거운 자리에 와인이 빠지지 않았음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날 밤, 쥬세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필요한 일을 처리하고 우리를 호텔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다. 그는 단언컨대 다혈질의 여느 이태리 남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날 밤 2시, 우리는(특히 여자들) 신이사님의 조언대로 쥬세페에게 감사의 포옹과 볼 키스를 날려 주었다. 그 때는 무뚝뚝한 쥬세페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번졌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쥬세페는 우리들이 와인에 취해 자신에게 강도 높은(?) 굿나잇 세레모니를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신이사님이 감사의 표현이라고 설명해 주었더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
시칠리아는 그런 곳이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곳! 처음 만난 이방인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시칠리아였다. 그 곳에서 나는 한없이 편안했다. 눈이 번쩍 뜨일 무언가가 없어도, 가슴이 설렐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나라 지방도시 뒷골목을 닮은 시칠리아에서 나는 익숙한 편안함을 느꼈다. 그것이 바로 이번 여행에서 찾아낸 시칠리아의 매력인 것 같다. 시칠리아에 다시 올 때는 가을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 더 느긋하게 시칠리아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에도 넉넉하고 소박한 시칠리아 사람들과 근사한 추억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재키, 신랑이랑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리에도 부러웠지만, 멋진 여행기를 보니, 또 부러운데 ^^
근데, 한편으론 남편보다 동기들과 여행하는 것이 훨씬 잼있다는 위의 댓글에도 동감 ㅋㅋㅋ
나도 한 해는 가족들과, 한 해는 동기들과 그렇게 다니고 싶당~
그런 경제적 여유와 동시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길 강렬히 원해.
원하는 만큼, 이루어질 것이라 우리 믿어보자구 ^^
언젠간, 재키하구도 같이 여행해 보자구 ^^
참, 매번 댓글을 못 달아도 재키 제동이 만난 쉼즐녀 이야기, 잘 읽고 있으니, 절대 그 끈 놓치 말라구!
한번 놓치면 다시 잡기 힘들다는 거, 꼭 기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