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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일 11시 52분 등록

바닥에 대하여    -정호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열흘 전 토요일 B를 만났다. B의 고객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두 사람 다 시간을 내기 어렵다하여 토요일에 B의 고객이 다니는 치과근처 송파쯤에서 약속을 잡았다. 고객의 치과예약이 정오에 잡혀있어서 우리는 11에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서류를 챙기고 옷도 단정하게 입었다. 주말이지만 첫 대면하는 자리이니 당연하다. 두 시간 전에 출발하였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전철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콩다방이었다.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출발한 이유는 여유 있게 도착하여 책을 볼 요량이었다. 요즘 나는 주말을 온전히 나의 시간으로 할애한다. 허나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고객을 만나는 일에는 시간, 장소 가리지 않은 것이 나의 영업원칙이다. 스마트폰으로 전철역을 검색하니 소요시간이 나온다. 40여분이면 도착한다는 정보를 믿고 출발했는데, 환승역에서 차를 한대 놓치고 나니 주말이라 배차간격이 생각보다 만만하지는 않다. 이른 출발이 아니었으면 늦을뻔한 시간에 도착했다. 약속시간 10분전. B는 정시에서 이삼 분 늦게 도착했고 고객은 그보다 십 여분 늦게 도착했다. 자그마한 키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여자분이었다. 명함을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깨끗한 피부 스마트해 보이는 고객이다. 대기업 부장. 임원물망에 오르는 분이라 하니 왠만한 이야기는 솔직함이 제일 좋은 상담이 되겠다 싶었다. 사전에 B를 통해 오늘 제안할 상품에 대한 정보는 모두 건네놓은 상태이다. 해당회사의 신용평가사자료, 현금흐름표, 채권발행신고서 등. 내가 아는 B도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 충분한 설명을 한 후에 나를 소개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B는 재무설계회사에 다니는 팀장이고 그의 고객을 오늘 내게 소개시켜주는 자리이다. 약간의 분위기 전환용 대화를 나누고 곧바로 서류작성을 했다. 필요한 설명을 하고 마지막으로 제안해놓은 채권에 대한 마무리상담을 하고 고객은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B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향후 영업에 관한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점심을 함께하고 B는 고객상담이 있다며 회사로 들어갔고 나는 전철로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간만에 주말에 일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계좌를 만들어서 고객에게 자금을 송금 받고 매수하기로 한 채권을 샀다. 그리고 다음날, 화요일이다. 10시20. 뉴스가 올라온다. G건설사 부도위기. 이 뉴스를 필두로 관련회사들의 주가가 내리기 시작한다. 17시19 G건설과 W홀딩스 법정관리신청. 두 회사는 어제 내가 고객에게 매수해준 회사와 무관하지 않은 회사이다. 지주회사와 자회사관계이다. 말 그대로 엄마회사와 자녀회사란 의미이다.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토요일 처음 만난 고객생각이 났다. 아차 싶다.

기존의 내 고객이 아니다. 첫 인연이다. 퇴근길에 전철역에서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확인된 사항이 많지 않지만 일단은 고객의 마음이 어떠할지는 가늠이 가는지라 전화부터 했다. 직접  적인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주회사의 법정관리는 자회사에게 좋은 뉴스는 아니다. 향후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영향권에 들어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금융환경은 신용이 좋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극명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신용이 좋은 사람은 대출이 쉽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대출자체가 어렵다.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은 흘러오지 않는다. 금융기관의 매커니즘은 아이러니하다. 필요한 곳에 자금조달을 위해 만들어진 금융기관이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우리가 매수한 회사의 재무상태를 좀더 자세히 안내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자세한 브리핑을 하기로 했다. 전날 내가 매수한 채권의 발행회사가 법정관리 신청한 회사는 아니지만 같은 그룹에 속해있는 회사의 채권이다. W그룹은 우량회사하나를 매각해놓은 상태였다. 금요일이면 자금이 들어오기로 되어있었다. 해당그룹의 현금흐름까지 확인하고 매수한 채권이었는데 갑자기 법정관리라니….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리저리 확인을 해보려는데 확인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 정도이다. 회사 내 관련부서는 비상사태라 회의 중으로 전화연락이 되질 않는다. 인터넷에 공시자료를 보고 나는 상황이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다음날 출근하여 추가로 상황 파악하여 고객에게 알려드리고 구체적인 대책은 논의하면 되겠다 싶었다.

 

다음날 아침(수요일) 04. 일어나서 휴대폰을 보니 메시지가 하나 들어와있다. 수신시각이 1143. B의 고객으로부터 온 메시지다. 시간을 보니 걱정이 되어 잠을 못 잤을 것 같다. 왠만하면 12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메시지를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이 이른 시각이지만 430에 답장을 넣었다. 혹시…고객은 잠을 전혀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답장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럴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계30위권에 있는 회사이다. 지주회사와 자회사의 법정관리. 의견이 분분하다. 말도 많다. 금융당국은 그룹회장일가의 도덕적 해이에 대하여 엄중 대처한다는 입장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이다. 하기야 외양간을 고치는 적기는 소를 잃었을 때라 하니 지금이라도 엄중대처 하는 것이 맞다.

 

주식과 달리 채권에는 신용등급이란 것이 있다. 투자자나 금융기관 종사자는 해당회사의 신용평가 자료를 참고하여 재무상태를 파악한다. 기업에 대한 정보를 세세하게 알기 어려운 상태에서,  정상적인 투자활동으로 생기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금융당국에서 또는 채권단에서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 아직은 미지수이다. 일련의 조치와는 별개로 나와 고객 그리고 B. 세 사람의 관계는 며칠 전과는 다르게 사뭇 이상해졌다.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일이 생기고 나면 고객은 늘 이야기한다. 정보의 부재를 탓한다. “정말 몰랐느냐?  가 질문의 요지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이지만 나로서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고객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얼마나 황당하겠는가….불과 이삼 일 간격이다.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채권투자, 처음으로 시작한 투자가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그리고 B의 입장도 생각해본다. 본인의 판단으로 내게 요청한 일이기는 하지만 B도 아쉬움이 클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생기는 채권을 제안한 것일까 하는 아쉬움 말이다. 내 입장은 이렇다.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다. 회사의 신용등급과 업황 그리고 재무상태 모두 고려하였고 정상적인 현금흐름이 예정되어 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행위이다. 나름 틈새시장을 고려하여 선택한 채권이었다. 일명BW(신주인수권부사채)이다. 열심히 공부하여 선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고객들은 이미 몇 달 전에 해당채권을 투자해놓은 상태였다. 이미 BW투자의 경험이 있는 고객들은 내 판단을 믿는다. 그리고 B의 고객처럼 늦은 밤에 메시지를 하지 않는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똑 같은 설명을 했는데도 누구는 편안할 수 있고 누구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관계인 듯하다. B의 고객은 첫 거래이다. 기존에 동일상품의 거래경험도 없다. 이런 경우 본인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찾게 되고, 정보에 대한 판단능력 또한 극단적으로 흐를 확률이 크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한다. 투자의 세계에서 최악의 상황은 파산이다. 그리고 깡통이다. 누구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이번 주에 B의 고객은 그날 함께 매수한 다른 채권도 팔기를 원할 것이다. 첫 거래에서 너무나 강력한 예방주사를 맞았다. 아마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나도 참고 견뎌보자고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분과 나의 인연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끊어진 셈이다. 바닥부터 찍었다. 바닥의 딛고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연의 끈이 끊어지는 것이겠지. B와 나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상호보완 가능한 일을 하고 있으니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겠으나 일을 함께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다. 내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남는 아쉬움이 아니다. 좋은 투자상품을 접할 기회를 아예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마음고생 할 고객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바닥을 찍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디가 바닥인지 몰라서이기도 하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닥인줄만 알아도 다음은 희망이니 괜챦다. 바닥을 가본 사람도 모르고 딛고, 일어서본 사람도 모른다. 다만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나의 일터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누구나 바닥을 찍고 싶어한다. 아니다. 바닥을 잡고 싶어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사고파는 행위를 할 때는 제일 싸게 사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다. 그렇다보니…당연히 바닥을 잡고 싶어한다. 누구보다도 싸게 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지나고 보니 그곳이 바닥이었네…당시에는 바닥인지 아무도 모른다. 우연챦게 바닥을 잡는 행운이 있을 수 있지만 99.99%그렇지 못하다.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닥을 잡는 일, 바닥을 딛는 일. 그것은 언제나 리스크와 비례한다. 그곳이 바닥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칼날을 잡을 확률을 무릅쓰고 잡는 것이다. 바닥…. 오늘이 고객과 나의 바닥이기를 바란다.

 

 

IP *.217.2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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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2 15:26:28 *.41.190.211

"바닥을 찍고 올라 갈 수 있길 바랄뿐이다." 그래도 양심적인 태도 인 것 같다.

  근데, 카를 융 이야기는 바닥 밑에 숨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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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06:20:27 *.194.37.13

내려올 때, 스프링을 달아 놓으면 바닥을 찍고 멋지게

점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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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13:21:29 *.210.80.2
서연형님 이제 돈과 시가 함께 나오는 본격 돈 이야기 영역으로 들어선 듯 싶습니다 우선 시로 시작되어 시 읽는 즐거움이 큽니다 또 첫 만남을 깔끔정장 시간 계산 프로의 아우라가 느껴져요 4:30에 문자를 보내며 고객의 마음을 읽어주고, 한편 기존 고객들도 그걸 샀는데 아무 항의가 없는 것과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에도 감동과 신뢰가 와요 시와 돈 그리고 사람의 마음과 상황을 읽어가며 마치 거대한 장기판을 운용하듯 하는 이야기가 뭔가 끌림이 있어요 서연형님 김미화씨 좋아하세요? 저 그녀가 진행하는 시사프로그램 좋아하는데요 형님의 돈 이야기가 쉽고 재미있고 만만했으면 좋겠어요 동네에 뭔 일 생기면 쪼르르 달려가 물어보고 의논하는 멘토 비스무리한 형님들이 한 분씩 있는 것 같아요 서연형님한테 저는 그런 아우라를 느껴요 그리고 이번 주도 똘창에 빠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노력해보겠습니다 (핸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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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13:22:43 *.210.80.2
작성하느라 땀 뻘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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