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뫼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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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5월 12일, 릴케에게는 커다란 변화의 날이다. 장소는 뮌헨의 소설가 야콥 바서만의 집에서 열린 다과 모임에서였다. 릴케는 당대 멋진 여성의 대명사였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나자마자 평생을 함께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쌓였다.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아니 그러기 때문에 그녀는 릴케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모성의 여인이었다고 기술한다. 그녀의 강렬하고 자유분방하며 협조적인 정신세계는 릴케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만나 스파크를 당겼다.
릴케에게 루 살로메가 각별했던 것은 그가 한 해 전에 읽은 그녀의 에세이 덕분이기도 했다. 루의 에세이 <유대인 예수>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릴케는 익명으로 그녀에게 몇 편의 시를 보내기도 했다.
루 살로메가 쓴 책 <하얀 길 위의 릴케>를 보면 이렇게 기술되어있다. 실제로 만난 릴케는 루 살로메에게 "친애하는 부인, 당신과 내가 보낸 어제의 그 황혼의 시간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짧지만 달콤한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녀의 에세이를 기억하는 시인에게 루도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릴케는 덧붙인다. “그 황혼의 시간에 나는 당신과 단 둘이서만 있었습니다.”라고.
후에 잠시 연인이었던 루 알버트 라사르트의 책, <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를 보면, 둘은 단순한 애정관계로 시작했지만, 릴케에게 루는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반려였다고 한다. 그녀는 릴케에게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모성적인 사랑의 제공자였고,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데 미숙한 시인에게 현실적인 길을 안내하는 정신적 후원자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공부하고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 여행을 떠나고, 유럽 전역을 돌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가까워졌다. 루는 릴케에게 프리드리히 니체(니체가 루에게 청혼한 적이 있다)의 사상을 알려주었으며, 러시아 문학을 소개했다.
그녀를 만난 후 릴케에게 몇 가지 변화가 생긴다. 먼저, 그는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었다. 1897년 빈의 한 잡지에 릴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을 쓰게 되는데, 바로 루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루 살로메는 그가 시인으로 성장하기에 좀 더 어울릴 법한 이름에 대한 혜안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릴케의 시 세계도 더욱 원숙해져, 그는 이 무렵 초기시의 미성숙한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루 살로메를 만난 후 러시아 여행 등을 거쳐 인식의 지평을 넓힌 릴케의 문학은 바야흐로 날개를 달게 되었다. 이 시기에 씌어진 <기도시집>(1905년 출간)은 1899년, 1901년, 1903년, 세 차례에 걸쳐 한 부씩 창작함으로써 완성된다. ‘기도서’를 문학적으로 수용한 이 시집은 자신의 시 창작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치열성을 담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멀리 있는 존재인 신을 향한 끝없는 날갯짓임을 웅변하였다. 이 시집을 펴냄으로써 릴케는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형상시집>(1902)과 <신시집>(1907)은 릴케 문학의 또 하나의 궤적이다. 사물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바라보기’가 릴케의 미학적 성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신시집>의 이른바 ‘사물시’는 대상을 응시하는 시인의 감각적 관찰이 오롯이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이 무렵 로댕과 함께 일하면서 질료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는 조각의 세계가 시인의 창조적 직관 속에서 독특한 진경을 창출해낸 것이었다.
스치는 창살에 지쳐 그의 눈길은
이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
그 눈길엔 마치 수천의 창살만이 있고
그 뒤엔 아무런 세계도 없는 듯하다.
아주 조그만 원을 만들며 빙빙 도는,
사뿐한 듯 힘찬 발걸음의 부드러운 행보는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있는
중심을 따라 도는 힘의 무도(舞蹈)와 같다.
가끔씩 눈동자의 장막이 소리 없이
걷히면 형상 하나 그리로 들어가,
사지의 긴장된 고요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이르면 존재하기를 그친다.
- 「표범—파리 식물원에서」 전문(김재혁 역)
소설 <말테의 수기>도 릴케 문학의 완숙기에 창작된 중요한 작품이다. 덴마크 출신의 젊은 시인 말테가 파리에서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수기 형식으로 담은 이 소설은 릴케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릴케는 순수 유미주의 미학보다는 샤를 보들레르나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정신에 자극받아 ‘문둥이 옆에 눕는 것’, 현실 문제를 깊이 성찰하는 태도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릴케 문학의 정점은 <두이노의 비가>(1923)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3)이다.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텐데. 아름다움이란/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김재혁 역)라고 시작되는 첫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비장한 목소리의 파도 속에 휩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리 탁시스 후작 부인이 제공한 ‘두이노 성’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쓴 이 시는 당시 교류했던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비견될 만한 ‘생의 약동’에 대한 웅대한 찬양가이다. 무용수 베라 오우카마 크노프를 위해 쓴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는 진정한 사랑의 노래로서 시인 릴케의 꿈을 보여주는 시이다. 시인은 스스로 오르페우스가 되어 에우리디케가 된 크노프를 향한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삶에 발을 둔 지하 세계의 방문객이었던 오르페우스, 저승의 신 하데스도 감동시킨 그의 노래야말로 시인의 꿈이었음을 보여주는 시라고 하겠다.
릴케는 그의 삶에 많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의 여인들이 릴케와의 관계를 고백한 회상록들만 해도 꽤 여러 종이다. 루 살로메는 물론이고, 피아니스트 마그다 폰 하팅베르크, 출판업자 카타리나 키펜베르크, 화가 루 알버트 라자르트 등이 회상록을 남겼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의 <하얀 길 위의 릴케>는 릴케 평생의 정신적 연인 루 살로메가 쓴 릴케에 대한 회고록이다. 평생 연인이었고, 강한 영향을 받은 사람의 히고록 치고는 냉정하고 담담하다. 이 책에서 그녀는 말한다. “릴케는 때로 고매한 사람이었고, 때로는 그저 침묵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두 가지 모습에 대해 이름을 각각 정해주었다. ‘라이너’와 ‘또 다른 라이너’, 그가 이 이름들에 대해 분노를 표현했을 때, 나는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릴케는 자신에게 ‘냉소적인 자아’가 있다는 생각에 분노하곤 했다고 회상한다. 릴케의 <묘비명>의 '장미의 가시'가 그 냉소적인 자아를 상징한다고 기록했다.
루 알버트 라자르트의 <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라는 책은 릴케의 또 다른 연인이 쓴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루 살로메의 것에 비해 그의 추억이 훨씬 더 깊고 가깝다. 그들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 소송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루 살로메의 개입과 가족간의 갈등과, 그의 시 세계, 그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들린다. “그 무엇에 의해서도 중단되지 않은 길고 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밤의 한 부분이 완전히 지워진 것을 알고 놀라는 때도 많았다”라는 그녀의 고백을 들을 수 있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 루 살로메에게 헌정한 <기도시집>의 제2부에서(김재혁 역)
그럼 이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은 릴케의 부인은 누구인가? 바로, 화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이다. 그들은 1901년 4월 28일 혼인했고, 같은 해 12월 12일 딸 루트를 낳았다. 그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결혼하기 이전에 임신을 한 것만은 확실하고, 임신으로 인한 결혼이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릴케는 결혼 무렵만 해도 릴케는 보헤미안적 생활을 버리고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결혼생활 직후 릴케는 자신의 일에 매우 충실했다고 루 살로메는 기록한다. 심지어는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기 위해 식사할 때는 창을 통해 들여온 음식을 서재에서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정적인 생활을 구축하려던 릴케의 생활은 차츰 실패했다는 것이 확실해진 1902년부터 릴케와 처자식은 서로 만날 기회가 드물어졌다. 이후 1922년, 그가 <두이노의 비가>를 완성한 해에 딸 루트 릴케가 독일에서 결혼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는 아내인 클라라 베스트 호프를 통해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을 만나게 된다. 1902년 파리로 간 그는, 파리의 툴리에가 11번지에 머물면서 로댕을 방문한다. 이 당시의 기억은 그의 유일한 소설 <말테의 수기>에 녹아있다. 그는 파리의 로댕 집에 묵으면서 그의 전기 <로댕 론>을 쓴다. 그는 동시에 <형상시집>을 냈는데, 이 시집은 러시아의 역사, 파리의 인상들, 스칸디나비아의 풍경, 그리고 성서에서 따운 여러 가지 모티브를 그 소재로 삼고 있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로, 한 계절을 보낸는 등의 자유로운 생활을 한다. 기록에 보면 1905년부터 1906년까지는 가족들과 함께 오버노일란트에서 보내고, 그해, 여름에는 또 다시 루 살로메와 재회하는 등의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15년에는 거의 일 년동안 아내와 루트가 살고 있는 뮌헨에 머물기도 하고, 동시에 <두이노의 비가>를 창작하기도 한다.
시인의 운명은 생각보다 일찍 저물었다. 릴케는 1923년 발병하여 몸져눕게 된다. 그때 이미 백혈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릴케의 죽음과 관련하여,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낭만을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그가 장미 가시에 찔린 적은 있었다. 1926년 9월 릴케의 여행을 도와줄 이집트 여인 니메트 엘루이가 찾아왔을 때 그녀를 위해 장미를 몇 송이 따주다가 그만 장미 가시에 손가락을 다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발병한 백혈병 때문에 상처가 쉬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아니다.
1926년 12월 29일 새벽,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1월 2일 키펜베르크 부부, 레기나 울만, 난니 분덜리 폴카르트, 베르너 라인하르트, 루 알버트 라자르트, 그리고 몇몇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라롱의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릴케의 유언에 따라 다음 시구가 새겨졌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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