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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2일 10시 27분 등록

즐거운 지식

프리드리히 니체

 

1. 저자에 대하여

 

1) 저자조사를 하기 전에

지난주부터 우리는 “인류는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 사유의 방식”에 대해 읽고 있다. 인류가 생각해 온 방식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다섯 권의 책을 읽는다. 김용규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이번주 과제인 프리드리히 니체의 『즐거운 지식』, 그리고 앞으로 읽게 될 세 권은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의 지혜』, 정약용의 『다산선생 지식경영』,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지난주는 2000년 동안 문명을 지배해온 ‘신’에 대해 알아봤다. 이번주는 그것에 반하는 책이다.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한 책 선정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시대흐름을 느껴볼 수 있게 정해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올해 책을 읽을 때 모든 책의 저자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읽고 있다. 왜냐하면 읽는 책의 대부분이 고전이기도 하고, 아직 고전은 아니지만 저자를 조사해보면 배울 점이 많은 분들의 저서이기 때문이다. 저자 조사의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렇게 서론이 긴 이유는 이번 주 책을 읽어가면서 내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지, 10월에 주어진 5권의 책의 주제는 무엇인지 확인하고 나니 나의 생각이 좀 바닥에서 한계단 올라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카를 융의 책을 두 번 읽고, 김용규의 책을 읽고 다시 니체의 책을 읽으려니 뇌에서 열이 났다. 방대한 양이 머릿속을 침투하니 뇌가 놀랄만도 하다. 더군다나 나만의 철학이 아직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 바쁘다. 그런데 한 주 한 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저자를 만나다보니 정신이 없다. 왔다 갔다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유의 방식’이라는 키워드를 잡고 나니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그리고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는데 덜 힘들다. (여기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간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말과 다르다. 거부감을 갖지 않고 내 생각을 저자에게 맡겨보는 것 뿐이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생각해 왔고, 현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살지에 대해서도 관찰하게 됐다. 좋은 일이다. 생각없이 살다가는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급급하게 따라가거나, 타인이 강요하는 것에 짓눌려 살 뻔했다. 자기의 생각을 갖는 다는 것이 늘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인생’을 사는 데는 아주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의 생각을 갖는다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갈등을 일으킬 수 도 있고 때론 혼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 없이 사는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사유의 방식’이라는 주제를 인식하기 전에는 우왕좌왕 저자들을 따라다녔다면 이제는 즐겁고 의미있게 방황한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의 <서곡>에서 말한다.

 

7 나를 따르다 - 너 자신을 따르다 (Vademecum-Vadatecum)

나의 방식과 말에 유혹되어

나를 따르고 추종하는가.

오직 너 자신만을 충실히 따르라-

그것이 나를 따르는 것이다 - 천천히, 천천히!

 

나는 이번 과제를 하면서 아마도 니체의 사유의 방식을 버겁게 따라갈 것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과제를 마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천히, 나는 나 자신만을 충실히따를 예정이다. 그리고 그가 쓴 문장이 어떤 뜻인지, 어떤 의미인지에 집착하기 보다 그의 문장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고,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내 생각의 방향은 어디로 가는지를 볼 것이다. 교실에서 시를 배우던 시절은 지났다. 정형화된 이해의 추구보다 어렵지만 내가 바라보는 니체에 집중하련다.

 

내가 나에게 한마디 하고 니체에 대해 소개하련다. “뇌(정신)야, 잘 견뎌라!”

 

2) 저자조사

니체.jpg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44년 10월 15에 태어났다. 며칠 전이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지 169년 째다. 내 나이 61이면 그가 태어난지 200년이 되겠다. 그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죽는다. 죽은지 112년 됐다. 죽은 후 그의 영향력은 100년이 넘은 셈이다. 앞으로 계속 될 것 같다.우린 169년 전 태어났고, 죽은지 100년이 넘은 그의 생각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한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가 된 해에 죽은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니체의 사상은 21세기에 맞는 생각일까, 아니면 앞으로 몇 백년 더 뒤에 맞는 생각이 될까? 궁금하다.

그의 아버지의 직업은 목사였다. 그리고 그가 5세때 죽는다. 그는 그 다음해에 동생의 죽음을 맞는다. 어린 시절 두 번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 일이 그에게 어떤 충격, 또는 사건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외적 사건으로는 두 번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는 어머니, 누이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는 배웠다. 6세에 초등학교에 들어 갔고, 14세에 슐포르타 학교에 입학했다. 20세에 슐포르타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했다. 그때 리츨 교수를 만났다. 21세에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옮겨갔다. 이때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하여 탐독했다. 23세에 나움부르크 포병 연대에 입대했다. 24세에 말을 타다가 떨어져 가슴을 다치고 염증을 일으켜 눕게 됐다. 그리고 제대하여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복학했다. 그리고 그 해 바그너를 만난다.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몇명 있는데,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는 20대에 만난 사람들이다.

25세가 돼었을 때 배움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으로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리츨 교수 추천으로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 조교수로서 초빙됐다. 그리고 무시험으로 박사학위도 받았다. 이미 이전의 삶에서도 천재의 냄새를 풍겼지만, 그가 남과 달랐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는 그 해 (1869년)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스위스인이 된다. 26세에 여러 가지 강연을 하면서 그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의 원형을 만든다. 그리고 28에 첫 책을 출판한다. 그 다음부터 그는 방대한 양의 책을 낸다. 그가 낸 책은 뒤에 따로 소개하겠다.

29세때부터 그는 계속 어딘가 몸이 좋지 못하고, 특히 심한 편두통을 앓았다. 31세에 눈병과 위장병이 악화됐다. 32세에는 강의를 중지하고, 33세가 되기 2달 전부터 바젤대학교의 모든 의무를 면제 받는다. 34세 때 건강상태가 악화된다. 병의 악화로 인해 35세 때 바젤 대학을 퇴직하고 3천 프랑의 연금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해 1년 동안 맹렬한 발작에 시달리게 된다. 발작 일수가 1백 18일이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 뒤 계속 읽고, 쓰고, 꿈꾸고, 살았다. 37세 때 실바푸라나 호숫가에서 영원회귀의 사상이 움트게 된다. 38세에 살로메를 만나는데, 그녀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다. 여름을 타우텐부르크에서 살로메와 함께 보내고 이번주에 우리가 읽는 『즐거운 지식』의 2부분이 빠진 모습을 탈고하고 출판한다. 그가 38살에 생각했던 것들을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다. 39세에 우리가 니체하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1부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해 말 제2부를 완성한다. 그리고 40세 에 3부를 완성한다. 그리고 41세에 4부를 완성하고 출판자가 나타나지 않아 자비로 출판한다. 그의 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3년에 걸쳐 집필한 책이다. 출판 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는다. (우리가 지난 주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바탕으로 신에 대해 읽어봤다.) 그리고 그 해 누이동생 엘리자베트는 푀르스터와 결혼했다. 누이동생이 니체의 생애에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그녀가 니체의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 및 파시즘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남편 푀르스터는 대표적인 국수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였는데, 니체의 누이동생은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했다. 그리고 그녀가 니체의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통제했고, 탐욕에 사로잡혀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모아 『권력에의 의지』(1901)등을 출판했다.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독재자 히틀러와 연결지어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니체는 결코 나치주의자가 아니었다.

니체는 이곳저곳 다니면서 집필에 전념했다. 43세 때 ‘포겔 프라이 공자의 노래’ 및 제 5권 ‘우리들 공포를 모르는 사람’을 덧붙인 『즐거운 지식』의 재판을 출판한다. 43세에 그가 사랑했던 살로메의 결혼 소식을 접하면서 우울증이 심각해진다. 45세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졸도했다. 1889년(45세) 1월 10일 바젤 정신병원에 인도됐다. 의사 비레의 진단은 ‘진행성 마비증’이었다. 1월 17일 어머니와 함께 예나로 가서, 예나 대학병원 정신과에 입원했다. 그리고 1월 말에 『우상의 황혼』을 출판했다. (아, 정신과에 입원해도, 책을 출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의 제2의 인격은 계속 쓰고 싶었나보다. 계속해서 그의 작품이 쏟아져 나온다.)

위에서 언급했는데 누이동생이 니체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발간하는데 관여하기 시작한 때가 니체가 47세 때이다. 그녀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4부의 발간을 저지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는 세상에 나온다. 니체가 48세때 가스트에 의해 전집이 기획되고 유고 정리 발표가 행해지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발간된 것이다. 니체는 50세에 광인이 되어 거의 외출을 못하게 됐다. 누이가 가스트에 의한 전집 발간 중지를 종용하고, 2월 ‘니체 문서보관서’를 나움부르크의 어머니 집에 차렸다. 니체는 51세에 마비증세를 자주 보였다. 니체가 53세 때 어머니가 죽고, 바이마르의 누이동생 집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55세를 보내고 56세에 죽는다.

니체는 독신이었다.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여자 살로메와 결혼을 하지 못하고, 혼자 살았다. 그래서 계속 어머니, 누이동생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가족과 계속 끝까지 함께 했던 것이다. 물론 혼자 돌아다니며 책을 읽고 쓰고 했지만, 마지막까지 가족의 울타리는 그를 따라다닌다.

저서로는『니체 최후의 고백』『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인간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피안』『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권력에의 의지』등이 있다.

17살 즈음 총기가 엿보이는 단정한 몸가짐의 니체.jpg 

17살 즈음 총기가 엿보이는 단정한 몸가짐의 니체

교수시절에 동료들과 함께한 니체(오른쪽).jpg 

교수시절에 동료들과 함께한 니체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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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집

플라토닉 삼각관계로 맺어진 루 살로메와 파울 레. 니체(왼쪽부터 1882).jpg 

 

플라토닉 삼각관계로 맺어진 루 살로메와 파울 레. 니체(왼쪽부터 1882)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제2판을 위한 머리말

p147 이 책은 얼음과 눈을 녹이는 봄바람의 언어로 쓰였음이 분명하다. 즉 신념과 긍지, 방황, 모순 그리고 변덕스러운 봄날씨가 이 책 속에 뒤섞여 있다. 겨울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음을 경고하는가 하면 동시에 겨울을 이겨내고 다가올, 아니 어쩌면 이미 와 있는 승리를 일깨워준다.

 

p150 나는 아직도 단어의 예외적인 의미에서 철학적인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행해진 모든 철학의 목표는 ‘진리’가 아닌 다른 것 - 건강, 미래, 성장, 힘, 생명- 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사상을 낳아야만 하고, 또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피, 심장, 활기, 쾌락, 정열, 고뇌, 양심, 운명, 숙업 등을 그 사상들에게 물려주어야만 한다.

오직 거대한 고통만이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이다.

 

p151 새로운 질문들과 함께 지금까지의 그 어떤 질문보다 더 깊고 엄밀하게, 거칠고 악랄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더 많은 질문들을 할 새로운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p153 ‘하느님이 어디에서나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것이 정말인가요?’ 하고 어린 소녀가 어머니한테 묻더니 말했다. ‘그건 점잖지 못하잖아요’ - 철학자들을 위한 경고이다! 사람들은 진줏빛 불확실함들과 수수께끼들 뒤에 몸을 숨긴 자연의 수줍음을 좀더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진리란 자신의 바닥을 보여주지 않을 만한 이유를 숨기고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

p155~169

1 초대

과거에 했던 내 모든 일들이

분발하여 제 능력껏 내게 새로운 영감을 주리라.

 

2 나의 행복

‘추구하는’일에 지치게 된 나는

‘발견하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역풍을 만난 이후로 나는

어떤 바람과도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

 

3 두려움 없이

네가 서 있는 곳을 깊이 파라!

그 밑에 샘이 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외치게 놔두어라.

‘아래로 가면 오직 지옥뿐이다!’ 라고 해도

 

7 나를 따르다 - 너 자신을 따르다

나의 방식과 말에 유혹되어

나를 따르고 나를 추종하는가.

오직 너 자신만을 충실히 따르라 -

그것이 나를 따르는 것이다 - 천천히, 천천히!

 

21 교만함을 경계함

너무 우쭐대지 말라! 그러다가

작음 침 한 방에 터져 버린다.

 

23 해석

다만 자신의 길을 가는 자가 있다면

그는 나의 모습도 밝은 빛 속으로 높여 주리라.

 

25 소망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한층 멀리 자리잡을 수 있다면

나도 내게 더 유익할 수 있으련만.

 

26 나의 냉혹함

나는 백 계단을 뛰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계단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33 고독한 자

추종하는 것도 앞장서는 것도 싫다.

복종, 아니! 지배, 그것도 아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남에게 공포를 느끼게 한다.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자만이 타인을 지도할 수 있다.

자신을 이끄는 것조차 나는 싫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숲이나 바다의 동물처럼

한동한 나를 잊는 것

외딴섬에서 행복한 망상에 잠겨 앉아 있는 것.

이윽고 멀리서부터 나를 불러들여

나 자신을 나 자신에게로 유혹하는 것.

 

50 분별을 잃다

그녀는 방금 현명함을 손에 넣었다 - 어디서 얻었는가?

조금 전 그녀에게 매혹되어 한 남자가 정신을 잃었다.

이 혼란 전에 그는 상당히 분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지는 아감의 손아귀 속으로 사라져 버린 건가?

아니, 아니다! 틀림없이 그녀에게로 간 것이다!

 

54 나의 독자에게

튼튼한 치아와 튼튼한 위장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이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내 책을 소화하면

나와도 사이가 좋아질 터!

 

제1부

p175 (1 생존의 목적을 일깨우는 교사)

인간은 점점 다른 모든 동물들과는 달리, 추가로 또 하나의 존재조건을 충족해야만 하는 일종의 공상적인 동물이 되어 버렸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삶에 대한 주기적인 신뢰, 다시 말해 삶에 내재하는 이성에 대한 믿음 없이는 번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수없이 되풀이하여 선언하게 될 것이다. ‘결코 비웃음을 허락하지 않을 어떤 것이 존재한다!’라고. 그리고 가장 신중한 박애주의자는 덧붙일 것이다. ‘웃음과 즐거운 지식뿐만 아니라, 모든 탁월한 비이성을 지닌 비극도 종족을 보존하는 수단이 되며, 필요한 것이다!’라고.

 

p176 (2 지적 양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것을 믿으며 그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것을.

이러한 부조화의 조화 상태, 현존재의 놀라운 불확실성과 애매함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 의문의 욕구와 즐거움으로 전율하지 않는다는 것, 질문하는 자를 미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노리개 삼아 실컷 웃고 떠든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경멸하는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런 감각을 나는 사람들에게서 찾고자 한다

 

p 177 (3 고귀함과 비속)

비속한 인간의 특징은 자신의 이익이 위협당하지 않을까 늘 주시한다는 점, 그리고 목적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자기 내부의 그 어떤 충동보다도 강하다는 점이다.

고귀한 인간의 취향은 예외적인 것으로 향한다. 보통 인기가 없고, 뭔가 달콤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p179 (4 종족 보존)

어느 시대에나 선인들이란 낡은 사상을 경작하여 열매를 맺는, 정신의 농부들이다. 그러나 토지는 언젠가 전부 경잘될테고, 따라서 밭을 뒤엎는 악의 쟁기가 또다시 필요해진다.

 

p181 (7 근면한 연구자들을 위한 몇 마디)

인간 충동이 여러 가지 도덕적 풍토에 따라 해냈거나 앞으로 해낼 여러 가지 성장에 관한 고찰, 그것만으로도 이미 근면한 사람들에게는 꽤 많은 일이 제공된다.

 

p183 (9 우리의 분출)

우리는 모두 비밀 정원이나 밭을 우리 안에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분출할 때를 기다리며 성장해가는 활화산과 같다. 다만 이 분출의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 조차도.

 

p187 (14 사랑이라 불리는 모든 것)

소유물은 소유됨으로써 대개 시시해진다.

그러나 소유의 충동이 가장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성 간의 사랑에서이다. 사랑하는 자는 상대를 무조건 독점하고자 한다. 그는 상대의 마음과 육체에 대한 절대권을 요구한ㄹ다. (중략) 사랑은 분명 에고이즘의 가장 솔직한 표현이다.

 

p189 (15 멀리서)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위대함은 선과 아름다움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더욱이 절대로 위로부터가 아니라 밑에서 바라볼 때만 감화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p194 (22 국왕의 하루 일정)

하루를 나를 위해 게획해서 어떻게든 보낼 작정으로 매일매일을 시작하는 게 나의 습관이다. 그래서 나는 지나치리만치 형식적으로 또 지나치리만치 귀한 신분인 체했던 것이다.

 

p197 (23 부패의 징후)

부패의 시대는 과실이 나무로부터 떨어지는 시대이다. 나는 지금 개인들, 즉 미래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 새롭게 정신적 식문운동과 국가적, 사회적 결합을 형성하는 창시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패라는 것은 한 민족의 가을에 대한 비방에 지나지 않는다.

 

p199 (26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삶, 그것은 죽음을 우리 몸으로부터 부단히 뗴어 놓는 과정이다. 삶,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약해지고 늙은 것들에 대하여 잔혹하고 인정사정없이 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 그것은 죽음에 이른것,초췌해진 것, 늙은 것에 대해 경건한 마음이 없다는 말 아닐까? 결국 부단히 살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모세는 말한다. ‘살인하지 말라!’

p202 (34 숨겨진 역사)

모든 위대한 인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 있다. 모든 역사는 그 덕분에 재차 저울 위에 올라간다. 그리하여 과거의 많은 비밀이, 그것이 숨어 있던 은신처에서 튕겨 나온다. 그의 태양 아래로. 앞으로 무엇이 또 역사가 될지 우리가 살필 길은 전혀 없다. 과거는 아마 본질상 계속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리라! 지금도 여전히 많은, 시간을 거슬러 작용하는 힘이 필요하다!

p203 (36 유언)

저 가공할 만한 인간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른바 현자 소크라테스에 못지않게 자기를 극복하고 똑같이 침묵을 터득한 인간이, 임종의 말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신중함을 내동댕이 친 사실을.

그러나 티베리우스 황제는 침묵을 지키며 죽었다. 모든 번뇌하는 이들 중 가장 심하게 번뇌했던 이 사람은 배우가 아니라 진실된 자였다!

 

p205 (40 고귀한 풍채의 결핍에 관하여)

산업문화는 그 현재 형태로 볼 때, 지금까지 있었던 것들 중 가장 비속한 생활양식이다.

 

p206 (42 일과 권태)

그런데 일의 기쁨 없이 노동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특이한 사람도 있다. 골라 잡기 좋아하고 쉽게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겐 일 그 자체가 최대의 수익이 아니라면 충분한 수익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렇게 독특한 인종에 속하는 이가 여러 부류의 예술가와 명상가이다.

 

그들은 권태보다도, 차라리 즐거움이 없는 일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들의’ 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권태가 필요하다. 사상가에게 또 모든 독창적인 정신에, 권태는 순조로운 항해나 즐거운 바람에 앞선 유쾌하지 못한 마음의 ‘잔잔한 바다’이다. 그들은 그것을 견디어 내야만 한다. 그런 것의 영향이 사라질 때를 계속 기다려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ㅍ여범한 인간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이다! 권태를 여러 방법으로 우리 몸에서 내쫓는 일은, 즐거움 없는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천박하다. 아시아인이 유럽인보다 우수한 까닭은 훨씬 오래, 훨씬 깊은 안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마취제조차도 유럽의 독약인 알코올의 혐오스러운 급격함과는 반대로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 참고 견딜 만하지 않은가.

 

p208 (44 믿어졌던 동기)

인류를 지금까지 실제로 행동하게 만든 여러 가지 동기를 아는 일은 확실히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각 동기에 대한 ‘신념’, 즉 인류가 지금까지 자기 행위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나 공상해 왔던 것이, 인식자에게는 한층 더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적인 행복과 비참을 결정짓는 것은, 이런저런 동기에 대하여 그들이 품은 신념이지 실제 동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후자, 즉 실제 동기는 모두 이차적 중요성밖에 없다.

 

p211 (49 관대함과 그것의 친척)

마음이 괴로운 사람의 태도에 돌연 나타나는 냉담함, 우울한 사람의 유머, 복수 또는 질투가 만족되거나 갑작스레 단념되었을 때의 관대함 등과 같은 역설적 현상은, 강대한 정신적 원심력을 갖고 있어 돌연한 포만감 또는 돌연한 구토감을 느끼는 인간에게서 일어난다.

 

p212 (50 고독화의 논거)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은 지극히 양심적인 인간의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감정에 대해서는 약해지는 법이다. 즉 ‘이러이러한 것은 네가 속한 사회의 미풍양속에 어긋난다’는 감정이다.

 

p213 (54 가상의 의식)

인식을 가지고 현존재의 모든 것에 직면할 때 나는 얼마나 경이와 신선함 또 전율과 야유를 느끼는지! 나는 그 옛날 인간과 동물의 현존재가, 아니, 태곳적 시대와 과거의 모든 것을 느기는 존재가 내 안에서 시를 짓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추론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돌연 ‘이런’ 꿈의 한복판에서 깨어난다.

 

(55 최후의 고귀함)

고귀함을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분명 희생은 아닐 것이다. 난폭한 육욕에 조종당한 인간도 희생을 치르기 때문이다. 열정에 따르는 행위는 더욱 아닐 것이다. 경멸할 만한 열정도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심지어 자신의 아집까지 버리는 행위도 분명히 아니다. 아마도 아집이 내포한 일관된 이기심은 정말로 고귀한 인간에게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

 

p214 (56 고뇌를 향한 욕망)

이런 고민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를 기쁘게 하고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보태려는 힘을 느낀다면, 그들은 또한 자기 특유의 내면적 고민을 창조하는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제2부

p221 (57 리얼리스트들에게)

냉철한 인간들아, 우리는 너희가 생각하듯이 서로 그렇게 무관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도취는 불가능하다는 너희의 신념이 존경할 만한 것이라면, 그와 마찬가지로 도취를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좋은 의지도 존경할 만한 것이다.

 

p225 (62 사랑)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정욕조차도 허락한다.

 

p232 (78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것)

사람들 저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체험하고, 무엇을 바라는가를 약간의 기쁨으로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그 눈과 귀를 처음으로 만들어준 이들은 예술가, 그것도 특히 극장 예술가였다.

 

p234 (80 예술과 자연)

아테네인은 아름다운 이야기 쪽에 귀 기울이기 위해 극장에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소포클레스가 노렸던 것은 아름다운 이야기 쪽이었다! 나의 이러한 이단적인 견해를 관대하게 용서해 달라!

 

p236 (83 번역)

어떤 시대가 소유하고 있는 역사적 감각의 정도는 그 시대가 어떻게 번역하고, 어떻게 과거의 시대와 서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는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얼마나 고의로 거리낌 없이, 순간이라 불리는 나비 날개의 가루를 털어 버렸던가!

 

p237 (84 시의 기원에 관하여)

즉 사람들이 리듬을 문체의 한가운데 끌어들였던 그 시대에 말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미신적인 이익성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운율이 있는 시구를 산문보다 더 잘 기억한다는 점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운율이 있는 소리가 더욱 멀리까지 들리고, 운율이 있는 기도 문구가 신의 귓가에 더 가깝게 올라간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은 잣니이 음악을 들을 때 경험하는 근원적 압도감에서 이익을 얻고자 했다. 리듬은 말하자면 하나의 강제력이다. 리듬은 그것에 굴복하고, 또 영합하도록 하는 누르기 어려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발걸음뿐만 아니라 영혼도, 계속 울리는 이 박자에 따른다. 추측건대 ㅅ니의 영혼 또한 그럴것이다!

 

p240 (86 극장에 관하여)

‘행동’이 아니라 차라리 ‘사무’의 연속인 삶을 사는 인간들이 무대 앞에 앉아, 그 삶이 사무를 초월한 이질적 존재를 구경하는 건가? ‘그것은 나쁘지 않다’라고 너희는 말한다. ‘그것ㅇ느 즐거움이다. 그것은 교양이다!’라고

스스로 충분히 비극과 희극을 체험하는 사람은 되도록 극장을 멀리하는 법이다.

 

p242 (87 예술가의 허영에 관하여)

그는 더 이상 뛸 수도 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걷지조차 못할 만큼 피로에 지친 영혼들이 어떻게 발을 질질 끌며 걷는지를 안다. 그는 숨겨진 고통, 위안 없는 이해, 고백 없는 작별의 조심스런 시선을 안다.

 

p243 (90 빛과 그림자)

책이나 기록 같은 것들은 사상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상가는 책 속에 빛을 모은다. 그의 마음속에 번쩍였던 인식의 광선으로부터 재빨리 훔쳐낸 빛을.

다른 사상가는 우리에게 그림자만을 줄 뿐이다. 낮 동안 그의 마음속에 쌓아 놓았던 것의 검은색이나 회색 잔상을 재현하는 것이다.

 

p243 (91 조심)

나는 플라톤 자신이 쓴 자서전도 전혀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루소의 자서전이나 단테의 <<신생>>도 마찬가지이다.

 

p244 (93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은 왜 쓰는가?)

A : 나는 잉크가 묻은 펜을 손에 들고 생각하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의자에 앉아 종이를 응시하면서, 열린 잉크병 앞에서 자신의 열정에 빠져 있는 부류의 인간은 더욱 아니다. 나는 쓰는 것이 개탄스럽고 수치스럽다. 쓴다는 것은 내게는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다. 비유해서 그것을 말하는 것조차 혐오스럽다.

B : 아니, 그렇다면 당신은 왜 쓰는가?

A : 그런데 나의 친구여. 솔직히 말한다면, 여태까지 나의 생각들을 털어버릴 다른 어떤 방식도 발견해 내지 못했다.

B : 왜 당신은 생각들을 털어버리고자 하는가?

A : 왜 그렇게 하려느냐고? 내가 그렇게 하려 한다고? 아아, 나는 어쩔 수 없기에.......

 

p247 (97 작가의 수다스러움에 관하여)

분노에서 나오는 수다스러움이 있다. 이것은 쇼펜하우어나 루터에게서 자주 접하게 된다. 칸트처럼 개념적 공식들의 풍부한 저장량 때문에 수다스럽게 되는 사람도 있다. 동일한 내용에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을 부여하는 기쁨으로 인한 수다스러움도 있다. 몽테뉴에게서 발견되는 수다스러움이다. 악의에 찬 인물들의 수다스러움도 있다. 현대의 저작을 읽는 자는 누구나 여기서 두 명의 작가를 떠올리리라. 좋은 말과 언어형식에 대한 쾌락으로부터 나오는 수다스러움, 이것은 괴테의 산문에서는 드문 것도 아니다. 감정의 소음과 혼란에서 깊은 쾌감을 느끼는 수다스러움도 있다. 이를테면 칼라일의 그것이다.

 

p249 (99 쇼펜하우어의 제자들)

‘삶에 대한 의지는 가장 미미한 존재물 속에 이르기까지,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게 완벽히 존재하고 있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면을 총괄하는 완벽함으로’.

우리의 인생 역시 우리 자신에게 정당한 것으로 남겨져야만 한다. 우리 역시 자신들로부터,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순결한 자기본위로 성장하여 꽃을 피워야만 한다! 이러한 인간을 문제로 삼을 때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전과 같이 지금도 나의 귀를 우린다.

‘열정을 스토아주의나 위선보다 낫다. 악에 대해서도 진솔한 것은 전통적인 도덕에 열중해 스스로를 잃는 것보다 아직은 낫다. 자유로운 인간은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자유한 인간은 자연에 대해 수치이며 천상 또는 지상의 위안을 공유하지 못한다. 결국 자유로워지고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누구에게나 자유는 기적적인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p258 (107 예술에 대한 우리의 궁극적인 감사)

진실을 억지로 밀어 붙인다면 그것은 우리를 구토와 자살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러한 결과를 피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우리의 정직에 댛아하는 반대세력이 있다. 바로 가상에 우호적인 예술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한데 모아 끝마치는 것을, 싲거 허구로 결말짓는 것을 무조건 거부할 수만은 없다.

 

우리는 잠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쉬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깔보며 예술적인 먼 곳으로부터 자기 자신에 대해 웃고 슬퍼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인식의 정열 속에 숨이 있는 주인공과 광대를 발견해야만 한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어리석음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우리의 지혜에서 계속적인 즐거움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본질적으로 엄숙하고 심각한 인간이며, 인간이기보다는 오히려 저울추이다. 따라서 확실히 우리에게 광대의 방울 달린 모자보다 더 쓸모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이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저 사물을 초월하는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화려하고 가볍고 춤추고 조롱하는, 어린애 같고 기쁨에 찬 예술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우리의 신경질적인 정직함 때문에 도덕 속으로 완전히 함락되거나, 또는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도덕적인 가혹한 요구들 때문에 고결한 괴물이나 허수아비가 되어 버리는 것은, 우리에게 병이 도진다는 의미이리라. 우리는 도덕을 초우러해야만 한다. 또한 당장이라도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을까 두려원하는 사람의 염려스러운 긴장을 느끼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초월하여 춤추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광대 없이는 못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술 없이 살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아직 얼마간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동안은, 아직 우리의 동지가 아니다!

 

제3부

p269 (109 경계하자!)

이웃 별의 순환운동같이 질서 정연한 것이 어디에게 있는 것으로 예상하지 말도록 하자.

우주는 자기보조본능ㅇ르 비롯하여 다른 어떤 본능도 없다. 우주는 어떠한 법칙도 준수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그곳에는 단지 필연성만 있을 뿐이다. 명령하는 자는 없다. 복종하는 자도 없다. 위반하는 자도 없다. 일단 그대가 목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연 또한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이라는 말은 목적의 세계와 비교할 때에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과 반대된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삶은 죽음의 한 형태, 그것도 매우 드문 한 형태이다.

세계가 영원히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자. 영속적인 실체는 없다. 물질이라는 것은 엘레아 학파의 신과 같은 오류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와 염려를 끝마치는 날은 언제인가? 이 모든 신의 그림자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을 멈출 날은 언제인가. 자연에 대한 비신격화를 완성할 날은 대체 언제인가? 언제 우리는 순수하고 새로이 발견되었으며 새로 구제된 자연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을 ‘자연화’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p270 (110 인식의 기원)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 지성은 오류만을 낳았을 뿐이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승되었으며 마침내 인간이라는 종의 기본적 상태로 굳어져 버린 그러한 잘못된 신조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즉, 영속하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 동등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 사물․물질․물체가 존재한다는 것, 사물은 그 보이는 바가 전부라는 것, 우리의 의욕에 자유롭다는 것, 나에게 선한 것은 그 자체로서 또한 선하다는 것 등이다.

 

p272 진리가 어디까지 체화를 견딜 수 있을까? 그것이 질문이자 실험이다.

 

p273 (111 논리적인 것의 기원)

오늘날 우리 뇌에서 이루어지는 논리적 사유와 추론의 흐름은, 그 자체가 저마다 매우 비논리적이고 불공정한 충동들의 과정과 투쟁에 적응한 것이다.

 

p274 (112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를 연속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지성인, 그것을 우리가 해 왔던 바와 같은 임의적 구분과 분할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지성인, 즉 사건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지성인이 있다면, 그는 원인이나 결과의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제약성을 부인할 것이다.

 

p275 (113 독에 대한 훈계)

예술적 에너지나 삶의 실용적 지혜가 과학적 사고와 결합한 상태, 즉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학자, 의사, 예술가, 입법가들이 고대의 무가치한 유물로 보일 만큼 고도로 유기적인 조직이 형성된 상태, 그런 상태에 우리가 도달하려면 또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할지!

 

p278 (120 영혼의 건강)

우리가 독특하고 개별적인 것이 머리를 다시 들도록 허락하면 할수록, ‘인간의 평등’이라는 도그마를 버리면 버릴수록, 질병의 정상 과정이니 정상적 식이요법이니 하는 ‘정상적’건강이란 개념은 의사들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영혼’의 건강이나 질병에 대해 숙고하고, 자기 영혼의 건강 속에서 저마다 특별한 미덕을 발견할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이 건강은 또 다른 사람한테서는 그 반대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p280 (124 무한의 수평선에서)

‘바다는 무한하다. 그리고 무한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아아, 자유를 느꼈던 불쌍한 새여! 지금은 무한이라는 새장의 벽에 부딪히고 있구나! 아아! 마치 대지가 더 많은 ‘자유’를 제공했던 것처럼 네가 대지에 대한 향수를 느낄 때, 더는 어떠한 ‘대지’도 없다.

 

p285 (129 신의 조건)

‘신은 현명한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루터는 말하였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신은 어리석은 인간 없이는 더더욱 존재할 수 없다’ - 우리의 훌륭한 루터는 이 점을 말하지 않았다!

 

(130 위험한 결심)

세상을 추하고 악한 것으로 보려는 그리스도교적 결심이, 세상을 추하고 악하게 만들고 있다.

 

p290 (144 종교전쟁)

종교전쟁이란 각 종파간의 정교히 다듬어진 논쟁들이 일반 사람들의 이성을 더욱 세련되게 만들 때 생겨난다. 이 경우에는 속된 대중도 나름대로 이론을 만들고 또 세세한 것들을 중요시하게 된다. 아니, 심지어 그들은 ‘영혼의 영원한 구원’이 여러 개념의 미세한 차이에 좌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p293 (151 종교 기원에 관하여)

사람들은 종교적 이념의 지배 아래 ‘다른(배후의, 아래의, 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관념에 길들여지며, 종교적 망상들이 파괴될 때마다 불안한 공허감과 결핍으로 고통을 겪는다. 이에 따라 이번에는 ‘다른 세계’가 또다시 성장의 기틀을 잡는다. 다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종교적인 것이 아닌 단순한 형이상학적 세계일 뿐이다. 어쨌든 태고시대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가정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은 어떤 충동이나 욕구가 아닌, 특정한 자연현상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며 지성의 곤경이다.

 

p294 (152 가장 커다란 변화)

모든 잘못은 오늘날과는 다른 형태로 인간 감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단순한 사회적 형벌이나 불명예보다도 신의 처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유혹자와 악마들을 믿었던 때 과연 어떤 즐거움이 있었을까, 악마가 그들 옆에서 안색을 살피고 있다고 생각할 때 생길 수 있는 인간 정열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의심이 가장 위험한 죄로서, 영원한 사랑에 대한 모독으로서, 선하고 고귀하고 순수하며 은혜로운 모든 것에 대한 불신으로서 느껴졌을 때, 과연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p296 (160 덕과의 교제)

인간은 덕과 교제하면서도 품위 없이 아첨을 한다.

 

(162 에고이즘)

에고이즘은 감정의 원근법이다. 가까운 것일수록 크고 중요해 보이며, 반대로 사물이 멀어짐에 따라, 그 크기나 중요성은 줄어든다.

 

p297 (169 공공의 적)

즉 인간은 자신의 미덕, 용감함, 쾌활함을 발휘하는 데 반드시 공공의 적이 필요하다.

 

(173 깊이 있는 것과 깊이 있게 보이는 것)

자신을 깊이 있게 알고 있는 사람은 명석함을 얻기 위해 힘쓴다. 대중에게 자신을 깊이 있게 보이려는 사람은 애매함을 얻으려 애쓴다. 대중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깊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물 속으로 들어가기를 꺼린다.

 

p299 (177 ‘교육제도’에 관하여)

독일에는 상류층 사람들을 위한 중요한 교육수단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상류층 사람들의 웃음이다. 독일에서는 이들은 웃지 않는다.

 

(179 사고)

사고는 우리 감각의 그림자이다. 사고는 감각보다 항상 더 애매하고 공허하며 단순하다.

 

p300 (182 고독 속에서)

홀로 사는 사람들은 크게 이야기하지 않으며, 또 글에서도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공허한 울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메아리의 요정이 들려주는 비판을. 게다가 고독 속에서는 모든 목소리가 이상하게 울린다.

 

p302 (192 우리 청각의 한계)

우리의 귀는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듣는다.

 

p304 (205 필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들 한다. 그러나 실제로 필요는 대개 발명의 결과일 뿐이다.

 

p305 (213 행복으로 가는 길)

어떤 현자가 어떤 바보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 바보는 가장 가까운 도시로 가는 길이라도 가르쳐 주듯 바로 대답하였다. ‘너 자신을 찬미하는 것, 그리고 번화가에서 사는 것이다.’ ‘기다려!’ 현자가 외쳤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구나. 자신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바보는 반격했다. ‘하지만 어떻게 끊임없이 경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찬미할 수 있겠는가?’

 

p308 (232 꿈꾸는 것)

꿈을 전혀 꾸지 말든가 아니면 재미있게 꿈을 꾸든가 해야 한다. 깨어 있을 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아예 깨지 말든가, 아니면 재미있게 깨어 있든가ㅣ.

 

p310 (246 수학)

수학의 정밀함과 엄격함을 되도록 모든 학문에 도입하자. 이 방법을 쓰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이 방법으로 우리 인간의 사물에 대한 관계를 확정 짓기 위해서이다. 수학은 단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지식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p311 (247 습관)

모든 습관은 우리의 손을 더욱 기민하게 하고, 우리의 지적 기민함을 더욱 무디게 한다.ㅣ

 

p312 (257 경험으로부터)

많은 인간들은 자기가 얼마나 부자인지를 모른다. 그들의 부유함이 도둑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p313 (261 독창성)

독창성이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의 눈앞에 있지만 아직 이름이 없으므로 불릴 수 없는 어떤 것을 보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 있는 평범한 것, 그것은 이름이 있어 비로소 사물로서 보이는 것이다- 독창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명명자들이기도 했다.

 

p314 (264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하는 일은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그저 항상 칭찬받거나 비난받을 뿐이다.

 

(267 위대한 목표를 세우면)

위대한 목표를 품은 사람은 자기 행위나 심판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의에 대해서도 우월하다.

 

(268 무엇이 사람을 영웅적으로 만드는가?)

최고의 고통과 최고의 희망을 향하여 동시에 나아가는 것이.

 

(270 너의 양심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272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사랑하는가?)

나의 희망을.

 

 

제4부 성 자누아리우스

p323 (276 새해에)

나는 사물의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그리하여 나는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도리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이것이 앞으로 나의 사랑이 될지어다! 나는 추한 것과 싸우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비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비난하는 자를 비난하는 일조차 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되리라. 요컨대 언젠가 나는 긍정만 표시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새해에 니체의 머리를 스치는 첫번째 생각이었다. 5부에서 운명에 대해 더 다뤘다고 하니 기대하고 읽어내려간다.

p325 (278 죽음에 대한 사상)

인간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들의 삶에 대한 생각을 백배로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기꺼이 어떤 일이라도 하고 싶다.

 

p326 (281 유종의 미)

일류 대가들의 특징은 일의 대소를 불문하고, 완벽한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데 있다. 멜로디의 결말이든 사상의 결말이든, 비극 또는 정치극의 제5막이든 간에 모두. 이류 대가들은 으레 결말에 가까이 갈 때마다 점점 불안해진다.

 

p327 (283 준비된 인간)

영웅주의를 인식하고 그 사상과 결과를 위해 전투를 벌일 그런 시대.

이를 위해서는 오늘날 용기를 지니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p328 (284 자기에 대한 믿음)

이 회의주의자를 납득시키고 설득하는 데에는 대개 천재적인 재능이 필요하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위대한 인간들이다.

 

p329 (287 맹목성의 기쁨)

방랑자는 그의 그림자에게 말했다. ‘나의 사상은 내가 서 있는 곳을 내게 보여 줘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려 줘서는 안 된다. 나는 미래에 관한 나의 무지를 사랑한다. 약속되어 있는 일을 미리 훔쳐보는 식으로 나의 파멸을 손짓해 부르고 싶지는 않다.’

 

p330~331 (290 하나의 일이 필요하다)

자신의 성격에 ‘양식(樣式)을 부여한다는 것’, 이것은 위대하고 아주 드문 예술이다

이와 반대로 약하고 자기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성격의 사람들은 양식의 구속력을 싫어한다. 그들은 이러한 고통스럽고 가혹한 억제가 주어진다면, 자신들이 천하게 되리라고 느낀다. 그들은 봉사하자마자 노예가 된다. 그래서 봉사하기를 꺼린다. 이러한 정신을 지닌 자들 - 그들도 일류의 정신 일 수 있다 - 은 자신과 주위 환경을 항상 자유로운 자연으로서- 야성적이고 제 멋대로이며 환상적이면서 무질서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 표현하거나 해석하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분명 하나의 일이 필요한 것이다. 즉 인간이 자신에게 만족하는 일이. 어떤 시와 예술을 통해서든 상관없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볼품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누구든지 계속 복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p333 (292 도덕의 설교자에게)

오늘날 우리는 도덕에 관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처럼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나는 나에게 신을 없애게 해 줄 것을 신에게 간청한다.’

 

p334 (293 우리의 공기)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하자. 지구에 불을 밝혀라, ‘지상의 빛’이어라! 그 빛이 되자. 그를 위해서 우리는 날개와 빠른 속도와 엄격함을 갖는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불과 같이 남성적이며 남에게 두려움을 주기까지 한다. 우리 곁에서 몸을 따뜻하게 할 뿐 스스로 몸을 밝히지 못하는 자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자!

 

p337 (297 모순될 수 있는 힘)

비평과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고급 문화의 징표라는 사실을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모순될 수 있는 힘, 즉 관습적이고 전통적이며 신성시된 것과 싸움으로써 얻어지는 부끄럼없는 양심이야말로, 위의 두 경우보다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 문화에서 참으로 위대하고 새롭고 놀라운 것이며, 해방된 정신이 걸어왔던 모든 한 걸음보다 더 나은 한 걸음이다. 누가 이 점을 알랴?

 

p337 (298 탄식)

나는 이 통찰을 길 위에서 낚아챘다. 그것이 날아가 버리지 못하도록 하려고 손에 닿자마자 서투른 말(언어)로 그것을 재빨리 붙잡아 두었다. 그러나 그 통찰은 무미건조한 말에 부딪치자 바싹 말라 죽은 채, 말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왜 내가 이 새를 잡았을 때 그렇게 행복한 느낌을 받았는지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p339~340 (301 관조자의 환상)

고귀한 인간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는 점, 게다가 생각하면서 보고 듣는다는 점에서 미천한 인간과 구별된다.

드높이 인간성의 정점을 향하여 뻗어 올라가는 자에게 세계는 더욱더 풍부한 것이 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실제로 끊임없이 창조해 나가는 것이 진실로 사고하는 자이며 감독자인 우리의 할 일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세계를, 인간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 우리가 지닌 능력만큼의 자부심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p340 (302 가장 행복한 인간의 위험)

소소한 수수께끼야말로 가장 행복한 인간들이 부딪치는 위험이다.

 

p341 (304 행동함으로써 내버려 둔다)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모든 도덕을 나는 싫어한다. ‘이것을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해라!’ 반면에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복해서 하도록 하고, 밤은 밤대로 그것을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그리고 그 일을 되도록 잘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나를 선동하는 도덕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가 내버려 두는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내버려 둔다.’ -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요 나의 신조, 플라시툼(원칙)이다.

 

p342 (306 스토아파와 에피쿠로스파)

에피쿠로스파는 자신의 극도로 민감한 지적 성질에 알맞는 상황과 인물, 사건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 밖의 것 - 실제로 대부분의 것 - 을 포기해 버린다. 그 모든 다른 것들은 그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많고 부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 자신에게 긴 실을 자아내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견한 사람은 누구든지 에피쿠로스의 길을 따르는 편이 좋다.

 

p344 (308 매일의 역사)

그대에게는 무엇이 매일의 역사인가? 그것을 이루고 있는 그대의 습관들을 돌아보라. 그대의 습관들은 수많은 사소한 비겁함과 게으름의 산물인가? 아니면 용기와 창의적인 이성의 산물인가? 이 둘은 매우 다르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그대에게 똑같이 칭찬을 보낼 수도 있고, 사실상 그대는 그 사람들에게 어느 경우에든 똑같이 이익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칭찬과 이익과 명성은 오로지 양심의 평안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그대들 ‘신장을 검사하려는’ 자, 양심의 사정을 훤히 아는 자에게는 불충분할 것이다

 

p345 (311 굴절된 빛)

인간이 늘 용감한 것은 아니다.

 

p346 (312 나의 개)

나는 내 고통에 ‘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다른 모든 개처럼 똑같이 영리하고 위안이 되고, 부끄럼을 모르며 주제넘게 나서 대지만 충직하다. 나는 그 개를 꾸짖을 수 있고, 기분이 나쁠 때면 그 개에게 풀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개와 하인 그리고 부인에게 그러듯이.

 

p348 (318 고통 속의 지혜)

쾌락과 마찬가지로 고통도 그 안에 많은 지혜를 지니고 있다. 고통도 쾌락처럼 종족 보존에 기여하는 커다란 요건들 중 하나이다.

 

p349 (319 우리 경험의 해석자로서)

‘나는 실제 무엇을 체험했는가? 그즈음 내 마음속과 내 주위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내 이성은 충분히 똑똑했는가? 내 의지는 감각의 모든 속임수에 대항하고, 환상적인 것에 저항할 때 용감하게 대처했는가?’ 그들 중 어떤 자도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았으며, 우리 친애하는 종교인 중 어느 누구도 오늘날까지조차 그러한 질문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이성에 반대도는 것들을 갈망하며, 그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너무 까다롭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적’과 ‘부활’을 체험하고 천사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을 갈망하는 다른 종류의 인간인 우리는, 자신의 체험을 과학 실험처럼 매일 매시간 엄밀히 조사하려고 한다. 우리는 스스로 실험이 되고 실험용 동물이 되고자 한다.

니체의 정수

 

p350 (323 운명이 주는 행복)

운명이 우리에게 가장 큰 경의를 표하는 경우는, 우리를 잠시 적의 편에 들어가서 싸우게 만들 때이다. 그로써 우리는 위대한 승리에 이르도록 이미 예정된 것이다.

 

(324 인생의 한가운데서)

인생은 인식하는 자의 하나의 실험이 될 수 있다. - 의무도 아닌, 숙명도 아닌, 기만도 아닌 실험일 수 있다 -는 이 위대한 사상, 이 우대한 ‘해방자’가 나를 갑자기 찾아 온 그날 이후로!

나에게 인식 그 자체는 영웅적 감정이 춤추고 뛰어노는 위험과 승리의 세계다. ‘삶은 인식의 수단이다’ - 이러한 원칙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며, 인간은 용감해질 뿐만 아니라 즐겁게 살고 즐겁게 웃기까지 할 수 있다! 무릇 전쟁과 승리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잘 웃고 잘 사는 방법을 알겠는가?

 

p351 (325 위대함에 속하는 것)

인간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하는 힘과 의지를 자기 내면에서 발견하지 않는다면, 누가 위대한 것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고통을 견디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우리가 큰 고통을 인간에게 가하고, 그의 고통스런 비명을 들으면서도 내심 곤혹이나 불안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위대함이요 위대함에 속하는 것이다.

 

(326 영혼의 의사와 고통)

우리는 우리의 고통, 특히 영혼의 고통에 단맛을 가미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용기와 숭고함에서, 또한 굴복과 체념이라는 고상한 착란 상태에서 도움을 얻는다. 피해가 지속되는 것은 고작 한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한 시간 뒤면 그것은 더 이상 피해가 아니다. 다소의 피해는 또한 우리에게 하늘로부터의 선물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새로운 힘, 아니면 적어도 힘에 대한 새로운 기회를!

 

p352 (327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대다수 사람들에게 지성은 움직이기 어렵고, 둔중하고 우울하고 삐걱거리는 기계이다. 그들은 이 기계를 움직여 잘 생각하려고 할 때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아! 그들에게 잘 생각하는 것이란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이 사랑스러운 동물인 인간은, 잘 생각할 때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진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웃음과 즐거움이 있는 곳에서 생각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이 진지한 동물들의 ‘즐거운 지식’에 대한 편견이다.

 

p353 (329 한가함과 여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는 무엇인가를 하라.’ 이 원칙이 모든 문화와 고상한 취미의 맨 마지막 숨을 끊어 버렸다.

이익을 좇는 삶이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기만하고 계략을 짜내고 남을 앞지르는 일에 언제나 정신을 기진맥진하도록 소모해 버릴 것을 가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려면 할 수 있는 어떤 성실을 위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거의 없다. 이러한 시간에 우리는 피로하여 쉬고 시퍼진다. 그리고 ‘멋대로 쉬고’ 싶을 뿐만 아니라, 길고 넓게 몸을 뻗쳐 벌러덩 드러눕고자 한다.

 

p354 (330 박수갈채)

사상가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박수갈채만 확신하다면, 갈채도 박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자기 자신의 박수갈채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기 찬성이나 온갖 종류의 칭찬 없이 견딜 수 있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결코 현자의 비방자는 아니었던 타키투스도 최고의 현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자들이라 할지라도 영광을 구하는 마음은 마지막에 가서야 버릴 것이다.’ 타키투스의 이 말은,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p355 (333 인식의 의미)

인식한다는 것은 ‘비웃지 말고, 탄식하지 말고, 욕하지 말고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스피노자는 그답게 단순하고 숭고하게 말했다.

 

p356 (334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1) 우리는 전체적으로 주제와 선율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2) 음악이 낯설어도 그것에 견뎌 내려는 노력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3) 우리가 음악에 길들여진 순간, 다시 말해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이 없으면 적마갛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세상으로부터 원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것만을 원하는, 겸손하고 진심으로 감동한 연인들이 될 때까지, 그 음악은 우리를 강제하며 박력있게 매료하기를 계속한다.

우리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도 그런 방법을 통해 배웠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을 배울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도 배워야만 한다.

 

p357~360 (335 물리학이여 영원하라!)

‘각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왜 너는 네 양심의 소리를 듣는가? 무엇이 네 판단이 진실되고 오류가 없다고 여길 권리를 너에게 주었는가? 이 신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양심도 존재하지 않는가? 너는 지적 양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가? 네가 말하는 ‘양심’의 배후에 있는 양심에 관해서는? ‘이런 까닭에 이것이 옳다’는 네 판단은 네 충동, 호감, 반감, 경험, 무경험 안에 그 과거의 경력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그것이 생겨났는가?’ 하고 너는 질문해야만 한다. 또 더 나아가 ‘나로 하여금 양심의 소리를 듣도록 강제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나 네가 이런저런 판단을 양심의 소리로 듣는 것 - 다시 말하면 네가 어떤 것을 올바르다고 느끼는 것 - 은, 네가 일찍이 자기 자신에 관해 깊이 성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네가 어린 시절부터 옳다고 들어 왔던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또는 네가 네 의무라고 부르는 것이 이제까지 네게 재산과 명예를 가져왔다는 사실에 근거할 것이다 - 그리고 너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게 너 자신의 ‘존재조건’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너의 도덕적 판단의 확고함은 인격적 부족함에 대한, 아니 비인격성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너의 ‘도덕적 힘’은 너 자신의 아집 속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 요컨대 만약 네가 더 면밀하게 생각하고 더 잘 관찰하고 더 많이 학습했다면, 너는 분명히 너의 이러한 ‘의무’와 ‘양심’을 두 번 다시 의무라든가 양심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어떻게 도덕적 판단들이 생겨났는가에 대한 통찰은, 너에게 이들 장중한 언어를 역겹게 느껴지도록 할 것이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여! 이제는 내게 정언적 명령 같은 이야기는 꺼내지 말게!

결국 아집이 자기 판단을 보편적 법칙인 듯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견해나 가치평가를 정화하는 일이라든가, 새롭고 고유한 가치의 목록을 만드는 일만 바라도록 하자.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이 되고자 한다. 새로운 인간, 다시는 없을 인간, 비교할 수 없는 인간, 자율적인 인간, 자기창조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

 

p360 (337 미래의 ‘인간성’)

어떤 먼 시대를 보는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볼 때, 나는 ‘역사적 감각’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고유한 미덕과 질병 이상으로 눈여겨볼 만한 어떤 것도 현대인에게서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대체로 역사에서 새롭고 낯선 무엇인가를 꽃피워 낼 것이다. 만일 이 씨앗이 자라도록 몇 세기 또는 그 이상 세월이 주어진다면, 이로부터 경이로운 향기를 지닌 경이로운 꽃이 피어 우리의 오랜 지구는 지금보다 더 살기 좋아질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는 바로 지금, 매우 강력한 미래적 감정의 사슬을 한 고리 한 고리씩 엮어가기 시작하고 있다.

 

p362 (338 고뇌에 대한 의지와 동정자들)

애초에 자신의 길을 지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끊임없는 어떤 외침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은 거의 전부가, 우리 자신의 문제는 제쳐 두고 도우러 달려갈 필요가 있는 것들뿐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나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버젓하고 칭찬할 만한 많은 방식, 그것도 진실하고 지극히 ‘도덕적’인 많은 방식이 있다는 것을!

 

p365~366 (341 최대의 무게)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수없이 계속 되풀이되기를 원하느냐?’ 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그대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과연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확증 말고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려면, 그대는 얼마만큼 그대 자신과 인생을 사랑해야 할 것이가!

 

제5부 우리 두려움 모르는 존재들

p375 (343 우리의 쾌활함<즐거운 지식>이 의미하는 것)

 

p376 (344 우리는 아직도 얼마나 경건한가)

학문 세계에서 확신은 아무런 시민권도 얻지 못한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즉 확신이 겸손하게도 하나의 가설, 실험을 위한 임시적 입장, 하나의 규제적 가정이라는 위치에까지 스스로를 낮추기로 결정할 때만, 그것에는 인식의 나라의 입국허가와 그 나라에서의 일정한 가치인정이 허용된다 .비록 확신은 항상 경찰의 감독, 의혹의 경찰 아래 놓인다는 제한이 있지만,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 살펴본다면, 이는 확신이 확신이기를 그만둘 때만 학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학문 정신의 훈련은 확신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또 한편 실제로 삶의 위대한 형식이 어디까지나 ‘다재다능한 임기응변’의 편에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는 더욱 그렇다.

 

p378 (345 문제로서의 도덕)

모든 위대한 문제들은 위대한 사랑을 요구한다.

 

p380 (346 우리의 의문부호)

우리는 자신을 단순히 진부하게 그저 무신론자, 불신자 또는 비도덕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그런 호칭이 알맞은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말기 단계에 이른 위의 세가지를 결합한 자이다.

 

p383 (347 독실한 신자들과 그들의 신앙에 대한 요구)

신앙은 의지가 결여된 곳에서는 항상 가장 심하게 기대되고 긴급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의지는 명령의 정열로서 자주성과 힘의 결정적 표징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것은 이윽고 힘을 발휘할 유일한 시점 또는 감정에 과도한 영양을 공급하므로, 모든 체계의 감각적, 지적 조직에 베풀어지는 일종의 최면술이다.

 

p387 (352 도덕은 어느 정도로 필수 불가결한가?)

우리 유럽인들에게서 의복이라고 불리는 이 가장을 없애 버리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도덕적 인간’이 옷을 입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도덕적인 통칙이나 의례라고 부르는 사고로 몸을 가리는 것, 의무, 도덕, 공공심, 명예, 극기 등의 여러 가지 개념들과 함께 선의에 기초하여 우리의 행동을 숨기는 것도, 의복을 입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p388 (353 종교의 기원에 관하여)

종교 창시자들이 본디 창안한 것은 첫 번째로 일정한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것, 즉 의지의 훈련으로서 작용함과 동시에 권태를 쫓아내는 일상생활의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렇게 세운 생활에 하나의 해석을 부여하는 것, 그 해석으로 생활에 최고의 후광이 비치게 하고 그 결과 바야흐로 그 생활을, 인간이 그것을 위해 싸우고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까지 포기하는 귀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p398 (357 ‘독일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문제)

우리는 본디 무엇이 그리스도교의 신을 무찔러 이겼던가를 알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도덕성 자체, 점점 엄격하게 이해되던 성실의 개념, 학문적 양심과 극도의 지적 결벅에까지 해석되고 승화되었던 그리스도교적 양심을 지닌 고해신부의 예민성 등이 있다. 자연을 신의 자비와 가호에 대한 증거로서 보는 것, 신적 이성을 중요시하여 역사를 윤리적 세계질서와 윤리적 궁극목적에 부단한 증명으로 해석하는 것, 자신의 체험을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석해 온 것처럼, 마치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 섭리이며 경고이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고안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해석하는 것, 이제 이러한 사고방식은 다 지나갔다 그것은 양심에 위배된다. 그것은 모든 섬세한 양심에 비추어 볼 때 추한 불성실로서, 허위와 페미니즘으로, 약함으로서, 비겁함으로서 생각된다. 무엇인가 때문에 우리가 선한 유럽인이며 유럽의 가장 오래된, 가장 용감한 자기극복의 계승자라면, 그것은 이러한 엄격함에 의해서야말로 그렇다.

 

p404 (361 배우 문제에 대하여)

양심에 흠이 없는 허위, 권력으로서 분출되는 이른바 ‘성격’을 한쪽으로 밀어제치고 그 위를 덮으며 때때로 그것을 없애버리는 위장의 희열, 가면과 역할과 가상에 대한 내적 욕구, 가까이 있는 근시안적 이익에 대한 봉사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는 온갖 종류의 적응능력 과잉 - 이 모든 것은 아마도 배우 그 자신에게만 특별한 것은 아닐까?

 

p406 (363 양성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어떤 선입견이 있는가)

나는 일부일처제의 선입견은 전면적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은 결코 승인할 수 없다. 이러한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쪽 성이 다른 성에 대하여 똑같은 감정을 ‘사랑’에 대한 똑같은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양성 사랑의 조건들 중 하나이다. 여성이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는 확실하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온전한 헌신(단순히 몸만 맡기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주저도 미련도 없고 오히려 특별한 제한이나 조건이 따르는 헌신에 대해 수치와 공포를 느끼는 헌신이다. 이처럼 조건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녀의 사랑은 믿음이다. 여자는 이외에 다른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남자는 한 여성을 사랑하는 순간 그녀에게 바로 이러한 사랑을 바라게 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은 여성적인 사랑의 전제로부터 가장 멀리 있게 된다. 만일 온전한 헌신이라는 바람을 조금이라도 스스로 품고 있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결국 남자가 아니다. 여자처럼 사랑하는 남자는 노예가 된다. 반면 여자처럼 살아하는 여자는 더욱더 온전한 여성이 된다.

남성의 사랑은 실로 소유하고자 하는 의지이지,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다. 그러나 소유하고자 하는 의지인 한 그것은 소유와 동시에 끝나 버린다.

그러나 실제로 이 ‘소유’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남성의 빈틈없고 의심 많은 강렬한 소유욕이야말로 그의 사랑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p414 (370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내가 처음에는 약간의 조악한 오해와 과대평가를 하기는 했을망정 어쨌든 희망에 가득 찬 인간으로서 이 근대 세계에 부딪쳐 왔다는 것을. 어떤 식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그랫는지 누가 알랴마는, 나는 19세기 철학적 염세주의가, 18세기의 흄, 칸트, 콩디야크 그리고 감각론자들의 시대를 특징지은 것보다 더욱더 고상한 사상의 힘, 대담한 용기, 승리로 가득 찬 삶의 충일함의 징후이리라 해석했다.

 

p417 (371 우리 이해하기 어려운 자들)

이것이 이미 내가 말했듯이 우리의 운명이나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해 자라고 있다. 비록 이것이 우리의 불행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번개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며 살기 때문이다.

 

p421 (375 우리는 왜 에피쿠로스파로 보이는가)

우리 근대인들은 궁극적 확신이라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의 불신은 모든 강한 신념, 모든 무조건적인 ‘긍정’과 ‘부정’에 포함되어 있는 양심의 기만과 마력을 붙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376 우리 인생의 완만한 시기)

모든 예술가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인간, 곧 모성적 인간은 다음과 같이 느낀다. 그들은 항상 자기 인생 각각의 장에서 목표 자체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그들은 늘 죽음을 다음과 같은 심정으로 조용하게 바라본다. ‘우리는 그럴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 이제 죽어도 좋다.’

 

p425 (378 ‘그리고 다시 맑아질 것이다’)

사람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리라 - 왜냐하면 우리는 깊으며,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밝아질 것이다.

 

(379 어릿광대의 한마디)

이 책의 지은이는 인간을 싫어하는 자가 아니다. 오늘날 인간을 증오하려면 꽤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섬세한 경멸은 우리의 취향이자 특권이며, 우리 근대인 중에서도 가장 근대적인 인간에게는 예술이요 미덕이리라.

 

p426 (381 이해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은 글을 쓸 때 오로지 이해되기를 원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또 확실히 이해되지 않을 것도 바라고 있다. 누군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해도 그것은 책에 대한 항의는 전혀 아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지은이의 의도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의 경우를 이야기하면, 나는 내 무지 때문이든 내 활발한 기질 때문이든 그대들에게 이해되는 것을 방해받길 바라지 않는다. 내 친구들이여, 덧붙이자면 아무리 그 활발함이 내게 빨리 문제에 달라붙어서 처리하도록 강요한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바라지 않는다. 나는 심각한 문제를 다룰 때에도 마치 냉수욕을 하는 것처럼 빨리 하기 때문이다.

하는 김에 묻겠는데, 어떤 사물은 단지 순간적으로 건드려졌거나 보였거나 비추어졌다는 이유로 더 이상 이해도 인식도 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돼야 하는가? 우리는 아무래도 그 위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가? 마치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뉴턴이 자신에 대해 말했듯이 ‘밤낮으로 생각에 골몰하면서?’ 적어도 드물게 부끄럼이 많고 성미가 까다로운 진리가 있어, 이것은 느닷없이 붙잡을 수밖에 없다 - 불시에 붙잡든지, 놓쳐 버리든지.......

 

p430 (383 에필로그)

그것이 네 맘에 드느냐, 내 참을성 없는 친구들이여! 좋다! 누가 너희에게 반대하겠는가? 내 피리는 이미 기다리고 있다. 내 목청 또한 그렇다. - 단지 그것은 조금 거친 목소리가 날지 모르지만 참아 달라! 사실 그 때문에도 우리는 산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너희가 듣는 것은 새롭다. 그리고 너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수를 오해한들 신경 쓸 이유가 있겠는가! 그것이 ‘가수의 저주’라는 것이다. 너희가 그의 음악이나 곡조를 잘 알아들으면 알아들은 만큼, 그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한층 잘 춤을 출 수 있다. 그대들은 그것을 원하는가?

 

<포겔프라이 왕자의 노래들>

새로운 바다로

저편으로 - 나는 가련다. 이제 믿을 것은

나 자신과 내 실력뿐.

눈앞에 열린 저 아득한 바다 끝으로

나는 내 배를 띄운다.

모든 것은 더욱더 새롭게 나를 비춘다.

시간도 공간도 잠으로 감싸 안은 정오-

오직 너의 눈동자만이 두렵게

나를 응시한다. 너, 끝없는 영원이여!

 

3. 내가 저자라면

니체의 『즐거운 지식』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5부 이외에 앞 부분에는 <머리말>과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가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포겔프라이 왕자들의 노래들>이 있다. 5부 안에는 383항의 조항이 있다. 한 단어 또는 질문에 대해 길게 답하기도 하고 한줄로 짧게 답하기도 한다. 내가 저자라면 어떤 질문 또는 주제에 대해 답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니체가 말한 『즐거운 지식』이란 무엇일까? 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즐거운 지식』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니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니체의 생각 또는 니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사실 안 것도 있다. 그렇지만 전부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 읽고, 북리뷰를 마친 이 시점에도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여러 가지에 대해 이야기 해서 일까? 그래도 작가가 가진 일관된 생각이 있을텐데 도무지 종잡기가 힘들다. 도덕적인 것을 부정하고, 신은 없으며, 예술가에 대해 찬미하고, 초인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사랑과 이해 죽음과 삶 등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런데 말하지 않을 것 같다. 니체는 말했으니 말하지 않았다.

내가 저자라면 중학생들에게 즐거운 지식이 될만한 것들을 정리하여 보여줄 수 있겠다. 질문하고 답하는 형식은 따라해볼 만 하다. 그리고 짧은 답이 책의 일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또한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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