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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9일 23시 55분 등록

서문

 

나는 산을 좋아한다. 정상을 정복하는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여정에 의미를 두고 간다. 마루금을 밟을때 심장이 있었음을 다시 알게 된다.

 

주중의 빨간 글씨. 공휴일에 찾은 도봉산은 한적했다. 역에서 내려 김밥, 족발, 겉절이가 진열되어 있는 길을 걸어 올라갔다. 매표소를 지나 우측으로 방향을 잡는다. 다락능선을 지나 포대능선을 향하는 길이다. 도시의 복닥거림을 피해 산에 와 보아도 주말에는 사람이 많다. 오늘같이 공휴일은 조금 나은 편이다.  V자 계곡으로 발을 옮겼다. 암벽사이로 박혀있는 철봉지지대를 잡고 내려가는 길은 아찔하다. 이제 오르는 길이다. 위를 바라본다. 바위와 검은 철봉지지대와 푸른 하늘이 보인다. 손으로 철봉을 잡고 발은 바위와 철봉의 꼭지점에 끼우고 다리에 힘을 주어본다. 한걸음 올라선다. 다시 한걸음을 위해 위를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기에도 꽤 멀찌감치 발 놓을 자리가 보인다. 오른발을 떼어 다음 자리로 이동해본다. 발이 닿지 않는다. 다시 제자리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시도해본다. 여전히 나의 발은 허공이다. 아래 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깍아 지른 바위 사이로 나무들이 간간히 보이고 서 멀리 아파트촌이 보일 뿐이다. 위를 보아도 하늘과 바위와 검은 철봉뿐이다. 주말에 줄을 지어 오르고 내리던 계곡에는 나와 산뿐이다. 난감하다.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갈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올라갈 수 없다면 내려가야 한다. 오르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치 앉는다. 이럴 때 짧은 다리를 원망해 보아야 무슨 소용인가.

 

허공에 덩그러니 있던 내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올려다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어르신이 웃고 계셨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앞서가셨던 분일 게다. 일행은 어디 있나요? 혼자 오셨어요? 아무래도 혼자 온 듯하여 앞서가다가 되돌아 오셨다고 했다. 내가 지나온 길은 선택이었다. 둘러가는 길이 있었음에도 굳이 V자 계곡으로 들어가서 난감한 상황을 만들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 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 , 혼자입니다 한적한 능선길을 함께 걸었다. 산 위의 길. 길중의 길이다. 나즈막한 나무들이 우리의 길을 안내한다. 구불구불 자연이 만들어낸 길은 언제나 좋다. 도시의 길들은 속도를 내며 달릴 수 있다. 산 위의 길은 한참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수고에 바람이 답을 한다. 흘린 땀을 조금씩 말려가며 한걸음 한걸음 흥이 돋는다. 못하는 노래가 절로 나온다.

 

산에서는 사람사이에 말이 필요 없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 이곳이다.

나는 오봉으로 해서 우이암으로 내려갈 겁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저도 오늘 같은 코스생각하고 왔습니다. 다음주에 있을 산행을 준비하러 왔거든요 다음주로 예정된 회사산행일정을 알려드렸다. 꽤 힘들겠는데요. 그러지 싶습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다. 한참을 지나 길이 참 좋습니다하신다. ..저도 이런 길이 좋아서 산에 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도 이런 길이 있지요 선생님은 언제가 이런 길 이었어요? 지금입니다

 

숨가쁘게 올라선 능선에서 땀을 식혀가며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인생에서 이런 길이 바로 현재라고 하는 그분의 말씀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공부가 따로 있겠는가. 이런 것이 공부지. 함께 내려오며 각자 싸온 점심을 하고 막걸리도 마셨다. 늘 혼자 산에 오게 되니까 잔 막걸리 밖에 마실 수가 없었노라고 하셨다. 중견기업 회장의 운전기사를 하고 있다고 하셨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회장의 휴일이 자신의 휴일이어서 주말에는 대부분 쉬질 못하고 이렇게 주중에만 시간이 난다고 하신다. 그분이 홀로 산에 오는 이유였다. 삶을 바라보는 어르신의 통찰에 깨달음을 얻은 날이었다.

 

20089월 나는 처음으로 이직을 했다. 이직이라고 하지만 동일업종 내에서의 이동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 남들보다 일찍 일터로 나온 덕분에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세상에 내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이직을 감행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나의 일터는 증권회사이다. 사람마다 증권회사에 대한 이미지는 다르다. 치열한 경쟁이 있는 곳이고 또 어쩌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곳이기고 하고, 시장상황이 좋지 않으면 심심챦게 자신의 목숨 줄을 내어 놓는 사고가 발생하는 곳. 실적이 인격을 말해주는 곳. 수많은 정보가 판을 치는 곳. 은퇴가 빠른 곳이기도 하고 하지 않아도 좋을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나의 일터다.

 

대한민국 고도성장기에 일터로 나왔다. 1982년 졸업을 며칠 남겨두고 시작한 일이다. 그로부터 31년이다. 같은 일을 삼십여년 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나 장인이 되어있어야 한다.

증권회사의 전문가라고 하면 돈을 잘 버는 일이겠지. 탁월한 상황대처능력, 그리고 수익. 이런 것을 전문가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현주소는 그렇지 못하다. 나 스스로가 전문가라고 말하기는 왠지 석연챦다. 왜 그럴까.

자칭 전문가가 제일 많은 업종에서 나는 30년을 무엇을 하며 지냈나. 잘못된 프레임에 갖혀있어서이다. 전문가라고 하는 프레임. 언제나 돈을 버는 사람. 세상에 없는 프레임이다.

 

이제 다른 안경을 써보기로 했다. 나는 전문가 맞다.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적어본다.

 

사람들은 어떤 심리상태로 투자를 선택하는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통찰.

세상일은 내 계획대로만 되어지지 않는다는 경험.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다른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

돈 앞에 인간은 얼마나 가변적인가에 대한 관찰기록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실체.

망하는 투자를 감행하는 사람들의 기질.

 

투자의 세계에 함께하는 행운과 불행. 그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들. 선택 후에 부담할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사람. 천칭저울에 작은 돌맹이를 하나 얹을 수 있는 사람. 테크닉의 함정에 빠져있는 전문가라는 용어를 다시 정의해본다. 단어에 메이지 말자.

 

2009년 나는 커다란 실패를 맛보았다. 나의 실패가 아닌 우리의 실패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리스크이다. 그것은 삶의 사다리가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죽음이 가까이 와 있던 시기이다. 삶의 정점에서 무너져 내리는 아픔. 그 바닥을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아픔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밥벌이에서 자유로운 삶을 생각하는 순간 만난 것 들에 대한 기록이다. 오늘의 선택이 남은 생을 가르고 갱생의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전문가를 꿈꾸는 이들의 이정표이며 삶의 정오에 선 사람의 꿈에 대한 기록이다.

 

대단한 투자노하우는 이 책에 없다.

실패의 아픔이 있다. 상실후의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소소한 성공이 있을 뿐이다.

이웃의 삶과 사랑이 있고 투자의 작은 힌트가 있을 뿐이다.

 

작은 성공과 힌트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보았으면 한다. 일상이 바쁘다는 것은 성공했다기보다 위기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투자의 세계는 빠름보다 느림의 미학이 있는 곳이다.

 

분주하지 않음을 좋아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투자가이드라고 생각하며 글을 적는다.

 

 

꼭지글

 

바닥에 대하여

 

열흘 전 토요일 B를 만났다. B의 고객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두 사람 다 시간을 내기 어렵다하여 토요일에 B의 고객이 다니는 치과근처 송파쯤에서 약속을 잡았다. 정오에 치과 예약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11 만나기로 했다. 서류를 챙기고 옷도 단정하게 입었다. 주말이지만 첫 대면하는 자리이니 당연하다. 두 시간 전에 출발하였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전철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콩다방이었다.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출발한 이유는 여유 있게 도착하여 책을 볼 요량이었다. 허나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고객을 만나는 일이니 시간을 더 여유 있게 잡았다. 스마트폰으로 전철역을 검색하니 소요시간이 나온다. 40여분이면 도착한다는 정보를 믿고 출발했는데, 환승역에서 차를 한대 놓치고 나니 주말이라 배차간격이 생각보다 만만하지는 않다. 이른 출발이 아니었으면 늦을뻔한 시간에 도착했다. 약속시간 10분전. B는 정시에서 이삼 분 늦게 도착했고 고객은 그보다 십 여분 늦게 도착했다. 자그마한 키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여자분이었다. 명함을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깨끗한 피부 스마트해 보이는 고객이다. 대기업 마케팅담당부장. 임원물망에 오르는 분이라 하니 자세한 상담이 가능하지 싶다. 사전에 B를 통해 오늘 제안할 상품에 대한 정보는 모두 건네놓은 상태이다. 해당회사의 신용평가자료, 현금흐름표, 유가증권발행신고서 등. 내가 아는 B도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 충분한 설명을 한 후에 나를 소개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B는 재무설계회사에 다니는 팀장이고 그의 고객을 오늘 내게 소개시켜주는 자리이다. 상품설명을 하고 바로 서류작성을 했다.  제안했던 채권에 대한 마무리상담을 하고 고객은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B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향후 영업에 관한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점심을 함께하고 B는 고객상담이 있다며 회사로 들어갔고 나는 전철로 집에 왔다. 오래만에 주말 일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계좌를 만들어서 고객에게 자금을 송금 받고 매수하기로 한 채권을 샀다. 그리고 다음날, 화요일이다. 10시20. 뉴스가 올라온다. G건설사 부도위기. 이 뉴스를 필두로 관련회사들의 주가가 내리기 시작한다. 17시19 G건설과 W홀딩스 법정관리신청. 두 회사는 어제 내가 고객에게 매수해준 회사와 무관하지 않은 회사이다. 지주회사와 자회사관계이다. 말 그대로 엄마회사와 자녀회사란 의미이다.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토요일 처음 만난 고객생각이 났다. 아차 싶다. 순식간에 머릿속에는 파노라마가 지나간다.

 

 기존의 내 고객이 아니다. 첫 인연이다. 퇴근길에 전철역에 앉아서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확인된 사항이 많지 않지만 일단은 고객의 마음이 어떠할지는 가늠이 가는지라 전화부터 했다. 직접 적인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주회사의 법정관리는 자회사에게 좋은 뉴스는 아니다. 향후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영향권에 들어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금융환경은 신용이 좋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극명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신용이 좋은 사람은 대출이 쉽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대출자체가 어렵다.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은 흘러오지 않는다. 금융기관의 매커니즘은 아이러니하다. 필요한 곳에 자금조달을 위해 만들어진 금융기관이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우리가 매수한 회사의 재무상태를 좀더 자세히 안내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자세한 브리핑을 하기로 했다. 전날 내가 매수한 채권의 발행회사가 법정관리 신청한 회사는 아니지만 같은 그룹에 속해있는 회사의 채권이었다. W그룹은 우량회사하나를 매각해놓은 상태였다. 금요일이면 자금이 들어오기로 되어있었다. 해당그룹의 현금흐름까지 확인하고 매수한 채권이었는데 갑자기 법정관리라니….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리저리 확인을 해보려는데 확인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 정도이다. 회사 내 관련부서는 비상사태라 회의 중으로 전화연락이 되질 않는다. 인터넷에 공시자료를 보고 나는 상황이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다음날 출근하여 추가로 상황 파악하여 고객에게 알려드리고 구체적인 대책은 논의하면 되겠다 싶었다.

 

다음날 아침(수요일) 04. 일어나서 휴대폰을 보니 메시지가 하나 들어와있다. 수신시각이 11시43. B의 고객으로부터 온 메시지다. 시간을 보니 걱정이 되어 잠을 못 잤을 것 같다. 왠만하면 12 다 되어가는 시각에 메시지를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이 이른 시각이지만 0430에 답장을 넣었다. 혹시고객은 잠을 전혀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답장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럴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계30위권에 있는 회사이다. 지주회사와 자회사의 법정관리. 의견이 분분하다. 말도 많다. 금융당국은 그룹회장일가의 도덕적 해이에 대하여 엄중 대처한다는 입장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이다. 하기야 외양간을 고치는 적기는 소를 잃었을 때라 하니 지금이라도 엄중대처 하는 것이 맞다.

 

주식과 달리 채권에는 신용등급이란 것이 있다. 투자자나 금융기관 종사자는 해당회사의 신용평가 자료를 참고하여 재무상태를 파악한다. 기업에 대한 정보를 세세하게 알기 어려운 상태에서, 정상적인 투자활동으로 생기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금융당국에서 또는 채권단에서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 아직은 미지수이다. 일련의 조치와는 별개로 나와 고객 그리고 B. 세 사람의 관계는 며칠 전과는 다르게 사뭇 이상해졌다.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일이 생기고 나면 고객은 늘 이야기한다. 정보의 부재를 탓한다. “정말 몰랐느냐?” 가 질문의 요지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이지만 나로서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고객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얼마나 황당하겠는가….불과 이삼 일 간격이다.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채권투자, 처음으로 시작한 투자가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그리고 B의 입장도 생각해본다. 본인의 판단으로 내게 요청한 일이기는 하지만 B도 아쉬움이 클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생기는 채권을 제안한 것일까 하는 아쉬움 말이다. 내 입장은 이렇다.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다. 회사의 신용등급과 업황 그리고 재무상태 모두 고려하였고 정상적인 현금흐름이 예정되어 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행위이다. 나름 틈새시장을 고려하여 선택한 채권이었다. 일명BW(신주인수권부사채)이다. 열심히 공부하여 선택한 투자방법이고 회사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고객들은 이미 몇 달 전에 해당채권을 투자해놓은 상태였다. 이미 BW투자의 경험이 있는 고객들은 내 판단을 믿는다. 그리고 B의 고객처럼 늦은 밤에 메시지를 하지 않는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똑 같은 설명을 했는데도 누구는 편안할 수 있고 누구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관계인 듯하다. B의 고객은 첫 거래이다. 기존에 동일상품의 거래경험도 없다. 이런 경우 본인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찾게 되고, 정보에 대한 판단능력 또한 극단적으로 흐를 확률이 크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한다. 채권투자에서 최악의 상황은 파산이다. 누구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이번 주에 B의 고객은 그날 함께 매수한 다른 채권도 팔기를 원할 것이다. 첫 거래에서 너무나 강력한 예방주사를 맞았다. 아마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나도 참고 견뎌보자고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분과 나의 인연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끊어진 셈이다. 바닥부터 찍었다. 바닥의 딛고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연의 끈이 끊어지는 것이겠지. B와 나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상호보완 가능한 일을 하고 있으니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겠으나 일을 함께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다. 내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남는 아쉬움이 아니다. 좋은 투자상품을 접할 기회를 아예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마음고생 할 고객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바닥을 찍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디가 바닥인지 몰라서이기도 하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닥인줄만 알아도 다음은 희망이니 괜챦다. 바닥을 가본 사람도 모르고 딛고, 일어서본 사람도 모른다. 다만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나의 일터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누구나 바닥을 찍고 싶어한다. 아니다. 바닥을 잡고 싶어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사고파는 행위를 할 때는 제일 싸게 사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다. 그렇다보니당연히 바닥을 잡고 싶어한다. 누구보다도 싸게 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지나고 보니 그곳이 바닥이었네…’ 당시에는 바닥인지 아무도 모른다. 우연챦게 바닥을 잡는 행운이 있을 수 있지만 99.99%그렇지 못하다.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닥을 잡는 일, 바닥을 딛는 일. 그것은 언제나 리스크와 비례한다. 그곳이 바닥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칼날을 잡을 확률을 무릅쓰고 잡는 것이다. 바닥…. 오늘이 고객과 나의 바닥이기를 바란다.

 

다행히 며칠이 지나는 사이 고객은 조금 안정을 찾았다. 문제가 생긴 채권과 함께 매수했던 다른 채권을 팔아달라는 주문을 해 왔다. 매도의사를 확인한 후 하루만에 매수할 고객을 섭외했다. 다행이다. 매수자를 구해놓았으니 매매결정만 하라고 연락을 취했더니 고객은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아마도 짐작컨데 바로 매수자를 구해줄지 몰랐던 것 같다.

 

투자의 환경은 늘 그렇다. 상황이 안 좋아질 때는 가속도가 붙는다. 사람사이에서도 한번 깨진 신뢰는 회복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상황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을 함에도 사람들은 머리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는 못한다. 현실로 다가왔을 때 비로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 그러리 섣불리 자신을 잘 안다고 말하지 말라. 소크라테스의 말이 괜히 명언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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