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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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어찌 살아야 하는가
생은 과정이다. 그 눈물 겨움을 참을 수 없겠지마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인간이 무한히 살고 죽어도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삶을 무한소급하여 그 시작을 알려 해도 그것은 미지다. 그러니 우열이 없다. 좋고 나쁨이 없다. 잘하고 못함이 없다. 우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元亨利貞(주역에서 원형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원은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의 혼돈의 시간, 형은 천지창조로부터 성장 단계까지의 시간, 리는 결실과 수확의 시간, 정은 왕성하던 것이 소멸하는 쇠퇴의 시간) 그 과정의 삶이므로 완성이나 달성 같은 언어는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의 언어다. 과정의 언어는 이와 같은 말을 쓰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안개 같이 답답한 말이 과정을 사는 인간의 삶에 가장 어울리는 선의의 단어다.
내 삶이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니! 인간의 삶이 결코 완성 되어 질 수 없다라는 것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씀으로 '내가 사춘기 때 생각하기를 60살까지 산다면 별 여한이 있겠는가 했는데 벌써 칠십을 바라본다' 하시며 찰랑거리는 소주잔 털어 넣을 실 때 삶이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슬픔이 더하였다. 그 사춘기의 사내가 자신의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아버지, 우리가 살고 죽은 다음 무엇이 기다릴까요? 왜 우리는 살고 죽어야만 할까요?' 물어본다면 부자가 서로를 부여 잡고 2박 3일을 슬퍼하여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딱히 해 줄 말이 없지 않겠는가. 열린 문틈으로 고양이 새끼가 지나가는 시간에 불과한 인간의 삶을 3천 년, 시공으로 확장시켜 펼쳐놓은 주역이라는 책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 때문에, 들이치는 댓바람에 허무하게 쓸려갈 수 없지 않겠는가 되묻는다. 인간은 태어났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과정이다. 슬프지만 슬퍼 만은 할 수 없다. 결과가 어찌 되든 과정의 역할은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는 것이 제 운명임을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주역은 제 운명에 맞버티라 한다.
육십네 개로 나누어진 인간 몸부림에 대한 준엄한 가르침은 그 마지막을 未濟(미제)로 마친다.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다. 강을 건너지 못하고 삶을 완성하지 못하고 아직 이루지 못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 끝을 맺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워 진다 한다. 이 땅의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미제자의 삶이므로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진가를 찾으라 한다. 해답을 찾으려 읽어 내린 책은 삶을 다시 더 깊은 미궁으로 빠뜨렸다. 어찌 살아야 하는가. 해를 거듭할수록 이 질문은 태산 같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주역이라는 텍스트가 그리도 탐스러울 수가 없다. 막힌 길에 대한 주옥 같은 답이 아니라 과정의 삶을 사는 인간들에게 던지는 비수 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과정을 사는 자들에게는 동지다. 주역의 어조는 무엇 무엇 하면 흉하고 무엇 무엇 하면 길하다는 식으로 일관한다. 예를 들면 ' 翰音(한음) 登于天(등우천) 貞(정) 凶(흉)' (날지 못하는 한음이 하늘에 오르니 끝이 흉하다는 말, 中孚編(중부편)) 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를 의문문으로 끝을 맺어보고 질문으로 치환할 때 갑자기 명쾌하게 비추던 태양은 일순간 먹구름이 되어 사방을 암흑으로 내몬다. 이를테면 ‘날지 못하는 닭, 오리는 진정 날 수 없는가?’ 하는 식이다. 제발 나에게는 묻지 말았으면 하는 묵직한 질문들이 돌직구가 되어 돌아와 박힌다. 책 읽기의 괴로움을 제대로 맛보고 싶은 자, 주역을 읽으라. 나는 주역에게 KO 당했다. 아마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다. 질문들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받았고 질문 하나 하나는 대부분 평생을 투자해도 풀지 못할 숙제들이다. 텍스트의 존재를 모르고 넘어갔더라면 삶을 사는데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 좋다. 그러나 고민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찌 살아야 하는가. 1년 전, 건방지게도 나는, 이리 살아야 한다며 거들먹거리며 혀를 놀린 적이 있다. 천둥벌거숭이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못하고 딸의 이름에 새긴 발문은 그 이후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훗날 제 이름을 이리 지어낸 아비의 아둔함과 그 뜻을 알고 난 뒤, 제 아비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보고는 가지게 될 아비 된 자의 자격 문제가 도마에 오를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주역의 益編(익편)에 소개된 '惠我德’(혜아덕)과 뜻을 같이 하는 그 발문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 삶의 방향이 되어 버렸다.
'듣는다는 사태는 자의적 행위가 될 수 없다. 세상을 둘러싼 소리, 음성, 말 또는 듣기 싫은 소음이라도 그것들이 우리의 주위에서 발생하는 순간, 들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두 귀가 열려있는 한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잘 들어 알아차리고 나아가 깨달음에 이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내’가 남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하고 싶은 얘기와 말들로 넘쳐난다. ‘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세상이며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름하여 ‘世聆’, ‘세상을 들어 인간을 깨우친다’라는 거창한 의미 속에는 타자성(他者性)이라는 함의가 녹아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실존시켜 주는 것은 자신이 아닌 타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스스로 입신하여 양명하는 일을 자신의 업적으로 여기는 일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와 나를 둘러싼 존재들의 가치를 폄하시키는, 깨달음의 부재인 것이다. 깨달음의 시작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그 왜소한 우주 속에서 외치는 작은 이야기들을 잘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너는 타인이 불러주는 너의 이름의 뜻을 깊이 새겨 ‘生’을 행복과 감사로 살아가라.'
주역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기 검열의 메뉴얼이다. 자신을 믿은 뒤 행하고 돌아보되 그때 돌아봄을 엄정히 하라 이른다. 일년이 지나 다시 돌아본 命名(명명)의 발문에 빗댄 나 자신은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여전히 없어 보인다. 나와 같이 앞뒤 없는 인간에게는 그래서 꾸준한 반성이 필요하다. 키우며 배운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게다. 다시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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