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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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가 왔습니다. 초록 물감으로 직접 봉투에 그려놓은 산 그림은 비에 젖어 번진 채 편지함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잉크로 단정히 쓴 편지는 다행히 많이 젖지 않았습니다. 추사의 시 한편이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쓰여 있었습니다. 시가 청량하여 나대로 외어 머리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초가을의 서늘한 기운 (初凉)
뾰죽한 봉우리에 새파란 기운 감돌고
호젓한 물은 비단결인양 흘러가누나
멀고 먼 하늘 길에 외로운 꿈 하나 지쳐나가고
울멍줄멍한 땅에 이슬 내리자
뭇 벌레가 울어 대누나
글씨는 그것을 쓴 사람의 마음을 전해줍니다. 받을 사람을 생각하고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써 보낸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젖먹이 아이를 돌보느라 새벽까지 잠을 설치고 이른 아침엔 맞벌이 직장인으로 출근하여 새로운 일 하나를 배우고 되돌아오면 하루가 다 지나갑니다. 다행히 그녀는 직장을 생업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그녀가 하는 일을 무슨 전기에 관한 것인데 요즘은 변압기 차단기의 배전 판넬에 대하여 배우는 데 즐겁다 합니다. 그래서 인지 그녀는 마이클 패러데이에 대한 책을 읽고 전기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 합니다.
그녀는 타고난 시인인데 자신의 시 속에 삶의 현장이 빠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삶이 빠진 시는 ‘정신적 낭비를 누리는 자들의 여유로운 놀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전기관련 일이니 그 일을 배우고 그 일에 대하여 시를 쓰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그녀는 손에서 시를 놓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낳고는 집과 직장 모두에서 더 바빠지고 잠을 설치는 일이 더 많아 졌지만 시 또한 더 많이 쓰게 된 듯합니다. 그녀야 말로 시와 생활이 섞여 시처럼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결혼할 때 내가 주례를 서 주었습니다. 매일 한 줄이라도 읽고 매일 한 줄이라도 쓰며 살게 되길 바랐는데 아프면 아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시와 함께 시처럼 살고 있는 그녀를 보니 가을이 갑자기 깊어집니다. 마음속에서 어떤 힘이 솟구쳐 오르며 이렇게 외쳐댑니다.
“하루를 시처럼 소설처럼 살아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새로운 일을 배워라. 알지 못한 일을 알게 된 감탄 속에서 하루를 보내라. 누군가에게 그 사람의 기쁨이 되라. 그리고 한 줄의 깨달음을 세상에 더하라” 하루야 말로 온 힘을 다해 싸워야하는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군요. 여기서 지면 삶이 설 곳을 잃고 마는 교두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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