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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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산
전공 책보다 산 바람이 좋았다. 무거운 배낭으로 온 팔이 반짝반짝 저려와도, 풀풀 날리는 마른 먼지를 흠뻑 마셔도 산길 걷는 일은 나에게 뻑가는 즐거움이었다. 스무 살, 달뜬 마음을 밤새 술로 적시어도 채워지지 않는 젊음의 공허함은 항상 찌꺼기처럼 남았었다. 세상의 근심을 떨쳐보려 무시로 공권력에 달려 들어 보고, 떼로 몰려다니며 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슴 한 켠, 양지바른 곳은 여전히 텅 빈 채였다. 누군가 젊음을 성스러운 질병이라 한 말은 옳다. 젊음이 이리 공허한 줄 알았다면 일찌감치 물렸으련만, 정신이 따라가지 못한 육체의 성숙은 허망했다. 니체는 젊음을 그리도 사랑했단다. 신을 죽일 수 있는 초인적 인간을 갈망한 사람이라 그러 했는가. 에헤라, 스물 살, 내 육(肉)은 푸르렀지만 그 푸른 육체의 의미를 알아채기엔 나는, 어렸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찾았던 산악회는 충격이었다. 여느 동아리에 만연하던 화사함과 웃음이 없었다. 칙칙했다. 그곳은 선배들의 알싸한 환영에 찬 왁자지껄한 캠퍼스 분위기와 동떨어진 심각한 아웃사이더들의 공간이었다. 무엇인가가 오래 묵은 듯한, 매캐하기도 구수한 것 같기도 한 냄새에다 사방 벽에 걸린 날 선 도끼는 거짓말을 보태어 푸줏간의 그것과 진배없다. 흥미롭다. 무뚝뚝한 선배의 성의 없는 인사는 그곳에 들어섬과 동시에 일었던 흥미를 단숨에 날려버린다. 뻘쭘하다. 그들이 쏘아대는 매서운 눈빛은 한눈에 나를 읽어내리라는 의지가 들어 차 있었다. 한 동안 나를 뚫어져라 보던 이들은 이내 제 하던 일을 다시 한다. ‘신입생을 정적 속에 앉혀 놓는 저 강심장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쭈뼛쭈뼛 눈알만 굴리며 상황 파악에 정신 없다. 도끼가 번쩍거리는 벽에 치렁치렁 걸려 있는 저 로프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쇠떵어리들 조차 나를 쏘아 본다. 순간, 손은 모아지고, 벽면을 360도로 둘러본 뒤 주눅들어 시선을 숙인다. 떨어지던 시선의 두 배의 속도로 다시 들어올려 사진 하나를 보았다. 모두가 나를 노려보는 중에 유일하게 따뜻한 눈길을 건네고 있었다. 천장 벽면 구석에 자욱한 먼지를 품고 수천 년간 주인을 기다려 온 듯한 사진 한 장, 그와 나 사이에 튀었던 스파크를 아직 기억한다. 자세히 보았다.
만년설의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던 두 사람이 잠시 멈춰 서서 얘기를 주고 받는 모습. 급박해 보이지만 사진 속, 그들은 손을 슬며시 맞잡으려 하는 순간에 멈추어 있다. 박제된 그 상황을 내가 어찌하진 못했다. 그들은 말을 할 수 없었고 사진은 나에게 말을 했다. 그들의 거친 호흡이 귀청에 어른거렸다. 설산의 그들이 내 앞의 벽에 걸린 채 나와 3D로 마주했다. ‘산은 저렇게 희구나. 사람들은 저런 극한에서 서로에게 얘기를 한다. 그렇게 같이 하는구나.’ 말이 없는 그들의 생리가 지금 내 앞에서 인사한 저들의 시큰둥함의 진의였다. 사지(死地)를 함께 건너온 무뚝뚝한 산재이들에겐 그리 긴 말이 필요하지 않을 테고, 산을 내려와서는 서로가 그리워 찾고, 볼 수 없다면 수화기 너머의 표정을 헤아리는 일로 사무침을 대신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나를 모멸 차게 쏘아본 건 자신과 생명을 나누고 그 사무침을 담보할 가슴을 지닌 놈인지를 판단하는 일이었던 거다.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산이 떨려왔다. 이후 우연히 길가 서점에 들러 생각 없이 넘기는 잡지에 흰 산이라도 있을라치면 사정없이 뛰는 가슴에 스스로도 놀라곤 했다. 내 젊음은 내 등에 착 달라붙은 배낭이 되었다.
‘멀리서 보면 새로 빨아 다려놓은 욧잇 같은’ 화강암을 오를 때, 내 몸이 기뻐했다. 수직의 빙벽 한가운데 제대로 먹힌 피켈의 샤프트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아이젠이 얼음 짝에 먹혀들 때, 나는 환장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한 달도 좋고 두 달도 좋아라 이 땅의 마루금 누비는 일에 빠졌다. 불안한 밤이 오면 배낭을 둘러맸다. 침낭 위로 쏟아지는 별과 나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았다. 별빛에 가슴이 떨렸고 바위 봉우리 끝에 희미한 텐트 불빛을 마음속 깊이 흠향했다. 산이 온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여름 능선 길, 굵은 비 맞으며 선배는 후배의 체온을 확인하고 한 겨울 한파를 뜨거운 라면 국물과 힘찬 산가 한 자락으로 날려 버렸다. 추운 겨울, 선배는 자신의 침낭을 후배에게 덮여 주었고 후배는 밤사이 얼어붙은 선배를 위해 밥을 지었다. 힘들 때,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었고 즐거울 때, 서로를 기꺼워했다. 산은 이제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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