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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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에게 제대로 쏘였습니다. 분봉하는 벌을 받아 앉히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가지러 다른 벌통 앞을 지나다가 이마의 한 가운데를 쏘였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워서 처음엔 벌이 그냥 이마를 물어보는 줄만 알았습니다. 일하기 위해 쏜살같이 날아가던 벌이 자신의 길을 가로막은 어떤 물체를 탐색하기 위해 다리로 더듬어보고 물어뜯어보는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얼음이 되었습니다. 오직 녀석이 조용히 날아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위협하던 벌도 가만히 있으면 날아가니까요.
그렇게 얼음이 된지 한 20여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녀석이 심하게 날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날아가려는데 날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꿀벌은 침을 쏘면 자신의 삶도 마감해야 합니다. 일벌의 예리한 침이 누군가의 살에 박힐 때 침에 연결된 내장도 함께 떨어져 나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벌의 날개 운동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벌은 없어졌지만 나의 이마에는 녀석의 몸 일부가 달린 침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침 벌 공부를 위해 찾아오신 손님에게 부탁하여 침을 뺀 뒤, 분봉 중인 벌을 마저 받아 앉혔습니다. 귀 밑까지 화끈거리고 호흡도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을 마치고 손님과 차를 마신 뒤 거울을 보았더니 낯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울 속에는 흠씬 얻어맞고 내려온 복싱 선수가 있었습니다. 정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얼른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내가 우는 모습의 사진을 꼭 찍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문득 흠씬 얻어맞은 것처럼 부어 오른 이 모습도 간직해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곧 어느 대학에 강의를 하러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정신을 챙기자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읍내 병원 응급실에 가서 엉덩이 주사 2대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부어 오른 얼굴이 가라앉기까지는 며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부은 얼굴로 강의를 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고 민망했습니다. 하지만 강의가 끝나고 받은 피드백에서 나의 부어 오른 얼굴 때문에 청중들이 아주 진한 리얼리티를 느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숲의 일원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40대 중반 한 남자의 살아있는 삶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에게 분봉하는 벌을 받는 일은 무척 신나는 일입니다. 쉼 없이 집을 짓고 꿀과 꽃가루를 수집하여 새끼 벌을 키우며 강군이 되어가는 벌통을 살피는 일도 신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저 하나의 통 속에 들어 있는 벌들의 삶을 통해 늦가을 두어 되의 꿀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벌쟁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오늘은 벌의 침에 쏘여 제대로 넘어져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다시 벌통 앞에 서는 것을 한 동안 주저했을 텐데 나는 오히려 벌들을 더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벌이 어떤 상황일 때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접근을 불허하는 지를 더 깊이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넘어져보는 경험이야 말로 삶의 리얼리티입니다. 리얼리티가 있는 삶이라야 진정 살아 있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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