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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남긴 시(詩)와 그림, 그리고 댓글
■ 호수 위에 쓴 시(詩)
2012년 3월 24일, 스승과의 첫 만남. 실제 작가의 모습을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에서 그와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앞서 걸어가는 스승의 뒷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에는 박노해의 ‘굽이 돌아가는 길’을 떠올리고 있었다. 좋아하는 시를 외워오라는 그의 첫 과제였다. 빠른 길을 쫓아 살아온 나는 그 날 이후로 스승의 발자국을 따라 삶을 에돌아갔다. 그의 어깨 너머에 산과 나무가 보였고, 그 위에는 푸른 하늘, 굽은 길 아래는 커다란 호수가 나머지 여백을 채워주었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꽃들은 봄 햇살을 맞으며 웃고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호수를 내려다 보았다. 걸으면서 보았던 산이며 나무며 하늘이 호수 위에 모두 그려졌다. 조금 전까지 홀로 서 있었는데, 호수는 그 모두를 담아내고 있었다. 나무는 산과 손을 잡고, 산은 하늘과 어깨 동무를 하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물결이 일렁이자, 흔들흔들 춤까지 추었다. 뮤즈의 숨결이었을까? 그 순간, 내 안의 어휘들은 호수 위로 내려 앉아 시(詩)를 섰다. 나는 알았다. 처음부터 고요하고, 깊고,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호수가 바로 스승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의 슬픔을 아픔을 고통까지도 다 감싸 안으며 자신의 넉넉한 마음 위로 시(詩)를 쓰게 했다.
■ 두 아들을 위한 스승의 그림
지금 다시 보아도 두 아이에게 꼭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스승은 두 아이의 눈을 보며 그 아이의 영혼을 알아본 것이다. 깊고 그윽한 스승의 눈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하루에도 수 없이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오가는 나의 모습을 뒤돌아보며, 그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살아가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 나의 서른 아홉을 행복과 기적으로 채워준 스승의 댓글
처음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주말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해외 여행을 감행했고, 여행지에서 밤 늦도록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터키로 떠나는 금요일 저녁, 그 주 과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였다. 제임스 조이스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내려 가서였을까? 여행 준비를 위한 의식을 내려 놓은 탓에 출국 수속을 할 때, 집에 여권을 두고 온 것을 알았다. 비행기 출발시간을 두 시간 남겨둔 상황이었다. 가족은 처갓집으로 내려가고 수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때 떠오른 것은 대학교 때 여자친구. 그녀가 마침 집 옆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퀵서비스를 불렀고 나는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다. 그 상황에서도 다음 주 과제인 단테 <신곡>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덕분에 비행기가 5분 늦게 출발했지만, 무사히 터키여행을 다녀왔다. 그 내용을 칼럼으로 올리자, 스승은 댓글을 달았다.
“너는 자석이구나. 무수한 재미부스러기들이 마구 달라 붙는구나. ㅋㅋㅋ”
“변경연에 와서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행운까지 달라 붙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두 번째 기억에 남은 댓글은 클레임처리를 위해 고객을 방문했던 내용이었다. 그녀는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다. 보이지 않는 순간의 움직임까지 잡아내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호메로스를 떠올렸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의 영웅 신화를 썼던 그도 역시 앞을 보지 못했다. 나는 칼럼을 쓰는 동안, 잠시 눈을 감고 호메로스에게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호메로스는 나에게 말했다. "너의 이야기를 나에게 끝까지 들려주면, 너에게 너의 영웅 신화를 선물로 주겠다"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간다. 그것은 어쩌면 비극일지도 모른다. 여행이 내면을 향하면 눈은 소용없다. 오이디푸스를 봐라. 제 눈을 뽑아냄으로 비극의 끝에 이르고, 그의 발은 땅에 닿는다. 비로소 내가 보인다. 그리하여 그의 남루한 육신은 콜로노스에서 성화한다. 그는 구원 받은 것이다.”
빛이라는 믿음은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릴 때 확인된다고 스승은 말했다. 스스로 밝음을 더 할 수 있다는 긍정은 매일의 삶을 축복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그 빛으로 나를 발견하고 변화시켜 간다면 새로운 삶을 얻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승인 남긴 댓글은 나의 첫 책을 위한 지침이었다. 수없이 방황하며 글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스승은 따뜻한 격려와 함께 다시 한 번 부지깽이가 되어 주었다.
“쉬운 교훈과 위로를 빼고 삶의 다양한 시선을 주어 네 책이 삶에 기여하게 해라. ‘꾸베씨의 행복 여행’도 좋은 모델이다. 구성을 면밀히 연구하여 너에 맞게 변용하도록 해라. 조각을 잇지 말고, 전체가 하나의 책으로 통하게 해라. 분리된 단편의 구도가 아니라 이어진 장편의 유기적 구도를 갖게 해봐라.”
연구원 2년차. 이제는 넓은 바다로 향해 닻을 올려야 한다. 비록 스승은 떠나고 없지만, 그의 영혼은 내 안에 다시 부활하여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그와 함께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것이며, 그를 향한 그리움은 더욱 더 나를 성장시켜 나갈 것이다.
봄 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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