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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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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1일 10시 33분 등록

  보름스 성에서 군터의 융숭한 환대를 받던 며칠이 지나자 군터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하겐이라고 불리는 그의 신하와 단 둘이었다. 부탁이 있다며, 군터가 먼저 술을 따랐다. 군터는 자신의 왕국을 키우고 싶어했다. 라인 강변을 따라 보름스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북해바다까지 이어지는 땅을 차지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바다 너머 쇠뿔 같은 투구와 도끼로 무장한 바이킹들은 잔인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들과 맞붙어 차마 전쟁을 벌일 힘이 부족하였다. 그렇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이킹들의 왕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여왕이었다. 만약 군터가 바이킹들의 여왕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부르군트는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왕국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여왕 브륀힐트의 까다로운 결혼조건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겨루어 자기보다 강한 자만이 자신과 결혼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미 수많은 영웅들이 미모와 힘을 가진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바다건너 북쪽 땅으로 갔지만 아직 살아 돌아온 남자는 없었다. 패배의 대가는 목숨이었다. 솔직히 말해 군터는 그녀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군터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만약 지크프리트가 자신이 브륀힐트와 결혼할 수 있게 돕는다면, 자신의 여동생인 크림힐트와 결혼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덧붙였다. 아... 크림힐트.. 지크프리트도 그녀를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 미모를 가진 공주를 지크프리트가 모를 리 없었다. 크림힐트 공주와 결혼할 수 있다면... 지크프리트의 마음은 벌써 라인 강을 한달음에 흘러가 북해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렸다. 하지만 어찌 도와야 할 것인가... 이번에는 하겐이 말을 이었다. 그는 군터의 욕심만큼이나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하겐은 지크프리트가 파프너로부터 빼앗은 투구를 이용하라고 했다. 투구를 쓴 자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으므로 지크프리트가 군터를 대신해서 브륀힐트 여왕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지크프리트는 하겐이 어찌해서 용이 감춰둔 보물들에 대해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하겐의 생각은 무척 괜찮은 방법이었고, 지금은 지크프리트에게도 크림힐트와 결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잔을 채운 후 군터가 건배를 청했다. 그들은 비밀의 맹세를 하곤 술을 마셨다. 군터의 잔에는 욕망이, 지크프리트의 잔에는 용기가 그리고 하겐의 잔에는 꾀가 가득 찬 잔들이 비워졌다.

 

  며칠 후 라인 강을 따라 브륀힐트에게 가는 군터의 청혼사절단 배가 떴다. 돛이 가득히 라인 강의 바람을 안고 부풀어 올랐다. 배가 바람에 순항을 했고, 날씨도 더없이 좋았다. 덕분에 브륀힐트 여왕이 지배하는 북쪽 땅에 일찍 닿을 수 있었다. 브륀힐트는 강했다. 이미 파프너를 물리친 지크프리트였지만 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양날 도끼는 군터의 아니 지크프리트의 방패를 찍었고, 지크프리트의 칼은 그녀의 허점을 쉽게 노리지 못했다. 그녀의 공격은 정확했고, 방어는 매우 유연했다. 승부는 쉽게 갈리지 않았다. 대신 종종 빗나간 도끼가 얼음바닥에 찍힐 때마다 땅이 울렸고, 초점을 잃은 칼이 허공에 바람을 갈랐다. 그 소리는 멀리 숙소에 남아 모습을 감춘 채 마음을 졸이던 군터의 귀에도 들렸다. 북쪽 나라의 어둠은 일찍 찾아왔다. 이미 모두의 방패는 산산조각이 난 채로 내동댕이쳐졌고, 두 사람 모두 지칠대로 지쳤다. 어스름하게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끼와 칼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내는 소리는 더 커졌고,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고, 치고받는 거리가 더 좁혀졌다. 어쩔 때는 얼굴이 닿을 정도로 맞붙기도 했고, 상대방이 내뱉은 숨결이 고스란히 마셔질 정도로 엉기기도 했다. 마침내 조금 먼저 지친 브륀힐트가 패배를 인정했다. 그녀는 자기를 이긴 자를 자신의 남자로 받아 들였다. 신하들과 함께 군터 아니 지크프리트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인사를 했다. 이제 두 나라는 하나의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군터는 서둘러 결혼식을 준비했다. 브륀힐트 여왕을 싣고 보름스로 돌아오는 뱃길은 더뎠다. 돛은 이전보다 더 부풀어 올랐지만, 라인 강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귀향길은 더디 걸렸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사람들은 군터 왕과 브륀힐트 여왕 그리고 지크프리트와 크림힐트 공주의 결혼을 축하하는 잔치를 즐겼고, 더없이 커진 부르군트 왕국의 번영을 기뻐했다. 악사들이 신나는 음악을 연주했고, 술과 고기가 상마다 가득 쌓였다. 곡예 같은 춤들이 선보였고, 사람들이 어울려 서로 흥겨웠다. 그렇지만 브륀힐트는 여전히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특히 크림힐트의 손가락에 끼여진 반지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분명 지크프리트가 크림힐트에게 결혼선물로 준 반지였지만, 그 반지를 얼마 전 자신과 맞붙어 싸웠던 군터의 손가락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브륀힐트로서는 그 반지가 어찌해서 군터에게서 지크프리트에게로 건네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첫날밤을 맞으면서 브륀힐트의 의심은 더해졌다. 자신의 침대로 찾아 온 군터는 자신을 이겼던 남자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뿌리치는 자신을 제압하지도 못했고, 힘껏 끌어안지도 못했다. 반지의 행방에 대해서도 군터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육감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고, 의심이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군터가 지크프리트를 찾은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지난 밤 그는 결국 브륀힐트를 품지 못했고, 그것은 한 남자로서 그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미 비밀의 서약을 나눈 사이이며, 브륀힐트를 차지하기 위해 술수를 공모한 처지로서 군터는 숨길 것이 없었다. 그는 지난 밤 브륀힐트와 있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며 한 번만 더 지크프리트가 그를 위해 해주어야 할 일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크프리트는 이번에도 거절하지 못했다. 이미 시작된 일이었고, 이제 와서 거절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다시 밤이 찾아왔고, 내키지 않아 망설이던 그는 결국 다시 투구를 썼다. 침실에 있던 브륀힐트의 반응은 군터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지난 밤처럼 군터를 홀대하였고, 자신을 제압하지 못한 것을 조롱이라도 하듯 비웃었다. 그렇지만 지크프리트는 이미 그녀를 한번 겪어봤다. 지난 번 도끼와 칼을 들고 대적할 때 그녀의 힘을 느껴봤고, 그녀의 강함과 부드러움을 알고 있었다. 브륀힐트는 또 다시 혼란스러웠다. 오늘 밤 군터는 어제의 군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확신에 가깝도록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인정한 남자였다. 잠시의 혼란스러움이 걷히자 그녀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반응하였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을 맞이하듯 그녀의 몸과 마음이 기쁘게 열렸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환희가 그녀의 빈곳으로 밀려들었다. 오랜 긴장이 눈이 녹듯이 풀렸고, 고단한 잠이 몰려왔다.

 

  브륀힐트는 꿈을 꾸었다. 그것이 그녀가 평생 살아왔던 북쪽나라의 긴 겨울이 끝나고, 짧은 봄이었다. 땅을 뒤덮고 있던 얼음들이 녹아 사라졌고, 눈보라 대신 가느다란 단비가 내렸다. 얼음 밑에 감춰졌던 대지는 푸른 생명을 품어내기 시작했다. 차갑고 두터운 얼음 밑에 저렇게 놀라운 생명들이 숨겨져 있었다니.. 꿈속이었지만 브륀힐트는 놀라고 감탄하였다. 지평선 저쪽 끝에서 순록들이 다시 찾아왔다. 순록의 무리는 천천히 움직였고, 대지가 품어내는 초록의 향연에 잔뜩 취해있었다. 암컷들은 살이 올랐고, 커다란 뿔을 가진 수컷들이 다툼을 벌였다. 단단한 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도끼가 방패를 찍을 때 나는 소리처럼 익숙했고, 단단했다. 싸움에 지친 수컷들의 코에서 김이 품어져 나왔다. 그녀의 몸이 더워질 정도로 숨은 거칠었다. 두 마리 순록의 뿔들이 맞붙어 비틀렸다. 그 사이로 커다란 눈망울이 보였다. 무언가를 차지하기 위한 본능으로 가득 찬 눈은 차라리 애절하게 비쳤다. 빠져들 것만 같았다. 애욕으로 한껏 달아오른 수컷들의 몸이 또 다시 대지 위에서 뒤엉켰고, 뿔이 시작한 머리 위에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선연하게 붉었다. 핏방울은 아직 채 녹지 흰 대지 위에 꽃처럼 피었다. 잔인한 아름다움이었다.

 

  라인 강변의 언덕위에 세워진 보름스의 성에 산머리를 넘어온 아침 햇살이 비쳐들기 시작했다. 라인 강에서 피어 오른 물안개에 싸여 강과 성의 경계가 불분명했고, 성의 풍경은 이제 막 고단한 잠을 깨려는 것처럼 보였다. 지크프리트는 지난 밤 있었던 일을 차마 군터에게 말할 수 없었다. 크림힐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투구가 가진 마법의 힘을 빌었지만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또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자신을 용서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점점 더 답답해졌다. 무엇인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늪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과 두려운 것은 보름스에 오래 머물수록 그런 일들을 더 많이 더 자주 해야 할 것이었다. 어제 밤 이후로 이제 군터를 브륀힐트를 그리고 크림힐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도 새로운 걱정거리였다. 어쩌면 떠나야 할 때가 된 지도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지만 어찌했든 크림힐트를 데리고 보름스를 떠나야만 했다. 라인강을 따라 가다보면 어딘가에 자신과 크림힐트를 받아 줄 땅은 분명 있을 터였다.

 

  군터의 반응은 의외였다. 떠나겠다는 자신을 붙잡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하겐으로 하여금 배편을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크림힐트와 자신이 머물 새로운 영지도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 왕의 사냥터에서 같이 사냥을 즐기자고 제안했다. 라인 강을 끼고 자라는 숲은 풍요로웠다. 숲의 어디에서든 크고 작은 동물들이 살았고, 특히 멧돼지는 전사들이 즐겨 쫓는 짐승이었다. 싸움터에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해야 하는 사내들에게 사냥은 놀이이기 전에 훈련이기도 했다. 사냥감을 쫓고, 죽은 짐승을 들쳐 매고 나타나 서로의 힘을 자랑하며, 잡은 고기를 구워 술을 마시며 노는 일. 왜 사내들이 그런 놀이를 즐기는지 지크프리트는 궁금했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일들이었다. 사내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죽음에 익숙해졌고, 서로 친해졌다. 하겐이 모든 것을 알아서 준비했다. 사냥을 나갈 곳과 사냥에 필요한 것들 그리고 함께 데리고 갈 사람들까지도. 그는 늘 꼼꼼했고, 그가 하는 일에는 빈틈이 없었다.

 

  숲은 들어갈수록 어두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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