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경(旦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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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네 편지를 읽으며 화가 났다. 그래도 한 번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해 이 편지를 쓴다. 행간에 숨어있는 나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놓치지 말고 함께 읽어주면 좋겠구나.” <구본형의 마지막편지> 13p
2010년을 여는 첫 달, 눈이 많이 내린 정월에 스승은 ‘네게 주는 마지막 충고’라면서 내게 편지를 주셨다. 스승이 갑작스럽게 이 세상과 작별하는 바람에 그 편지는 정말로 스승이 내게 주는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편지의 요지는 이렇다.
“아이도 충고를 싫어하는데, 하물며 어른에게랴. 어른에게 충고하는 것이 바보짓인 것을 알지만 마지막으로 너에게 바보 짓을 한번만 하기로 했다. 너는 성공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삶의 모든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하면 말릴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에만 집중해라. 네 안에 있는 무수한 아마추어들에 맞서라. 너는 지금 잡다하게 너를 낭비하고 있다. 작가로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신은 네게 특별한 역할을 맡겼으니 그 일에 집중해라. 재미로 도망가지 말고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글을 써라. 오래 해서 그 일로 먹고 살고 즐길 수 있는 프로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구본형의 마지막편지> 20,21 P
당시 나는 스승과 공저를 하다 중단하고 다른 일에 빠져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책을 낼 수 있는 둘도 없는 좋은 기회였기에 하던 일들을 잠시 멈추고, 책 쓰기를 위해 두 달을 빼놓았었다. 스승의 표현대로라면 골키퍼만 있는 골대 앞에서 골만 차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 일생을 두고 질기게 나를 따라온 미루기 패턴에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언제나 구멍을 파면 와르르 모래로 순식간에 차버리는 해변의 모래사장 같았다. 한 가지를 진중하게 붙잡으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일들로 내 일정표는 가득 찼다. 노력은 했지만 책을 쓰기 위해 따로 떼어놓았던 두 달도 결국 분주한 일들에 쓸려 내 손아귀를 벗어나버리고 말았다. 내게 남은 건 스승을 실망시켜드렸다는 자책과 자기혐오, 그리고 이전보다 더 커진 조바심뿐이었다.
스승의 질타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편지를 받은 후부터 스승이 어려워졌다. 스승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도둑이 제발 저린 심정으로 스승 가까이에 가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게 되었다. 얼마 전에 내게 보냈던 편지가 스승의 유고집 <구본형의 마지막편지>에 실려 출간되었다. 요즘 나는 틈만 나면 그 편지를 읽는다. 스승의 분노 속에 숨겨진 크나 큰 사랑이 이제는 직진하는 태양처럼 굽힘 없이 읽힌다. 나는 날마다 그 사랑으로 내 자신을 치유하며 지난 몇 년 동안 책 한 권 내지 못하고 자격지심 속에 살아온 자신을 해방시키는 중이다. 소중한 걸 미루는 것의 결과가 엄청나게 생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뿌리깊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더 많이 안아주고 보듬어 주고 있다. 그리고 스승이 내게 한 바보 짓을 영원히 헛되게 할 수는 없다는 책임감이 내 안에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 책은 다만 나의 못남을 만 천하에 공개하는 책으로 그칠 뿐이다.
요즘 가지고 있는 스승의 책을 다 꺼내 <구본형 다시 읽기>를 하고 있다. 19권의 책을 쓰면서 스승은 한 번도 자신의 주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 집중과 인내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그 해법은 아주 단순하다. 단순하다고 쉬운 건 아니다. 그러나 길은 있다. 스승은 친히 그 길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승이 지금껏 천착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하루를 바꾸지 않으면 혁명도 없다.
자신 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낯선 곳에서의 아침> 283p
그리고 그 하루 혁명의 내용은 실로 간단하다. ‘한 가지를 정해 매일 하는 것’이다. 일상과 분리될 수 없는 습관이 되어서 아무 저항이 없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러면 내가 잘하고 또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 하고 싶다는 것은 내 안에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욕망이란 그 일을 매일 하도록 추동하는 에너지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적 일관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현실로 형상화되지 못한다. 내가 부족했던 것이 바로 이 일관성이었다. 일관성이 핵심이다. 매일 정해놓고 해야하는 것이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줄리어스 어빙
솔직히 요즘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그 동안 자주 쓰지 못해 손이 많이 굳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모든 것을 덜어내고 내 가장 원초적인 욕망 만을 남긴다면 거기엔 '글쓰기’가 남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점은 나보다도 스승이 더 먼저 알아보았다. 내가 정말 소중한 것을 미루는 습관을 갖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캐서 고치는 일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내 욕망에 물을 한 번 더 주는 일을 할 것이다.
매일 걸어라. 매일의 힘만이 꿈으로 인도하는 단 하나의 믿음직한 주술이다. <깊은 인생> 121p
그 동안 조바심 때문에 지적인 무질서에 휘둘림을 많이 당했다. 너무 많은 주장과 외침에 휩싸여 정작 자신의 목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에게는 지금 ‘잘 해낼 수 있다’는 자기 믿음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런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이 세상의 그 많은 책이 다 필요한 건 아니다. 스승의 책 19권도 다 필요하지 않다. 삶을 잘사는 단순한 원리를 스승은 모든 책에 일관되게 담아 놓았다. 그러니 마음에 무찔러 드는 책 한 권만 정하면 된다. 나는 그 책을 꼭꼭 씹어 아주 일용할 양식으로 삼을 것이다. 내 고질적인 습관이 깨지고 새 습관이 자리잡을 때까지 당분간 그 책을 삶의 지표로 삼아 즐겁게 정진할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면 사부는 무척 좋아하실 것이다. 마치 비를 흠뻑 맞은 화초처럼 그렇게 즐거워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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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로이스(단경)는
2007년 모닝페이지와 스승님을 만나 인생의 전환을 이루었다. 몇 년의 즐거운 탐사와 시행착오를 거쳐 '내 삶을 가장 빛나는 예술로'라는 주제로 <아티스트웨이> 법인을 열었다. 이 회사의 중심엔 '여행과 사람들'이 있다. 모토는 'You are an artist, create your own life' 이다. 빨간 열정을 가진 창조성(&모닝페이지) 코치요, 여행 기획자로 사람들의 가슴에 피가 돌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신이 나서 한다. 아름다운 인간 구본형의 본질에 제대로 다가서고 싶은 마음에 요즘 <구본형 다시읽기.>를 하고 있다.
로이스님
저는 저 편지가 부러워요. '붉은 여인'에 대한 편지도 부러웠어요.
로이스님이 연구원 현역시절 안성에서의 모닝페이지 모임을 마치고 연구원 숙제를 하러 간다던 날의 모습이 이상하게 안 잊혀져요. 로이스님은 빈티지 인민군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제가 안성에 간 일은 금강호숫가 팬션에 갔던 때였을 거에요.
구본형 다시 읽기 주제의 첫 마음편지를 읽고서 제게 퍼뜩 떠오른 건 '어리고 겁많은 말이 장애물 앞에서 멈칫하는 건 두려움 때문'이라는 구절이었어요. 맥락이 생각이 안나 급히 <아티스트 웨이> 책을 찾아보았어요. 9장, 254쪽부터 265쪽 사이를 읽었어요. 이건 오늘 내야할 연구학교 공개수업 지도안을 미루다 미루다 시작도 못했으면서 스트레스로 아랫배가 아픈 저에게 필요한 구절인 듯 합니다. 한동안 매일 읽다시피 했던 책을 오늘 새벽에 펴 보니 애틋합니다. 누래진 이 책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이 책으로 인한 저의 행로가 신기합니다. 모닝페이지가 저를 찾아와 준 건 행운이었어요. 첫 모임 지원서를 보내고 받은 답장에서 저는 용기를 치하받고 안전한 가드레일을 보장받고 무한 응원을 받았어요. 과분하다, 과장이 심하다 하면서도 저는 그런 응원에 목말라 있었어요. 자꾸 듣다보니 조금씩 믿게도 되구요. 저의 타고난 사회성없음으로 인해 '저만치' 있지만요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멀리서 간간이 지켜보고 있어요. 저도 로이스님과 한 팀으로 지내는 이번 경험이 기뻐요.
잘 읽었습니다.^^
콩두 고마워. 자긴 강하면서 부드러운 사람이야. 마음 결이 이쁜 사람이지. 자신이 믿는 것보다 더 많이. 난 자기에게서 많이 배워.
자기가 써준 댓글 보고 나도 오랫만에 누래진 아티스트웨이 책을 꺼내들고 확인을 했지. 지금은 새로 개정된 멋진 책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처음 정을 준 것이 특별하고 마음에 애틋하게 오래 남는 것 같아. 그렇게 오래 전의 일도 아니지만 그 시절이 아련하게 그리워. 연구원도 하고 모닝페이지도 포기하지 않던, 내 안에서 나도 모를 열정이 샘솟아오르던 그 때 말이야. 자기같이 멋진 사람들이 내게로 오는 것이 참 좋았지. 모페의 힘으로 우리 뭔가 나중에 함께 저질러 보자고. 때가 되면 그렇게 될거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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