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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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감독으로 유명한
곽경택 감독을 만난건 <영화론>이라는 강의에서였다. 영상학을 복수전공하고 가장 먼저 수강신청했던 강의, 왠지 멋진 영화
만드는 법을 알려줄 것 같은 강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으로 인기있는 전공수업이였는데, 40명이 될까말까한 소규모 학과에서 나름 수강하기 힘든 수업이였다. 수강신청을
성공하고, 시작부터 운이 좋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강의실은 연극 무대위에 의자 15개를 놓고 수업을 듣는 방식이였다. 마루로 되어 있는 높은 단상, 그리고 그 위에 오렌지색의 따스한
조명이 우리를 내려쬐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어두운 관객석은 비장함과 특별함을 주었다. 미국 학교에서나 보던 자유로운 분위기, 영화 'Fame'의 빈티지한 느낌은 나를 한없이 설레게 하였다.
하지만 멋진 강의실을 뒤로 하고 도저히 교수라고 생각되지 않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정교수 대신에 한학기동안 수업을 책임질 영화감독이라고 자신을 간략하게 소개한 후,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아저씨 같은 촌스러운 외모는 그의 영화가
지루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고, 그가 만들었던 작품들은 너무 생소해서 하품이 날 지경이였다. 실제로 몇몇은 실망한 눈빛이였다.
그가 외형적으로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결론적으로 곽경택 감독의 강의는 정말 훌륭했다. 그의 박식함과 센스, 화려한 언변은 그가 왜 무명감독인지 자꾸 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영화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고, 어떤
질문에도 감동적인 답변을 해주었다. 감동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대답은 학생들에게 통찰을
주었다.
그리고 결국 사건이 터졌다. 수업이
3주쯤 진행되었을 때, 그가 찍었다고 했던 '친구'라는 영화가 소위 대박이 난 것이다. '니가 가라 하와이,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라는 유행어와 함께, '친구'는 한국 흥행기록을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가볍게 농담을 하던 평범한 아저씨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유명해지고 나서도 곽경택 감독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소탈한
패션으로 강의실에 나왔고, 강의중에 '친구' 이야기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부터는
곽경택 감독은 정말 바빠졌다. 책임감 있는 그였지만 갑자기 찾아온 인기와 바쁜 스케쥴에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부족한 수업 준비를 아는 지인을 통해 해결했는데, 촬영감독, 배급사 관계자, 유오성, 장동건
같은 배우들이 나와서 여러가지 영화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떻게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들, 어디서도 듣기 힘든 이야기들이였고, 황홀한
이야기였다. 바쁜 스케쥴과 일상이였지만 그는 최대한 노력하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많은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한번의 시나리오 제출과, 한편의 영상 제출을 끝으로 한학기 수업이
끝났다. 3학점이였던 영화론 수업에서 난 C학점을 받았다. 재수강할 마음도 없었지만, 다시한번 영상에 대해 나의 열정과 재능없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곽경택 감독과의 연락은 끊어졌고,
가끔 TV나 영화 개봉 소식으로 어렴풋이 그를 기억할 뿐이다.
자기 분야에서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 혹은 이뤄내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빛이 난다. 그런 사람들 옆에 있다보면 자연스레 열정에 취하게 된다. 나에게 곽경택 감독은 그런 사람이였다. 가장 열정적으로 자기 일을
해나가는 한남자, 그리고 자랑스러운 결과물과 성취. 광경택
감독은 아마 당시가 인생의 가장 빛나는 황금기였으리라.
그는 학생들에게 꿈을 주었다. 꿈을 꿔라,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지
은연중에 보여주었고 그것 자체가 날것의 가르침을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행동이나 분위기등에서 알 수
있었다. 강의를 듣다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우리 모두에게 열정을 전염시켰다. 영화감독이라는 것이 얼마나 멋진 직업인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작업인지 우리에게 끊임없이 알려주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 그리고 거짓 없는 열정으로 많은 것들을 체득한 사람, 난 그에게서
존경과 질투를 느꼈다.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곽경택 감독은 나에게 진지하게 영화감독이
꿈이냐고 물어왔다. 그리고 컴퓨터가 전공이라면 그쪽으로 한번 열심히 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충고했다. 영화판 현장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던 사람, 영화는 열정없이는 절대 할수 없다고 확고한 지론을 가진 사람의 충고였으니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방황하는, 아니 열정없는 내 모습에 불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승산없는 싸움을 계속 하지 말라는 따스한 조언이였다.
가끔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못하는 게 너무 많았던 시절, 고민도 많고 악에 받쳐서 살았던 그 시절, 오직 예술만이 날 구원해줄
것이라는 되도 않은 망상에 빠져들었던 어린시절이였다. 재미와 불안이 번갈아가면서 나에게 다가왔고, 시원한 가을밤과 차가운 겨울새벽이 공존하는 기분이였다.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는 질문을 하였지만 대답하지 못하고 낭비했던 시간들이였다. 그리고 추억과
추억. 영화를 하고 싶다는 진지하지 못한 꿈과 현실의 괴리감등으로 고민했던 수많은 시간들이였다.
그의 조언대로 난 영화감독의 꿈을 접었다. 어차피 진지하게 시작도
하지 않았던 꿈이라 후회도 없었다. 그리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영상, 예술과 전혀 관계 없는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고만고만한 평범한 직장인, 열정적이지도 않고 뭔가 이뤄낼 의지도 없는 그런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영화에서
찾지 못했던 열정이 여기에 있을리가 없다. 세월히 변하고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난 고민속에 허우적
거리고 있다.
오늘밤 왠지 다시 그를 만나보고 싶다. 포장마차에서 소주한잔 하면서
그의 속사포같은 영화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다. 지금의
내 모습에 대해서.
“감독님, 저 지금 잘하고
있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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