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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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드셨어요?”
“응…팥죽 먹었지. 내가 쑤었다.”
“좀
싸가지고 오지요. 팥죽 좋아하는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여유가 없었다. 화요일 아침, 밥을 먹고 팥죽을 데우면서 시어머니에게 부탁을 합니다. “죽 한 그릇 싸주세요” “플라스틱 그릇은 좀 그렇지?” 평소와 달리 그릇에 신경을 쓰십니다. 회사동료에게 가져다 준다고 하니 아무 그릇에나 싸주기는 좀 그러신가 봅니다. 게르마늄자기 그릇에 담아주십니다.
“그릇은
꼭 가져와라. 비싼거니까.”
동짓날
팥죽을 쑤어먹는 풍습은 오래된 일입니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과 달리 사먹기도 하고
그냥 건너뛰기도 합니다. 세시음식歲時飮食이 생활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바쁜 일상에 일일이 챙길 여유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토요일 마트에서 봐온 장바구니를 보며 ‘팥을 사올 줄 알았더니...교회에서 팥죽 준다고 전화 왔었는데…’ 혼잣말이 끊이지 않는 시어머니에게
“죽집에서 한 그릇 사먹으면 되죠”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주말이고 해서 팥죽을 쑤어볼까 생각을 하며
다시 마트를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한 달에 두 번 쉬는 휴일이다. 평소에는 비싸다는 이유로 가지 않던 백화점식품코너를 찾았다. 유전자변이를
하지 않았다는 팥 500g짜리 두 봉지를 사고 찹쌀가루 두 봉지를 집어 들었다.
"새알은 안 사?" 남편 말에 나는 가슴에 안고 있던 찹쌀가루봉지를
가리킵니다. "여기." 다시 묻습니다. "그것 말고 새알." 이 찹쌀가루를 가지고 새알
만드는 거라고 설명을 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입니다. "원래는 찹쌀을 불려서 가루를
내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이걸로 할려고." 죽은 쌀과 부재료를 함께 끓여 먹는 유동식입니다. 넉넉치 않은 살림살이에는 양을 불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방법으로, 몸이
성치 않은 환자에게 소화흡수를 돕기 위한 음식입니다. 요즘은 웰빙식으로 죽을 먹지만. 죽에 대한 대우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동지팥죽에는
특별히 옹심이라고 하는 새알심이 들어갑니다. 동지(冬至)는 말 그대로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여져 있는 날입니다. 일년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지요. 동지가 지나면 낮길이가 1분씩 길어지는데 옛 사람들은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지를 설날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새알심을 자기 나이만큼 먹는 풍습이 있는
이유입니다. 설날에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면서 나이를 한 살 먹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지요. 팥죽의 붉은 색이 잡귀를 몰아내는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장독, 곳간, 헛간, 방 등에
놓아두고 대문과 벽 곳간 등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잔병을 없애고 건강해지며 액을 면할 수 있다고 전해져
이웃간에 서로 나누어 먹곤 했지요. 동지는 태양력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24절기중 하나입니다. 동지가 음력으로 11월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이면 중동지, 하순이면 노동지라고 하여
애동지에는 팥죽을 집에서 쑤지 않는 풍습이 있습니다. 2013년은 중동지입니다.
팥을
씻어 한번 애벌삶기를 합니다.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함이지요. 삶은
팥을 한번 씻어 낸 후 물을 충분히 붓고 끓입니다. 팥은 콩과 달라 딱딱하여 삶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한꺼번에 물을 많이 붓고 끓이기보다 팥이 잠길 정도로 삶다가 물이 줄면 다시 물을 보충해가며 삶아야 잘 무릅니다. 쌀을 씻어서 물에 담가 놓고, 찹쌀가루를 익반죽해 새알심을 만들어
놓는 것도 중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500g 두 봉지의 팥을 삶는데 두어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통의 방식대로 하자면 체에 팥을 걸러서 껍질을 제거해야 합니다. 오늘은
식구끼리 먹는 팥죽이니 조리기구의 도움을 받기로 합니다. 삶은 팥을 믹서기에 곱게 갑니다. 커다란 솥에 갈아놓은 팥을 넣고 물을 충분히 부어 농도를 맞추고 불려놓은 쌀을 넣습니다.
센불에
저어가며 죽을 끓입니다. 팥은 저어주지 않으면 눌러 붙어 끓을 때까지 불 옆에서 저어주어야 합니다.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밑바닥까지 잘 긁으면서. 젖다 보면 하얀 거품이
일기 시작하고 조금 더 있으면 쌀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끓기 시작하면 가끔씩 저어주어도 눌러 붙지
않습니다. 이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젖던 주걱으로
쌀알을 들어올려봅니다. 적당히 퍼졌으면 새알심을 넣습니다. 끓는
죽에 새알심을 그냥 넣으면 뜨거운 죽이 튀어서 데이기 좋습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쉽지 않으니 나무주걱에
새알을 몇 개씩 올려서 죽 속으로 침투시킵니다. 죽 한 그릇
먹자고 화상을 입는 불상사를 만들면 안되니까요. 새알심은 익으면 수면위로 떠오릅니다. 하나 둘 떠오르던 새알심이 일제히 솥의 상단을 점령하기 시작하면 팥죽완성입니다. 굵은 천일염으로 간을 합니다. 입맛에 따라 설탕을 가미하기도 하지만
단팥죽이 아닌 동지팥죽은 소금으로 간을 하고 동치미를 곁들여 먹는 것이 좋습니다.
몇
천원이면 사서 먹을 수 있는 것이 팥죽입니다. 특별히 좋은 재료를 썼다고 해도 만원정도면 충분하지 싶습니다. 시간을 절약한다는 생각으로 사서 먹을 수도 있고, 동지에 팥죽을
먹던 풍습을 꼭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풍습은 미신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시작되었건 시대가 바뀌면서 의미도 변해갑니다. 요즘은
그냥 동지는 팥죽 먹는 날? 밤이 제일 긴 날? 정도로 바뀐
느낌입니다. 세시음식은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동일 민족으로서 일체감을 결속시키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이런 의미도 점차 사라지고 있으니
때마다 챙겨먹는 것의 의미가 퇴색해 버린 것도 당연합니다.
동지팥죽은 가족과 이웃의 건강을 기원했던 조상의 마음이 깃들인 음식입니다. 요즘같이 믹서기가 없던 시절에는 꼬박 하루를 소비해야 만들어지는 음식입니다.
저는 재료 사는 시간 빼고 믹서기사용해서 네 시간 걸렸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만든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 것도 현실입니다. 어쩌다 집에서 팥죽을 만나면 오늘이 동지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날은 어김없이 동지였고 엄마는 잊지 않고 팥죽을
만들어 주시곤 했는데. 이젠 내가 엄마가 되었는데 아이들에게 당연히 만들어주는 음식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바쁘다는 핑개로 말입니다. 나의 아이들이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에 동짓날 팥죽을 쑤어주는 모습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동했을지도 모릅니다
새알을 왜 안 사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찹쌀가루를 가리키는 나를 봅니다. 내게는 당연한 것이 그에게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동지팥죽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사서 먹는 음식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만들어 먹는 음식입니다. 당연했던 세시음식이 당연하지 않은 풍습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짓날이면 늘 팥죽을 쑤어주는 엄마를 두었던 저와 다르게 나의 아이들은 다른 엄마를 두고 살아갑니다. 가끔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통용되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바램을 가져보지만 이제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아갑니다.
“나는 새알을 사는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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