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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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원고를 넘겼다. 스승이 남기신 흔적을 꼭꼭 씹어 소화해 내어놓는 분에 넘치는 과제를 껴안고 부단히도 부대꼈던 시간, 설레임과 두려움, 뿌듯함과 억울함. 애뜻함과 원망. 사랑과 미움. 고마움과 미안함의 그 어디쯤인가를 하염없이 헤매던 여정도 이젠 끝.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여행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지금으로선 그저 피할 수 없었던 길을 끝까지 버텨준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뿐.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또 잘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으니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무위의 시간이 좋을 것 같다가도, 워낙에 가만히 있는 걸 힘들어 하는 아이니 오히려 신나게 몰입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템이 더 적당해 보이기도 하고, 그동안 과한 작업을 치루어 내느라 난장판이 되어버린 마음작업장 정리를 도와주면 제일 고마워하겠다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드는 생각.
그리도 존경하던 스승을 모시고 영혼의 구석구석을 알뜰히도 탐험하고 돌아온 이 사치스러운 여행 자체가 이미 넘치는 선물이 아닐까? 선물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이 여행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용히 자기 몫을 희생해 준 가족들이 아닐까? 그들은 어떤 선물을 제일 반가워할까? 한참을 이리저리 궁리하다 숨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깨닫는다. 두려움, 억울함. 원망. 미움. 미안함, 슬픔 그리고 차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만큼이나 유치하고 졸렬하던 그 모든 ‘나’들마저도 오롯이 넘치는 축복이었구나. 그동안 그렇게나 힘들었던 건 그들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들로부터 어떻게 해서든 도망쳐보겠다는 헛된 욕심때문이었던 거구나. 빛으로부터 그림자를 분리해내 보겠다는 억지가 그토록 나를 지치게 했던 거구나. 삶은 이렇게나 부족한 나를 포기할 줄을 모르는구나. 세상은 나를 아낌없이 보살펴주었고 또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조용히 눈을 뜨니 또 새로운 문이 보인다.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빛줄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어쩌면 나는 진짜로 바보인지도 모른다.
방황한다고 해서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여행은 여행자도 모르는 비밀의 목적지를 품고 있는 법이다.
EBS 고전읽기 <동방견문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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