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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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였다. 비 오는 날 청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몰아 본 적이 있다. 기왕 젖은 몸이니 그냥 끝까지 몰아보자 하는 오기로 가보지만 빗줄기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맹렬히 퍼붓기만 한다. 온 몸은 비에 젖고 그렇다고 자전거를 버릴 수도 없고 움푹 패인 웅덩이를 지나다 넘어져 손바닥에서 피는 흐르고 자전거 체인은 훌러덩 빠지더니 제자리로 들어갈 줄을 모른다.
인정한다. 나는 요즘 참으로 고단한 일상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쳇바퀴 월급쟁이 인생이라지만 요즘 들어 쳇바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리진다. 회사는 신년들어 사장도 바뀌고 부사장도 새로 영입했다. 유명한 컨설팅 업체를 불러다가 벌써 두달 넘게 컨설팅을 진행 중이다. 회사 손익의 극대화를 위해 조만간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을 것 같다는 소문도 이젠 일상이 되어버렸다. 몇 주 째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면
10기 페이스메이커를 자원한 지 이제 2주차다. 약속한 오늘
퇴근 길 지하철, 쓰지 못한 칼럼을 써볼까 싶어 핸드폰 메모장을 열었지만 배터리가 3% 남았다는 메시지가 뜬다. ‘너나 나나 비슷한 신세구나!’ 자동으로 꺼져버린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눈을 감아본다. 머리 속도 하얗다. 기도를 해볼까 마음을 모아도 이네 초점을 잃어버린다.
어떻게 힘을 내볼까 궁리해 본다. 모처럼 저녁식사를 집 거실 식탁에서 천천히 음미하며 즐겨본다. 고향집 어머니와 영상통화도 하였다. 조금 힘이 난다.
칼럼으로 무엇을 써 볼까 궁리하다 거실 책장 앞에 서서 이 책 저 책 뽑아 뒤적거렸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요즘 내가 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거지? 생각은 하고 사는 건지.’ 그저 눈 앞에 일만 쫓아 몸이 부서져라 하루하루 사는 모습이 한심해 보이지만 그래도 안쓰럽고 또 대견스럽다.
아무리 일을 해도 노동의 결과물은 결코 내 소관이 아니다. 그들의 몫일 뿐이다. 그저 잠자코 회사 방침에 군소리 없이 따라올 정도의 월급을 꼬박꼬박 마이너스 통장에 던져줄 뿐이다. 우리의 노동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던가? 일하는 보람이 무엇인지 이런 말 저런 말로 풀어내 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자아완성’, ‘행복추구’ 같은 참으로 허망한 몇 개의 단어가 맴돌다 제 풀에 꺾여 사그러든다. 이 순간, 노트북 화면에서 껌뻑 거리며, 그저 누군가 키보드를 누르면 재빠르게 글자를 찍어내는 이 ‘커서’처럼, 내일도 모레도 나는 여전히 회사에서 던져지는 일을 처리하며 보낼 것이다.
잔칫집 식혜
보아라
뉘 집 잔치인지도 모르고
식혜는 또 삭고 있지 않더냐
그 맛이
또한 맛나지 않더냐
지난 3월 어느 취한 밤, 퇴근 지하철에서 핸드폰 메모장에 썼던 시를 다시 꺼내 본다. 비로소 얼굴에 웃음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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