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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9일 06시 52분 등록

지난 5월에 시스티나를 처음 갔다. 비 내리는 바티칸 정원에서 벽화에 대한 설명을 한참 듣고, 우리는 성당 안으로 향했다. 긴긴 복도를 따라 숨막히도록 매끈하고 아름다운 조각과 그림으로 가득 찬 작은 방과 둥근 회랑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스치듯 지나갔다.

신이 깜빡 실수하여 신의 재능 그대로 지상으로 내려보냈다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제단 뒤 벽화 앞에 도착했을 때는 찌푸린 날씨로 안이 매우 어두웠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다 집합시간에 쫓겨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멈춰 섰다. 밖에서 비가 개었는지, 창 밖에서 환한 빛이 들어왔다. 선명한 로마의 햇빛에 방 안이 점점 밝아졌다. 점차로 강해지는 빛에 벽과 천장에 그려진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신비한 빛에 싸여 나는,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인류의 보고에 와있는 것 같다는 기분을 받았다. 그때 나는 동양의 젊은 여자가 아닌, 인류의 후손으로서 그 곳에 있었다.

 

커다란 인류 정신의 전당. 그곳은 마치 천국처럼 구름에 싸여 온갖 위대한 대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앉아 있다. 영감의 아홉 여신들은 그 한가운데에서 태어난다. 단테가 쓴 신곡에 따르면 고대인들을 포함한 이교도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있으니, 이 전당은 종교적, 문화적 천국과는 다른 좀더 보편적인 지혜의 전당일 것이다. 다만 위대함으로 가득 차있는 곳, 영감의 보고다. 시대를 가리지 않는 탁월한 지혜의 힘. 나는 유적지 앞에서 나와 같은 형상의 이천오백 년 된 거인을 만나고 왔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서양의 지혜를 내 인생에서 딱 좋은 시점에 읽었다. 나의 경험과 사고가 이정도 개략적인 서양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무르익었고, 각 철학 사이의 다른 점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열려 있었다. 너무 일찍 만나 나에게서 잊혀졌던 철학책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조급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개개인이 지닌 삶의 철학을 넘어서, 그 안에서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한 철학자가 모든 철학을 꿰뚫는 하나의 가설을 증명해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다만, 철학자들은 각자의 시대와 불완전한 감각과 사고로 제 나름대로의 가설을 세우고 이것이 옳다는 증명을 하려 노력했다. 완전한 철학은 없다. 삶이란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우리는 변한다.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이천오백 년이라는 거대한 세월 동안 수집된 지혜가 있다. 러셀의 말마따나 철학자가 말하려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취하면 된다.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도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니 오류가 있었다. 잘 나가다가 진창에 빠지기도 했다. 그만큼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삶의 방향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가설을 갖는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니 철학이 있는 사람의 인생만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삶으로 표현된다. 개인이 스스로에 대한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만약 한 명의 철학자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스피노자를 고를 것이다. 삶에 충실한 철학, 자유인의 지혜가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에서부터 온다는 그의 주장은 나로 하여금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만약 리트머스 시험지로 나의 철학 성향을 구분 짓는다면, 나는 분명 낙천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사과를 따먹듯이 간단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도 선험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혜의 습득에는 끊임없는 공부와 생각해보는 훈련과정이 필요했다. 이천오백 년의 메리트를 놓칠 필요는 없다. 이미 웬만한 사상들은 모두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많은 사람들 사이에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어떻게 자기 상황에 맞게끔 사용할 수 있는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이다.

 

이번에도 책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결국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개인의 철학으로 현대철학을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공리주의 위에 개인을 세울수도 없고 낭만주의의 연약함에 의지할 수도 없다. 나는 그 뜨겁고 찬란하던 태양처럼 깊고 밝은 활력이 필요하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문다. 이성의 빛으로 농익은 과실은 아주 달고 맛있다. 나는 앞으로 몇 년에 걸쳐 이 지혜를 공략할 것이다. 오른손에 든 아폴론적인 이성과 왼손에 쥔 디오니소스의 신비함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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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07:21:16 *.104.9.216
진짜를 만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 가운데 중심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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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17:21:16 *.50.21.20

사실 서양의 지혜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벽을 많이 느꼈습니다.

내가 읽고 본 세계는 훨씬 넓고 빛나고 있었는데, 내 칼럼을 쓰려고 흰 종이를 앞에 놓았더니 내것은 보잘것없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피울님이야기를 들으며 다독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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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12:34:42 *.94.41.89

다이어트는 언제하시나? 늘 이렇게 맛있는 것들을 배불리 먹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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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17:22:06 *.50.21.20

그러게요 먹는 이미지로 칼럼을 마무리를 지어야 뿌듯하네요. ㅋㅋ 

평소의 습관마저도 그대로 반영이 되는게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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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14:03:32 *.196.54.42

"나는 그 뜨겁고 찬란하던 태양처럼 깊고 밝은 활력이 필요하다." 깊고 밝은 활력은 이미 소유한 듯^^

"철학이 있는 사람의 인생만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이젠 어니언님의 철학의 렌즈로 불을 지필 때!

느낌 좋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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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17:23:06 *.50.21.20

ㅎㅎ 검은 종이를 태우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납니다.

생각보다 진득하게 앉아있어야 했는데... 글쓰기는 그 이상으로 몇 번이나 해야 불이 붙을지...ㅋㅋ

견디는 것이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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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20:33:09 *.218.180.22

나도 이번에 스피노자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


철학....

처음엔 입만 살은 사람들만의 말장난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고

요즘 들어 재미있을것 같다. 한번 알아보고 싶다라는 찰나에 이 책을 읽게 되어 기뻤는데

철학이 이렇게 오묘하고 수학과 관련이 깊은 학문인지 몰랐네.

평생을 가까이 두고 있어도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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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1 11:11:39 *.50.21.20

응 같은 생각이여요.

그래도 읽으면서 이전과 많이 달라진 느낌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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