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에달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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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_구달리뷰#14 (2014. 7. 1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1832)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1710-1782)
는 명목상의 황실 고문관으로 법학을
공부한 부유한 인사였으며,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1731-1808)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로서 천성적으로 활발하고 명랑하였다.
=>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21살이나 많았다. 엄마가 큰아들 괴테를 18살에 낳았다. 그 시대에는 이런 식의 결혼이 성행했나 보다. 시장 딸이라면
빵빵한 명문가인데 이렇게 나이 차가 나는 결혼을 시켰다면 정략 결혼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
1750년(1세) 누이동생
크르넬리아가 태어났다. (그 이후 출생한 남동생 둘, 여동생
둘은 모두 출생 후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다.) 1753년(4세) 크리스마스 날 할머니로부터 인형극 상자를 선물 받았다.(지금도
프랑크푸르트의 괴테하우스에 보존되어 전시 중이다.)
1757년(8세) 조부모에게
신년시를 써서 보냈다. (보존되어 있는 괴테의 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759년(10세) 프랑스군이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하였다. 군정관 토랑Thoranc 백작이 2년쯤 괴테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를 통해 소년
괴테는 미술과 프랑스 연극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65년(16세) 10월에
라이프치히로 가서 대학에 입학하였다. 베리쉬, 슈토크, 외저 등의 예술가들과 사귀며 문학과 미술 공부를 하였고, 그리스
연구가 빙켈만의 글을 읽고 계몽주의 극작가 레싱의 연극을 관람하였다.
1766년(17세) 식당
주인 쇤고프의 딸 케트헨을 사랑하여 교제하였다. 그녀에게 바친 시집 <아테네>는 베리쉬에 의해 보존되었다.
1767년(18세)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이듬해 4월에 완성)
1768년(19세) 케트헨과의
애정 관계를 끝냈다. 6월, 빙켈만의 살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7월 말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769년(20세) 이전
해 11월에 시작한 희곡 <공범자들>을 완성했다.
1770년(21세)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눈병 치료차 슈트라스부르크에 온 헤르더와 교우, 문학과 언어에 관해 영향을 받음.
10월, 근교의 마을 제젠하임에서 목사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771년(22세) 프리데리케와
자주 만나며 그녀를 위한 서정시를 많이 썼다.
교회사 문제를 다룬 학위 논문은 민감한 내용 때문에 불합격되었으나 대신 그에 준
하는 시험에 통과하여 공부를 마쳤다. 8월 프리데리케와 작별하고 고향으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으나 문학에 더 몰입하였다. 슈투름 운트 드랑이 성향이
짙은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엔>의 초고를
썼다.
1772년(23세) <괴츠>를 출간, 슈트라스부르크 시절부터 구상했던 <파우스트>의 집필을 시작.
시 <마호메트>, <프로메테우스>를 쓰고 오페레타 <에르빈과 엘미레>의 집필시작.
1774년(25세)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시작하여 4월에 완성하였다.
<괴츠>가 베를린에서 초연되었고, 희곡 <클라비고>를 썼다.
당대의 대시인 클롭슈톡과 편지를 교환하였다.
1775년(26세) 프랑크푸르트
은행가의 딸 릴리 쇠네만을 사랑하여 약혼, 반년쯤 후에 파혼하였다.
희곡 <스텔라>를 썼다. 칼 아우구스트 공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를 방문하였다.
1776년(27세) 바이마르(당시 인구 6000명 정도의 도시) 에 머물기로 결심하고, 7월 추밀원
고문관에 임명된 후 정식으로 바이마르 공국의 정사에 관여하였다. 궁정여관
‘샤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깊은 우정 관계를 맺고, 그녀로부터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1777년(28세) <공범자들> <에르빈과 엘미레>가 공연되었다.
1778년(29세) 희곡 <에그몬트>에 전념하여 몇 장을 집필하였다.
1779년(30세) <이피게니에> (산문) 완성하여 초연하였다.
슈투트가르트에 들러 실러가 생도로 있는 칼학교를 방문하였다.
1780년(31세) 희곡 <타소>를 구상하였다. <파우스트>의 원를 아우구스트 공 앞에서 낭독하였다.
그
원고를 궁정여관 루이제 폰 괴흐하우젠이 필사해 두었는데, 그것이 훗날 <초고
파우스트>의 출간을 가능하게 하였다.
1782년(33세) 황제
요제프 2세로부터 귀족의 칭호를 받았다.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1786년(37세) 식물학과
광물학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칼 아우구스트 공, 슈타인
부인, 헤르더 등과 휴양차 칼스바트에 체재하다가 몰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올랐다. 로마에서 화가 티슈바인, 앙겔리카
카우프만, 고고학자 라이펜슈타인 등과
교유하며 고대유적의 관찰에 몰두하였다. <이피게니에>를
운문 형식으로 개작하였다.
1787년(38세) 이탈리아
체류를 연장하고 나폴리와 시칠리아 섬까지 돌아보았다.
<에그몬트>를 완성하여 원고를 바이마르로 보냈다.
1788년(39세) 6월에
스위스를 거쳐 바이마르로 돌아왔다. 귀환 후 슈타인 부인과의 관계가
소원해 졌다. 평민 출신의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와 만나 동거 생활을 시작하였다.
(후에 괴테의 정식 부인이 되었다.). 실러와 처음 만났으나 절친한 관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실러는 괴테의 주선으로 예나 대학의 역사학 교수 자리를 얻었다.
1789년(40세) 크리스티아네와의
사이에 아들 아우구스트가 태어났다.
당대의 학자 빌헬름 폰 훔보트와 친교를 맺었다.
1790년(41세) 괴센
판 괴테전집에 <파우스트 단편>을 수록하였다.
색채론과 비교 해부학 연구에 몰두 하였다.
1792년(43세) 프랑스
혁명군에 대항하는 프러시아 군에 소속되어 베르텡 공방전에 종군하였다.
1793년(44세) 연합군의
일원으로 프랑스군 점령지인 마인츠 포위전에 참가하였다가 8월에
귀환하였다. 그 체험을 살려 희곡 <흥분된
사람들>을 썼다.
1794년(45세) 새로
건립된 예나의 식물원을 맡아 관리하였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개작을
시작하였다. 실러와 <호렌>지 제작에 함께 협조하면서 가까워졌다. 시인 프
리드리히 휠덜린과 처음으로 만났다.
1795년(46세) <독일
피난민의 대화>를 출간하였다. 훔볼트 형제와
해부학 이론에 관심을 쏟았고, 실러와 공동으로 경구집 <크세니엔>의 출간을 구상하였다.
1797년(48세)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집필하였다. 실러의 격려와 독촉으로 <파우스트>에 다시 매달려 <헌사><천상의 서곡><발푸르기스의 밤>을 집필하였다.
1799년(50세) 티크, 슐레겔 등과 친교를 맺었다. 희곡 <사생아>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1803년(54세) <사생아>를 완성하여 첫 공연을 가졌다. 절친했던 친구 헤르더가
사망하였다.
1805년(56세) 5월에
실러가 죽었다. 괴테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내
존재의 절반을 잃은 것 같다’고 술회하였다.
1806년(57세)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바이마르가 점령되었다.
크리스티아네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807년(58세) 아우수스트
공의 모친 안나 아말리아가 사망하여 추도문을 작성하였다.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1808년(59세) <파우스트> 1부가 출간되었다. 소설 <친화력>을 구상하고 집필을 시작하였다.
9월에
어머니가 별세하였고, 나폴레옹과 두 차례 회견하였다.
1810년(61세) 카스바트와
드레스덴으로 여행하였다. <색채론>을 완성하였다.
1811년(62세) 자전적
기록인 <시와 진실>에 전념하여 9월에 1부를 완성하였다.
<에그몬트>에 대한 베토벤의 편지를 받고 2부를 집필하였다.
1812년(63세) 베토벤의
음악을 곁들인 <에그몬트>가 초연되었다. 칼스바트에서 몇 차례 베토벤을 만났다. <시와 진실> 2부를 집필하였다.
1813년(64세) <시와
진실> 3부 완성하고, <이탈리아 기행>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1814년(65세)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스의 시집 <디반>을 읽고 자극을
받아 <서동시집>에 착수하였다. 라인과 마인 지방을 방문하였다.
1815년(66년)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희곡<에피메니네스의 각성> 공연됨, <서동시집>에 수록할 140편의
시가 씌어졌다.
1816년(67세) 아내
크리스티아네가 중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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