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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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연구원 수업은 나에게 멋진 하루였다. 하루에 완전히 몰입한 하루였다. 나는 그날 이후로 완전히 원기를 되찾고, 내가 가지고 있던 즐거운 생기를 다시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
지난 2주간 무척 괴로웠다. 나는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해내고 걱정하고, 우울했고, 불안해했다. 잡히지 않는 불확실함에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보내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하루 보내기’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주제다. 놀기 좋아하는 나는 그것을 내 나름대로 즐겁게 고민하며 멋진 글을 써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근데 이상하게 하기 싫었다. 그 이유를 나는 그 전 주부터 아무 것도 안하고 하루를 놓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루 후유증은 아주 컸다. 나는 컴퓨터 자판을 잘 치지 못했고, 솜처럼 피곤해도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고대하던 오프 모임이었지만 과제가 미진해서 수업도 별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무의식의 반영이었는지, 늦게까지 과제를 끄적댄 탓인지 늦잠을 자서 수업에 늦었다.
수업에 가서도 처음에는 쳐져 있었다. 여전히 컴퓨터 자판이 잘 쳐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한 과제를 맨 첫번째로 발표해야 했다. 과제물을 발표하고 나자 모두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다시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보려는 날카로운 질문과 회피성 대답을 끝으로 나의 차례는 지나갔다. 나는 여전히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다른 연구원들의 과제는 아주 반짝이고 아름다웠다. 그들의 하루는 제 나름대로의 깨달음과 우연한 사건들, 즐거운 감각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평소처럼 그런 것들이 부럽다기 보다는, 어쩐지 수혈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기에 심하게 걸려 병원 응급실의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수액을 맞는 도중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 말이다. 네 번째 사람이 발표를 할 때쯤에는 타자 속도도 다시 되돌아와 있었다.
우리가 수업했던 곳은 일반 2층집을 개조해서 만든 인문학 카페였다. 잔디밭이 아름다웠다.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그곳에 나가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승호선배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혈색이 돌아온 게 느껴졌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순간 갑자기 나를 누르고 있던 무겁고 검은 것이 흩어지면서 원래의 내가 기지개를 펴는 것이 느껴졌다.
수업이 끝날 때쯤에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나는 이 날 나의 멋진 하루를 구성하는 몇 가지를 찾아내었다.
첫 번째는 사람이다. 연구원 수업은 나의 한 달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벤트이다. 그 이유는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만나면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여기 온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나를 지탱해준다. 게다가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나는 그들을 온 감각으로 느끼며 나를 깨울 수 있다.
두 번째는 깊이있는 경험이다. 연구원 과제는 표면적이고 현실적인 것들만 생각해서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스스로를 만나게 된 경험들에 대한 공유, 질문을 할수록 깊게 들어가는 작은별 같은 일상을 통해 환기된 의식은 새로운 예시를 자신의 현실에서 찾는다. 이 과제들은 그런 의미에서 한 권의 향기로운 책과도 같다. 게다가 나는 디지털 서기를 하면서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발표자에게 밀착해서 공유받게 되는 장점을 즐겁게 누리고 있다. 반짝임을 하루에 불러옴으로써 현실이 단단해지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번째는 속도다. 스페인에 완연했던 자유는 나를 온전히 나의 속도로 걷도록 조정해주었다. 한국에 돌아온 일상은 현실의 빠름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사이에서 좀 멀미가 났던 것 같다. 조정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나는 그것을 수업을 통해서 극복했던 것 같다. 느려도 나의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현실을 잃지 말아야 한다며 고삐를 고쳐 잡았다.
수업 테라피(?)를 받고 나서 사람들을 따라 뒷풀이를 갔다. 기가 막힌 어죽국수를 먹고, 생맥주가시원한 이자카야에서 누가 쏜가도 해서 안주를 몰래몰래 시키고, 갑자기 몸이 간지러워지는 가리비회와 삶은 오징어를 먹고 택시를 잡아타고 산울림 극장 어귀에 있는 맥주집을 갔다. 창고 같은 지하실을 노란 조명과 담배연기와 밥 딜런의 노래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딱 기분 좋을만큼 취해있어서 들썩거리다가 일어나서 춤도 추었다. 술집에서 나오니 서있을 기운도 없어 냉큼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그러고 씻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잘 온다. 일어나도 어제의 기운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즐거운 아이처럼 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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