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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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진술과 관련하여 교조적인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해석의 획일화’가 눈에 띄는 즉시 우리는 그 해석이 교조적이며
따라서 비생산적임을 알게 된다. _ 카를 융
지난 밤.
2014. 09. 28
칠흙 같은 밤이다. 한 사내가 어느 저택으로 미끄러지듯 스며 들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찾아든 서재에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또 한 사내가 비오는 창밖을 초점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고풍스럽게 갖춰진 서재는 사방 벽면을 모두 책으로 빼곡하게 둘렀고, 창을 등지고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책상과 깊숙한 의자, 그리고 작은 티테이블이 개인용 소파 두개와 함께 놓여있다. 바닥엔 밝은 색의 깨끗하고 두툼한 카펫이 깔려있어 사뭇 포근하다. 책상의 오른쪽 벽엔 큼지막한 벽난로가 놓였는데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잔뜩 이글거리고 있었다. 두 사내는 한참을 석고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이윽고 창밖을 보던 사내가 등을 돌렸다. 이글거리던 벽난로는 그 사이 겨우 숨이 붙어있을 만큼 사그러 들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에게 닿았다. 한점의 동요나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또 그렇게 한 동안 서로를 무심하게 쳐다 보았다. 그 사이 두 사람은 그렇게 눈빛으로 건조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룰 수 없는 것이겠지?” 등을 돌린 사내가 말했다.
“...” 단호한 대답이다.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는 코트 깃 사이로 날붙이가 번득인다. 남자는 숙명처럼 곱게 무릎을 꿇더니 목을 들어 천정을 바라 보았다. 아주 잠깐 눈빛이 흔들렸으나 본인조차도 느끼지 못할 만큼 찰나간이었다. 두 사내 사이의 공기는 그들이 나누는 눈빛과는 반대로 이제 막 시작한 천둥 번개 만큼이나 난폭하고 격정적이다. 다시 번개가 번뜩였을 때 꿇어 앉은 사내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깨끗한 죽음이다.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사내의 눈은 여전히 무심하다. 그래서 오히려 단호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밤은 점점 더 무겁게 내려 앉았다. 두 사내는 의식을 행하듯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사내는 의식처럼 잠시 섰다가 밤속으로 사라졌다. 비바람이 점점 세차게 불었다. 사내가 떠났을 때 벽난로는 온기만 남은 채 사그러졌다. 번개가 번뜩일 때 죽은 사내의 얼굴이 잠시 드러났다. 평화롭다. 다시 번개가 번뜩였을 때 죽은 사내가 ‘나’라는 것을 알았다. 밤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던 ‘나’는 천둥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혼자 일어나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외가로 떠나고 너른 집에 덜렁 혼자 남았다. 융의 자서전과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꿈’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들 처럼 꿈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위에서 짧게 적은 것은 지난 밤 꿈에 관한 기록이다. 사실 백배쯤은 더 길고 복잡했던 것 같다. 꿈속에서도 ‘꿈을 잘 기억했다가 기록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지난 밤 꿈은 이 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때 꿈은 현실처럼 생생했다. 곧바로 키보드로 옮길까 생각도 했었지만 깨어난 정신만큼 몸이 깨어난 것은 아니어서 빠릿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사실 중요하다. 많은 다짐들이 실천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다 되어 간다. 잠자리에 든지 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몸은 다시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잠속으로 달리고 싶은 몸과는 반대로 한번 깨어난 정신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렇게 또 몇 시간을 뒤척였다. 꿈속에서 나는 또 그 꿈들을 기억하고 분석하느라 바빴다.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은 내게 ‘그게 바로 개꿈이야.’라고 말했다. 다시 깜빡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 보니 아홉시가 넘었다. 살짝 패배감이 몰려온다. 조금만 있다가 일어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꿈을 기록하겠다던 다짐 때문이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키보드 앞에 앉았다. 바로 그 순간, 길고 길었던 기억들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선명하던 기억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더불어 그나마 기억에 남은 이야기조차 문장으로 만들어지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다. 어떤 기억은 이미지로 또 어떤 기억은 문장으로 또 어떤 기억은 대화로 남았는데 순서도 장소도 뒤죽박죽이다. 몇 가지 이야기가 뒤섞였는데 어떤 것들이 서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난 밤에 모두 네번 죽였다. 다 기억나지 않지만 죽은자는 모두 ‘나’였을 것이다. 꿈속에서는 선명했으나 꿈에서 깨어나자 누군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위에 적은 것은 그 가운데서 겨우 문장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비교적 꿈을 자주 그리고 많이 꾸는 편이다. 대부분 혼란스럽고 논리적이지 않은 괴상한 내용들이지만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볼 작정이다. 꿈을 꾸는 시간 역시 삶의 일부가 아니던가! 여직 버려두었던 황무지를 발견하여 다시 개간하는 듯한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죽은 시간들을 다시 살려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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