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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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달라이 라마와 스테판 에셀이 나눈 세기의 대화
원제 Declarons La Paix! Pour Un Progres De L'esprit
달라이 라마・스테판 에셀 저, 임희근 옮김, 돌베개, 2012.
1. 저자에 대하여
■ 스테판 에셀 Stephane Hessel ■
•출생/사망 |
1917. 독일 베를린 / 2013.2 | |
•활동분야 |
사회운동가, 저술가 |
|
• 발 자 취 • |
• 저 서 • | |
1924년 부모를 따라 일곱 살에 프랑스로 이주 1937년 프랑스 국적 취득 193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입대함 1941년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에 합류해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약 1944년 체포되어 부헨발트 수용소 수감. 교수형 언도 받고 극적으로 살아난 후 수용소 탈출 1946년 외무부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외교관이 됨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 유엔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를 역임 |
분노하라 참여하라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분노한 사람들에게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세기와 춤추다 | |
2011년에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가 선정한 세계의 대표적 사상가 |
…… …… |
■ 편집자 후기 - 스테판 에셀, 그는 누구인가?
p45~50 스테판 에셀은 1917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에셀은 유대인 출신의 작가이자 번역가였고, 어머니 엘렌 그룬트 역시 작가이자 화가이며 음악애호가였다. 그의 부모는 1924년, 장남 울리히와 차남 스테판을 데리고 파리에 정착했다. 이런 가정환경 덕분에 이들 형제는 파리의 전위 예술가들을 가까이서 보며 자랐는데, 그중에는 다다이즘의 기수 마르셀 뒤샹, 미국 조각가 앨릭잰더 콜더도 있었다. 1937년 프랑스인으로 귀화한 스테판은 1939년 파리 윌름 거리에 있는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지만,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한다. 그는 군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체험하고, 페탱 원수가 프랑스 국가 주권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목도한다. 1941년 5월 그는 런던으로 가서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에 합류하여 방첩・정보・행동 담당 총국에서 일한다. 1944년 7월 10일, 그는 파리에서 누군가의 밀고로 게슈타포에 체포된다. 에셀은 1997년 펴낸 회고록 『세기(世紀)와의 춤』에 이렇게 썼다. “고문받고 비밀을 발설한 사람은 쫓기지 않는다”라고. 고문-특히 물 담긴 욕조에 머리를 밀어 넣는 고문, 그러나 그는 이런 고문을 받으면서도 고문자들에게 모국어인 독일어로 말을 건네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다-이 따르는 취조를 받고 나서 그는 1944년 8월 8일, 파리 해방을 불과 며칠 앞두고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내졌다. 교수형을 당하기 바로 전날, 그는 극적으로 자기 신분을 같은 수용소 안에서 티푸스로 사망한 프랑스인의 신분과 바꿔치기한다. 이후 프레이즈 반 직공 미셸 부아텔이라는 새 이름으로 그는 독일 폭력기 융커52의 착륙장치를 만드는 공장 부근이 로틀베로데 수용소로 이감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억세게 운이 좋았던지 그는 회계부서로 배치된다. 그리고 탈출한다. 그러다 다시 잡혀 끌려간 곳은 도라 수용소로 V-1과 V-2가 제작되는 곳이었다. 나치는 여전히 이런 무기들을 동원해 전쟁에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중죄를 범한 수용자들을 따로 모은 징벌부대에 배속된 그는 다시 한번 탈출을 시도해 이번에는 성공한다. 때마침 연합군이 도라 수용소 가까이로 진격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파리로 돌아와 아내 비시아와 재회한다. 그들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게 된다.
“이렇게 삶을 되찾았으니, 이젠 그 삶을 걸고 참여해야 했다”라고 ‘자유 프랑스’의 옛 전사는 회고록에 쓰고 있다. 1946년 외무부 채용 시험에 합격한 스테판 에셀은 외교관이 된다. 그의 첫 직장은 국제연합(유엔)이었는데, 마침 그 해에 유엔 부사무총장 겸 인권위원회 간사 직책을 맡고 있던 앙리 로지에가 그에게 자기 보좌팀의 팀장으로 일해달라고 제안한다. 스테판 에셀은 이 직책으로 훗날 세계 인권선언이 될 문안을 작성하는 위원회에 합류한다. 이 워원회의 위원 12일 중에 6인이 특히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여섯 명은 다음과 같다. 엘레너 루스벨트(1945년 별세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부인이며 참여적 여성운동가로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음), 중국인 창 박사(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장제스가 통치하는 자유중국 사람이었다. 그는 이 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세계 인권 선언에 서양적 사고만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레바논인 샤를 하비브 말리크(엘레너 루스벨트와 함께 이 위원회의 보고책임자를 맡았고, 종종 위원회를 이끌어가는 ‘동력원’이라고 소개된 사람), 프랑스인 법률가이자 외교관 르네 카생(인권 문제에 관해 프랑스 외무부에 자문을 구하는 일을 담당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인권 선언의 여러 조항을 직접 작성했다.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국가가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그때까지 자기들이 식민지에 행사하던 주권이 위협받을까 저어하는 와중에도 과감히 이 선언의 내용을 썼다. 그는 인권에 대해 엄격하고 개입주의적인 입장이었다), 존 피터스 험프리(캐나다인 변호사 겸 외교관, 로지에의 측근으로서 400쪽에 달하는 인권 선언 초안을 썼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스테판 에셀(프랑스 외교관으로, 로지에의 보좌팀에서 최연소자이면서 팀장을 맡았다). 이만하면 이 위원회에 ‘자유 프랑스’의 정신이 얼마나 많이 깃들어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유엔은 1948년 파리 샤이오 궁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유엔에 신규 채용된 공무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그중 대다수는 보수가 많은 자리를 탐내 ‘이상을 추구하는 주변적 인물들을 고립’ 시켰다고 에셀은 회고록에서 술회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셀은 유엔을 떠난다. 프랑스 외무부는 그를 국제기구의 프랑스 대표부에 근무하도록 발령했다. 에셀에게는 이것이 뉴욕에 그리고 유엔에 잠시나마 복귀할 기회였다. 알제리 전쟁 기간에 그는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1977년 엘리제 궁의 비서실장 클로드 브로솔레트-BCRA의 국장을 역임한 피에르 브로솔레트의 아들-와 뜻이 잘 통하는 에셀에게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제네바에 본부를 둔 유엔의 프랑스 대사직을 제안했다. 에셀은 프랑스의 국가 요직을 맡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자유 프랑스’ 시절 런던에서 알게 되었고 그 후 1946년 뉴욕에서 재회했는데, 당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파견된 프랑스 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에셀의 회고록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 내의 이 변화” 덕분에 그가 정식 외교관 지위를 갖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때 변화란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일이다. 에셀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다국간 협력 부문만을 담당하던 전문가로서 정년퇴직을 2년 앞둔 외교관이었던 내가 프랑스 대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썼다. 이후 그는 사회당에 입당한다. “사회당에 들어간 이유를 나 스스로 물어본다. 왜 입당했느냐고? 첫 번째 답은 1995년의 충격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설마 자크 시라크를 대통령으로 뽑을 만큼 신중치 못할 줄이야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후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그는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한 아내와 함께 2008년과 2009년에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그곳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증언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
93세의 노령에도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여기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사람, 스테판 에셀이 바로 그 사람이다. - 실비 크로스만(앵디젠 출판사 편집인)
참고자료
알라딘, yes24 저자소개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두 ‘악마’의 만남
p15~16 에셀 : 1948년 ‘세계인권선언’ 문안을 작성할 때 저희는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이 선언문에서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우리가 행동하고 어떤 일들을 성취해갈 때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하는 것임을 선언문에 명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 신에 관한 언급은 하지 말자”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장펑춘 교수 같은 분의 의견이 그러했습니다. 장교수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 쪽이 아니라 국민당의 장제스 쪽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공자 전문가, 극작가였습니다. 이 문제에 해법을 제시한 사람은 당시 옵서버 자격으로 선언문 작성에 함께 했던 바티칸 교황청 대표였습니다. 그는 “신을 언급하지는 말되, ‘존엄성’이라는 말을 넣자”고 했습니다. 세계인권선언문 서두를 읽어보면 ‘인류 구성원 모두에게 내재하는 존엄성’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선언문을 작성할 당시 우리는 인간 가족이 환경 자연, 지구와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전 세계의 에너지를 끝없이 써도 환경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앞으로 20년 후에는 지구에 사는 70억 인류가 “적어도 우리가 좋아하는 도시 파리만은 끔찍한 일을 면할 수 있었으면…….” 이런 말은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파리만이 아닙니다. 자연 전체가 우리와 공동 운명입니다. 우리는 존엄성의 개념을 자연에까지 넓혀 적용해야만 합니다. 자연 또한 망쳐질 수 있고, 분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호의존
p19~20 라마 :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낳은 결과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유일한 법칙은 연기(緣起)의 법칙(불교 교리의 바탕을 이루는 법칙으로, 일체의 만물과 현상은 원인과 결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p20~21 라마 :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만의 아름다움이 있고, 우리는 여러 종교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보편적 수준에 이르고자 한다면 다른 차원, 즉 ‘세속 윤리’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세속’이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종교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속 윤리는 모든 종교를 존중하며, 종교를 믿지 않을 권리를 지닌 비종교인도 똑같이 존중합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의 종교, 하나의 진리’라는 생각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가족이라는 좀더 넓은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다양한 종교, 다양한 진리’라는 생각을 권장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인권선언에는 이 종교, 저 공교의 구분이 없습니다. 인류 전체를 이야기하지요.
p23 라마 : 우리의 미래는 현재에 달려 있고, 어떤 계획이든 그것을 추진할 때는 장기적인 결과를 생각하면서 해야만 합니다. 1,000년 후까지는 못 내다본다 해도, 최소한 10년 후는 내다보아야지요! 숱한 파업, 그리스와 다른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소요사태 등을 보십시오. 만약 엄격한 조치를 단번에 난폭하게 강요하지 않고 조금씩 점진적으로 취했더라면 과연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이런 것을 저는 ‘전일적 관점의 결핍’이라고 부릅니다. 정신의 지도가 없는 셈이지요.
정신의 지도
p26 에셀 : 아는 것이 행동이 되려면 이보다 조금 더 앞서가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 ‘무언가’는 성하께서 ‘연민’이라고 적절하게 말씀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연민심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혼자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남들과 함께, 남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디 남이 잘됐으면 하는 배려로 우리 모두가 연결된다면 그때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p27 라마 : 연민, 그렇습니다. 그건 책임감이기도 합니다. ‘내게는 내 집을 보살필 책임이 있고, 앞으로 태어날 내 자손 세대의 운명에 대한 책임도 있다’, 이렇게 자신이 의식할 때, 그 때 남들의 의식이 따라오고 행동이 따릅니다. 책임감은 의식하는 데서 나옵니다. 책임감은 믿음에서가 아니라 분석에서 나옵니다. 현존 교육체계는 그 본질상 물질적 가치 쪽을 지향합니다. 마음의 체계를 세워주고 가르쳐 주는 내용은 거의 없지요.
우리는 정신의 지도를 지녀야 합니다. 그 지도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이행하는 법을 알 수 있고, 이곳에서 시작된 감정이 어떻게 다른 감정을 자아내며 그 감정은 또 어떻게 다른 감정을 만들어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지도가 있다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활동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8 제가 생각하기에 성하께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길잡이 삼아 이 정신의 지도를 잘 발전시키고 감정, 정서, 그리고 그 감정과 정서를 비폭력적으로 지켜내는 방법들을 지도상에 입력하시는 듯합니다.
저희들은 폭력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옳다면, 자, 그럼 행동하자!”라고 말합니다. 반드시 남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를 담습니다. 그것은 성하의 메시지입니다만, 어쩌면 현대적 사유―여성들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 시대―의 매시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p29 라마 : 인간적 감수성, 연민, 비폭력 같은 것들이 발전해가는 데에 여성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합니다. 에셀님이 방금 강조하신 것처럼,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이런 것의 계발이 아직은 한참 덜 된 상태지요. 21세기 현대 사회는 연민, 관용 같은 인간적 심성의 계발보다는 지적이고 학문적인 탁월성만 강조하는 사회입니다.
티베트의 분신 사태
p31 에셀 : 자살의 책임이 분신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계속 삶을 이어가지 못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할 수는 없을까요?
p32~34 최근 저는 매우 지식수준이 높은 베이징의 한 중국 청년으로부터 펴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중국 정부의 선전 탓으로 달라이 라마가 분리주의자이며 독립을 획책하는 자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도에서 중국까지 불교 성지 순례를 한 어느 티베트인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는 달라이 라마의 입장이 티베트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티베트 문화를 말살되지 않게 지키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부터 달라이 라마를 온전히 지지한다”며, 만약 이 실상을 알게 된다면 중국인들 100퍼센트가 저를 지지할 것이라고 썼습니다. 중국 정부 지도자들이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속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티베트인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강한 정신을 지녔습니다. 이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큰 ‘우리’
p35 에셀 :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것만큼 그리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쨌든 바뀌고 있습니다. 성하의 메시지는 믿음과 용기의 메시지입니다. 저도 제한된 방도를 통해서나마 젊은이들에게 어떻게든 이를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상황이 좋지 않다. 하지만 믿음과 신뢰를 갖고 용기를 보여라. 그러면 세상이 차츰, 또는 문득 달라질 것이다”라고요. 단, 혼자 행동할 것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행동하라고요. 21세기 초, 오늘날의 세대는 우리의 젊은 시절에 비하면 엄청나게 유리합니다.
p36 에셀 : 우리의 현대 사회는 취약합니다. 때로는 이 사회가 붕괴하고 있는 듯도 합니다. 따라서 변화는 지난 여러 세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서양인들이 인권에 대해 제대로 언급을 시작하기까지 몇백 년이 걸렸습니까? 400년? 500년? 성하께서는 대단한 이점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미 수천 년 된 ‘정신’, 불굴의 힘을 지니고 여러 세기가 지나도 그대로 있으며 늘 변함없이 탄탄한 이 ‘정신’을 믿으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서양인들에게는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서양인들은 16세기를 토대로 삼습니다. 16세기는 유럽이 변하기 시작한 시기이고, 이 도약이 프랑스 혁명, 아메리카 혁명,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이 실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었건, 서양의 역사는 점진적으로 구축되었습니다. 하지만 성하께서는 탄탄한 바탕 위에 서 계시며, 또 아주 오래된 토대를 작고 계시다고 느껴집니다.
지팡이도 미움도 없이
p44 라마 : 에셀 님은 그저 살아남으신 정도가 아니라 존엄성을 잃지 않고 당당히 생존하신 것이지요. 에셀 님은 적에 대해서 증오심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우리 불교의 수행법 중에는 ‘적이 최고의 스승이다’라는 말을 거듭 외는 방법도 있습니다. 결연함을 잃지 않는 데에 아주 유용한 품성인 관용과 인내, 그것을 실천하는 법을 적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더없이 열심히 실천한다 해도 인내가 한계에 이르면 미움, 두려움, 의심이 들게 마련이지요. 관용은 약함의 징표가 아니라 힘의 징표입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일수록 관용의 마음이 더욱 우러납니다. 화를 내는 것은 취약하다는 표시입니다.
빈부의 격차
p45 에셀 : 불행히도 세상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응당 누릴 만한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가난하고 불행하다. 그래서 저쪽 사람들, 저 자본가들, 권력을 쥔 자들, 그들을 증오하고, 그들을 없애버리고 싶다…….” 이들의 정신과 마음을 연다는 것,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p45~46 라마 : 1973년, 제가 처음으로 유럽을 방문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제네바에 갔던 어느 날 제가 말했지요. 저는 구세대에게 큰 희망을 두지 않는다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고 완고하기 때문이라고. 그랬더니 어느 영국 노신사가 충격을 받더군요. 그 뒤로 빈부 격차는 더욱더 심해졌습니다. 당시는 세상 사람들이 지금처럼 연결되지 않고 고립되어 살던 시절인지라, 당연히 사람들은 위협을 느꼈지요. 서구 사회는 추구하던 목표를 달성한 지가 이미 어느 정도 지났는데도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그 방식, ‘우리’와 ‘그들’을 가차없이 나누는 방식입니다.
빈부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경제제도의 주체들이 우리 사회에서 무시무시한 권력을 장악하고, 빈곤이 계속 곳곳에 절망을 흩뿌리고 있으니 우리 모두는 우리의 경제를 공감에 기반을 둔 경제로 변모시킬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공감 기반 경제’란 존엄성과 정의라는 대원칙을 ‘세계인권선언’이 명시한 대로 누구에게나 적용시키는 경제입니다.
빈곤은 그 어느 곳에서 창궐하든지, 사회적 조화를 위협하고 불건강한 상태와 괴로움과 무장 충돌을 조장하는 데 한몫을 합니다. 왜냐하면 빈곤은 그저 도덕적 차원에서 비난할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 삶의 차원에서도 빈곤은 각종 문제, 분쟁, 전쟁의 피치 못할 원인이 됩니다. 저는 이를테면 카시미르 지역을 두고 벌어지는 인도-파키스탄 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테러리즘 등을 생각해봅니다. 만약 이런 여세로 분쟁이 계속된다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다분합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점점 더 벌어져만 가는 격차, 이것이 자아내는 고통은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단지 고통받는 사람들과 공감하자는 부탁만이 아니라 사회 정의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좀더 많이 참여하자는 부탁도 함께 드립니다.
p47 에셀 : 모든 이에 대한 존중은 오늘날 국제법을 통해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도가 갖추어진 국제적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1945년부터 우리에겐 유엔헌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땅이 신으로부터 받은 땅이며, 헤브론도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말합니다. 유엔 헌장은 그 땅을 당신들에게 주지 않았다고. 유엔 회원국 국민이라면 유엔 헌장과 세계인권선언을 존중하고, 그 선언이 수호하는 문화적・사회적 권리도 존중하라고. 국제법은 국가이기주의에 앞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민족이 고유의 문화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명시한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에, 국가이기주의를 고집하는 일을 단념하고 국제법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그 나라에 압박이 가해져야만 합니다.
비폭력의 실천
p48~49 에셀 : 인권 수호 활동은 스스로 비폭력적인 활동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권 침해 사례들은 폭력을 낳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 ‘존중’이라는 개념이 개입합니다. 이 개념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관용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나의’ 인권이 침해되었으니 나는 폭력에 의존해도 된다”라고 말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개인적 이익 한 가지를 수호하기 위한 분노는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분노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 모두와 관계된 인간적 가치의 이름으로 분노하자는 이야기입니다.
p49 라마 : 만약 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거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라면, 그 어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면, 그때는 설령 이런 행동들이 외관상 폭력적으로 보인다 해도 그 본질은 비폭력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폭력과 비폭력을 나누는 구분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 ‘동기’입니다. 현대 세계에서 그야말로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부패, 이것은 폭력의 한 형태라고 저는 자주 말합니다. 부패의 동기는 속임수와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부패는 본질상 폭력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p51~52 라마 : ‘만약 내가 저 선원을 죽이지 않으면 다른 499명이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죽이면 나는 499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또한 그가 499명을 죽이는 죄를 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인 죄에 따른 악업의 결과를 그대로 받게 된다. 게다가 만약 내가 음모를 꾸미는 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499명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래서 선장은 무기를 들고 그 선원을 죽입니다(대승불교 경전인 ‘대방편경’의 티베트 역에 나오는 ‘대비’ 선장 이야기로, 갈등 상황에서 방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
단호하고 용감하게
p53 에셀 : 수백 명의 죄를 면해주기 위해 자신이 희생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이야기는 현대의 독재자들 모두가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나는 고문이라는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사람을 고문해서 무기가 어디 있는지 실토케해야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처럼 때로는 폭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우리는 폭력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폭력의 힘을 빌려 독재에 맞서려 합니다. 독재에 대해 우리는 무력하게 대처했는데, 사실은 진작 그 독재 세력이 득세하지 못하게 만들었어야지요. 민중의 고통보다 이기적 이득이 앞선다는 미명하에 사람들은 그런 독재를 묵인한 것입니다. 좀더 일반적으로 표현해,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합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은 때로 큰 충격으로 작용해 커다란 변혁의 기폭제가 될 수 있습니다.
p57 에셀 : 비폭력, 다른 한편으로는 단호함,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완벽히 자신을 신뢰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면서도 폭력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노한’ 이들의 움직임은 무엇을 말합니까?"우리에겐 지키려는 가치들이 있다. 그 가치에 관한 한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호하다. 그러나 폭력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단호하고 용감하게, 불굴의 의지를 보이십시오.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바치십시오. 그러나 절대로 남을 죽이지는 마십시오!”라고. 이것은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p58 라마 : 영국의 제국주의가 비록 나쁘기는 해도 어떻든 민주주의적 가치에 토대를 둔 정부는 갖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법체계는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갖추고 있고,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간디는 감옥에 가서도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공산주의와 같은 현대판 제국주의에는 민주주의도 없고,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규범도 없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하지만 저는 주장합니다. 티베트의 일부 젊은이들은 우리를 보고 너무 수동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비폭력적 방법으로 우리의 권리가 인정받도록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과학의 진보와 정신의 진보
p60~62 에셀 : 카뮈는 매우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비폭력적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려면 높은 정신수준의 소유자여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라고. 그로서는 정말 자기 입장에서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나는 비폭력을 받아들일 만큼 강한 사람이 못 된다.” 이 말이지요. 비폭력 원칙을 견지하며 살 수 있으려면 아주 강인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 지금 처한 상황이 하도 심각해서 폭력을 쓸까 하는 유혹이 드는데 이런 유혹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으려면 넓고 큰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카뮈는 알제리가 프랑스에서 독립하려고 투쟁하던 시대에 알제리에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간디처럼 행동할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확실히 비폭력을 구현하려면 지성만이 아니라 감성도 필요합니다.
p62~63 어느 독일 목사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윤리라는 것은 모두 종교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라고. 이슬람교도인 제 친구도 그런 견해를 갖고 있더군요. 종교 없이는 윤리도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를 상대로 한, 즉 보편적인 교육은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연민, 관용, 신앙과 무관한 전일성 등의 인간적 품성을 계발하는 것은 반드시 종교에서 비롯되지 않은 가치에 토대를 두고도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63 이러한 보편적 가치들을 저는 ‘세속 윤리’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세속’이라는 표현은 인도 헌법에 나오는 표현인데, 이 말이 종교를 존중하지 않거나 경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모든 종교와 비종교인들은 똑같이 존중한다는 뜻이지요. 이젠 점점 더 많은 교육자, 과학자들이 실험적인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미 아주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습니다.
p66 앵디젠 : ‘정신의 진보’가 세계인권선언이 제안한 큰 기획의 틀 안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확단되어야 할 소명을 띠고 있는 만큼, 이를 도입한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군요. 현재로서는 세계인권선언 27조에 ‘과학의 진보’거 명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정신의 과학’에 기존의 종교적 타당성을 넘어 보편적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과학의 진보 덕택입니다.
정신적 민주주의
p67 민주주의, 이는 ‘사람들’입니다. 특권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도처에서 최상층 부자들과 극빈자들의 기막힌 격차를 목도한다면, 민주주의는 뭔가 행동하고 또 해야 하며, 극빈층이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정치는 이런 것을 위해 하는 것이며, 우리는 여기서 정신적 영역을 회복합니다. 우리는 단지 자기 나라의 국가적 자부심에만 관심 갖는 정부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도 함께 일하기를 배우는 정부를 갖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부 간 소통, 그리고 여러 나라의 참여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세계 곳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누구나 알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남부에서 누가 살해당했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사람들은 즉시 압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 세계를 위한 민주적 리더십, 방금 성하가 말씀하신 대로 비폭력과 공감을 계발하는, 종교와 무관한 정신 수련과 상통하는 그런 리더십입니다.
유엔 개혁
p71 에셀 : 이제는 권좌에서 놓여나 오직 인류의 안녕에만 관심을 두는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들로 구성된 ‘현자위원회’, 그런 것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거부권을 없애시오. 사람들을 모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한 분들로 구성된 위원회 말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 우리에겐 젊은 세대도 필요합니다. 곳곳에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런 식으로 통치받는 것을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우리는 진정으로 민주 정부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젊은 세대 말입니다. 그런 젊은이들이 거리에 많이 모인다면, 그제야 비로소 정부들은 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든가 아니면 젊은이들은 억압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억압하고 싶지 않다면, 현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편이 그들에게도 이로울 것입니다!
p73~74 앵디젠 :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인 퐁쇼 신부님은 크메르루주의 집단수용소 체제를 비판하는 국제 여론을 처음으로 불러일으킨 분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이 일파만파를 일으키겠지만, 내 생각에 인권이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그리스도교―내가 실천하고 있는 인도주의 활동의 기반이 되는,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라고 보는 전통―의 유산인 듯하다. 이 전통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이며, 그래서 신성한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런데 원래 ‘인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선행이나 악행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채워가는 에너지의 다발일 뿐이다! 그래서 누구에게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심판된다. 인류에 대한 그리스도교식 기여가 강요될 수는 없다. 게다가 내 생각에 서양은 그 물질주의와 오만 때문에 ‘인권’을 운위할 만한 입장이 아니라고 본다.” 이 말씀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p74~75 에셀 : 저는 그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퐁쇼 신부님이 물질주의적인 서양의 결함을 잘 지적하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세계인권선언문을 만든 사람들의 노력은 단지 서양만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성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선언문 작성자 중에는 중국인, 레바논인 각 1명씩, 라틴 아메리카인들, 그리고 인도인 1명도 있습니다. 르네 카생이 이 선언문의 원제에 ‘보편적’이라는 수식어를 공연히 붙인 것이 아닙니다. 국제적인 발표문들 중에 ‘보편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오직 이 선언문뿐입니다. 이 선언문이 서양 중심주의라는 옳지 않은 비난을 함으로써 세계의 여러 독재자들이 그 핑계로 이 선언문의 요구사항들을 지키지 않게끔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임을 지는 것은 사람들, 민주주의자들입니다.
p75~76 라마 : 어느 나라, 어느 대륙 출신이건,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똑같은 인간입니다. 필요로 하는 것도, 관심사도 같습니다. 인종, 종교, 성별, 정치적 지위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 합니다. 인간, 사실, 모든 유정들은 행복을 추구하며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아시아의 몇몇 나라 정부는 주장하기를, 세계인권선언에서 정한 인권의 기준은 서양에서 주장하는 기준인데 아시아와 또 다른 제3세계는 문화가 서양과 다르고 사회적・경제적 발전수준도 균일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곳에는 이 선언이 적용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시아 사람들도 대부분 저처럼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자유, 평등, 존엄을 열망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본성이며, 아시아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으니까요.
저는 경제발전의 필요성과 인권 존중의 필요성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다고 봅니다. 문화와 종교의 풍부한 다양성은 어느 공동체에서나 인간의 기본권 강화에 도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성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인간 가족의 구성원으로 우리를 이어주는 가치와 열망들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문화적 차이는 어떤 경우에도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없습니다. 다른 인종, 여성, 사회적으로 취약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는 일은 어떤 차이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만약 정당화하는 일이 있다면, 그런 행동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보편적 원칙이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인권의 보편성에 반대하는 것은 주로 권위주의, 전체주의 정권들입니다. 이런 생각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런 정권들에게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장기적으로 또한 좀더 광범하게 보아 이득이 되게끔,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원칙들을 준수하고 그 원칙에 따르도록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옮긴이의 말-두 그루 거목과 만나다
p95 1997년에 출간된 스테판 에셀의 회고록 『세기와 춤추다』에는 외교관으로 일했던 아프리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책도 번역 중이라고 말씀드리니 혹시 내용 중에 같은 얘기가 되풀이되지는 않더냐고 물으셨다. 심혈을 기울여서 쓴 자신의 회고록임에도 이런 질문을 하다니, 자기 객관화와 자기 점점에 투철한 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권마다 새롭습니다”라는 나의 대답은 예의상 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담이었다. 그분의 회고록이 그렇고, 『분노하라』에 이어 나온 그의 여러 대담들도 그렇다. 이 책도 물론이다. 서두에 편집인들도 밝혔듯 이 책은 『분노하라』를 다시 우려낸 재탕이 아니라 삶의 연륜이 두텁고 정신성에서 그 누구보다 우뚝 서 있는 두 거성이 만나 나눈 이 시대 ‘정신의 지도’에 관한 미래지향적 핵심 담론이다.
p96~97 "'분노하라‘라는 이 호소는 자칫 나쁘게 해석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당장 살 집이 없어 분노할 수도 있으며, 자기 나라에 와서 사는 외국인이 너무 많아서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분노하라‘의 참뜻은 레지스탕스의 정신과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된 가치들을 정부나 기업들이 침해할 때 이에 분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분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다음엔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p97 남은 생애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행동해온 주제, 그것은 인권입니다.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것도 계속해서 인권이 세계 곳곳에서 존중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저항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난폭하게 대하고 멸시했을 때도 나는 항거했습니다. 내가 일생 동안 외교관으로서 한 일은 서로 다른 문화, 다른 나라들이 만나서 합의사항에 동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합의사항이란 다름이 아니라 독재자를 처단하게 하는 국제적 형법을 만들게 하자는 것입니다. 내 일생을 통틀어 공적으로 가장 헌신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한편 내 일생에 개인으로서 가장 내밀한 애착을 품은 것은 시입니다. 실ㄹ 외우는 것은 정말 큰 기쁨입니다.”
p99 2012년 세계정세의 흐름에 대해 질문하자 명석한 답을 해주셨다. “지금은 무척 힘든 시기입니다. 금융・경제・정치・생태적으로 모두 위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제대로 된 답을 찾아야만 합니다. 201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생태에 관한 국제회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좀더 잘 다스려지는, 즉 ‘세계 거버넌스’에 의해 조정되는 세계, 가장 빈곤한 이들의 기본적 요구를 배려할 줄 아는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진정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나는 다음 세대가 책임 있고 현명하고 강하고 인간적으로 열려 있다고 믿습니다. 현재의 세계에는 물론 어두운 힘, 부정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라는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를 보면 격려도 됩니다. 튀니지, 이집트 등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좀더 잘, 민주적으로 살겠다는 민중의 의지의 표명이니 그것을 볼 때 큰 힘이 됩니다.”
p105 "불교와 과학의 대화를 중시하는데, 양자의 출발점이 다른데도 어떻게 대화를 하십니까?“
이때 달라이 라마의 답은 ‘팩트를 갖고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축적된, 사실 규명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화에 대해 얘기했다면, 화날 때의 생리적・화학적 변화를 분석해가면서 과학자들과 논의를 진전시킬 수가 있고, 일단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뒤로 돌리고 실증적인 체험의 영역부터 접근하여 거기서 서로 얘기가 통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어린 나이에 포탈라궁에서 생활할 때부터 이미 과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고, 이는 망명 후에도 더욱 폭넓어져 오늘날 세계인이 불교에 큰 관심을 갖게 하는 촉매가 되고 있다. 스트레스 요소가 늘어만 가는 세상에서 평온한 마음을 지니는 법, 행복해지는 법을 달라이 라마는 과학과의 대화를 통해 실증적으로 추구한다. 망명 중인 티베트 승려들의 과학 교육에도 신경을 쓰고, 국제 과학자 대회도 열고, 과학자들과 수시로 의견을 나누며 뇌과학, 신경과학의 첨단 연구 성과들을 명상, 수행과 직결시키기에 그분의 이야기가 현대인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108~109 생각이 곧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이때 동력원이 되는 것이 바로 ‘연민’이다. ‘compassion'의 어원은 ’괴로움을 함께함‘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측은지심, 심리학에서 말하는 공감. 기실 ’정신의 지도‘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부디 남이 잘됐으면 하는 배려로 우리 모두가 연결된다면 그때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리 단순한 지도를 그리지 못하여, 혹은 그리기를 짐짓 거부하며 우리는 낙담하고 얽히고 좌절한다. 남에 대한 배려와 자애로 우리가 연결된다는 것을 다람살라에 가서도 새삼 확인하고 왔다. “나의 종교는 친철과 자비입니다”라던 달라이 라마의 말씀을.
p111 자기부터 바꿀 수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 복잡다단한 문제가 얽혀 있는 오늘의 세계를 제대로 통찰하고 개선해갈 수 있는 영감을 주는 두 분에게 감사한다.
3. ‘내가 저자라면’
■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편집인의 말-왜 ‘정신’인가 두 ‘악마’의 만남 상호의존 정신의 지도 티베트의 분신 사태 큰 ‘우리’ 마음의 과학 지팡이도 미움도 없이 빈부의 격차 비폭력의 실천 단호하고 용감하게 과학의 진보와 정신의 진보 정신적 민주주의 유엔 개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주(註) 옮긴이의 말-두 그루 거목과 만나다 |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경제 속에서 경제와 정치민주화를 위한 요구가 높은 현실에서 21세기의 진보를 이루기 위한 인간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각자 동서양이라는 지역과 나이, 종교 등 많은 것이 다른 두 사람이 오로지 현시대에서 ‘정신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자신의 사상을 토대로, 현실을 토대로 이야기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정신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 핵심이라 말하고 있다. 과연 인권에 대한 새로운 보편적 가치들이 도출되었는지, 현대 교육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 유엔의 개혁문제, 과학과 민주주의 등을 중심 주제로 하여 정신적 진보를 갖추어가기 위한 논의들을 하고 있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달라이 라마가 종교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칫 이 이야기는 ‘종교’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염려한 것과는 달리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의 삶의 경험을 토대로 높다고 말하면 어색하지만 오래도록 생각해온 정신적인 성숙을 위한 방안을 이야기하기에 숭고함이 더해진다. 어찌 보면 짧은 대화임에도 그들의 생각은 잘 정제되어 있다. 모순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의 얼개들을 만들어 내고 실행하려 노력하고, 실행해 가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 보완점
스테판 에셀의 저작은 메시지의 명료함이 특징이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 않아도 명확한 메시지를 표출한다는 것인데 대담 형태의 책은 일방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비해 타인과의 의견나눔이기에 스테판의 생각의 흐름과 확고한 신념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동양의 사상가인 달라이 라마와 사회의 진보를 위한 ‘정신’의 진보를 이루기 위한 대담은 오랜 활동을 해온 대가의 논의들이라서인지 관념적으로 흐르지 않고, 실제적인 현실과의 문제를 끄집어내며 전개되고 있다.
포기하지 마라 - 분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제 ¡No os rindais!
스테판 에설 저, 조민현 옮김, 문학세계사, 2013.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행복하여라, 율리시즈처럼 멋진 항해를 한 사람은”
- 조아생 뒤 벨레
■ 한국어판 서문_세상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p11 스페인에 있는 그의 책 발행인 라몬 페레요가 2012년 말에 그에게 ‘분노한 사람들(인디그나도스)’ 운동 2년 후의 상황을 새로운 책에 담아볼 것을 제안했을 때. 스테판 에셀은 즉시그것이 스페인 젊은이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비록 건강이 많이 나빠졌지만, 그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2013년 1월 한 달 동안 나는 그의 집에서 세상과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기 위해서 네 차례 그를 만났다. 이 책은 우리가 나눈 대화의 결과이다. 이 책에 있는 모든 생각과 말은 다 그의 것이다. -2013.4.11 파리 유이스 우리아
■ 서문_현명한 사람의 유산
p13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자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 인디그나도스)’ 운동을 예고한 연로한 투사는 자신의 뒤에 풍요롭고 풍성한 긴 생애를 남기고 2013년 2월 27일 새벽 파리에서 숨졌다. 향년 95세였다.
p17 "증오는 위대한 일을 도모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유럽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온 몸으로 관통하며 살아낸 이 생존자는 특히나 도덕적인 면에 대해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에셀은 증오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질투라는 인간의 감정을 자신의 삶에서 제거한 것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그것은 로슈의 소설 『쥴 앤 짐』을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각색한 동명의 영화의 배경이 된, 삼각 애정관계로 확대된 커플인 부모 사이에서 그가 태어났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p18 1년 전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와 가진 인터뷰에서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는 그에게 다음 계획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죽는 것을, 그것도 곧 죽는 것을, 희망합니다.”라고 그는 허심탄회하게 대답했다. 돌발적인 말이 아니었다. 스테판 에셀은 이제 알맞은 시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종종 말해왔던 것처럼, 죽음은 결국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었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의에 따라 끝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포기하지 마라
한 친구의 목소리
p25 언제나 스페인에 대한 나의 생각은 프랑코와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대항하여 용기 있게 싸우고 방어했던 영웅적인 나라라는 것이었다. 독재와 파시즘에 항거하는 스페인의 투쟁은 나의 투쟁 목적과 같았다. 그 부분에서 나는 강제수용소 최고의 동료 중의 하나였던 스페인인 호르헤 셈프룬과 뜻이 일치했다.
p29 나는 항상 스페인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며, 내가 무척 존중하는 스페인 문화에 깊은 친근감을 느낀다. 스페인 문화가 없는 유럽 문화는 무엇일까? 세르반테스와 우나무노 없는, 『돈키호테』없는 우리의 존재는 무엇일까? 돈키호테는 ‘저항’이라는 스페인 사람들의 성격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는 이 밖에도 선을 위한 투쟁에서 보편적인 상징성을 갖는다.
분노와 참여
p30 분노의 깃발을 드높이면서 2011년 봄에 일어난 스페인 젊은이들의 운동은 스페인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많은 불신을 받고 있는 기존 정당 조직과는 아무런 관련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분노한 사람들(인디그나도스)’ 운동은 단지 금융뿐만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접수하려는 소수독점 지배세력의 조작을 거부하는 표현으로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온 마음을 다해 요구하는 시위였다. 그것은 기존의 공식적인 통로와는 다른 방식으로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표출하려는 것이었다.
p31~34 스페인 청년들에게, 아랍의 청년들처럼 어떻게 이 운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정부에 영향을 미치며, 대대수의 시민이 요구하는 개혁을 추동하기 위한 효과적인 대안을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스페인의 경우에 ‘분노한 사람들’ 운동의 성격은 쉽게 해석될 수 없는 것이었다. 2011년에 ‘분노한 사람들’ 운동이 그 지향하는 바와 다르게 좌파 정부를 무너뜨리고 우파 정부가 들어서게 하는 데 기여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나는 사회당 정부가 스페인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정책을 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정보를 열렬히 지지했었다. 따라서 그의 실패에 나는 무척 실망했다.
그러나 즉각적인 정치적 효과와는 다르게 스페인에서의 ‘분노한 사람들’ 운동에는 어느 누구도 간과할 수 없는 효력이 있었다. 이 운동은 “어차피 바뀌지 않을 테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라고 사람들이 말하며 순응주의 또는 패배의식에 빠지려는 위험한 순간에 다시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성과를 거두었다. 패배주의를 벗어나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들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이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놀랍게도 이 운동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운동의 동력이 1년 안에 고갈돼 버릴 거라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그것은 아직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p35 그러나 분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만약 누군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거리에서 시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분노가 진정한 참여로 변모되는 것이 필요하다. 변화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소수독점 지배세력을 거부한다는 우리의 의사는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와 정치에 대한 의욕적인 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항의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행동해야만 한다. 대규모 추방이라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태어난 ‘부동산 저당대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행동은 매우 훌륭한 예이다. 아다 콜라우가 지도하는 스페인 시민운동은 국민당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그들이 최초의 결정을 수정하여 집을 은행에 넘기고 자유롭게 되는 부동산 지불저당 관련 국민요구 법안을 국회에서 처리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현명한 행동을 동반한 거리의 압력이 성취한 것에 대한 한 예이다.
p35~36 나는 지독한 경제 위기와 부패 스캔들에 의해 악화된 스페인 사회에 존재하는 불신과 불만족이 일부의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태도를 가져오게 할 수 있음을 염려하고 있다. 비록 동일하지는 않지만, 오늘날 유럽 상황은 1930년대 심각한 위기로 말미암아 결국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상황을 어느 정도 떠오르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당시와 유사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현자의 위기와 그로 말미암은 고통은 공포와 증오를 격화시키고 있다. 극단주의가 우리에게 잠복해 있는 것이다.
p36~37 그러나 혁명의 길이나 전체주의 사상으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 혁명은 결국 전체주의를 부른다. 나는 소비에트 혁명과 함께 태어났다. 아마 그래서 혁명이라는 말에 과민반응을 일으키는지 모르겠다……나는 위기로 인한 고통에 대한 대답이, 또 다른 피델 카스트로나 또 다른 체 게바라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가치를 지키는 개혁적 민주주의의 힘을 결집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20세기 동안에 많은 스페인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등 유럽인들은 조직화된 운동과 자신의 양심을 멀리하고 모든 판단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를 떠받들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전지전능한 안내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반공산주의자 역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혁명적이거나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변화는, 행동・정치적 협의・민주적 참여를 통한 현명한 작업 속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민주주의는 목적이다. 그러나 또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운동이 효과적인 조직으로 변모되지 못한 것을 비판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이 운동의 주요한 약점이다. 하지만 또한 위대함일 수 있다. 비대한 조직 역시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특히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운동이 카리스마 넘치는 위대한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려는 유혹을 피할 만큼 충분히 신중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만족스러웠다. 어느 누구도 일부 우두머리들이 명령을 내리고 나머지는 이를 따르는 피라미드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p37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의미 있게 참여할 수 있는 분야 중의 하나는 사회적 연대에 기반을 둔 경제 영역이다. 또 다른 영역으로 생태와 자연 환경을 지키는 것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정당하고 지구를 존중하는 발전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창조할 때에야,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p38 정치에 대한 욕구를 회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정치없이는 진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토론을 유발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등 정치에 참여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 베를린 자벽이 무너진 이후 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소련의 지배에 대항한 역사적인 반체제 인사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각자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당신이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지라도, 당신이 아무런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들 각자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p39 나는 정당에 들어가는 데 지나치게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존의 정치 세력을 이용할 것을 확신을 가지고 지지한다. 밖에 있는 것보다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나는 항상 동료들에게 똑같은 말을 한다. 당신들ㄹ이 문제와 싸우기를 원한다면, 세상을 바꾸길 원한다면, 우리들이 속해 있는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그 일은 정당들의 도움으로 행해져야만 한다고. 비록 그들이 결점을 갖고 있고, 불완전하고,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말이다.
p40 우리들 각자는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가장 가깝고, 우리의 요구사항을 가장 잘 도와줄 준비가 된 정당을 찾아야만 한다. … 그런데, 정당들에게 그러한 활력과 공격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 스스로임을 잊지 말라.
민주주의 대 과두정치
p41~42 ‘분노한 사람들’ 운동 뒤에 있는 근본적인 열망은 무엇인가? 스페인과 세계 여러 곳에서 결집되고 있는 젊은이들의 공동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그들의 기본적인 열망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과두정치를 몰아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다시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시민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정부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모든 권력을 가지려는 소수 특권층이 아니라 국민들 속에서 나오기를 바란다. 물론 그 국민이란 준비가 되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올리가르키아’라는 낱말이 갖고 있는 이중의 의미는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정의한다. 그 하나는 동일한 사회 계급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이 정부를 구성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을 자신들의 뜻대로 관철시키기 위해서 모인 힘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말이다.
p45 우리의 민주주의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와서 원기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각자가 우리의 운명을 한탄하며 앉아 있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일어나서 행동해야만 한다. 참가해야만 한다. 시민들의 결정적인 결집이 없었다면, 베를린 장벽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p45~46 꼭 필요한 변화를 가져오도록 광범위한 여론을 모아 강력한 시민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 변화는 대지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큰 강을 이루는 작은 지류들처럼 모든 차원에서의 개혁과 변화를 위한 수많은 행동들로부터 나온다. 내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정치적인 차원에서 정당에 가입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내부로부터 그 기능을 변화시키고 민주적 참여, 사회 경제, 환경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그 구조 속에 침투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좌파가 방어했던 근본적인 가치들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으라는 것이다.
시장독재에 대항하여
p50~51 경제는 그 자체의 논리로 고려되어야 하고, 국가가 적게 간섭할 때 더 좋은 성과가 나온다는 밀턴 프리드먼과 시카고학파의 이론은 완전히 어긋났고, 현재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심각한 위기로 이끌었다. 오늘날 우리는 1930년대와 매우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다. 루스벨트와 같은 용기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이, 즉각적인 대책을 채택해야 한다.
p52~53 또 다른 차원에서,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 노동자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독일이나 미국의 여러 주에서 시행하고 있는 ‘근로시간 단축제도’를 대안으로 고려함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에서 자행되는 대량 해고에 제동을 걸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하는 전체 일의 20%를 해고하는 것은 사회적 반향이 엄청나게 다르다…… 마찬가지로 실업수당을 연장하고, 실업자들이 다시 노동 현장으로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교육을 용이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절박한 일이다.
p54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많은 전선들이 있다. 우리 시민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익을 얻기 위한 헤게모니를 거부하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만들어 가야 한다. 즉 현재의 대량 소비 경제를 멀리하고 전체 이익을 존중하는 정당한 경제를 추동하고, 사회연대 경제를 강화하면서 우리가 상상하는 경제로 나아가는 데 힘쓰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p55 오늘날 이야기되는 세계화의 본질 또한 바뀌어야만 한다. 경제적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부과된 세계화이 개념은 이제 그만 버리고, 지구상의 모든 주민들이 운명공동채로 통합된다는 의식으로서, 인간과 문화의 교류를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척도로 세계화의 의미를 사유해야 한다. 세계 무역을 할 때, 사회와 환경 보호에 관한 동일한 규준을 모든 나라가 준수하게 하는 새로운 규칙을 도입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유럽, 우리의 유일한 희망
p61 생각들은 부족하지 않다. 모든 생각들이 다 환영받는다. 그런데, 경제적・정치적 통일을 앞당기게 하는 것은 실제로 그것을 채택하는 일이다. 비록 매우 작거나 불충분하게 보일지라도 먼저 그것을 채택해야만 한다.
p64 카탈루냐의 경우에는, 경제위기와 불만족스럽게 작동하는 민주적 시스템, 그리고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등이 많은 카탈루냐 사람들에게 독립 국가가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을 심어준 것 같다.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위험하다. 나는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보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 보다 근본적인 것은 각각의 나라에서 진정으로 민주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그것이 ‘분노한 사람들’의 목표가 될 것이다. 과두제로 통치되는 카탈루냐가 과두제로 통치되는 스페인보다 더 낫지 않을 것이다.
p64~65 유럽에서 민족주의적 정서의 확대는 어떤 경우에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현재의 상황은 내게 조금은 1930년대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위기는 민족과 영토 문제에서 외국인 혐오나 인종주의 같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파시즘과 반유대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 민족주의와 유로 회의주의가 확대되고 강요되는 것을 우리가 그냥 방관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가장 어두운 쪽으로 다시 끌려들어가는 위험에 놓일 것이다.
야망을 가져라!
p66~67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다. 사회적・경제적 부정으로 또는 환경 파괴로, 또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소멸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세우기 위해 건설적인 비전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야망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용기에서 태어나는 야망. 세상 일이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낙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염세주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야망을 가져야만 한다. 포기하지 마라!
■ 해설_스테판 에셀의 삶과 사상 | 조효제
p74 에셀은 지적이고 문화적인 중산층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탓에 전쟁의 그늘을 거의 느끼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다. 스테판의 아버지 프란츠(1880~1941)는 작가이자 번역가였다. 비판이론 계열의 저명한 문화비평가인 발터 벤야민과 절친한 사이였던 프란츠는 벤야민과 함께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에셀은 장성해서도 아버지의 친구 벤야과 교유를 갖게 된다.
p74 프란츠의 부모, 즉 에셀의 할아버지 하인리히와 할머니 패니는 유대계로서 1880년대에 베를린으로 이주해 와서 루터교로 개종했던 가정이었다. 따라서 에셀은 민족으로 보자면 유대계에 속하면서 종교적으로는 딱히 유대교 신자라 할 수 없는 독특한 가계 내력을 지녔다. 나중에 에셀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견해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동족을 배신했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에셀의 어머니 헬렌(1886~1982)은 개신교 집안 출신의 저널리스토로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재원으로 여류 명사였다.
p75 에셀은 일곱 살 때인 1924년 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여기에는 약간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어머니 헬렌이 프랑스 작가 앙리 피에르 로슈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아예 그를 따라 모든 식구가 파리로 이주해 버린 것이다. 공개적인 삼각관계라 할 수 있었는데 로슈는 이 당시의 경험을 자전적 소설 『쥴 앤 짐』에 자세히 표현해 놓았다. 쥴은 에셀의 아버지 그리고 짐은 로슈에 해당되는 캐릭터였는데, 이 소설의 로맨틱한 설정에 깊은 인상을 받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1961년에 동명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쥴과 짐의 구애를 동시에 받는 여성, 즉 에셀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카트린느 역할을 잔느 모로가 연기했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에셀은 집 바깥에서는 프랑스어, 가정에서는 독일어를 쓰면서 자라났다. 이 당시 에셀의 집에는 수많은 지식인, 문화인들이 드나들었다.
p83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망명정부의 프랑스 정보요원들이 대거 프랑스 현지로 사전에 파견되었다. ‘그레코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이 작전에서 에셀은 파견부대의 선발팀에 속해 프랑스에 낙하산을 타고 잠입하였다. 그의 임무는 프랑스 내에서 레지스탕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무전기를 배포하는 것이었다. 비밀리에 파리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한 에셀은 몇 년 만에 어머니와 재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 조직에는 밀고자와 첩자들이 많이 침투해 있었고 그 때문에 에셀은 결국 게슈타포에 체포되고 말았다.
p94 유엔에서의 인연으로 에셀의 관심의 폭이 전 세계 인권과 개발로까지 확대되었다. 젊은 날 유럽 내에서의 파시즘 반대와 인도주의 옹호 활동이 국제적 차원으로 외연이 넒어진 것이었다.
1953년 처음으로 사하라 이남지역을 여행한 후 에셀은 비서구권, 과거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아시아, 아프리카의 빈곤국들의 발전과 인권에 대해 더욱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에셀이 나중에 유엔개발계획의 부행정관으로 다시 유엔 관리가 되었던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에게 있어 프랑스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 생활과 인류 전체의 복지와 인권을 위한 활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에셀은 좁은 의미의 국익 위주로 사고하기 쉬운 외교관과는 전혀 다른 사유체계의 소유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96~97 에셀의 인도주의적 입장 그리고 갈등 해결의 경험과 경륜으로 인해 여러 곳에서 그의 조력을 청하는 일이 많아졌다. 아프리카의 부룬디에서 일어난 부족간 갈등을 중재하는 일을 맡기도 하고, 불법체류자 등 사회적 갈등이 이슈에도 중재자로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전직 외교관으로 점잖고 편안한 은퇴생활을 즐기는 대신 적극적인 사회 참여자로 변신해 갔던 것이다. 이와 함께 팔레스타인 문제에도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p101~102 어째서 아흔세 살이나 된 노인의 짤막한 글이 21세기의 세계인들에게 이렇게까지 선풍적으로 어필하는가 하는 점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크게 보아 두 가지라 할 수 있었다. 『분노하라』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 있었고, 이 책의 저자가 보여준 평생에 걸친 삶의 무게와 두께가 던진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대상황이 이토록 암울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분노하지도, 『분노하라』에 호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책의 저자가 에셀이 아니었더라면, 예컨대 똑같은 내용이라도 인생의 묵직한 배경이 없는 사람이 그 책을 썼더라면 세상은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분노하라』는 상황적 계기와 인간적 계기가 합해져 거대한 화약고가 폭발한, 흔치 않은 일대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02 2008년 레지스탕스 기념식에서 에셀이 행한 연설을 바탕으로 출판사 사장이 에셀을 세 번 정도 만나 원고에 살을 보태고 최종적으로 감수를 보아 펴낸 책이었다.
p103 에셀은 인권의 정신이 레지스탕스 운동의 본령이자 연장선이었음을 강조한다. 레지스탕스 운동은 단순히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겠다는 차원의 활동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프랑스의 독립운동임과 동시에 자유-평둥-박애의 바탕 위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인권’이 완전하게 보장될 수 있는 세상을 희구하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레지스탕스 운동 자체가 인권운동이었고, 미래 인간사회를 위한 혁명적 기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분노하라』를 여타 사회운동 관련 서적과 구분되게 만드는 점이다. 분노해야 할 이유를 인간 존엄성의 침해에서 찾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p103~104 에셀의 외침 속에는 면도날같이 정교한 사회과학 분석이나 이론적이고 어려운 어휘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불의와 파렴치와 인간에 대한 예의의 결여를 질타하면서 인류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상식적이고 직관적인 정의의 어휘가 있을 뿐이다. 실제로 『분노하라』는 신자유주의니, 반지구화 운동이니 하는 사회운동식 용어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의식이 무척이나 선명한데도 불구하고 에셀이 고수하는 바는 원초적인 정의 관념과 같은 약간 ‘구식’의 메시지다. 하지만 전 세계 독자들이 이런 원칙적이고 상식적인 정의의 메시지에 더욱 열광적으로 반응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p104~105 에셀은 고위 공직자 출신으로서 대중의 존경을 누리며 안온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가장 혜택받은 사회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과감히 내던지고 용기있게 세상과 대면하는 길을 선택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거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p105 에셀의 앙가주망(현실참여)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성향이기도 하지만, 특히 그가 사르트르와의 교유에서 배운 바이기도 하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지성일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일신의 안위와 상관없이 결단하는 행위이며, 자신의 평판과 상관없이 추구해야만 하는 의무이며, 더더욱 자신의 나이와도 상관없이 묵묵히 걸어야 하는 사명이라는 것이다.
p106 일찍이 스탠리 코언이 말했듯 ‘훌륭한 시민성’의 상태는 거창한 영웅적 행동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침묵을 장려하지도 않는 법이다. 에셀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도 바로 이처럼 발언해야 할 때 발언하고, 참여해야 할 때 참여할 줄 아는 시민상이다. 사실 이 정도의 덕목은 모든 민주시민에게 요구할 수 있고, 또 요구되어야만 한다. 가정과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p106 에셀이 “인류상호의존선언”을 주도한 것도, 세계시민 사상을 그토록 강조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생각된다. 침묵하는 양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련 있는 중요한 문제에 눈을 감는 것이 되고, 공분할 줄 모르는 정신은 전 세계의 몰락에 동조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나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공분하지 않는다면 전 인류의 몰락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p110 에셀은 타계하기 직전 그의 유언과도 같은 글을 남겼다. 그 유고가 바로 이 책 『포기하지 마라』이다. 에셀은 우리에게 순응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지지 말고, 자신의 신념과 가까운 정당에 가입하고 또한 시민운동에 뛰어들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에셀은 말한다.
“나는 위기로 인한 고통에 대한 대답이 민주적 가치를 지키는 개혁적 민주주의의 힘을 결집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20세기 동안에 많은 유럽인들은……이데올로기를 떠받들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전지전능한 안내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반공산주의자 역시 되지 않았다. ……나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혁명적이거나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변화는, 행동・정치적 협의・민주적 참여를 통한 현명한 작업 속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민주주의는 목적이다. 그러나 또한 수단이 될 수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 ‘포기하지마라’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 한국어판 서문 세상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 서문 현명한 사람의 유산 포기하지 마라 한 친구의 목소리 분노와 참여 민주주의 대 과두정치 시장독재에 대항하여 유럽, 우리의 유일한 희망 야망을 가져라! ■ 해설 스테판 에셀의 삶과 사상 | 조효제 ■ 부록 세계인권선언 |
<분노하라>고 외친 스테판 에셀은 2013년 2월 27일 95세로 타계했다. 이 책은 그가 전하는 유언이다. 저자는 줄곧 분노하라를 통해서 이 시대의 진보를 위해 싸울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마지막 유언은 그것을 위해 포기하지 마라는 것이다. 물론 변화를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그 노력은 단순히 봉기의 형태가 아니라 ”국가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와 정치에 대한 의욕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 항의에서만 머물르는 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행복하여라, 율리시즈처럼 멋진 항해를 한 사람은.”
스테판 에셀은 행복하였을까. 책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그의 마지막을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평온했다고 말한다. 세상을 떠는 스테판 에셀을 추모하기 위해 수백만의 인파가 자리에 모였고 유엔인권이사회에서도 개인을 위해 공식적으로 묵념행사를 했다.
끊임없이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행동을 촉구하던 스테판 에셀의 마지막 말은, 포기하지 마라였다. 답답하고 지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저주저하는 때에 그의 마지막 말은, 새로운 출발선에 서는 것처럼 힘을 내게 한다.
■ 보완점
경험과 지식의 폭으로 사회참여를 촉구하는 저자의 메시지는 확연히 다르다. 하고픈 말이 정확하고 요구하는 것이 정확하다. 어쩌면 경험과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은 메시지는, 힘이 없고 중언부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명확한 사실에 대한 인지와 그를 바라보는 정확한 판단, 그리고 구현하고픈 의지에 있을 것이다. 겪음을 토대로 하게 되는 이야기와 겪을 지도 모르기에 하는 이야기의 차이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결국, 한계가 될 수밖에 없다.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전달력에도 차이가 나타난다. 구현하는 방법에도 신경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 책에 참고할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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