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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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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3일 12시 06분 등록
 

나는 아무래도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  언제나 내 마음이 먼저다. 젊을 때는 그렇다고 쳐도, 이 믿지 못할 나이가 되어서까지 아직도 그렇다면 조금 문제가 있는 건가?


지난 일요일 가까운 산에라도 가자며 나서다가 사건이 하나 있었다. 가방을 쌀 때까지는 분위기 정말 좋았다.  늘 얼굴 큰 것이 불만인 아들이 불쑥 말했다.

“홍빛이 머리는 대추형이야”

머리를 올려 묶은 동생의 두상이 갸름하니 보기 좋았던 모양이다. 내가 무심히 말을 보탰다.

“대추형? 계란형이라고 하면 미인이라는 줄 알고 대번 좋아하겠지만 대추형이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헷갈리겠는 걸.”

이어서 얼굴과 머리의 사이즈에 대한 설왕설래 끝에 딸이 나에게 던진 말에 우리는 폭소를 터뜨렸다.

“엄마 얼굴은 TV형이야, 그것도 와이드.”

딸애의 재치는 알아줘야 한다. 딸 덕분에 왁자하게 웃을 때가 많다. 그날도 그렇게 웃을 때까지는 정말 좋았다. 그런데 가방 메고 나섰다가 내가 일을 친 것이다.


다섯 번쯤 부른 후에야 겨우 나와서 아침을 먹고 난 딸이 그 때부터 자기 식대로 서두르는 거다. “10시 30분에 출발하자”느니, “설거지 하지 말고 가자”느니 정신을 빼더니, 가방 메고 신발신고 나선다. 물론 나는 저처럼 빠르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러면 저보다는 내가 하는 일이 더 많다. 그리고 나는 내 속도대로 살고 싶다. 아무렇게나 옷을 꿰어 입고 애들 뒤를 따라가다 보니 슬그머니 부아가 난다. 입은 옷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다가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을 워낙 싫어하는 탓이다. 그래서 결국 몇 마디 쏘아붙이고야 말았다.  보통 때는 손도 까닥 하지 않다가 저 마음먹은 일에는 정신없이 서둘러서 옷도 제대로 못 입었다고. 오빠랑 나는 저한테 하느라고 하는데, 자기는 무슨 교관 같이 굴 때는 우습지도 않다고.


딸과 나의 기질은 백팔십도 다르다. 내가 천생 낭만파라면, 딸은 스스로 말하길 ‘치사할 정도로 돈계산이 빠른’ 실리주의자이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즉흥성을 신봉하는 나에 비해, 딸은 매사에 계획을 갖고 싶어 한다. 모녀라는 이름으로 엮이지 않았다면 같이 어울릴 일이 없었겠다 싶을 정도로 우리의 기질은 다르다. 속도도 그 중의 하나인데, 그 날은 바로 거기에서 부딪친 것이다.


당연히 분위기는 급냉각되고 딸의 얼굴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아차 싶었다. 좋은 기분으로 바람 쐬러 나선 길에 한 박자만 참을 걸 하고 후회가 밀려 왔다. 아니나 다를까 딸은 산에 안 간다며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나도 산에 갈 기분이 아니라 가까운 산책로로 빠지고, 아들 혼자만 산에 간단다.  산책길로 올라가다 뒤돌아보니 혼자 걸어가는 아들 모습이 보인다. 천천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는데, 이게 웬 일인가 싶다. 달랑 세 식구가 제각기 삼각형 방향으로 쪼개진 것이, 머지않은 장래에 산산이 흩어질 모습을 예고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나는 왜 이럴까. 30년이 어디 짧은 세월이냐구, 딸보다 30년이나 더 살았으면 조금 언짢아도 감정을 다스리고, 따로 조용히 이야기를 하든지 했어야지. 겨우 이 정도 갈등도 해소를 못하고 분위기를 망쳐 버리다니...’

도서관에 들린 전후로 5시간이나 산책을 했다. 주말에는 열람실을 5시까지 밖에 안 하는지라 집에 일찍 들어가기도 뭣해서 계속 걸어 다녔더니, 다행히도 자괴감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때로는 충격요법도 필요해. 나는 워낙 자유방임형이라 어지간해서는 잔소리를 안하는데, 오히려 지가 사사건건 잔소리를 할 때도 있잖아. 모녀라고는 해도 이제 성인대 성인의 관계를 시작할 때가 되었어.  서로의 속도를 존중해주지 않고 내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조금씩 틈이 벌어질 수도 있다구. 물론 따로 조용히 말을 해도 되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조금 강하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도 있어.


아들? 넉넉한 형편도 아니고 특별히 잘 해 주는 것도 없는데 쟤는 유독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 같아. 나를 닮아서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이지만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지 걱정이 될 정도라니까. 결혼을 해 보라지. 얼마나 시시콜콜한 문제도 갈등으로 비화하기도 하는데,  이렇게라도 사람살이의 갈등에 접해보는 것도 괜찮지 뭐.


아아! 한명석. 참 못 말린다. 이제 더 나이 들면 애들에게 순응해야 할 때도 있을 텐데, 그 때는 도대체 어떻게 맞춰갈 셈이냐?  여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일은 얼핏 ‘속도’의 문제로 보이지만, 사실은 ‘주도성’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딸의 현실감각은 나를 훌쩍 뛰어넘는다.  내가  매사에 어리버리한 반면 딸의 경제감각과 공간감각이 출중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영역을 구축하여 내 라이프스타일을 고수하지 못하면 딸의 지휘를 받는 처지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내가 자신감이 있을 때는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일 여유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피해의식에 젖게 되고, 쇠퇴의 속도는 롤러코스터처럼 빠를 것이다!


엇, 뜨거라! 싶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8시가 다 되었다. 딸도 산에 갔다 왔다고 한다. 딸은 아직 뾰로통하지만 뭐 원수진 것도 아니고, 곧 말문을 트게 될 것이다. 조금 거칠게 전달이 되었지만 앞으로 피차 조심하게 될 것이고, 나의 게으름에도 쐐기를 박았으니 나쁘지 않다. 어른스럽지 못한 내 성향도 쓸 데가 있는 것이다. 나는 좀 더 숙연해진 마음으로 읽던 책을 폈다.


얘기가 좀 길어졌지만 나는 매사에 이런 식이다. 하고 싶은 것을 안 한다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무슨 일에든 내 의지가 중요하다보니 일을 저지르고 나서 생각하는 식이다. 그 대신 어떤 경험에서든 의미를 찾아낸다. 그런데 이런 성향이 사회성은 떨어지지만 글쓰기에는 유용할지도 모른다. 글은 언제나 ‘나’에 대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이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기호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기억, ‘나’의 상처, ‘나’의 결핍에 대해서 쓰는 것이다. 내가 만일 조신한 엄마였다면, 모처럼의 산행을 망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내 의지가 ‘조신한 엄마’를 선택했다면 몰라도,  엄마는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면 조금 심심하다. 오래되고 익숙한 ‘좋은 엄마’ 얘기만 계속하는 것도 식상하다. 나처럼 솔직한 내면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좋은 글쓰기의 소재가 된다. 여기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어느새 내가 아이들 눈치를 보게 되었구나, 세월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두려움을 표명할 수도 있다.  ‘이렇게 주도권 전환이 시작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친정어머니를 배려하기보다 내 마음대로 상황을 이끌곤 했다. 친정어머니는 묵묵히 내게 순응해 주셨지. 아! 친정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역할전환을 잘 하실 수 있었을까’ 하고 친정어머니에 대한 감회를 기술할 수도 있다. 수명연장시대의 새로운 부모자식관계에 대한 통찰을 시작할 수도 있고, 내가 그랬듯이 ‘50대에 전문가 되기’의 결심을 다잡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나의 내면에서 시작한다. 무엇이든 내가 절실하게 느껴야 글이 나온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조언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내 느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내 느낌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충분히 느껴보고 표현하는 훈련이 글쓰기다. 얼마나 내 느낌에 충실한가의 문제가 독자적이고 독특한 목소리를 내는 기본 조건이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무조건 옳다’는 뱃심으로 나의 느낌을 중시하고 존중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윤리적으로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나의 느낌에 충실하게 복무한다는 뜻이다. 나의 느낌을 알아봐주고, 이름지어주고, 생생하게 빠져들고, 내 감정의 편이 되어주자.


이만교는 이것을 ‘실질적 정직’이라고 부른다. 외부의 시선이나 관습에 의해 내재된 규범을 따라가는 것이 ‘도덕적 정직’이라면, 스스로의 생각을 중시하여 자기 안의 꿈틀거리는 욕망을 존중하는 것이 ‘실질적 정직’이다. ‘일반인’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 시선을 중시하며 살아가지만, ‘예술가’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스스로의 시선과 생각을 중시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는 예술가 혹은 자유인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에 의하면 ‘실질적 정직’은 글쓰기의 기본정신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유아독존적인 자기중심성이 위로를 받고 쓸모를 얻는다. 정여울이 말했듯이, 나 역시 글을 쓰지 않을 때는 한정치산자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집중은 잘 할 수 있다. 관심이 다양하거나 재주가 많은 사람들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닐 일도 없고, 참견할 일도 없다. 오직 내가 가진 약간의 재능을 갈고 닦기 위해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일 밖에 없다. 이왕 쓰기 시작한 것, 정말 한 번 잘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참고도서
이만교, 글쓰기공작소, 그린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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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10.02.23 12:15:47 *.108.50.152
요즘 연구소에 올라오는 글도 많은데, 길게 써서 죄송함다.^^
이렇게 길어서야 나라도 안 읽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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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2.23 17:37:41 *.36.210.62
허참, 별 소릴 다하시네...
본문보다 더 긴 댓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쩌라고?  치ㅅ~ ㅋㅋ


늦게 멀리까지 가서 어린 동료들이랑 기숙사생활까지 해보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요, 내가 나일 먹었더라고요. 가족들이랑, 혹은 편하게 소규모의 구성원들과 일할 때까지만 해도 잘 몰랐어요. 그리고 단지 몇 해 전 까지만 해도요.

그런데, 운동 부족에 나름의 스트레스를 오래 껴안고 살아 그런지 몸이 늙었더라고요. 마음대로 뜻대로 안 움직여져요. 주변으로부터 은근 괄시를 받게 되죠.

딸도 알게 되죠. 울 엄마를 보면서 생각되어 지는 것들이 많아요. 느리게 움직이시는 것은 별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또 항시 저보다 먼저 서둘러 챙기시기에 기다리는 법이 없지만, 느닷없이 준비해야 할 때는 당연 느릴 수밖에 없고 그것도 모자라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아니면 엄두조차 못 내기도 하지요. 그러니 이런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세대차로 인해 일을 선택하는 취향도 방식도 물론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쌍방이 이해해야 할 부분이지만 서로가 그 부분을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고요. 그래서 산책을 하신 것과 같이 여백이 필요한가 봐요.

가끔씩 엄마를 들여다보며 엄마는 딸에게는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처음에는 남매들 가운데 유독 절 이기시려고 하는 줄 알았지요. 형제 가운데 유달리 영악스러운 면이 있어서 그러시나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지요. 서로 간에 인정하지 않는 경쟁심이라도 발동하게 되는 걸까 의아해 한 적도 있고요. 나일 먹으니 절로 이해가 되네요. 어디 가서 이길 수 있겠어요. 당신의 고집스러움 같아 때때로 몰아붙이기도 하지만, 가령 올케 앞에서는 당신을 미리 점검하시고 아예 말도 꺼내보지 못하시는 경우 등을 보게 되면 애잔함에 저 역시 할 말을 잃고 말지요. 지레 이핼 못할 거라 여기시며 스스로 조심하시는 모습을 대할 때면 안타까울 밖에요. 그러니 밖에 나가서는 또 어떠실까, 보나마나 이니 짠해질 뿐이고요. 사람은 그렇게 서로 자신을 알아가게 마련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점검을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그런 것이 지혜와 무엇이 다르겠어요.

그래서 세상의 엄마는 딸에게만은 당당히 이기고 살아야 할 것 같아요. 딸부터 까부수고 이겨서 다른 사람 앞에서도 온전히 당당해 질 수 있도록 말예요. 더욱이 어떻게 해서라도 열심히 살아가고자 애쓰는 엄마의 경우라면 두 말할 것도 없지요. 가족 구성원에게 지원 받으면 밖에 나가서도 힘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들의 사회성을 먼저 익히게 되곤 하니까요.

선밸 울 엄마께 비교하는 것은 아니고 저도 선배 의견처럼 일상의 사소한 부분이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몫은 챙기며 당당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부족하고 미안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로 인해 주눅들 필요 없이,  더욱이 나쁜 일이나 못된 짓이 아닐 때에는 얼마든지 당당히 의사표현을 적극적으로 하고 때에 따라 확실하게 요구와 사과도 받아내야지요. 저 역시 그렇게 살고 싶어요. 요즘은 노쇠한 엄말 대할 때면 얼마든지 엄마와 맞서 싸우는 관계가 앞으로도 오래 많이 지속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울 엄마는 나의 최대의 적이고 동시에 원조자지요. 항시 가장 신랄하게 비평하시고 가장 가슴 아파하시니까요. 그런데 그런 분이 내 허물도 못 알아차리고 무디게 짚어 주시며 그저 잘하고 있겠지 혹은 아무 생각이 없으실 때, 정말로 엄마가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연세가 많으시니 요즘엔 부쩍 더 그러하시죠. 이런 모습을 대할 때면 공연히 저까지도 기운이 빠지고 외로움이 짙어 집니다.


십여 년 전 엄마가 일흔이 되었을 때, 그리고 내가 여자로서의 삶의 고단함을 조금 이해했을 때 엄마에게 엄마가 남은 생동안 당당해 질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엄마가 항시 평생의 업처럼 잘해온 일 가운데 하나를 계속 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해 지원했죠. 원하는 일이었지만 너무 늦었다며 십 년만 젊었더라면 했을 것이라고 하는 그것을 성원하고 도와드렸어요. 몇 가지 리스크가 따랐죠. 하지만 곁에서 가장 오래 지켜보면서 알게 된, 엄마가 열정을 쏟을 만한 그 일을 찾아 격려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다만 통계적 개념이나 일반적 기준의 선택을 고려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림돌이 있었지만 그 부분 과감히 털고 실행에 옮겼죠. 당연 일정 부분의 리스크를 통째로 견뎌야 하는 부담이 있기도 했지만 저 역시 뿌듯하더라고요. 리스크의 대가는 제가 치르겠다고 강하게 마음먹었지요. 그러며 생각했어요. 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리스크 때문에 회피하는 것 또한 일종의 방임과 불효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성실한 것이라고요. 내 삶을 걱정하듯 엄마 입장에서 원하는 대로 진정으로 돕지 않는 것은 부정직함이요, 떳떳한 삶이 아니라고요. 작은 시도지만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기도 했지요.

곁에서 엄마와 가장 오랜 이야기를 나눠왔고 당신을 닮은 딸로서 그렇게 하면 당신의 걱정스러움을 덜고 남은 생이 편안하겠다고 생각하시는 그 일을 도운 건 정말로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로인해 의기소침 하지 않고 더 당당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생명줄을 얻는 것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흡족해 하시며 현재까지 쭉 고맙다고 하시고요. 당시로서는 당신 생이 얼마나 남았을지 한편으로 걱정 하시며 심지어 부끄럽게 까지 생각하셨지만 그 후로 십여 년 든든하고 떳떳하게 잘 살아오셨고 당당함에 보탬이 되셨다면 저로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밖에요. 누구라도 남들이 생각하는 나일 먹었다고 해서, 선입견을 의식하며 주변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에 당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축소하려 들거나 의욕이 있음에도 지레 포기하게 된다면 당사자로서는 얼마나 후회막급하고 안타까운 일이 되겠습니까.

개인의 삶이란 조화도 좋지만 주변의 인식에 얽매어 합당한 일마저 주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일 먹으면 공연히 자신감이 없어져 의기소침해 질 수 있는데, 이때 정말로 적극적인 지원자가 될 수 있는 가장 친한 사람이나 가족은 심사숙고한 단계를 거쳐 온전히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가 원하는 일을 도울 때만이 진정한 지원자로서의 덕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일 먹어도 당당히 자기주장을 하며 원하는 일을 성취해 나가려면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 한편, 부지런한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느껴져요. 그래야 남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감을 갖을 수 있고, 납득할 만한 과정들이 있는 가운데 진정한 지원자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기도 하며, 나아가 결국에 모두에게 인정받게 되는 길이기도 하고요. 그것이 책 읽기나 글쓰기든, 염불을 외우고 불공을 드리는 일이든지 말예요. 지원자나 당사자나 할 것 없이 주변의 눈치를 너무 보게 되면 스스로의 삶이 당당하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노년에도 당당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나, 현재 일정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중장년들이라면, 이제라도 스스로를 힘차게 가꿔나가지 않으면 노년의 당당함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구나 어떤 경우라도 일상의 항상성을 유지해 나갈 능력이 있을 때, 평온한 가운데 여유가 생겨 스스로 당당할 수 있고, 나아가 배려와 덕도 쌓아가게 마련인 것처럼 말예요.

따라서 노년의 새로운 의욕이 움트고 그것으로서 좀 더 오래 심신의 건강함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나 방도가 있다면 비록 고령자라 할지라도 건강과 정신상태만 받쳐준다면 그 선택을 절대 포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체면이나 기타 다른 논리와 입장에 의해서 차단 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단지 연로한 것을 이유로 노년에라도 할 수 있고 맞는 역할과 일거리들로부터 위치를 빼앗기거나 제외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함입니다. 그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그 역할을 계속 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노후를 편하게 돕는 것이란 생각에서 입니다. 어떤 일이 노쇠한 노년의 일상의 큰 버팀목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알고 이해한다면 더욱 말이지요. 노쇠한 당신이 의욕할 만한 최소한의 터전과 발판을 필요로 하고, 그로서 힘을 얻어 당당히 살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도록 돕고, 힘이 모자라면 도와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요.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 흥미로울 요소가 되는 최소한의 기본 베이스가 없으면 스스로도 즐겁지 않을 뿐만아니라, 아무리 옳고 바른 일로 인도하여도 잔소리로나 여기며 잘 먹히지 않게 되는 것이 노년의 현실이요 실제 상황이니, 수명연장시대에는 늘어나는 노년의 세월만큼 그 삶의 기반과 당당함도 예전의 일반적인 개념에 비해 더욱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요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선배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주장에 찬성입니다. 나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쓰다보니 장황해져 전달이 제대로 되는 건지 모르겠네용. 댓글이니까 뭐~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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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2.23 19:17:23 *.108.50.152
푸하하핫! 
정말 댓글 한 번 야무지네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속담이 떠오를 정도로,
슬쩍 단면을 비쳤을 뿐인데,
연속극을 보여 주네요.^^
 
잘 보았구요, 잘 전달되었어요.
써니 어머니께서 칠순이 되셨을 때 도와드린 일이 무엇인지
엄청 궁금하니 다음에 꼭 가르쳐 주구요.

'딸을 이긴다'로 표현했지만,
가족 안에서 그만큼 수용되고, 말발이 있으며, 지지받는 사람이
밖에 나가서도 자존감을 갖고 자기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적극 동의해요.
가족이 자아상과 인간관계의 근원인 거지요.

써니 글을 읽으며
써니의 가족관과 또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에게 해 드린 것을 보면서
나를 반성하게 되네요.
친정어머니에게 사회의식까지 겸한 인간적인 연민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시간을 많이 나누지는 못하거든요.
어머니 한 번 오시라고 말하려면 며칠을 벼르는 나를 보며
이 다음에 또 나는 어찌할꼬 생각이 번져갔지요.

써니,
정말 대단한 입심, 글심이네요.^^
긴 댓글 고마워요.
써니 글도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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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2.24 16:20:57 *.94.31.26
이건 지 생각인디유,
저질러분 거 생각할 필요 없시유..
무조건 잘했다고 생각하시믄 되야유...
휘회하시믄 스트레스 되고요,
똑같은 일이 생겨유,,,
'나가 이참은 도저히 못 참긋다.' 하고 시작하지유...

지는 유,,,
우리 아들한테, 무조건 버텨유,,,
완전 뻔뻔하게...
최후에 잘 써먹는 말이
'사는 것이 다 그렇게 모순인거시여, 워디 학교에서 배운디로 된다냐...'

저녁에 다시 모이는 가족이 부럽네유...
행복 하셔유.. 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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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2.25 10:32:06 *.108.50.152
위의 써니 글 읽으면서 느낀 것이 많네요.
무릇 그것이 가족이 모여 사는 이유일 텐데,
나는 너무 모자라는구나~~  하는 생각이요.
가족이라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절대로 없으니까요.

근데 성렬님 아드님은 어떻게 생겼을지 문득 궁금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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