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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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무엇을 느꼈는지 쓰지 말고,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마시고, 사랑했을 때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세요. 다시 한 번 더 걷고 먹고 보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형식적인 것들 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시고, 잊지 못할 음식을 드시고, 그 날의 기분과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 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형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이상 강의끝.
-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에서 -
글쓰기에 대한 책을 수십 권 읽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나오는 글쓰기원칙은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였다. 안정효는 이 원칙을 글쓰기 책상 앞에 써 붙여놓아도 좋을 만큼 중요하고 필수적인 가르침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설명’과 ‘보여주기’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이미 작가라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최수묵은 ‘기막힌 이야기 기막힌 글쓰기’에서 이것이 내러티브 기사쓰기의 첫 번째 원칙이라고 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두 번째 원칙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첫 번째이자 유일한 원칙인지도 모르겠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강의를 하면서 이 말을 하면 어떤 수강생들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개그맨 홍록기 이야기로 말문을 트곤 했다. 언젠가 TV를 보니 홍록기가 자기는 여자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럴듯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겠구나 싶었다. 바로 이것,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노’, ‘두려움’, ‘좌절’, ‘환희’ 같은 감정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 자체를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성공인 것이다. “그녀가 울었다”고 말하지 말고 그녀를 무대에 올려 직접 울게 하라!
소설가 김연수의 30초 소설특강은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처럼 간결하고 명료하게 이 기법을 표현할 수 있다니! 나는 김연수가 단박에 좋아졌다.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형식뿐이란다. 그러니까 너를 사랑한다고 오백 번 말해도 그 사랑을 느끼게 해 주지 못한다면 공허하단 얘기다. 지금 이 부분에서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이런저런 몸짓이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빈약하다 못해 황량할 지경인 나의 이력서라니...
아! 억지로 하나 생각났다. 어느날 갑자기 대학시절 동아리 선배 하나가 떠올랐다.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그 때도 실로 빈약했던 청춘을 회상하다가 어쩐지 그 선배의 몸짓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뭐라고 말하진 않았어도 엠티에서 굳이 내 옆을 비집고 앉던 모습이나 유독 따듯했던 눈매에 혹시 무슨 의미가 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나서 얼마 후 그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25년 만이었고 서클 동기 한 명과 함께였다. 참치회를 사줘서 먹고, 호프집에 가서 맥주를 한 잔 하는 동안 얼마나 내 말을 잘 들어주었던지 마음 한 켠이 훈훈하게 덥혀졌다. 그 때도 별다른 말은 없었다. 젊은 날 팍팍했던 환경 이야기를 했고, 막 대학에 입학한 딸에 대한 애틋함 같이 상식적인 화제를 나누다가 헤어질 때 그가 문득 어디 한 번 안아보자며 슬쩍 껴안더니 내 이마에 입술을 댔다. 그 날 집에 돌아와서 나는 시 한 편을 썼다.
이십 오년
단조롭고 밋밋한 내 청춘의 갈피에
그래도 남달랐지 싶은
선배의 몸짓 하나가 있다.
경동교회나 과천 영보수녀원에서
아무 말 하지 않았어도
가끔 꺼내보는
어깨짓 하나가 있다.
이십 오년만에 마주한 그는
그래도 쟤 예쁘게 컸다는 소리를 하여
예쁘지 않게 늙는 중인 나를 웃기더니,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 때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노라고
방 하나에 식구들이 바글바글했노라고
그 얘기만 한다.
회를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한 번 안아보자며 슬쩍 당기더니
이마에 입술을 댄다.
사람 많은 종각 지하철역에서였다.
이래저래 그의 속내는
또다시 이십 오년 후에나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지금 내가 이 장면을 떠올린 것은 순전히 김연수 덕분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원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을 뻔했다. 확인할 수 없는 옛날 선배의 마음 하나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온 몸이 찌릿해진다. 당최 신나는 일이라곤 없어 좀비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몸에 비로소 피가 도는 느낌이다. 드디어 글쓰기 원칙 중의 원칙을 이해했다는 감격에 온 몸의 털이 오소소 선다. 그러니 언어를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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