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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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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6일 00시 07분 등록

 

태풍에 가까운 바람이 두어 날 숲으로도 불어왔습니다. 아직 터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소나무 수꽃가루에게 이번 바람은 아무런 연이 되지 못했습니다. 대신 희고 둥근 공 모양을 이미 완성한 민들레 씨앗에게는 더 없이 귀한 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삼 년 전 제 큰 키를 줄이지 않고 이사 온 어느 벚나무에게 이 바람은 슬픈 연이 되었습니다. 나무는 30도쯤 기울었고 뿌리 한 쪽이 땅 위로 부풀고 말았습니다. 바람은 모두에게 매 한가지로 불었거늘 그 연은 각기 달랐습니다.

 

바람 그친 숲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오전의 끝자락, 나는 숲에 앉아 백석을 읽고 있었습니다. 열흘 전쯤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기억이 맞던가, 여름 철새 검은등뻐꾸기의 노래는 숲을 떠나 마을로 뻗어가던 중 잠시 내 귓가에 걸렸다 떠나곤 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탐하지 않는 내 주름진 얼굴 근처를 우악스러운 말벌만이 알지 못할 연유로 배회하다가 이내 떠나곤 했습니다.

그 시인이 반한 여인을 만나러 통영으로 떠났다가 그곳의 정취를 담아 지었다는 시를 소리 내어 읽는데, 시가 새겨진 종이 위로 애벌레 한 마리가 툭 떨어졌습니다. 나뭇잎에 노닐던 놈이 제 몸에서 길게 실을 내어 하강하다가 그 밧줄같은 실을 끊었겠구나 생각하며 살펴보았습니다. 하얀 몸에 검은 빛과 애머랄드 빛을 어린 아이 색종이 공작하듯 섞어 일정한 패턴으로 수를 놓은 애벌레였습니다. 종이냄새에 취해서였을까, 아니면 툭 떨어진 충격에 엉덩이라도 아파서였을까? 녀석은 잠시 멈춰 미동도 않더니 이내 몸을 꼬물대며 시인의 시 위를 횡단하기 시작했습니다.

 

들고 있던 책을 펼쳐진 페이지 그대로 유지한 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관음이라도 하듯 녀석의 몸짓을 숨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꾸물텅- 꾸물물텅- 꾸물텅텅-’ 녀석의 몇 마디 몸짓은 엉망이었습니다. 시의 말미에서 제목이 있는 쪽으로 움직여갈수록 녀석의 몸짓에는 리듬이 생겼습니다. ‘꾸물텅- 꾸물텅-’ 순식간에 책의 오른쪽 상단 가장자리까지 도달했습니다. 200쪽 두께의 경사지를 내려가기만 하면 녀석은 나무 테이블로 옮아갈 것입니다. 책은 흰색이고 테이블은 암갈색이니 녀석은 얼른 이 흰색의 위험한 배경을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었습니다. 경사지를 내려가는 일이 녀석에게는 마치 새로운 도전처럼 여겨진다는 듯이.

 

녀석은 몸의 뒷부분 하반신을 시인의 시가 쓰여 있는 페이지 가장자리에 고정해 놓고 머리 부분과 상반신을 엎어놓은 U자처럼 들어 올려 경사면 아래쪽으로 연신 휘젓고 있었습니다. 다음 디딜 자리에 대한 탐색이었습니다. 몇 번을 허방으로 휘저은 끝에 녀석의 머리와 가슴 부분이 경사지에 닿았습니다. 조심조심 몸을 움직이며 경사지를 내려갔지만 잠시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나무 테이블에 상반신이 닿자마자 녀석의 움직임은 다시 꾸물텅- 꾸물텅-’ 저만의 리듬을 만들며 테이블의 저 쪽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녀석을 바라보다가 어느 제자의 고민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아직 저 자신의 시선으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 자신의 글을 쓰는 일 역시 너무 벅찬 과제입니다.’ 나는 그에게 저 애벌레의 리듬을 보여주고 싶어졌습니다. ‘꾸물텅- 꾸물물텅- 꾸물텅텅-’꾸물텅- 꾸물텅-’의 리듬으로 성장하고 전환하는 과정을 살펴보라 권하고 싶었습니다.

글이든, 삶이든, 사랑이든, 자신의 리듬이 생길 때 그것에 결 고운 무늬가 생기고 그만의 향기가 생겨납니다. 자신의 리듬이 생길 때까지 해야 할 일은 반복하고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부끄럽고 어색하고 때로 남루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반복이 어느 순간 저만의 호흡과 박자와 마주치게 됩니다. 꾸물텅- 꾸물텅- 꾸물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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