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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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김녕해안의 갈매기
아득한 구름밭 저 편에 한 점 물고기 형상으로 나타난 비행기
엄마 모시고 제주에 왔습니다. 베트남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저축보다 “지금 여기”를 선택하기로 했다지요. 저가항공에 저가호텔을 이용하면 그다지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구요. 제주는 바다가 절반이라 날씨에 따라 인상이 확확 변하는 것 같습니다. 겨울인데도 월정리며 함덕의 바다 색깔이 죽여줍니다. 엄마와 딸, 여자 삼대가 떠난 여행이 좋은지 저는 출발할 때부터 그 중 신이 났습니다. 비행기가 대지에 사선을 그으며 떠오르는 순간을 숱하게 카메라에 담았으며, 창가에 앉아 구름구경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잘 익은 백설기처럼 희디흰 색깔에 성글게 솜의 결의 훤히 비치는 구름이 영락없는 캐시미어 솜 같았습니다. 그렇게 솜뭉치 같고 양떼 같은 구름밭에 한 점 작은 물고기 형상의 비행기가 출몰했을 때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어린애처럼 즐거워했습니다. 3.3 좌석 저쪽 창가에 일곱 살 쯤 된 남자아이가 앉았는데 간간히 그 애가 지르는 탄성과 제 마음이 똑같아서 피식 웃을 정도로 저는 한껏 들떠있었습니다. 심지어 동심을 잃지 않는 내가 기특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요.
하지만 저녁에 사진을 정리하는 시간은 영 착잡했으니, 감탄과 즐거움을 이어붙일 스토리라인이 떠오르지 않아서였습니다.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이륙”은, 차원을 달리 하는 변화와 절정경험의 상징이었지만 저는 그 상징을 끌고 나갈 이야기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올해 83세가 되신 엄마, 총기는 여전한데 단기기억은 쇠퇴하는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는 데는 때로 인내심을 잃을 정도입니다. 엄마 이야기를 하면 노화, 인생, 가족의 문제가 따라 와야 무게감을 갖추는데 거기에는 제 자기검열에서 걸립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은 둘째 문제입니다. 여행길의 단순한 포스팅에 심혈을 기울일 수도 없구요. 그런데도 제 마음에 드는 글 한 편을 올리지 못했을 때, 즉 한 줄의 생각을 조합해내지 못했을 때 저는 울적했습니다. 여행의 하루에 마침표를 찍지 못해 편하게 잠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깨달았네요. 내가 가장 중시하고 갈망하는 것은 오직 스토리라는 것.
부와 명예 그 어떤 것보다 내가 맹렬하게 질투하는 것은 잘 빠진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이고,
이렇게 밖으로 도는 이유도 내 마음에 스토리를 생성하여 다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을 만들려는 일시멈춤이라는 것을.
무어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들른 몇 군데의 기착지에서 수없이 찍은 사진들을 관통하는 한 줄의 문장,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입니다. “왕이 죽었다. 왕비도 죽었다.” 가 아니라 “왕이 죽었다.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왕비도 죽었다”하면 스토리가 되듯이, 비행기를 처음 타는 아이처럼 발랄하게 즐거워할 수 있는 성품과 김녕 해안의 갈매기를 연결시키지 못하면 제주여행이 파편화되어 공중으로 휘발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구나 하는 자기인식과 자기규정, 이것을 집약한 자기표현이 없이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것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지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면 허방을 딛는 것 같지 않겠어요? 스치는 상념을 발효시켜 의미부여가 안 된다면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어진 목숨이니 관성대로 살아가지 않겠다, 내 발걸음의 이유와 의미는 늦게라도 나 스스로 규정하겠다는 의지, 이것이 모여 스토리가 되는 거고, 그렇기에 스토리를 만들지 못했을 때 불안하고 울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라고 하나 봅니다. 그대의 오늘은 어떠했는지요? 하루를 관통하는 뼈대를 몇 줄의 이야기로 기록할 수 있다면 그대는 삶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자기이유를 자기언어로 말할 수 있으니까요.
** "글쓰기를 통한 삶의 혁명" 카페에서 조촐하지만 강력한
글쓰기/책쓰기 강좌를 하고 있습니다.
http://cafe.naver.com/writingsut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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