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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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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0일 08시 03분 등록

『도덕경』

노자, 오강남 풀이, 현암사

 

11주차 (6/12~6/19)

티올(윤정욱)

 

[INTRO]

 

노자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실존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불 분명하다. 다만 그의 사상이 공자의 그것만큼이나 중국을 포함해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고 한다. 그에 대해서 알아 보자. 노자(老子). 그의 이름에 자리잡고 있는 ()’ 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동양 고전에 언급 된 많은 실존 인물들은 그의 이름과 자()가 함께 전해 진다. 하지만 노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냥 노자, 늙은 사람이다. 오늘 날 늙었다는 것은 고루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하지만 현재의 그의 사상적 위치와 그간 그의 사상이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미루어 볼 때, 후대 사람들이 그를 칭한 이 ()’ 다르게 해석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예정하고 있다. 죽음과 매일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다. 하루살이의 하루가 인간 수명의 80년과 다르지 않다. 하루살이는 자신만의 속도로 하루라는 생을 마감하고, 우리 인간의 인간만의 속도로 80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보낸다. 늙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의 기능은 떨어질지 몰라도, 자신만의 세계관을 갖추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도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늙었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되었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대상을 나타낸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노자는 동양 고전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왜? 대체 왜? 노자가 중요하고, 도덕경이 중요한가? 왜 하필 이 책이 중국 고전 가운데서도 주석서가 가장 많은 책이 되었을까? 중국에서만 1,500권의 주석서가 씌여졌고, 그 가운데 약 350여 종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와 덕()에 관한 경전, 도덕경(道德經). 그 동안 산발적으로 읽었던 이 책을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의 형식을 빌려 접근해보고자 한다.

 

 

I. 작가 분석

 

1.    노자, 대체 너 누구니? (#노자의 생애#)

 

Q) 아빠, 오늘 학교에서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대해서 배웠는데 많이 어려웠어요. 노자(老子)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데 이야기 해 주실 수 있나요? 노자는 대체 누구고 어떤 삶을 살았나요?

 

A) 노자는 유가 사상과 더불어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도가 사상의 시초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가운데서도 관련한 기록이 적단다. 그래서인지 그가 실존한 인물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지.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노자는 기원전 604 9 14, 중국 초나라 고현의 여향 곡인리 라는 지방에서 한 여인이 자두나무에 기댄 채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노자였다고 하구나. 그런데 놀랍게도 노자의 어머니는 떨어지는 별을 찬양하면서 62년 동안 노자를 임신해 있던 상태였고, 그때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도 할 수 있었다고 하구나. 놀랍지 않니?

 

Q)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네요. 엄마가 62년 동안이나 임신한 상태에서 노자를 낳았다는 것도 그렇고, 태어나자 마자 말을 했다는 것도 그렇고.

 

A) 그렇지. 때문에 노자를 실존한 인물이 아니었다고 믿는 학자들이 많아. 아무튼 그 이후, 노자는자두나무()에다 자신의 큰 귀()를 상징하는 이름을 붙여 스스로 이름을 이이(李耳)라고 정했다고 해. 그런데 그의 머리칼은 벌써 하얀 눈처럼 희었기 때문에, 훗날 사람들은 그를 두고 노자(老子)라고 불렀어. ()는 늙었다는 뜻이고, ()는 존칭의 표현으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 있단다.

 

Q) 노자는 어떠한 일을 했나요?

 

A) 노자는 왕실의 장서고를 기록하는 관리 일을 약 사십여 년간 했다고 해. 이 무렵 그 유명한 공자 역시 노자를 방문 한 적이 있었어. 노자를 찾아 온 공자는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는데, 그 때 노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

 

“군자는 때를 만나면 나아가서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뒤로 물러나 숨어야 하는 것이오. 내 일찍이 듣기를 ‘훌륭한 장사꾼은 귀중품을 감춰놓은 채 아무것도 없는 듯이 행동하고, 완전한 덕성을 갖춘 사람은 겉으로는 다만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라고 했소. 그러니 그대는 몸에 지니고 있는 그 교만과 욕심과 위선 따위를 다 버리시오.

 

Q) 성인으로 추앙 받는 공자가 어째 노자에게 혼이 나는 것 같네요.

 

A) 그렇단다. 백발이 성성한 노자가 볼 때, 공자는 아직도 혈기가 왕성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나 보구나. 이처럼 공자에게 따끔한 충고를 가한 노자는 스스로 재능을 숨겨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썼다고 하는구나.

 

A) 그러던 어느 날 주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노자는 주나라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게 되지. 그런데 노자가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국경을 수비하던 관리 윤희(尹喜)라는 사람에게 붙들리고 말았단다. 그리고 그가 간청하는 대로, 상하 양편의 오천 자로 된 글을 남기게 되는데, 그게 바로 《도덕경(道德經)》이란다. 만약 윤회라는 사람이 노자에게 글을 간청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동양 고전 역사 상 가장 값진 한 권의 책을 얻지 못했겠구나. 아무튼 노자는 그 이후 백육십 살 또는 이백 살을 살았다고도 전해지는데, 그의 최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쉽게도 아무도 없단다.

 

 

2.    노자는 어떤 시대에 살았나요? (#시대적 배경#)

 

Q) 그렇다면 노자는 살았던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나요?

 

A) 노자가 기원전 600년 전에 태어났으니까 노자는 주나라 춘추 시대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구나.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니? 자세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기에 앞서 여기 고대 중국 역사 연보를 보렴.

 

역사 연보.jpg

 

A) 우리가 흔히 춘추시대라고 말하는 동주 시기에는 중국 주나라의 천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과거 봉건 종속관계로 형성된 제후국과의 유대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던 혼란한 시기였단다. 당시 140여 개나 되는 제후국들은 주 왕실을 상징적 군주로서만 인정하면서 예()와 관련 된 질서를 지킬 뿐이었지. 이 시기를 바로 춘추(春秋)시대라고 해. 제후국들이 강성해지고 북쪽의 융적(戎狄) 오랑캐 세력과 남방의 초()나라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주나라 천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천하 일을 간섭하고 처리했던 세력 강한 제후국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춘추오패(春秋五覇)라고 불렀단다.

 

Q) 춘추오패에는 누가 있었나요?

 

A) ()나라의 환공(桓公), ()나라의 문공(文公), ()나라의 장왕(莊王), ()나라의 왕 합려(闔閭), ()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가리킨단다. 당시에는 워낙 나라의 정세가 불안하고 어지러웠고 제후국의 힘들이 강성했기 때문에, 여러 뜻 있는 사람들은 각 제후국에 등용이 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학식과 재능을 선전하기도 했단다. 그러한 사람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하지.

 

Q) 요즘의 취업 시장과 비슷한 것 같아요.

 

A) 그러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아무튼 각 제자백가들은 나라가 혼란에 빠진 원인과 이러한 혼란을 종식 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저마다의 다른 방식으로 각 제후국 맹주들에게 어필했었지.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儒家) 역시 인()과 예()를 강조하며, 춘추 시대 이전, 즉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당시로 돌아갈 것을 강조 했지.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하는 옛날의 주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이야. 일종의 보수주의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지. 그를 위해 많은 현실적 제도의 개선과 노력을 강조했지. 노자도 어떻게 보면 그러한 제자백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Q) 그렇다면 당시의 제자백가들과 노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A) 좋은 질문이구나. 공자를 포함 한 당시의 제자백가들의 대부분은 혼란한 당시 나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 엄정한 제도와 관리 그리고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지. 다분히 현실적이었고, 실용적이었지. 하지만 노자는 다른 제자백가들과 달랐단다. 노자가 강조한 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정신이란다. 원래 자연 상태 있는 그대로가 가장 조화로운 상태이며,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라가 더욱 어지러워진다고 주장했어. 애초부터 큰 도리를 굳게 잡아나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일을 꾸미려 하니 일이 꼬였던 것이고, 다시 그것을 억지로 고치려 하니 일이 더 얽히고 설키게 되었다는 뜻이란다. 이런 배경에서 노자는 유가에서 말하는 지혜와 인의를 오히려 끊어버릴 것을 주장하기도 했어.

 

Q) 노자의 사고 방식은 다른 제자백가들과는 차이가 많은 것 같아요.

 

A) 바로 그 점이 노자의 도덕경이 기록이 많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위대한 경전 가운데 하나로 인정 받는 이유이기도 하지.

 

 

3.    노자의 사상(思想)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요 (#노자의 사상#)

 

A)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노자는 유가에서 내세운 명분주의와 인위적인 조작에 반대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처할 것을 주장했단다. 그는 유가의 인위적인 도덕이 끼치는 폐단과 인간의 위선을 고발함으로써 좀더 근원적인 진리로 나아가고자 했지.

 

Q) 조금 어려운 것 같아요.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A) 그래. 무위라는 것은 행함()이 없음()을 말한단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라는 것은 모든 인위적인 제도나 노력 그리고 사회적 질서 같은 것들을 말한단다. 그리고 자연(自然)이라는 것은 숲 속의 자연이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의 도와 진리를 품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 즉 우주의 근본 원천을 말한단다. 인위적인 제도나 노력을 배제함으로써 자연이라는 궁극적인 실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지. 너도 노자의 도덕경을 보면 알겠지만, 그곳에서 등장한 주요한 비유 두 가지를 통해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첫 째는 그릇의 빈 공간이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릇에 무언가를 담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어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지. 가득 차 있는 물 잔에 물을 더 담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단다. 진짜 쓰임은 비어있는 공간이 있음으로써 생겨난다는 것으로 무()의 용(), 즉 없음의 쓸모 있음이라는 것이 바로 노자 사상을 대표적 드러내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단다. 또한 노자는 이러한 무의 효용성에 대해 이렇게 비유하기도 했단다.

 

“수레바퀴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의 통에 모여 있긴 하지만 그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수레를 사용할 수 있으며, 또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 때 그 빈 곳이 있기 때문에 그릇을 쓸 수 있으며, 문과 창문을 뚫고 방을 만들되 그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방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유()가 이용되는 까닭은 무가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Q) 노자의 사상에 대한 다른 비유는 어떠한 것이 있나요?

 

A) 두 번째 비유는 바로 굽은 나무가 제 수명을 누린다는 것이지. 춘추 시대 많은 제자 백가들은 현실적으로 실용적인 대안을 강조 했지. 나무로 치자면 곧은 나무가 되기를 바랬던 것이지. 하지만 노자는 곧은 나무야 말로 가장 빨리 벌목 되어 제 수명을 누르지 못하는 불행한 존재라고 비유했단다. 그는 인간의 재치와 이기심 등 작위성을 멀리하고 욕심을 멀리 하도록 가르치며, 또한 물질적 재화에 대해서도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당부했단다. 검소함을 미덕으로 강조하였지.

 

뿐만 아니라 마치 부드러운 물이 견고한 바위를 뚫는 것처럼, 부드러움은 딱딱함을 이길 수 있다고 강조 하기도 했단다. 이처럼 도란 어떤 의미에서 물과 같단다 (上善若水). 물은 모든 사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먼저 가려고 다투지 않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무르려 하지. 물과 같이, 모름지기 현자는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유익을 안겨주면서도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항상 겸손한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이 노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구나.

 

 

4.    도덕경(道德經)이란 무엇인가요? (#도덕경의 이해#)

 

A) 도덕경(道德經)이란 쉽게 말해 도()와 덕()에 관한 경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빠가 그린 아래 그림을 보면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도덕경.jpg

 

A) ‘는 우주의 궁극실재 혹은 근본 원리를 말한단다. 그리고 덕은 그 도가 구체적인 인간이나 사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될 때 얻어지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도덕경> 전체를 통해서 주어지는 기본 메시지는 우주의 기본 원리인 의 흐름을 체득하고,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감으로 참다운 자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을 보라는 것쯤으로 생각할 수 있단다.

 

Q) 그렇다면 이러한 도와 덕에 관한 내용으로 노자가 지은 책이 도덕경이라는 거군요?

 

A) 그렇단다. 도덕경은  5,000, 상하 2편으로 되어 있지. 다만  경 안에 인용 된 글 가운데 일부가 그 문체나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형식이나 방법 등이 통일 되어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을 노자 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는 견해를 가지기도 한단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경의 내용은 노자가 태어난 기원전 600년 전인 춘추시대부터 전국 시대를 거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이후 한()나라에 의해 다시 재 통일 되는 기원전 200년 전 까지 중국에서 널리 유행했던 도가사상을 집대성 한 것으로 보여진단다. ()나라 초기에는 <노자>의 원본이 있었던 모양이나, 현존하는 도덕경은 한나라 초기 즉 기원전 200년 전에 제작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라고 하는구나. 그 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이르러 상편 37, 하편 44, 합계 81장으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단다.

 

 

5.    왜 도덕경을 읽어야 하나요? (#도덕경의 의의#)

 

Q) 도덕경을 왜 읽어야 하나요?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모르겠어요.

 

A) 좋은 질문이구나. 고대 중국인들의 일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사상을 꼽는다면 단연 유가 사상과 도가 사상을 꼽을 수 있겠구나. 유가 사상은 선구자가 공자(孔子)라면 도가 사상의 선구자는 바로 노자(老子)라고 할 수 있단다. 유가 사상이 우리의 현실 정치와 일상 생활을 지배했다면 도가 사상은 우리의 사상적인 바탕이 되었다. 동양 고전에 자주 등장하는 무릉도원이나 이상향과 관련된 모든 신화적 기원이 바로 이 도가 사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단다.

 

그래서 아빠는 네가 도덕경 책을 읽을 때 고리타분한 옛날 고전을 읽는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도덕경의 사상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었으면 좋겠구나.

 

Q) . 잘 알겠어요. 감사해요.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8) ‘도’는 우주의 궁극실재 혹은 근본원리요, ‘덕’이란 그 도가 구체적인 인간이나 사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될 때 얻어지는 ‘힘’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은 전체를 통해서 주어지는 기본 메시지는 우주의 기본 원리인 ‘도’의 흐름을 체득하고,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감으로 참다운 자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덕’을 보라는 것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9) 도덕경은 장자라든가 다른 서책과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을 ‘일깨우기’ 위한 ‘일깨움’을 기본 특성으로 하는 책이므로 내용적으로는 의미상 차이가 약간 있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노자님의 사상을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고 송두리째 떠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을 읽고 그와 함께 생각하며 내면적 대화를 가짐으로써 뭔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던 것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20) 영원한 도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의미의 무엇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꼭 집어 말해 주지는 않는다. ‘도’란 직관과 체험의 영역이지 사변과 분석과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22) 만일 우리가 ‘욕심을 비우고’ 깊은 형안을 갖게 되면 전자인 실상계의 신비를 직관하게 되지만, ‘욕심을 가지고’ 사는 한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계만을 감지하고 살 뿐이라고 한다.

 

(22) “도대체 어찌하여 허공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있다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계속했고,, ‘존재의 신비’니 ‘존재의 충격’이나 하는 말로 그 신비스러움을 표현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다.”고 했다.

 

(26) 분별의 세계, 일상적 상식의 세계를 초탈하라는 것이다. ‘도’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나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서로 다를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빙글빙글 돌아 고정된 성질로 파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고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는 변증법적 사고방식, 양쪽으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27) 우리말로 성인이라고 하면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성인의 본래 뜻은 이런 윤리적 차원을 넘어, 말하자면 ‘특이한 감지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만물의 근원, 만물의 ‘참됨’, 만물의 ‘그러함’을 꿰뚫어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 도덕경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형이다.

 

3장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30) 노자님은 이런 상식적 관례를 깨어 버리라고 한다. 훌륭한 사람들을 떠받들거나 그들에게 상을 주면 그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질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구하기 어려운 귀중한 것을 귀히 여기면 사람들은 그런 것을 얻으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을 저지를 것이요, 탐날 만한 것을 보이면 그런 것을 못 가져 안달하거나 ‘상대적 빈곤’에 시달릴 것이니 아예 그런 것을 귀히 여기지도 말고 보이지도 말라고 한다.

 

(31) 그보다 여기서 노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 훌륭하다는 것, 귀중하다는 것, 탐날 만하다는 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궁극 가치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가져 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32)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간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지구가 판판하다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계속 버려서 결국 우리의 제한된 ‘무지’의 경지에 이르면 그때 새로운 의미의 완전한 앎, 궁극 지식의 경지가 트이는 셈이다. 이를 ‘박학한 무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장 도는 그릇처럼 비어

 

(37) 도가 육신이 되어 세상과 하나되고, 그래서 세상에 거한다... 사실 세상의 세상됨이란 도가 세상과 하나됨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세상의 됨됨이가 도의 모습 그대로이다. 도는 전적으로 초월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내재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겸하고 있는 ‘변증법적 실재’라 할 수 있다.

 

5장 짚으로 만든 개처럼

 

(41) “말이 많으면 좋지 않다” ... 일상 생활 중에 말이 많으면 그만큼 실수하기 쉽고 쓸데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 말많은 것이 좋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도같이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는 뜻이리라.

 

6장 도는 신비의 여인

 

(46) 요컨대 지금까지 공격성, 진취성, 지배성, 경쟁성 등 주로 남성적 특성을 찬양하고 이런 특성을 신과 결부시켜 신을 우리의 대장, 임금, 승리자, 정복자, 주님 등으로 생각했는데 종래까지의 이런 의식구조나 고정 관념을 청산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48)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삶이란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생물학적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롭게 된 참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49)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역설의 논리다. 도덕경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에서도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50) “나를 비우는 것이 나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이처럼 건전한 종교들의 기본 지침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8장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51)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 힘을 다한 섬김 /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

 

(52) <도덕경>에서 가르치는 삶의 자세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물같이 되리”는 것이다. ‘도’처럼 된다든가 ‘도’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도의 최고 상징이다.

 

9장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56)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쉬 무디어집니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이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재산과 명예로 자고해짐은 재앙을 자초함입니다.

일이 이루어졌으면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입니다.

 

(59) 그래서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물러남이 있을 때 새로 들어옴이 있다. 이것이 하늘의 길이라는 것이다.

 

10장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않고

 

(61) 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11장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64)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15장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83) “흙탕물처럼 탁하다”는 것도 흥미로운 표현으로, 도의 “티끌과 하나됨”과 같이 도인도 고고하게 자기 혼자만의 결백성을 주장하며 산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탁해지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물들거나 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탁함을 고요히 하여 드디어 맑게 하고, 정지되어 맑게 된 것을 다시 움직여 결국은 생동하게 하는 일을 한다. 세상과 하나 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셈이다. 이런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7장 훌륭한 지도자는

 

(89) [훌륭한 지도자는] 말을 삼가고 아낍니다.

[지도자가]할 일을 다하여 모든 일 잘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고.

 

20장 세상 사람 모두 기뻐하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나도 두려워해야 합니까?

얼마나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입니까?

딴 사람 모두 소 잡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봄철 망루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는데,

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기만 합니다.

지친 몸으로도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텅하기만 합니다.

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

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

딴 사람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입니다.

나 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은 결국

나 홀로 어머니 []먹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p101

 

(104) 역사적으로 이렇게 일반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지에서 고독했던 사람이 얼마일까? 인간 역사는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독 속에서 밝힌 진리의 등불로 이 정도라도 밝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22장 휘면 온전할 수 있고

 

(110) 휘면 온전할 수 있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되고,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됩니다.

 

(113) 결국 이런 트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한 면만 보는 데서 오는 단견에 입각한 자기의 입장을 관철하려거나 자기를 드러내려고 겨루거나 다투는 일을 하지 않는다.

 

24장 발끝으로는 단단히 설 수 없고

 

(119)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설 수 없고,

다리를 너무 벌리는 사람은 걸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밝게 빛날 수 없고,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은 돋보일 수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밥찌꺼기 군더더기 같은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의 사람은 이런 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26장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

 

(130) 그때그때 임기 응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약삭빠르게 온갖 편법을 써 가면서 수선을 떨고 사는 삶이 우선은 ‘성공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같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도덕경’에서는 우리에게 그런 삶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묵직하고 조용하는 사는 삶, 어느 면에서 우직하기까지 한 삶이 결국 긴 안목으로 볼 때 그런 경박한 삶보다 훌륭하기 때문이다.

 

27장 정말로 잘하는 사람은

 

(131) 정말로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달린 자국을 남기지 않습니다.

정말로 잘하는 말에는 흠이나 티가 없습니다.

정말로 잘 닫힌 문은 빗장이 없어도 열리지 않습니다.

정말로 잘 맺어진 매듭은 졸라매지 않아도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

물건을 잘 아끼고, 아무것도 버리지 않습니다.

이를 일러 밝음을 터득함이라 합니다.

 

(133) 그런데 일상적, 상식적 세계를 넘어서서 완벽한 선의 경지에 이르면 이런 외부적인 것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이다.

 

29장 세상은 신령한 기물

 

(142) 나라를 뜯어고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게 하겠다고 외치면서 혁명이니 계급 투쟁이니 인민 해방이니 하고 함부로 대들다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고통 당했는가? 결국 동유럽이나 기타 여러 나라에서 보듯이 평등한 굶주림의 사회로 끝장나게 하려고 그 동안 그렇게도 야단스럽게 설쳤던가?

 

(144)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세기1:28)는 ‘성서’의 명령에 따라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천부의 권리라고 믿고 자연을 함부로 대하던 서양에서는 이제 환경보호 문제가 큰 이슈로 되어 이를 위한 노력이 전반적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한 데 반하여,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고 자연과 벗할 것을 이상으로 여겨왔던 동양에서는 새삼 서양의 과거 전철을 밞아 가는 건지 생태계 파괴로 인한 공해 문제가 심각하지만 이를 개선하겠다는 노력이 아직 미미하다는 것이다.

 

30장 군사가 주둔하는 곳엔 가시엉겅퀴가

 

(145) 무력을 써서 세상에 군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무력을 쓰면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오게 마련이어서

군사가 주둔하던 곳엔 가시엉겅퀴가 자라나고,

큰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따르게 됩니다.

훌륭한 사람은 목적만 이룬 다음 그만둘 줄 알고,

감히 군림하려 하지 않습니다.

 

(147) 중국에서 유가, 불가, 도가의 사상가들, 심지어 묵자님 같은 사상가도 그 동기는 각각 달랐겠지만 모두 평화주의자였다. 그 가운데에서 노자님, 장자님이 가장 철두철미하게 평화를 주장하고 전쟁을 죄악시했다.

 

(147) 아무튼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나라를 방어하고 국민을 보위한다는 본래의 목적이 성취되었으면 거기서 끝나야 한다. 무슨 큰일을 이룬 것처럼 승전고를 울리면서 사열식을 하고, 전승 기념탑이니 영웅 추대식이니 하면서 그것을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그것으로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31장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

 

(152) 유엔에서 채택한 히브리 성서 이사야의 말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2:4) 한 것이 생각난다.

 

(153) 옛날 중국에서는 왼쪽을 양적인 것 곧 남성적인 것으로서 하늘, 동쪽, 생명 등을 관장하는 자리로 생각하고, 오른쪽을 음적인 것 곧 여성적인 것으로서 땅, 서쪽, 죽음 등을 관장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보통 때는 생명을 관장하는 자리인 왼쪽이 귀하게 여겨지지만, 전시에는 죽음이 판을 치므로 죽음을 관장하는 자리인 오른쪽이 귀하게 여겨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156) 그러나 이름도 없던 통나무가 쪼개져 마름질을 당하면 여러 기물이 생겨나고..,

 

33장 자기를 아는 것이 밝음

 

(158)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입니다.

남을 이김이 힘있음이라면,

자기를 이김은 정말로 강함입니다.

 

36장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

 

(170) 약하게 하려면 일단 강하게 해야 합니다.

폐하게 하려면 일단 흥하게 해야 합니다. ...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깁니다.

 

(173) 만사가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 ‘도덕경’의 기본입장이다. 이렇게 변증법적 변화 과정을 꿰뚫어보는 것이 ‘미명’ 즉 ‘은근한 명찰’이라는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은 ‘도덕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기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다.

 

37장 하지 않으나 안 된 것이 없다

 

(175)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무위도식’이 아니다. 의식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자연스럽고 과장되고 지나치고 쓸데없고 허세를 부리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모든 행위를 ‘하지 않음’이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고 속 깊은 데서 저절로 우러나는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행동, 이것이 바로 ‘무위의 위’, ‘함이 없는 함’이다.

 

(177) 욕심이 없어지면 고요함과 평화가 깃들게 된다고 한다. 부처님도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가르치면서 우리의 고통은 ‘집착’ 때문이라고 하였다. 집착을 끊은 상태 곧 ‘욕심의 불길이 꺼진’ 상태, 이때 가능하게 되는 시원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자유의 경지가 바로 ‘니르바나(열반)’라는 것이다. 어느 종교나 나 중심의 생각, 거기서 나오는 덤벙거림을 청산하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의 평화를 위해 불가결함을 강조하는 데는 다를 바가 없다.

 

38장 훌륭한 덕의 사람은

 

(178) 훌륭한 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하기 않습니다.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훌륭하지 못한 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합니다.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많습니다.

훌륭한 인의 사람은 억지로 일은 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은 없습니다.

훌륭한 의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합니다.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많습니다.

훌륭한 예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응하지 않기에, 소매를 걷고 남에게 강요합니다.

 

(179) 앞을 내다보는 것은 도의 꽃, 어리석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람은 두꺼운 데 머무르고,

얄팍한 데 거하지 않습니다.

열매에 머무르고, 꽃에 거하지 않습니다.

후자는 버리고 전자를 택합니다.

 

39장 예부터 ‘하나’를 얻은 것들이

 

(186) ‘하나’를 근본으로 하는 삶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것을 꼴지어 주지만 스스로 어떤 꼴을 취해서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수적으로도 그것은 모든 숫자의 시작이며 바탕이지만 동시에 모든 숫자 둥 가장 작은 숫자이다. 이런 뜻에서 ‘하나’는 자기 낮춤의 최고 상징이다.

 

43장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201)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깁니다.

‘없음’만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202)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란 물론 물입니다.

 

(203) 힘없는 민초의 힘이 결국은 철권을 휘두르는 강권 정치의 힘을 이기고 만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계속적인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신념이 있다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이 반드시 어리석은 일만은 아니다.

 

(204) ‘없음’만이 틈이 업는 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없음이란 자기 고유의 형체가 없는 것이다. 칼이 얇으면 얇을수록 베는 물건 속으로 잘 들어가듯이 자기 고유의 형체를 줄이면 줄일수록 좁은 틈 사이로 그만큼 더 잘 들어갈 수 있다.

 

44장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더 귀한가?

 

(205) 그러므로 (무엇이나) 지나치게 좋아하면 그만큼 낭비가 크고, 너무 많이 쌓아두면 그만큼 크게 잃게 됩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08) 신학자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가 생각난다. 하느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옵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고,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46장 족할 줄 모르는 것

 

(217) “닭이 울 때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순 임금 계통의 사람이요, 닭이 울면서 일어나 하루 종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도척의 무리다.

 

47장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218)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다 알고,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습니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만큼 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훤하고,

억지로 하는 일 없이도 모든 것을 이룹니다.

 

(220) 요는 진리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외부 현상에 대한 정보만 찾는 데 온갖 신경을 다 쓰면서 돌아다니기만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아버리면 사물의 밑바탕인 참된 근원을 간과하고 말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48장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222)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억지 일 꾸미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아직도 억지 일을 꾸미면 세상을 다스리기엔 족하지 못합니다.

 

49장 성인에겐 고정된 마음이 없다

 

선성에서도 인간이 에덴 동산에 살 때에는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런 상태가 바로 낙원 상태였다는 것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므로 선악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의식의 세계로 ‘타락’하게 되고, 그리하여 자의식을 비롯한 모든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상태가 ‘원죄’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복낙원은 엄격히 말하면 다시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비이분법적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p228

 

50장 그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기에

 

(234)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연습도 중요하지만 죽어가는 연습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의연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p234

 

51장 덕은 모든 것을 기르고

 

(237) 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도와 덕이 있어야 하지만, 그 밖에도 다른 물질이 있어서 하나의 개체가 모양을 갖추게 되고, 자연 환경이나 사회 여건 등의 영향력이 있어서 그 개체가 완성된다고 한다.

 

(237) 도와 덕이 하는 일, 더욱 정확히 말하면 도가 ‘덕을 베풀어서’ 하는 일은 “낳고 기르고 자라게 하고 덮어 주는”일이다. ‘덮어 준다’는 것을 '묻어 준다‘고 해석하여 도는 만물이 나서 땅에 묻히기까지 생성 괴멸의 모든 과정을 돌봐 주는 일을 한다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p237

 

53장 이것이 도둑 아니고 무엇?

 

(244) 이천 몇 백년 전의 사회상을 묘사한 이 말이 어쩌면 이렇게도 정확하게, 우리의 현실에 잘 부합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 주위를 직접 보고 우리 가운데에 편만한 윤리적, 사회적 부조리를 그대로 고발하고 있는 말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55장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255) 이렇게 억지를 쓰는 일은 갓난 아이의 생활 태도와는 반대로 완전히 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곧 끝장이 나고 마는 법이라는 것이다. 도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역효과만 초래하므로 달력의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자연과 합일되어 구름 떠가듯,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삶에서 궁극적인 삶의 스타일을 찾도록 권고하고 있다.

 

56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256)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입을 다물고, 문을 꽉 닫습니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주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신비스런 하나됨’입니다.

 

60장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다

 

(274)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로써 세상을 다스리면

귀신도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귀신이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있어도 사람을 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힘이 사람을 해칠 수 없다기보다는

성인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해치지 않으니

그 덕이 서로에게 돌아갑니다.

 

(276) 작은 생선을 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잘 익을 때까지 한참 동안 가만히 놓아 두고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특히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이와 같이 가만두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중앙 정부가 지방의 일을 사사건건 간섭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통치 체제를 채택할 것이 아니라 각 지방 자치단체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스스로 되어가도록 놓아 두라는 것이다.

 

61장 큰 나라는 강의 하류

 

(278) 큰 나라는 강의 하류,

온 세상이 모여드는 곳.

그것은 세상의 여인.

여성은 언제나 그 고요함으로 남성을 이깁니다.

고요히 스스로를 낮춥니다.

 

(279)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생 공영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타국과의 관계에서 명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일은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큰 나라는 솔선하여 작은 나라 아래에 스스로를 둬야 한다고 하고 있다.

 

64장 천릿길도 발 밑에서

 

(295) 그러나 도에 따라 사는 자연인, 자유인은 한 줌 티끌이나 한 줌 흙을 옮기는 기분으로 쉽게 일을 시작하여 꾸준하고 묵묵히 수행한다. 꾀를 내거나 자기를 드러내려는 인위적이고 표피적인 행동이 아니다. ‘함이 없는 함’이다. 그래서 결국은 태산이 이루어지고 구층 누대가 완성된다. 그러나 아무것에도 달라붙거나 집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족할 뿐, 뽐내거나 소유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잃는 일이 없다.

 

67장 내게 세 가지 보물이 있어

 

(307) 세상 모든 사람 이르기를 나의 도는 크지만

쓸모 없는 듯하다고 합니다.

크기 때문에 쓸모 없는 듯한 것입니다.

만약 쓸모 있었으면 오래 전에 작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게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이를 지니고 보존합니다.

첫째는 자애

둘째는 검약

셋째는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입니다.

 

68장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보이지 않는다

 

훌륭한 승리자는 대적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이기는 자는 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길이 있고, 이렇게 이길 때 완전히 이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p314

 

70장 내 말은 알기도 그지없이 쉽고

 

(323)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불경에 의하면 성불한 후 사람들에게 가서 가르치기를 주저하였다고 한다. 첫째 대부분 사람의 경우 우선 먹고 살고 지지고 볶는 데 바빠 상식 세계를 넘어서는 이런 진리 같은 데 관심이 없을 것이고, 둘째 그 진리 자체가 너무 심오하고 원대해서 보통 사람이 이해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327) 소크라테스도 자기나 아테네의 모든 사람이나 모두 무지한데,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자기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73장 하늘의 그물은 엉성한 것 같지만

 

비폭력주의 같은 소극적 대처 방안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것처럼 보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이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지고 당장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라. 결국은 하늘의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어릴 때 듣던 “물은 물대로 간다.”는 말이 생각난다 p337

 

74장 위대한 목수 대신 나무를 깎는 일

 

(339)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아무리 사형으로 위협한들 소용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죽음보다 더 큰 가치, 자기가 믿기에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경우이다. 어느 경우든 죽음이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상태이다.

 

76장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346)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집니다

온갖 것, 풀과 나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지만 / 죽으면 말라 뻣뻣해집니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사람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사람은 삶의 무리입니다.

 

77장 하늘의 도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

 

(352)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왔는데, 그 부자가 자기 집 양은 아까워서 안 잡고 이 가난한 집 암양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부자의 철면피함을 개탄하고 그에게 벌을 내리라고 명했다. 나단은 이 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78장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다

 

(356) 물이 가진 이런 특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문제는 스스로 물처럼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천이 문제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물처럼 되는 것이 손해 보는 일, 어리석은 일, 비능률적이며 전시 효과도 없고 화려하지도 못한 일이라 여겨 물처럼 되기를 기피한다. 그러나 물처럼 되어 보라고 한다. ‘부드럽고 여림’의 진리를 몸소 실천해 보라고 한다. 여기서는 특히 물의 정화 작용, 더럽고 궂은 것을 떠맡아 깨끗이 하는 일을 강조하고 그런 일을 해보라고 한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면 가히 나라를 다스릴 자격을 갖추는 셈이라고 한다.

 

80장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

 

(365) 노자님의 이상 사회는 사람들이 살아 있음을 고맙게 여김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회, 그래서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더 나은 삶을 찾는다고 떠다니는 일이 없는 사회이다. 비록 배나 수레가 있지만 사람들 멀리 이사 가거나 여행하지 않기 때문에 타는 일이 없고, 방어전을 대비해서 갑옷이나 무기를 비치해 두었지만 이웃과 싸우거나 내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쓸 일이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회이다.

 

81장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370) 성인은 쌓아 나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욕심이 없으니 재물을 저축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고 그럴 능력도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사람들을 위해 다 내어 준다. 그러건만 점점 더 풍요로워진다. 도와 하나가 됨으로 이제 우주가 내 집이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니 무엇이 모자라고 무엇이 더 탐나겠는가?

 

 

III.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을 분석

 

가.   평이한 목차 구성

 

특별히 목차 구성에 대한 호불호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목차 구성이 평이 했다. 여든 한 장이나 되는 본문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어 도덕경이라는 것을 구조적으로 생각하거나 접근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만약 도덕경에 등장하는 각 장이 다른 장들과 구조적인 관계가 없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상편 37장과 하편 44장 정도는 별도로 구분하고, 이 상하편의 구분이 어떠한 이유로 나눠져 있는지에 대한 설명 정도만 보강 되어도 전반적인 구조 상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 된다.

 

나.   신선한 소제목 활용

 

각 장에 별도의 소제목이 달려 있다. 논어와 같이 각 장의 본문의 첫 구절을 따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 가운데서도 오강남 역자가 생각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해서 각 장의 제목으로 삼은 듯 하다. 대부분의 소제목들이 역자의 안목과 고심이 느껴지는 것 들이었다. 목차를 보고서도 각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하게 신경 쓴 소제목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독자의 눈으로)

 

가.   영문 번역 굳이 필요한가?

 

도덕경의 영문 번역을 첨부 한 것에 대해 굳이 첨부를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문 번역을 보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영문 번역이 어떠한 의미가 있거나 기대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사소하게나마 그것에 대해 역자가 언급을 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독자가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독자 선에서 그냥 넘겨도 크게 문제는 없을 듯 하다.

 

나.   도덕경이 우리 사회에 갖는 의미 강조 해야

 

도덕경이 지어졌다고 추정되는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나 지금이나 우리의 현실은 실용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양명(揚名) 하지 못하는 입신(立身)은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런데 도덕경은 사회와 떨어질 것을 강조한다. 사회를 버리자는 것일까? 방기(放棄)하자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애착이 없었다면 노자가 도덕경이라는 글을 수고스럽게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무언가를 개선하기 위한 우리의 어설픈 시도는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노자의 말에 공감이 가는 것은 왜일까. 서문에서 밝힌 것과는 다르게 도덕경이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가질 수 있는지 그에 대해 역자의 좀 더 깊은 고민에 대해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물론 그것은 독자의 몫이라면 몫일 수도 있겠다.

 

 

3) 이 책의 장점 (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등

 

가.   한자 지식이 없어도 읽기 편함

 

본문에 한자 관련된 내용을 최소화 시켜 두었다는 점이 눈에 띄였다. 독자가 어렵다고 느낄 수 있는 내용에 대해 최소화 하면서 한자 지식이 없어도 본문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 대한 설명도 쉽게 되어 있어서, 원문을 번역하는 것 이외에도 그것을 이해하고 곱씹으려고 애썼을 역자의 노력과 수고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나.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각 장의 구성이 중복되는 내용은 있어도 각각의 장이 별도로 연관 되는 것이 아니라 순서 상관없이 내키는 부분을 탁 하고 책을 펼쳐서 아무 페이지나 내키는 대로 읽어 내려가도 좋을 것 같다. 구애 받지 말자. 어차피 노자가 도덕경을 어떠한 기준에 맞춰 체계적으로 도덕경을 써내려 갔다면 그 역시 노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도덕경에는 유독 비유적인 표현이 많다. 넌지시 알려 줄 수 있을 뿐이다. 직접적인 가르침에는 지식만 있고, 감동이 적다. 울림이 적다.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읽고, 그 촌철 같은 비유로 저마다의 머리를 두들겨 맞다 보면 안에서 느껴지는 울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콕 찝어 알려주어도 아무런 배움이 없을 사람이다. 내가 노자의 비유적 표현을 좋아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의 눈으로)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가.   도덕경 각 장을 범주 별로 재 구성하기 (Ex : 정치, 일상 .. etc)

 

도덕경은 총 여든 한 장의 각각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각각의 장들을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각 장의 주제나 범주에 맞게 장을 재 구성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체계화 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관련 주제 별로 묶어서 글을 읽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뜻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상편 37장과 하편 44장 정도는 따로 구분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   나의 생각 추가하기

 

각 범주(Ex : 정치, 일상 .. etc) 별로 도덕경을 새로 구분을 하게 되면, 각 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한 두 장의 지면을 빌려 함께 수록하면 좋을 것 같다.

 

 

 

[에필로그]

 

조금 많이 벗어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노자의 도덕경이 열역학 제 2법칙을 소개한 엔트로피라는 책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지만(열역학 제 1법칙) 에너지를 사용하면 할수록 가용한 에너지의 양은 점차 줄어들 뿐 절대로 다시 늘지는 않는다는 것(열역학 제 2법칙)이 바로 엔트로피 이론의 핵심이다. 에너지를 아껴 쓰면서 가용한 에너지가 감소하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가용한 에너지 자체를 늘릴 수는 없다는 말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다시 말해 가용한 에너지는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점점 줄어만 가고, 쓸 수 없는 에너지는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점점 늘어만 간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엔트로피 이론을 신봉하는 학자들은 검소한 삶, 소박한 공동체를 지향한다.

 

이 점이 바로 엔트로피 이론이 노자의 사상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노자 역시 검소한 삶과 작은 공동체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 산재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고 질서를 추구하지만,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자연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많이 가졌음에도 더욱 결핍을 느끼는 역설의 삶을 살고 있다. 더욱 빈곤해 진 것이다. 더 많은 책이 나오고 지식과 학문이 계발 되었지만, 우리의 사고는 옛 사람들의 그것보다 깊지 않다. 보는 책이 많아질수록 읽은 책에 대해 이해의 깊이는 더욱 얕아졌다. 더욱이 오늘 날은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빼앗는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자연과 더불어 지내지도,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지도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도덕경이 우리 사회에 가질 수 있는 역할은 다름아닌 잠시 멈춰 서서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경쟁하는 삶 속에서 과연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인지 잠시 멈추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오늘 날의 사회가 춘추전국시대의 그것보다 더욱 복잡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그 고민 속에서 그것과 함께 뒤엉켜 살아간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듯 도덕경을 느껴보자. 도덕경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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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0 11:16:19 *.124.22.184

저자 연구 대단하다. 난 너무 자료가 없어서 그냥 했는데... 이렇게 새로운 형식으로 하다니 놀랍네.

칼럼도 이렇게 써보면 좋겠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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