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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0일 08시 37분 등록

도덕경

 

노자

 

저자에 대해서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허난성 루이현(鹿邑縣)) 출신이다. 이름은 이이(李耳)이고 자는 담()이며 호는 백양(伯陽)이다.

노자가 태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기원전 57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1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 혹자 중에는 기원전 5세기, 심하면 기원전 4세기로 보는 사람까지 있고, 심지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런가 하면 노래자와 노자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자는 주(동주(東周))나라의 도서관을 관장하는 책임자를 지냈는데, 주나라가 쇠퇴하자 이를 한탄하며 서쪽 산관(또는 함곡관)1)을 나가 은퇴했다고 한다.

 

공자와의 만남

기원전 519년 춘추시대 중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해에 공자는 동주(東周)의 도성이었던 뤄양(洛陽)을 방문한다. 평소 주의 문물제도를 흠모해왔던 공자로서는 뤄양 방문이 그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을 것이고, 주 무왕을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공자였기에 흥분 그 자체였을 것이다.

공자는 우선 주 천자가 제후들을 맞이하고 대전을 거행하는 명당(明堂)을 비롯하여 왕성의 궁실, 주나라 조상 후직에게 제사를 드리는 태묘(太廟),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단(天壇) 등을 돌아보았다. 또 특별히 당시 이름난 음악가인 장홍을 방문하여 ‘악()’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공자가 뤄양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자는 그의 제자 강상초(康桑楚) 등과 함께 열렬히 공자를 환영했다. 뤄양의 각종 도서와 『주례』와 관련하여 얘기를 나누던 중에 노자는 공자에게 『사기』에 인용된 것처럼 자기 철학의 일단을 드러냈다. 그 대목을 보면 이렇다.

“그대(공자)가 말하는 예란 이런 것이오. 그 사람과 뼈는 이미 다 썩었는데 오직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인 것. 군자는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날리는 쑥대처럼 굴러다닌다고 합디다. 장사를 잘하는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간직하길 마치 그 물건이 없는 것처럼 하고, 군자는 덕이 넘치나 그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들었소이다. 그대의 교만한 기상과 넘치는 욕심, 얼굴과 모양새를 꾸미는 일, 갈피를 못 잡는 어지러운 뜻일랑 버리시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외다.

노자의 이 말은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지만 공구의 아픈 곳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으며 동시에 노자의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공자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안다. 물고기가 헤엄을 잘 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짐승이 달리기를 잘 한다는 것도 물론 잘 안다. 달아나는 자에게 그물을 칠 수 있고, 헤엄치는 것에게 낚시를 드리울 수 있으며, 나는 것을 향해 활을 쏠 수는 있다. 그러나 용이라면 나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뭐랄까? 그는 용과 같았다···”

 

또 『공자세가』에도 노자가 공자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귀한 자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재물을 딸려 보내고, 어진 자는 사람을 보낼 때 말로 한다고 합디다. 내 비록 부귀하지는 못하나 인자로 자처하길 좋아하니 이런 말로 그대를 떠나보낼까 합니다. ‘총명하여 깊이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위험이 따르는데, 이는 남을 잘 비판하기 때문이요, 많은 지식을 지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로운데 이는 남의 결점을 잘 꼬집어내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식은 아버지뻘 되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신하된 자는 임금 앞에서 자신을 치켜세우지 않는 법이다.’”

 

무위자연

기원전 484, 오자서가 ‘반란’이란 모함을 받고 자살한 바로 그 해, 노자는 홀연히 자리를 내던지고 푸른 소를 타고 서쪽으로 가버렸다. ()의 산관(散關, 산시(陝西)성 바오지시 서남)을 지날 때 관문을 지키던 사령관 윤희란 자가 “은거하시려는 모양인데 몇 글자만 남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하자, 노자는 그 자리에서 저 유명한 『도덕경(道德經)』을 써준 다음 바람과 같이 관문을 나가 사라졌다.

『도덕경』은 『노자(老子)』라고도 부르는데, 5천 자밖에 안 되는 짧은 문장이다. 이 글에서 노자는 우주발전의 자연법칙을 ‘도()’라 불렀는데, 이것이 도가학파의 기원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경』에 반영된 노자 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법률 · 도덕 · 풍속 · 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푸른 소를 타고 있는 노자의 모습

노자의 사상은 횡포한 세상에 대한 소극적 반응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또 항거할 수 없는 압력에 부딪쳤을 때 취할 수 있는 일종의 자기이해와 자기위안의 심리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친구 상종(常從)으로부터 큰 계시를 받았다. 한번은 상종이 큰소리로 느닷없이 “혓바닥이 아직 있나?”라고 물었다. 노자는 “있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상종은 “그럼 이빨은?”이라고 물었다. “없지.” 그 순간 노자는 약자가 살아남고 강자가 멸망하는 이치를 깨달았다.

노자의 전체 사상은 청정(淸靜)과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사물의 자연적 발전에 맡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고 이내 무너질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쓰러지지 않을뿐더러 더욱 강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의 발전은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지극히 약한 것이 지극히 강한 것이고, 후퇴가 곧 전진이다. 술잔이 차면 넘치고 달이 차면 기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노자는 억지로 나가려 하지 말고 마음을 다 잡을 것이며, 일삼지 않는 것이 일하는 것이니 자연의 변화가 곧 규칙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지 않는 것(무위(無爲))이 바로 아주 중요한 일을 벌써 많이 한 것(유위(有爲))이다.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P20 – 1장 도 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영원한 도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의미의 무엇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꼭 집어 말해 주지는 않는다. “란 직관과 체험의 영역이지 사변과 분석과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란 무엇인가?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도이다. 라는 뜻인데 그럼 도대체 도는 무엇인가> 어렵다.

 

P25 – 2장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이 장에서는 우선 모든 것이 상대적임을 말하고 있다. 선악, 미추, 고저, 장단 등이 모두 상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상대적 개념이라고 할 때 그것을 두 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길다고 하는 것은 짧은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 반대로 짧다고 하는 것도 긴 건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비교 때문에 많고 적음이 있는 것이다.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P26 – 2장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본질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반면 내 손가락이 길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서로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처럼 한 손가락이 길 수도 있고 동시에 짧을 수도 있다는 것, 길고 짦음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것 등을 보도록 하라는 것이 도가의 가르침이고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비본질적 사고라 할 수 있다. 

 

P27- 2장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특이한 감지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만물의 근원, 만물의 참됨’, 만물의 그러함을 꿰 뚫어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 [도덕경]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형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이상적 인간은 성산약수로 축약해서 표현되는 것 같다. 물과 같은 인간, 낮은 곳으로 향하고 언제나 모양을 변하면서 순응하는 것이 물이다

 

P27- 2장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무위란 물론 행위가 없음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 도식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 중심적 행위, 쓸데 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 중심적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P29 –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이 장은 가장 비판을 많이 받는 장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뛰어나려는 마음, 부를 축척하고 즐기려는 마음을 고취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사람들로 어떻게든지 더욱 많은 지식을 쌓고 의욕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무엇이나 해보겠다는 마음을 갖도록 고무하여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이 마땅하거늘 이렇게 찬물을 끼얹으니 말이 되는가 하는 비판이다.

P31-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노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 훌륭하다는 것, 귀중하다는 것, 탐날 많다는 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궁극 가치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가져 보라고 말하는게 아닐까?

과연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가?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물음인 것 같다.

 

P32-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간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지구가 판판하다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다. 계속 버려서 결국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 얻어졌던 일상적 지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완전한 무지의 경지에 이르면 그때 새로운 의미의 완전한 앎, 궁극 지식의 경지가 트이는 셈이다, 이를 박학한 무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41-짚으로 만든 개처럼

[도덕경]에서는 도가 어떻다고 할 때, 언제나 도가 그러니까 우리도 그러해야 좋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삶이란 도에 맞추어 도처럼, 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도와 함께 흐르고, 도와 함께 춤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P41-짚으로 만든 개처럼

말이 많으면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은 [도덕경]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훈이다. 일상 생활 중에 말이 많으면 그만큼 실수하기 쉽고 쓸데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 말 많은 것이 좋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도 같이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는 뜻이리라

말이 많으면 어찌되었건 좋지 않다. 말을 줄이자 경청하자

 

P45-도는 신비의 여인

[도덕경]에서 도를 여인, 특히 어머니로 상징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이런 뜻에서 나는 여성 운동가들이 [도덕경]을 여성 운동의 성서로 삼아도 좋으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장해 오고 있는 터인데, 여성운동가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서양에서 활발히 거론되고 있는 여성 신학에서는 이제 신을 하느님 아버지라 부르는 대신 하느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자는 주장도 있지만, 너무 길고 거추장 스러우니까 둘 중 하나를 골라 잡아야 한다면 하느님 어머니가 휠씬 좋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바뀌어 부르는 것이 큰 차이가 있을까? 색다른 주장이긴 하나 그 효과가 궁금하긴 하다.

 

P50-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란 말이 참으로 명언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명언임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

죽을 각오로 해야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죽을 각오를 해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P52-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8장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이 그 유명한 上善若水라는 구절이다. [도덕경]에서 가르치는 삶의 자세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물같이 되라는 것이다.

도덕경을 통틀어서 압축할 수 있는 구절이 아닌가 싶다.

 

P53-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물은 또 더러운 것을 씻어 정결케 해주기도 한다. 히브리 성서에 보면 하나님이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리라.”(에스겔36:25)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새 영새 마음을 갖게 되고, 굳은 마음이 없어지고 부드러운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물을 뿌리는 세례나 물에 잠그는 침례 등은 물의 이런 정화 작용으로 옛사람을 씻어 없애고 새 사람으로 소생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재현해 내는 의식이다.

세례 의식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서야 이해한다.

 

P54-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만물은 물 없이 못 살지만 물은 그들을 이롭게만 할 뿐 그 공로를 인정받자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 밑에서 묵묵히 섬기는 일을 할 뿐이다.

물의 위대함을 새삼 가슴에 새긴다.

 

P59-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재산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인생의 더 깊은 면에 눈을 돌려 보지 못하고 평생을 그저 돈 생각만 하다가 마쳐 버릴 위험이 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을 도둑 맞는 것이 재산을 도둑맞는 것보다 더 억울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가 할 일을 다 했지만 물러나야 한다. 처음부터 자기가 할 일도 하지 않고 은자의 생활이나 도피 생활로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문제지만, 할 일을 다 하고도 한 자리에 어물쩍거리거나 버티고 앉아 있는 것도 곤란하다.

자기 마음을 도둑맞는 다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무엇이 인생에게 중요한지를 일 깨워주는 듯 하다.

 

P63 –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않고

결론적으로 도에 입각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도와 마찬가지로 여인처럼, 어머니처럼 만물을 낳고 만물을 그 품안에서 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소유하려 하거나 거기에 기대려 하거나 군림하거나 좌지 우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능력 내지 영향력이 바로 현덕, 신비롭고 그윽한 힘이라는 것이다.

 

P65 –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도덕경]에서는 있음의 세계, 존재의 차원 자체를 부정하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의 세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비존재의 차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줄 뿐이다.

비 존재의 차원이란 무엇일까? 어렵다. 없음으로 해서 있음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P65-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우리 앞에 찻잔이 있으면 우리는 그 찻잔의 모양, 무늬, 재료 등에 신경을 쓸 뿐 가운데가 비어 있음 때문에 찻잔이 찻잔 노릇을 하게 된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수레바퀴도 바퀴통 가운데 수레축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있어야 바퀴 노릇을 할 수 있고, 집도 사람이 들어가 살거나 물건을 갖다 놓을 공간이 있어야 집으로서의 유용성이 생긴다.

 

P70-다섯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고

신나는 삶이란 이런 감각적인 것들에 전적으로 무감각하거나 무신경하거나 무관심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색깔, 아름다운 소리, 아름다운 맛을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알아보고, 놀랍고 고마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영어로 표현해서 ‘appreciate’할 줄 아는 삶이다.

도덕경에 새로운 모습이다. 모든 것을 멀리하라는 은둔의 학문인줄 알았다.

 

P75-내 몸 바쳐 세상을 사랑

따라서 남의 비난을 받아 자손심이 상하는 등 상처를 입는다는 기분이 들면 아하, 아직 내가 무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구나.’ 하고 깨닫고, 이 깨달음에 따라 더욱 열심히 나를 비우고 죽이는 정신적 훈련에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거의 신의 경지인 것 같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도 비슷한 것 같다.

 

P83 – 도를 체득한 휼륭한 옛사람은

흙탕물처럼 탁하다.”는 것도 흥미로운 표현으로, 도의 띠끌과 하나됨같이 도인도 고고하게 자기 혼자만의 결백성을 주장하며 산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탁해지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물들거나 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탁함을 고요히 하여 드디어 맑게 하고, 정지되어 맑게 된 것을 다시 움직여 결국은 생동하게 하는 일을 한다. 세상과 하나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셈이다. 이런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P87 – 완전한 비움

눈코 뜰 사이 없이 부산하게 돌아가는 현대 생활에서 언제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 우주의 흐름이니 사물의 실상이니 영원한 진리니 따지고 있을 시간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근본적인 진리에 입각하지 않고 엄벙덤벙 살아가면 아무리 설치고 부산하게 일을 늘어놓아도 그것은 결국 미망으로 재난을 당하는결과 밖에 가져오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빨리가고 오래가는 길이다.

 

P91-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무엇이나 너무나 크고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의 감지 대상 밖이다. 더 쉬운 예로 [장자]에서 말한 것처럼 신발이나 허리띠 등이 꼭 맞으면 내 몸의 일부처럼 되어 따로이 의식되지 않는다. 의식된다는 것은 뭔가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완전하지도 못하다는 뜻이다.

너무나 쉽게 이해가 된다. 인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P95-대도가 폐하면 인이니 의니 하는 것이

[도덕경] 전체를 통해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을 뒤흔들거나 뒤엎도록 하는 충격요법비슷한 것이 계속 등장하는데 이 장에서도 그렇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인의, 지혜, 효성, 자애, 충성 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최고로 여기는 덕목이다. 그래서 이런 것이 강조되고 실천되기를 바라고, 이런 것이 실천될 때 이상적인 사회가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도덕경]에서는 이런 것이 강조되는 세상은 아직도 덜 된 세상이라고 한다.

그런 것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앞 구절과도 일맥상통한 것 같다. 의식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불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P104-세상 사람 모두 기뻐하는데

역사적으로 이렇게 일반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지에서 고독했던 사람이 얼마일까? 인간 역사는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독 속에 밝힌 진리의 등불로 이 정도라도 밝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런 분들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를 부끄럽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하리라.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어머니는 도를 상징하므로 결국 도에 의존하여 도와 함께 사는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삶은 이분법적 의식을 초월하여 양극의 조화를 체득한 삶이다. 이렇게 홀로 도와 하나되는 삶을 살아감으로 고독한 사람을 두고 ‘the alone with the alone’이라 한다.

앞서 간다는 것은 외롭고도 고독한 길인 것 같다.

 

P108-황홀하기 그지 없지만 그 안에

여기서는 도가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이 미묘하고 황홀하지만 그렇다고 무 의미하게 텅텅 빈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속에 모든 것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뭔가가 들어 있다는 있음 有의 측면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도는 비존재이지만 그것은 일반적 존재를 초월하고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는 비 보통적인 존재라는 뜻으로서의 비존재이지 존재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P109-황홀하기 그지 없지만 그 안에

그런 뜻에서 야스퍼스가 말한 것처럼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은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암호 내지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눈 있는 자는 보라는 것이다.

 

P111-휘면 온전할 수 있고

휘면 온전할수 있다는 말은 노자님 이전부터 내려오던 말인 모양이다. 온전하려면 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들의 풀잎을 보라. 바람이 불 때 휘어지지 않는다면 뿌리째 뽑혀 버리고 말 것이다. 대나무를 보라. 휘어지지 않으면 꺾여 버리고 말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은 유연함이다.

 

P117-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

[도덕경]에 의하면 하늘과 땅도 가끔씩 말을 하기는 한다. 회오리바람이나 소낙비가 하늘과 땅의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늘과 땅의 말도 아침 나절이나 하루 이상 계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늘과 땅도 이렇게 가끔씩 짧게 말할 뿐인데, 어찌 사람이 그토록 오래 말을 계속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그보다 휠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P119-발끝으로는 단단히 설 수 없고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설 수 없고,

다리를 너무 벌리는 사람은 걸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람은 밝게 빛날 수 없고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은 돋보일 수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를 뽑내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깊이 있는 많은 울림이 있는 문구인 것 같다.

 

P137-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지금까지 이 반대의 일치라는 이야기는 하도 자주 나와 신물이 날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상이 또 있을까? 조셉켐벨은 그의 유명한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모든 영웅담에 나오는 정신적 영웅의 이야기르 잘 살펴보면 그들의 정신적 모험이란 결국 최종적으로 이 반대의 일치의 자각에 도달하려는 정신적 추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칼융도 중국인들은 모든 생명 있는 것 속에 생래적으로 내재하는 모순성과 양극성을 인지하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 반대처럼 보이는 것은 언제나 다른 편에 대한 균형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고급 문화의 징표이다. 일면성은 비록 그것이 모멘텀으로 유도하기는 하지만 야만성의 표지이다.”라고 했다.

 

P143-세상은 신령한 기물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세기 1:28)[성서]의 명령에 따라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천복의 권리라고 믿고 자연을 함부로 대하던 서양에서는 이제 환경 보호 문제가 큰 이슈로 되어 이를 위한 노력이 전반적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한 데 반하여,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고 자연과 벗할 것을 이상으로 여겨왔던 동양에서는 새삼 서양의 과거 전철을 밟아 가는 건지 생태계 파괴로 인한 공해 문제가 심각하지만 아직 이를 개선하겠다는 노력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도덕경과 같은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1세기간의 사상적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P149-군사가 주둔하던 곳엔 가시엉겅퀴가

오직 남의 나라가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범한 역사적 죄악을 미리 막아주지 못할 정도로 방어태세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은 과거 자기들이 남의 나라를 점령하고 지배한 역사가 없음을 영예로 생각할 뿐 수치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화를 사랑한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자!

 

P153-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

그 중 한 여인은 적군이간 하지만 몇 십만명의 무고한 사람이 살상당했는데 이런 축제 행사가 격에 맞느냐?”고 말했다. 노자님도 아주 외롭지만은 않은 셈인가?

노자는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 만약 모든 이들이 이에 동의했다면 세상은 좀 더 평온해질 것 같다.

 

P154-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다듬지 않은 통나무가] 마름질을 당하면 이름이 생깁니다. 이름이 생기면 멈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가의 중용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P157-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범을 쫓지 말고 깃을 가꾸라.”는 속담처럼 위정자나 사회의 지도자가 사람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눈에 보이는 실적주의나 알팍한 인기 전술 같은 잔꾀나 술수를 쓸 것이 아니라, 대우주의 기본 질서인 도와 함께하면 인심은 저절로 모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250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진리일까?

 

P158-자기를 아는 것이 밝음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입니다. 남을 이김이 힘있음이라면 자기를 이김은 정말로 강함입니다.

 

P174 – 하지 않으나 안 된 것이 없다.

인간, 특히 자도자도 이런 도의 원리를 받들어 무위를 실천하면 만사가 저절로 잘 되어가리라고한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무위 도식이 아니다. 의식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자연스럽고 과장되고 지나치고 쓸데없고 허세를 부리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모든 행위를 하지 않음이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고 속 깊은 데서 저절로 우러나는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행동, 이것이 바로 무위의 위’, ‘함이 없는 함이야 말로 위대한 행동으로서 자연스럽게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P185-예부터 하나를 얻은 것들이

이런 뜻에서 하상광의 주석에서 이르듯이 하나도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가 도와 별개의 것은 아니다. ‘하나도 도임은 틀림없으나 좀 전문적인 용어로 하면 그것은 비존재로서의 도에 대응하는 존재의 측면으로서의 도, 비존재와 존재가 맞닿는 경계의 자리로서의 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189-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입니다. 약함이 도의 쓰임새입니다. 온 세상 모든 것 있음 有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 無에서 생겨났습니다.

 

P192-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크게 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P193-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덴마크의 철학자 케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역설이라고 했다.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절대적인 실재에 대한 진리는 그것이 절대적이기 위해서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고, 동시에 가장 큰 것보다 더 커야 한다는 역설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가? 진리란 참 이해하기가 어렵다.    

 

P199-도가 하나를 낳고

이런 추상적이고 아리송한 우주 창생론적 논의가 왜 중요한가? 이런 논의는 그 자체의 중요성도 문제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인가? 음기와 양기가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고 했는데, 가만히 따져보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각자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거나 상대방에게 자기의 뜻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화는 어디까지나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마음, 자기 혼자서는 아무 일도 성사시킬 수 없다는 의식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조화는 자기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겸손함을 전제로 하는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이다.

조화의 시작은 겸손함이다. 새로운 깨우침이다. 조화는 겸손에서 시작한다. 모자람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한다.

 

P201-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깁니다.

없음 無有만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결국 이긴다. 역설적인 듯하면서 진리이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 힘들다.

 

P209-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합니다.

그러나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습니다.

완전히 가득 찬 것은 빈 듯합니다.

그러나 그 쓰임에는 끝이 없습니다.

완전히 곧은 것은 굽은 듯 합니다.

완전한 솜씨는 서툴게 보입니다.

완전한 웅변은 눌변으로 보입니다.

아는 듯 모르는 듯 하다.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인가?

 

P220-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요는 진리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외부 현상에 대한 정보만 찾는 데 온갖 신경을 쓰면서 돌아다니기만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아 버리면 사물의 밑바탕인 참된 근원을 간과하고 말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P221 –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최근에도 에리히프롬 같은 사람은 우주선 발사 등으로 우주 공간에만 쏟는 우리의 관심을 내부 공간에 기울이고, ‘우주 공간을 탐색하는 우주인이 아니라 내부 공간을 탐구하는 우주인이 더욱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노자님도 여기서 내향과학을 강조하고 있는 셈인가?

우리 안의 소우주에 대한 관심이 더욱 중요하다. 밖에 남에게 관심을 갖지 말고 내 안의 나에 대해서 조금 더 들여다 보자.

 

P228-성인에겐 고정된 마음이 없다.

성서에서도 인간이 에덴 동산에 살 때에는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런 상태가 바로 낙원 상태였다는 것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므로 선악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의식의 세계로 타락하게 되고, 그리하여 자의식을 비롯한 모든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상태가 원죄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복낙원은 엄격히 말하면 다시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비이분법적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P233-그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기에

노자님이나 장자님에게 죽음이란 근본적으로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장자님은 죽음이란 한 가지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옮겨 감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난 것이 즐거운 일이지만 세상에는 이와 못지 않게 다른 수많은 존재 양식이 있을터인데, 이런 수많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도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는 식의 말을 했다.

 

P234 – 그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기에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연습도 중요하지만 죽어가는 연습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의연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P242 – 어머니를 알면 자식을 알 수 있다

시작을 아는 것, 근원을 아는 것, 도를 터득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용히 욕망으로 가득한 입을 다물고”, 감각과 지각 같은 이원론적 의식의 문을 닫고’, ‘작은 것’, 내면적인 것을 꿰둟어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쓸데없이 부산하게 일을 벌이거나 욕심스럽게 설치는 저돌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부드러움을 지킬 줄 아는 차분함이 있어야 한다.

 

P246 – 이것이 도둑이 아니고 무엇?

도둑이 따로 없다. 노자님에 의하면 한쪽에서는 굶어 죽는데 우리가 이를 못 본체 내 돈 내가 쓴다고 하여 흥청거리면 그것이 바로 도둑이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럴 경우 우리는 도둑보다 더 못할지도 모른다. 도둑은 자기가 한 일을 잘못으로 알고 부끄러워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내 재산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 사람은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 모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겠다.

반성하게 만드는 말이다. 진정한 도둑이 누구인가? 우리들 모두 일 수 있다.

 

P252 –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갓난 아이와 같습니다.

[도덕경]에서는 갓난 아이를 도를 닦아 덕을 기른 사람의 상상으로 이상화하고 있다. 갓난아이 상태란 어떤가? 갓난아이는 아직 인위적이고 이분법적인 의식을 갖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P256 –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도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다 모른다는 초월할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알겠는가?

 

P264 – 백성이 저절로 통나무가 된다

이런 외부적인 한계를 꿰뚫어보고 결국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는 이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제도적,법률적, 심리적, 문화적 환경 개선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그럼 우리 사회가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해결이 시작되는 것인가?

 

P274 –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노자의 비유를 보면 문학가로서의 면모도 훌륭한 것 같다. 함축적 의미와 비유가 참 쉽고 이해하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

 

P292 – 천릿길도 발 밑에서

억지로 하는 자 실패하게 마련이고,

집착하는 자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인은 하지 않음으로 실패하는 일이 없고,

집착하지 않음으로 잃은 일이 없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 언제나 거의 성공할 즈음에 실패하고 맙니다.

시작할 때처럼 마지막에도 신중했으면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 입니다.

 

P294

천리길이라고 생각하고 겁 먹을 것이 아니라 우선 한 발짝을 떼어 놓는다는 생각으로 출발하면, 시작이 반이라고 할 일의 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띠끌모아 태산.” 태산을 만든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그런 큰 것을 생각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우선 띠끌을 모은다는 생각으로 시작하면 쉽게 일에 착수할 수 있다.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발짝부터 오늘부터 바로 지금부터이다.

 

P302 –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개천과 계곡의 물은 강이나 바다로 흘러든다. 모든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과 바다로 모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강과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이렇게 스스로를 낮출 때 모든 백성이 절로 그에게 모여든다는 뜻이다.

 

P309 – 내게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이 장은 [도덕경] 중에서 삼보의 장으로 잘 알려진 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보는 자애, ‘검약’,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이라는 도가의 기본적 실천 윤리를 말한다.

이 세 보물 가운데서 으뜸은 결국 사랑하는 마음인 자애라고 한다. 자애로움을 원칙으로 하면 전쟁에 임해서도 승리하고, 방어하는 일에도 튼튼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듯 안전하다고 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어 하늘도 사람을 구하고자 하면 사랑으로 그들을 호위한다고 한다.

역시 세상의 으뜸가는 진리는 사랑이다.

 

P323 – 내 말은 알기도 그지 없이 쉽고

위대한 인물의 실존적 고독을 읊고 있다. 상식의 세계, 이분법적 의식의 세계, 분별지의 세계를 넘어서 초상식의 세계, 최의식의 세계, 합일의 세계를 접한 사람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그를 이해할 수도 따를 수도 없다.

 

P326 –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합니다.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입니다.

병을 병으로 알 때만 방이 되지 않습니다.

동서양의 진리는 통하는 법인가 보다. 소크라테스나 공자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일단 자기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무엇을 모르는지가 앎의 시작이다.

 

P337 – 하늘의 그물은 엉성한 것 같지만

하늘의 그물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성기고 엉성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그것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당장 뭔가 설치면서 저돌적으로 나가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 같고, 비폭력주의 같은 소극적 대처 방안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것 처럼 보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이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지고 당장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마라.

 

P342 –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

윗사람이 뭔가를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몇 천년이 지나도 똑같다. 회사도 그렇다.

 

P362 –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

열가지 백가지 기계가 있으나 쓰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백성이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가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비록 배와 수례가 있어도 타는 일이 없고,

비록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내보일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 다시 노끈을 매어 쓰도록 하고,

음식을 달게 여기며 먹도록 하고,

옷을 아름답게 생각하며 입도록 하고,

거처를 편안하게 생각하며 살도록 하고,

풍속을 즐기도록 하십시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우는 소리 개 짖는가지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사람들 늙어 죽을 때 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습니다.  

노자의 사상을 잘 표현한 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과연 춘추전국시대에 받아드려질 수 있었을까? 아니 지금도. 그래서 더욱 존중받고 각광받는지 모르겠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도덕경의 목차를 따라 서술하고 설명하겠기에 목차에 대해선 이대로 따르겠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도덕경이 해석할 여지가 많아서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과 의견을 소개하다 보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하나 오히려 너무 많은 해석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다 보니 읽는데 있어서 약간의 혼란이 있을 때가 있다. 너무 본 뜻에 벗어난 평가를 받는 의견들은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3. 이 책의 장점

이 책의 장점은 도덕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지에 대해서 길을 안내해 준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설명이 없다면 도덕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읽기는 하되 그 뜻을 이해하는 데는 10%도 안될 것 같다. 물론 더 깊이 본인만의 해석으로 도덕경을 받아드릴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아마 다른 의미의 도덕경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을까란 생각도 든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도덕경은 해석의 여지가 많은 책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여백이 많기에 그 만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저자의 스타일이기도 하거니와 기본적으로 노자의 사상 자체가 여백이 많고 해석이 다양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은 도덕경 문구 하나의 다양한 해석에 대한 소개도 좋긴 했는데, 도덕경을 우리는 오늘날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고 접근해 가야 할 지 방향성을 제시해 주면 더 좋을 거 같다.

그리고 당시의 노자의 도덕경 내용과 다른 사상과의 차이점, 같은 사항을 놓고 다른 의견을 개진것에 대한 비교 분석이 있다면 고전에 입문하는 독자들에게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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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0 11:21:54 *.124.22.184

정학씨 말을 줄이지 않아도 돼요. 경청도 잘하고 있구요~ ㅎ

도덕경이 논어보다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죠? 논어의 군자보다 도덕경의 성인이 훨씬 되기 힘들어서 노력해서 되는 단계가 아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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