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ggumdream
  • 조회 수 1744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17년 6월 20일 11시 1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노자(老子)

 

기원전 604914, 중국 초나라 고현의 여향 곡인리에 한 여인이 자두나무(李樹)에 기댄 채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이 아이의 어머니는 떨어지는 별을 찬양하면서 62년 동안 임신해 있던 상태였고, 그때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주위의 자두나무를 가리키며 나는 이 나무를 따서 성()을 짓겠다.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자두나무()에다 자신의 큰 귀()를 상징하는 이름을 붙여 스스로 이름을 이이(李耳)라 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칼은 벌써 하얀 눈처럼 희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두고 노자라 불렀다. ()는 늙었다는 뜻이고,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존칭어다

노자는 유가에서 내세운 명분주의와 인위적인 조작에 반대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유가의 인위적인 도덕이 끼치는 폐단과 인간의 위선을 고발함으로써 좀더 근원적인 진리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주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그곳을 떠나기 위해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국경을 수비하던 관리 윤희(尹喜)라는 사람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권하는 대로, 상하 양편의 오천 자로 된 도덕경(道德經)을 완성하게 됐는데, 이렇게 본다면 윤희라는 사람이야말로 거의 노자와 맞먹을 정도로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가 노자에게 글을 쓰도록 종용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가장 값진 한 권의 책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독일의 사상가 슈테릭히는 세계에 단 세 권의 책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버려야 한다면, 도덕경이 그 세 권 가운데 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도덕경>을 손꼽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번역본을 가진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양에 250여 종의 번역본이 있었으니 지금은 거의 300여 종에 가까울 것으로 짐작된다. 유가와 더불어 동양 사상을 대표하면서 동양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그나마 해소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는 백육십 살 또는 이백 살을 살았다고도 전해지는데, 그 최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공자와 노자의 만남 에피소드

 

노자는 주나라에서 왕실의 장서고를 기록하는 수장실사(守藏室史)로서, 사십여 년간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공자의 방문을 받았는데, 공자는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자가 볼 때, 공자는 아직도 혈기가 왕성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나아가서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뒤로 물러나 숨어야 하는 것이오. 내 일찍이 듣기를 훌륭한 장사꾼은 귀중품을 감춰놓은 채 아무것도 없는 듯이 행동하고, 완전한 덕성을 갖춘 사람은 겉으로는 다만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라고 했소. 그러니 그대는 몸에 지니고 있는 그 교만과 욕심과 위선 따위를 다 버리시오.”

이처럼 공자에게 따끔한 충고를 가한 노자는 스스로 재능을 숨겨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썼다.

뤄양(洛陽)을 떠날 무렵, 공자가 다시 노자를 찾아 작별 인사를 드리자 그는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고 한다.

 

부자는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배웅하고, 선비는 말로써 사람을 배웅한다고 하오. 그런데 나는 돈이 없으므로 선비의 흉내를 내어 말로써 선물을 대신할까 하오. 총명한 사람이 자칫 죽을 고비에 이르게 되는 것은 남의 행동을 잘 비평하기 때문이오. 또 학식이 많은 사람이 자주 위험한 고비에 부딪치는 것은 남의 허물을 잘 지적하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자기의 주장을 함부로 내세워서는 안 되오!”

 

이 말을 듣고 돌아간 공자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새는 공중을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헤엄을 치며 짐승은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는 활을 쏘아야 잡을 수가 있고, 물속을 헤엄치는 고기는 그물을 쳐야 잡을 수가 있고, 달리는 짐승은 덫을 놓아야 잡을 수가 있다. 하지만 용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구만 리 하늘로 오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만나본 노자는 바로 용이었다.

 

과연 큰 도(大道)란 무엇일까? 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무위자연의 도다. 위대한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인의가 생겨났고, 지혜가 나오고 나서 큰 거짓이 생겨났고, 집안이 불화하기 때문에 효와 자애가 강조되었으며, 나라가 혼란할 때 충신이 필요했다. 이처럼 유가에서 강조하는 덕들은 이미 그것들이 사라지고 없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큰 도리를 굳게 잡아나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일을 꾸미려 하니 일이 꼬였던 것이고, 다시 그것을 억지로 고치려 하니 일이 더 얽히고설키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배경에서 노자는 유가에서 말하는 성스러움과 지혜와 인의를 오히려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옮긴이 : 오강남

 

종교에 관심은 있었지만 목사가 될 마음은 없어서 신학교 말고 서울대 종교학과에 갔어요.

* 자발적으로 간 것이었다. 그 시대에 순수학문을 할려고 했을까? 자신만의 선택.

제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주로 서양종교, 서양철학에 대해서만 공부하는 분위기였죠. 그러다 캐나다에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는 한창 동양 종교가 붐을 일으키고 있는 거예요. ‘, 나는 지금까지 무얼 했나싶었죠. 그래서 도교, 불교, 힌두교 같은 동양종교를 전공하면서 또 한 번 아하, 종교는 이런 차원도 있구나, 종교는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고 실천이구나,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구나, 이런 지적 전율이랄까 환희를 느꼈고 그걸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그래서 책도 쓰고 공부도 계속하다 여기까지 왔네요. 대학 들어와서 정년 퇴임할 때까지, 그리고 퇴임하고 나서도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종교학만 공부한 셈인데 아직도 쓰고 싶은 게 많아요. 그런데 요즘은 허리가 아파서 쓰고 싶은 걸 다 쓸 수 있을까 걱정이네요.

 

한국에서 서양사상을 10년 가까이 공부하다 캐나다에 가서 힌두교, 불교, 노장 철학 같은 동양사상을 접하면서 , 종교에 이런 차원이 있구나!’하는 걸 깨달았어요.

 

종교에는 표층 종교가 있고 심층 종교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천당 가고 내가 극락 가고 내가 낙원에 가고, 죽어서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내가 잘 살기 위해 믿는 종교는 표층 종교에요. 자기중심적, 에고중심적인 거죠. 이에 반해 심층종교는 내 안의 진짜 나, 참나, 진아(眞我), 큰 나, 대아(大我)를 발견하여 얻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같은 헌금을 내더라도 은총 받아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남 보란 듯이 살아보겠다, 이건 표층 종교예요. 그게 아니고 헌금을 바치면서 내 욕심을 줄여보겠다, 혹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인데 나만 이렇게 잘 사는 것은 미안한 일이니 같이 나누겠다 그래서 하는 건 심층적인 것이죠.

 

어떤 종교는 심층 종교고 다른 종교는 표층 종교다, 그런 게 아니라 기독교 안에도 표층적인 기독교과 심층이 있고, 불교, 이슬람교에도 표층과 심층이 있는 겁니다. 심층끼리는 종교가 달라도 서로 통하고 이해할 수 있어요. 서로 나쁘다 비난하고 싸우는 것은 표층 종교끼리죠. 내 말은 맞고 네 말은 틀려야 하거든요. 문명의 충돌, 종교의 충돌 그러는데 그건 말이 안 되요. 표층 이슬람과 표층 기독교가 대립하는 거죠.

 

2.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온 문장

 

6. 한문으로 겨우 5천 자 남짓, 200자 원고지로 25매 정도 된다.

25매 책이 이렇게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글이 꼭 필요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하긴 긴 장편소설보다는 시 한편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수 있으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말을 너무 많이 하지마라. 그래야 돋보이는 것은 아니다.

 

6. “동양 문헌 가운데에서 어느 책보다도 먼저 읽어야 할 책이 바로 노자님의 <도덕경>이라고 생각한다.” “<도덕경>이 씌어지지 않았다면 중국 문명이나 중국인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

 

6. 송욱 교수도 자기가 가진 수천 권의 장서 중 단 한권 가장 아끼는 책을 골라잡으라 한다면 서슴지 않고 <도덕경>의 주석을 모아 엮은 <노자익>을 택할 것이라고 했다.

 

7. 우리가 의식하든 그러지 못하든 <도덕경>에 나타난 사상이 우리의 의식 심저를 움직이고 있고 그것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 삼국의 종교, 철학, 예술,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다.

 

7. 공자님의 윤리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상이 우리 생활에서 양적인 외면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면, 노자님의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사상은 우리 생활에서 음적인 내면세계를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7. <도덕경>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책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은 도와 덕에 대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7. ‘는 우주의 궁극실재窮極實在(ultimate reality)' 혹은 근본 원리(principle)', ‘이란 그 도가 구체적인 인간이나 사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될 때 얻어지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8. <도덕경> 전체를 통해 주어지는 기본 메시지는 우주의 기본 원리인 의 흐름을 체득하고,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감으로 참다운 자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을 보라는 것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8. <도덕경>의 사상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는 <도덕경>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일종의 실존적 반응 내지는 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8. <도덕경><장자>라든가 다른 서책과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을 일깨우기위한 일깨움을 기본 특성으로 하는 책이므로 내용적으로 의미상 차이가 약간 있다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노자님의 사상을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고 송두리째 떠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을 읽고 그와 함께 생각하며 내면적 대화를 가짐으로써 뭔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던 것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9. 뉴턴의 말과 같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더 먼 곳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라고나 할까.

 

1장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19. ‘라고 할 수 있는 는 영원한 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의 시원.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

 

20. 첫 장인 이 장만 잘 이해해도 <도덕경>의 반 이상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장이다.

머리만으로 보면 보인다. 그러나 아직 가슴속으로 보이지 않는다. 두고 두고 곱씹어봐야 할 부분이다.

 

20. 영원한 도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의미의 무엇이다. ‘란 직관과 체험의 영역이지 사변과 분석과 정의의 대상이 될수 없다는 뜻이다.

 

21. 모든 다른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궁극 실재 혹은 절대적 실재는 우리의 제한된 표현을 초월한다는 주장이다. ‘라든가 뭐라고 이름이나 속성을 붙이면 그것은 이미 그 이름이나 속성의 제한을 받는 무엇으로서 절대적인 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무명(無名) 혹은 무()일 뿐이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가 아니라는 뜻인가. 김기상은 이름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듯이..

 

21. 우주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무엇,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도록 하는 기본원리, 그것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움직일수 없는 우주의 기본 원칙 같은 것, 그런 의미로서의 ‘The way’, 그런 의미로서 궁극 실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21. 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 신비의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이름 붙일 수도 있고 드러나 보이기도 하는 현상의 측면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실상(實相)의 세계로서 무명(無名) 혹은 무()의 세계요. 후자는 현상(現象)의 세계로서 유명(有名) 혹은 유()의 세계이다.

 

22. ()라고 해서 물론 전혀 아무것도 없는 헛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보통으로 존재하는 유()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보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의 무()이다.

 

22. 만일 우리가 욕심을 비우고깊은 형안을 갖게 되면 전자인 실상계의 신비를 직관하게 되지만, ‘욕심을 가지고사는 한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계만을 감지하고 살 뿐이라고 한다.

 

22.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하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다.”고 했다. 존재의 신비, 존재의 충격이 이러하거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비존재의 신비, 그 비존재의 충격이야 어떠하겠는가? <도덕경>은 이렇게 존재계의 신비, 그리고 그 존재의 영역을 포함하고 통괄하면서 그 근본 바탕이 되는 비존재계의 신비, 이런 신비의 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차분한 마음으로 이 초대에 응해보자.

 

2장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24.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착한 것을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비교 할 대상이 있다는 것. 서로의 존재가 관계되기 때문일 것이다.

 

24.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따라서 성인[자유인]은 무위(無爲)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합니다.

 

25. 공을 쌓으나 그 공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다. 공을 쌓으면 인정받고 싶고 남에게 그 공을 돌리기는 쉽지 않다. 성인군자만이 가능한가?

 

25. 이 장에서는 우선 모든 것이 상대적임을 말하고 있다. 선악, 미추, 고저, 장단 등이 모두 상호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상대적 개념이라고 할 때 그것을 두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길다고 하는 것은 짧은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 반대로 짧다고 하는 것도 긴 것이 있을때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길다’, ‘짧다하는 것은 독립적인 단독 개념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으로 의존하는 상대 개념이다. 둘째 길다고 하는 것도 그보다 더 긴 것에 비하면 짧은 것이요. 짧다고 하는 것도 그보다 더 짧은 것에 비하면 긴 것이 된다. 한가지 사물이 서로의 관계에서 길기도 하고, 동시에 짧기도 하다는 뜻이.

 

26. 내 손의 손가락이 길다라고 할 때 그 길다고 하는 것이 내 손가락 자체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성질로 보는 것이 보통의 상식적 관찰이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본질론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반면 내 손가락이 길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서로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볼수도 있다. 이처럼 한 손가락이 길 수도 있고 동시에 짧을 수도 있다는 것, 길고 짧음을 동시에 가질수 있다는 것이 도가의 가르침이고 이런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비본질론적 사고(non-essentialist view)’라 할 수 있다.

 

26. 이른바 분별의 세계, 일상적 상식의 세계을 초탈하라는 것이다. 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나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서로 다를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빙글빙글 돌아 고정된 성질로 파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고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는 변증법적 사고방식, 양쪽으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ion)’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변증법적 사고라는 걸 이번에 처음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변증법은 정--합 이것이었다. 그런데 변증법적 사고라는 것도 있었네. 변증법은 서양식 사고인데 왜 여기서 언급했을까 싶었는데.

간단하게 말해서 뭐든 따로 따로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오류로 흐르게 된다. 연관의 맥락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증법이고, 따로 따로 떼어서 바라보는 관점이 형이상학인 것이라고 한다.

 

27. 우리말로 성인이라고 하면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성인의 본래 뜻은 이런 윤리적 차원 넘어, 말하자면 특이한 감지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만물의 근원, 만물의 참됨’, 만물의 그러함을 꿰뚫어 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성인은 무위(無爲)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27. 무위라는 것은 <도덕경>에서 그리고 <장자>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행동 원리다. 무위란 물론 행위가 없음이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 중심적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무위(無爲之爲)’,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위의 위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행동 때문에 누가 잘되거나 무슨 일이 이루어져도 자기의 공을 주장하거나 과시하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기의 의식적, 인위적 행위가 아니라 도에 따라 저절로 우러나온 자연적 행동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행동인지도 모르고 그것 때문에 생긴 공이 자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행동방식, 이런 마음가짐, 이런 초월적 자세를 가진 자유인이 하는 일은 참된 일이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 자유인인가?

정말 어려운 행위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살아오면서 남의 공을 빼앗아 가는 사람을 얼마나 보아왔던가? 그런데 이번 오프모임 경주 모임을 준비하면서 느꼈다. 변경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자연적 행동이었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냥 좋았다. 인정받고 칭찬을 받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이런걸 무위의 위라고 봐야 하나?

 

3장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29.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이빈다. 귀중하다는 것 귀히 여기지 마십시오. 사람사이에 훔치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탐날 만한 것 보이지 마십시오. 사람의 마음 산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29. 성인이 다스리게 되면 사람들로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튼튼하게 합니다. 사람들로 지식도 없애고 욕망도 없애고 영리하다는 자들 함부로 하겠다는 짓도 못하게 합니다.

배가 든든해주고 뼈가 튼튼해지면 그 다음에 찾는 것이 지()가 아닐까. ()를 없앨수 있을까?

 

29. 억지로 하는 함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0. 훌륭한 사람들을 떠받들거나 그들에게 상을 주면 그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질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귀중한 것을 귀히 여기면 사람들은 그런 것을 얻으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을 저지를 것이요, 탐날 만한 것을 보이면 그런 것을 못 가져 안달하거나 상대적 빈곤에 시달릴 것이니 아예 그런 것을 귀히 여기지도 말고 보이지도 말라고 한다.

뜻인 이해되나 기업에서 사회에서 어떤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소위 신상필벌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상도 안주고 월급도 안주는데 열심히 일할 사람 몇 명이나 되겠나. 아직 내가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기 혼자 이런 것은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조직에서 대단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31. 성인의 다스림은 무엇보다 백성들로 간교한 마음이나 그 마음에서 나오는 허망한 야심을 없애도록 도와 주고, 그들로 배와 뼈로 대표되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도록 해주는 일을 우선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31. 노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 훌륭하다는 것, 귀중하다는 것, 탐날 만하다는 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궁극 가치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가져 보라고 말하는게 아닐까?

 

32. 소위 분별지分別知로서의 지식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잘못 배움을 없애 가는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32. 계속 버려서 결국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 얻어졌던 일상적 지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완전히 무지의 경지에 이르면 그때 새로운 의미의 완전한 앎, 궁극 지식의 경지가 트이는 셈이다. 이를 박학한 무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 얻어진 주객 이분의 분별지는 결국 욕심을 낳고, 나아가 자꾸만 함부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덤비게 만든다. 따라서 도의 길은 이런 지식을 버리는 과정이다.

자꾸 버리라는 말은 자꾸 공부하라는 뜻을 들린다. 계속 공부하면서 기존 지식을 버리고 버리면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면 결국 다다른다는 그런 뜻으로 들린다.

 

33.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지식을 넘어서는 참된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일상적 지식이 주는 편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깨닫는 것이다. 하상공의 말처럼 우민이 아니라 安民의 장이다.

 

4장 도는 그릇처럼 비어

 

34. 도는 그릇처럼 비어, 그 쓰임에 차고 넘치는 일이 없습니다. 심연처럼 깊어, 온갖 것의 근원입니다.

...누구의 아들인지 난 알 수 없지만, 하늘님보다 먼저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35.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이 빈 것이지만 마술사의 빈 병처럼 거기서 나오는 것으로 세상이 있는 것들을 채우면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도는 텅빈 그릇과 같이 비어서 아무리 퍼담아도 차고 넘치는 일이 없을 정도로 그 쓰임새가 크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36. 아무튼 도는 빈 그릇같기도 하고 심연처럼 깊어 알 수도 없고, ‘깊은 물처럼 아물아물한 신비스러운 무엇이지만 그것은 모든 것의 존재 근원으로서 상존하면서 모든 것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엇임을 재천명하고 있는 셈이다.

 

36. 세상에 자연적인 것치고 직선적인 것, 직각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 직선적이고 직각적인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물방울도, 능선도, 꽃잎도 모두 둥글거나 곡선적이다. 이런 것은 양극의 조화를 가능케 하는 도의 작용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물방울이 꽃잎이 직선이고 직각이면 어떨까? 이런 것이 도에 의한 작용이라고 해석한다.

 

37. 和光同塵<도덕경>의 명언 중에서 많이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지만 특히 흥미로운 것은 도가 티끌, 곧 티끌 세상과 하나가 되려 한다는 것이다. 도는 세상과 따로 떨어져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겸하고 있는 변증법적 실재라 할 수 있다.

 

37.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세상의 온갖 거, 심지어는 중국에서 최고의 인격신으로 모시는 하늘님上帝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도는 구체적 인격신과 차원을 달리하는 무엇이다....도는 우주의 궁극 근거(Ungrund)’로서 無時的이고 無時間的이고 超時間的이라는 뜻이다.

 

5장 짚으로 만든 개처럼 도의 무편 무당성

 

39.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짚으로 만단 개처럼 취급합니다. 성인도 편애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모두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

 

39. 말이 많으면 궁지에 몰리는 법, 중심을 지키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습니다.

 

40.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 따라서 이들은 대표되는 도는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의 상관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라는 것이다.

 

40. 도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이기적 요구 사항에 좌우되지 않으므로 오직 한결같은 도의 근본 원리에 우리 자신을 탁 맡기고 쓸데없이 안달하지 않는 태도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40. 하늘, , 성인 그리고 도가 만물을, 그리고 모든 사람을 제사 때 한번 쓰고 버리는 짚으로 만든 개처럼취급한다는 것은 이런 무편 무당하고 한결같은 관계를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41.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인위적, 의식적으로 조화스럽게 유지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은 결코 인간의 최고 덕목일 수 없다는 것이다. 도와 하나되고, 자연과 인간이 모두 도에서 하나되어 도덕적 요구 같은 것은 저절로 충족되므로 인이니 의니 하는 윤리적 차원 따위는 잊어버리고 신경쓰지 않는 상태가 최고라는 이야기다.

노자와 공자가 학문을 놓고 토론하는 걸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41. ‘하늘과 땅사이는 풀무의 바람통은 도의 역동적인 성격, 창조적인 능력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41. “말이 많으면 좋지 않다.”는 일상생활 중에 말이 많으면 그만큼 실수하기 쉽고 쓸데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 말 많은 것이 좋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도같이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는 뜻이리라.

 

42. 궁극적 실재는 체험의 영역이지, 사변적으로 따지거나 논리적으로 캐내려는 지적노력의 대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 노력은 오히려 궁극 실재에 대한 체험을 불가능하게 한다. 구태여 말을 한다면 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42. “중심을 지키는 것 守中

궁극 실재에 대한 외적 표현에 치중하기보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의 깊숙한 본질적 차원을 붙드는 것, 외부로 나타나 보이지 않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도 그 자체의 내면적인 차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42. “희로애락 등이 외부로 표출되기 이전인 未發상태의 마음, 아직 흔들리지 않은 마음, 평정된 마음, 맑고 고요한 마음, 이런 마음을 유지하므로 온 우주가 그 속에 합일되고 주객이 일체가 되는 것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뜻으로 해석해 보아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6장 도는 신의 여인[현빈玄牝] - 도의 여성적 특성

 

43. 계곡의 신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비의 여인. 여인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 끊길 듯하면서도 이어지고 써도써도 다할 줄을 모릅니다.

 

44. 약한 것 같지만 끊어지는 일이 없고, 쓰면 줄거나 없어질 것 같지만 언제나 이어지고, 텅 빈 것 같지만 그 속에서 계속 뭔가를 생산해 내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 이런 신비의 여인보다 의 항존성, 수납성, 창조성, 생산성, 개방성을 더 잘 상징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44. 계곡과 여인은 여러 가지로 공통되는 점이 많다. 계곡을, 특히 폭포라도 떨어지는 계곡을 보고 있으면 여인을 보는 듯하다고 그 외형적 모양을 두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여인도 계곡처럼 자기를 낮은 곳에 두고, 허허하고, 고요하고, 탁 트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생산한다는 면에서 서로 같다. 그래서 여기서는 계곡과 여인을 묶어 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계곡을 여인의 몸과 비유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꼭 부끄럽고 외설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거기에 내포된 것을 찾기위한 노력보다는 그냥 글 그대로 쓰여져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함.

 

45. 궁극 실재로서의 신은 물론 남성이니 여성이니 하는 한 가지 범주에 국한될 수 없지만 그런 절대적인 신은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가 없으므로 뭔가 인간과 가까운 상징으로 이해해 볼 도리밖에 없어서 아버지니 어머니니 하는 상징을 쓰는데, 2,000년 가까이 아버지라는 상징을 써 왔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46. 요컨대 지금까지 공격성, 진취성, 지배성, 경쟁성 등 주로 남성적 특성을 찬양하고 이런 특성을 신과 결부시켜 신을 우리의 대장, 임금, 승리자, 정복자, 주님 등으로 생각했는데 종래까지의 이런 의식 구조나 고정 관념을 청산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6. ‘는 신비의 여인, 우리를 낳고 기르고 먹이고 감싸 주는 어머니. 이런 표현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보다 훨씬 부드럽고 안온하고 포근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 아닐까?

 

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는 삶

 

47.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삶을 사는 것입니다.....나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48.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은 영원한 삶을 산다.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삶이란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생물학적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롭게 된 참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참삶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건가?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을 그만둘 때 가능해진다고 한다. 좀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자기 부정의 길이 곧 자기 긍정의 길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영존시키는 길임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50. 죽기 전에 죽지 않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If you die before you die, you will not die when you die). 명언임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

 

8장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물에서 배운다

 

51.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곳을 향하여 흐를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52. 그 유명한 上善若水라는 구절이다. <도덕경>에서 가르치는 삶의 자세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물같이 되라는 것이다.

 

52. 우선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물이 없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 없이는 아예 처음부터 삶이 있을 수도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물은 실로 생명의 근원이다.

 

53. 특히 물이 아무것과도 겨루지 않음不爭과 물의 자기 낮춤을 강조하고 있다. ‘다툰다’, ‘겨룬다’, ‘싸운다는 뜻인데 물은 자기의 도움을 받는 것들과 다투거나 겨루거나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54. 만물은 물 없이 못 살지만 물은 그들을 이롭게 할 뿐 그 공로를 인정받자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54. 모두가 높은 곳을 향해 오르려고 안달하지만 물은 그런 일과 상관없이 우주적 원리에 자기를 턱 맡기고 유유 자적 낮은 데로 임할 뿐이다.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꾸준하고 조용하게, 성실하고 정의롭게, 오직 섬기는 자세로 시의 적절하게 움직이는 물, 어느 누구와도 겨루는 일 없이 자기를 끝까지 낮추는 물, 과연 누가 이런 물을 나무랄 수 있을까? 여기에서도 자기 겸비가 자기 승귀의 길이라는 종교적 역실이 통하고 있다. 물처럼, 물처럼 되라.

 

9장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집착에서의 해방

 

56.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쉬 부디어집니다. .....일이 이루어졌으면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입니다.

 

57. 지나치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바람직한 것이라도 지나치면 역효과를 가져온다.

 

57. <도덕경>에서 밝히는 기본 가르침 중 하나가 되돌아옴의 원리. 만사는 그저 한쪽으로만 무한히 뻗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가다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58. 인생의 오르막 내리막 길에서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삶을 그만큼 여유 있는 자세로 대할 수 있게 한다.....끝까지 오르지 못했다고 안달하거나 끝까지 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필요도 없다.

 

58. <도덕경>에는 재산이나 명예 자체를 부정하는 금욕적 도피주의를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금과 옥을 모두 갖다 버릴 것까지는 없고, 그것들이 방에 가득하여 지킬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곤란하다는 것, 그리고 부귀가 생기는데 일부러 피할 것 까지는 없고 다만 그것으로 교만해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59. 누구나 자기가 할 일을 다했으면 물러나야 한다. 그래서 떠날 때가 되면 미련없이 떠나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물러 남이 있을 때 새로 들어옴이 있다. 이것이 하늘의 길이라는 것이다.

제일 어려운 일 중에 하나다. 자기가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언제인지를. 누구도 얘기를 못해준다.

 

10장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않고 순수한 자기 희생

 

60.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 티가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무지를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62. 동양에서는 인간이 혼과 백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혼은 정신적인 면을 관장하고, 백은 육체적인 기능을 주관한다고 보았다..... 혼과 백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둘을 하나로 감싸안고 잘 보존하라는 말일 수도 있고, 혼백을 다하여 하나우주의 근원을 감싸안고 그 하나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른 후 거기서 떠나지 말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62. 어떻게 해서든 갓난아이처럼 부드러워지라는 것이다.

도교나 무예의 수련 경지에서 최고의 경지는 몸이 어린애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이며 피부도 어린애과 같은 피부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꼭 육체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리라. 어린이처럼 순수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닐까?

 

62.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도 마음의 눈, 하늘에 있는 우주거울 등 온갖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여기서도 명상을 통해 마음에서 더러운 것들을 씻어 맑고 밝은 마음을 갖도록 하라는 말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63. 결론적으로 도에 입각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도와 마찬가지로 여인처럼, 어머니처럼 만물을 낳고 만물을 그품 안에서 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소유하려 하거나 거기에 기대려 하거나 군림하거나 좌지 우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능력 내지 영향력이 바로 현덕(玄德), 신비롭고 그윽한 힘이라는 것이다.

 

11장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없음의 쓸모

 

64.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65. <도덕경>에서는 있음의 세계, 존재의 차원 자체를 부정하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의 세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비존재의 차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줄 뿐이다.

 

65. 존재의 세계는 비존재의 세계를 통해서만 그 유용성을 발현하게 된다는 사실에 눈을 돌리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66. 우리는 이처럼 보이고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의 유익성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유익성을 가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것의 유용성도 함께 알아보고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66. 도는 있음의 면과 없음의 면을 다 포괄하는 궁극실재이다. ....이제 눈을 떠서 이런 있음의 세계를 통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없음의 세계, 비존재의 세계에 눈을 돌리고 그것이 지닌 근원성, 역동성, 창조성 등을 인지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있음의 세계, 존재의 세계는 없음의 세계, 비존재의 세계를 드러내 주는 계시자내지 암호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67. 동양화의 경우 궁극적인 의미에서 매화 가지와 참새는 이 그림에서 주제가 아니고, 그 뒤에 공간으로 대표되는 무()나 공()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수단 내지 상징이다.

 

67. 그림이든 시든 유를 통해서 무를, 현상적인 것을 통해서 현상 너머의 것을, 시간적인 것을 통해서 비시간적인 것을 표현하고 그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역할을 하는 것이다.

있음의 세계, 존재의 세계를 보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없음의 세계, 비존재의 세계를 인지하고 체득하라.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체험이다.

 

12장 다섯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고 감각적 욕망의 극복

 

68. 다섯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다섯 가지 소리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집니다.....그러므로 성인은 배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습니다. 후자는 뒤로 하고 전자는 취합니다.

 

69. 감각적이요 외면적인 가치 때문에 내면적인 세계를 하찮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이야기다.

 

71. 참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감각적, 의식적 현상세계의 일을 최고 가치로 떠받드는 대신, ‘로 상징되는 내면적이고 원초적인 내실을 우선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13장 내 몸 바쳐 세상을 사랑 지도자의 요건, 자기 비움

 

72. 수모를 신기한 것처럼 좋아하고, 고난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기십시오.

 

73. 내 몸 바쳐 세상을 귀히 여기는 사람 가히 세상을 맡을수 있고 내 몸 바쳐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가히 세상을 떠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73. 수모를 당한다 하더라도 그다지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칭찬을 받는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신나하거나 우쭐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74. 인간이란 모두 욕먹는 것을 싫어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게 마련이다.

 

74. 그런데 어찌 여기서는 수모를 당해도 신기한 것처럼 좋아하고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신기한 것처럼 좋아하라는 것일까? 첫째, 남의 비난이 객관적으로 반드시 타당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 신이 아닌 이상 남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수모를 당해도 그것을 신기한 것처럼 여기고 좋아해야 할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남의 비난을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영적이 차원의 장성을 위한 촉진제로 받아들일수 있다는 사실이다.

 

74. 부처님은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공자님도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일이 있나 염려하라.”

 

74.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방되면 얼마나 홀가분한 삶이 될 수 있을까? 여론이다. 인기관리다, PR이다 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요즘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아무튼 이런 것이 가능한 사람이라야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14장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도의 신비적 초월성

 

77. 도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고 한다. 이런 면을 두고 각각 아리송함’, ‘아득함’, ‘여림이라 불러 본다는 것이다.

 

78. 도의 근본적인 차원은 일상적인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양도, 소리도, 형체도 없는 것.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도의 본질을 완전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세 특성을 한꺼번에 다 포함한 것 또는 그 이상이다. 도는 결국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다.

 

78. 이렇게 궁극 실재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부정의 길이라 한다. 이 짧은 장에서 아닐 불()’자가 아홉 번, ‘없을 무()’자가 세 번 쓰이고 있다. 그야말로 말할수 없음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라는 식이다.

 

78.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무한하다는 뜻이다. 무한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쪼개거나 무슨 범주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뜻이다.

 

79. 그러기에 궁극실재는 보통의 논리로 따지면 모순이요, 역설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넘어서는 초합리적이고 초이성적인 것으로서 독일 종교학의 거성 루돌프 오토가 말한 엄청난 신비라는 것보다도 더 엄청나고 신비스러운 무엇이다.

 

79. 도의 근본자리는 결국 없음의 세계이다. 그러나 도는 그 자체형상이 없고 모양도 없지만 모든 형상, 모든 모양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자체, 모양 자체이다.

 

79. 존재하는 모든 것, 유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 그것들의 근원되는 비존재, 무의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도의 본질로 들어가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15장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도인의 외적 특색

 

82. 도를 체득한 사람의 깊은 체험을 어찌 보통 인간으로 가히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머뭇거림, 주춤거림, 어려워함, 맺힘이 없음, 소박함, 트임, 탁함 등이 도를 체득한 사람의 특징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요즘 세상에서 이상적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인간상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82. 참으로 도를 체득하고 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이런 예의 바른 교양인의 단계를 넘어선 사람이다. 따라서 딴 사람이 보기에는 뭔가 어색하고 모자란 듯 보인다.

 

83. 특히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하다거 했는데 이 표현은 도의 상징으로 자주 쓰이는 것으로 꾸밈이 없고, 순박하고, 진솔하고, 분화되지 않은 전일(全一)의 상태를 뜻한다. 도가 그런 것처럼 도인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83. “흙탕물처럼 탁하다는 것도 흥미로운 표현으로, 도의 티끌과 하나됨같이 도인도 고고하게 자기 혼자만의 결백성을 주장하며 산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 그러기 어쩔수 없이 탁해지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물들거나 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탁함을 고요히 하여 드디어 맑게 하고, 정지되어 맑게 된 것을 다시 움직여 결국은 생동하게 하는 일을 한다.

 

83. 도인은 또 채워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도에 접한 사람은 체움의 길을 버리고 비움의 길을 걷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고 노래할 수 있다.

 

16장 완전한 비움 뿌리로 돌아감

 

86. 헛된 욕심과 잡생각을 모두 비우고 조용히 앉아 우주 만상의 생겨남을 관조하면 모든 것이 결국 그들의 뿌리로 돌아감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생성과 변화의 세계에서 모든 것의 뿌리, 만물의 근원, ()로 돌아가서 참된 고요를 찾는 것이 곧 우주 만상의 본래적 운명에 귀의함이라고 한다.

 

87. 영원한 진리를 알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우선 너그러워진다고 한다. 옹고집이나 독단은 무지나 단견이나 편견에서 나온다....통이 큰 사람, 여유 있는 사람,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된다.

 

88. 이렇게 영원한 시각에서 사물을 봄으로써 융통성, 포용성, 활달함을 갖게 되면 사가 없어지고 공적인 인간, 공평 무사한 인간이 된다.

 

17장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네종류의 지도자

 

90. 가장 훌륭한 유형은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있는지 없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다. ....백성의 필요에 다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공기처럼 드러나지 않게, 백성의 필요에 따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공기처럼 드러나지 않게, 순리대로, 뒤에서 잘 다스려 나가기 때문에 백성이 근심 걱정없이 잘 살아갈뿐이다. 이른바 무위자연의 다스림, ‘가만둠의 다스림이다.

 

91. 두 번째 유형은 사람들이 친근감을 가지고 찬양하는 지도자이다. 어느지도자를 사람들이 칭송하다는 것 자체가 벌써 그 지도자를 의식한다는 뜻이다.....신발이나 허리띠 등이 꼭 맞으면 내 몸의 일부처럼 되어 따로이 의식되지 않는다. 의식된다는 것은 뭔가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완전하지도 못하다는 뜻이다.

 

91. 셋째 유형은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지도자이다. 법가에서 떠받드는 법치주의 지도자이다.

 

91. 넷째, 가장 저질의 지도자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부류이다.

 

92. 사람을 다스리는 일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본래적 능력이나 가능성을 자기들 스스로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도와 주는 것이다. 다스림은 지배나 강압이 아니다. 뒤에서, 밑에서 북돋워줌이다.

 

18장 대도가 패하면 인이니 의니 하는 것이 윤리적 차원의 한계

 

95. 첫째, 우리가 보통 귀히 여기는 이런 윤리적 가치가 강조된다는 사실은 결국 그런 윤리적 이상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말해 준다는 뜻이다.

 

둘째, 설령 인이니 의니 하는 유교식 최고 덕목이 완전히 실천되는 사회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이런 덕목의 실천만으로는 완전한 사회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사회란 이런 덕목의 실천을 넘어서서 이런 덕목이 더 이상 문제되거나 필요하지 않은 사회, 윤리적 제약이나 규범에 머물러 있는 단계가 아니라 이런 단계를 넘어서서 완전한 자유의 경지를 구가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96. 두 번째 율법적, 윤리적 단계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 영역이라 착각하지 말고 거기서 한 단계 더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19장 성스런 체함을 그만두고 소박성 회복

 

99. 성스러움이니 지식이니 인이니 의니 기술이니 영리니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나 집착은 모두 인위적인 것, 장식적인 것, 문명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것으로는 사랑이 용솟음 치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한마디로 소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는 물들이기 전 본바탕 그대로의 명주천을 뜻하고 (/)’은 사람 손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은 통나무, 원목이란 뜻이다. 이처럼 인위적인 것이 가미되거나 거기에 물들지 않은 자연적 마음 상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지배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거울 같은 마음 상태를 회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99. 그러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듯 여기서도 를 줄여 가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자기 중심주의, 저차적인 이기주의, 자의식 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멸사나 무아의 경지, 좀 현대적 용어를 쓰면 자기를 비우는 것, 자기를 잊는 것, 자기를 부정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20장 세상 사람 모두 기뻐하는데 -위대한 인물의 실존적 고독

 

102. 일상적 주객 분리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학문의 축적이 궁극 해결일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103. 일상적 의식의 합리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이런 차원을 넘어선 사람을 보면 아주 흐리멍텅하고 답답하기 그지 없어 보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은 뭇사람의 이해를 얻지 못해 외로운 법이다. 이를 일러 위대한 인물의 실존적 고독이라 할까?

 

104. 이런 위대한 선각자는 일반 사람과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어머니 먹음食母을 소중히 하는점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를 상징하므로 결국 도에 의존하여 도와 함께 사는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삶은 이분법적 의식을 초월하여 양극의 조화를 체득한 삶이다.

 

21장 황홀하기 그지없지만 그 안에 도의 존재론적 측면

 

107. 덕이란 도를 따르므로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 여유 같은 것이다. ..이런 사람은 윤리적 차원을 완성하고 이를 넘어서서 훌훌 자유로이 살아가는 능력 때문에 의 사람, ‘의 사람이 된 것이다.

 

108. 도는 비존재이지만 그것은 일반적 존재를 초월하고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는 비보통적인 존재라는 뜻으로서의 비존재이지 존재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비존재로서의 도는 존재의 근원으로서, 좀 철학적인 용어를 쓰면 존재들보다 더욱 존재적이다. 따라서 도의 있음의 측면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22장 휘면 온전할 수 있고 겸손의 위력

 

111. 온전하려면 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들의 풀잎을 보라, 바람이 불 때 휘어지지 않는다면 뿌리째 뽑혀 버리고 말 것이다. 대나무를 보라. 휘어지지 않으면 꺾여 버리고 말 것이다....살아가는데 융통성, 유연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 사람은 항상 융통성이 있어야지.

 

112. 융통성, 유연성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휘어짐온전함’, ‘굽어짐곧아짐등이 양립 불가능한 반대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불가결의 상관 개념이라는 더욱 근본적인 사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112. 성인이라 이렇게 반대의 일치라는 위대한 진리를 통찰하고 거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일이 없이 사물을 하나, ‘통전적으로파악함으로 의연함을 유지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세상의 본보기가 된다.

 

113. 세상을 양면으로 다 보는 사람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일이 엇어 구태여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욱 빛이 나고, 돋보이고, 인정을 받고, 오래 기억된다는 것이다.

 

23장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 언어를 넘어서는 경지

 

117. <도덕경>에 의하면 하늘과 땅도 가끔씩 말을 하기는 한다. 회오리바람이나 소낙비가 하늘과 땅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늘과 땅도 아침 나절이나 하루 이상 계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118. 말로 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 이성적 추구만으로는 뚫을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경지를 궁극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도와 하나되는 경지이다. 이것이 바로 신비스런 하나됨玄同으로서 이런 경지가 되면 도마저 이를 기뻐한다고 한다.

 

24장 발끝으로는 단단히 설수 없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의 역효과

 

120. 좀더 높이 서겠다고 발끝으로 서는 것은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으로서는 단단히, 오래 서 있을수 없다. 멀리 가겠다고 다리를 한껏 벌리고 가려고 하는 것도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121.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 보더라도 체하는 삶, 허례 허식으로 가득한 삶, 위선적인 살은 무엇보다도 우선 본인을 고달프게 한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지옥을 경험한다는 말을 나는 항상 되새기곤 한다. 이것만큼 피곤한 삶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면 진짜 성인이다. 그러나 난 안될거 같다. 절충할수 밖엔는 없을 것 같다.

 

121. 이런 식의 삶은 또 남을 괴롭게 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하는 삶,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삶, 스스로 자랑하고 뽐내는 삶은 주위에서 이를 보아야 하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

 

122. 도의 사람은 이런 일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남이 칭찬을 하거나 오해하여 비난을 하는데 신경쓰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소박하고 충실하게, 그리고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단순하고 꾸밈이 없는 삶이 가져다 주는 자유와 청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해방의 삶이다.

 

25장 나는 그 이름을 모릅니다. - 근원으로서의 도

 

123. 나는 그 이름을 모릅니다. 그저 라 불러 봅니다.

 

126. ‘는 무엇을 본받는가? 도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고 한다. 해석이 구구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자연이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산천 초목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대로 스스로 그러함이다. 영어로 ‘self-so’‘spontaneity’로 번역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을 본받는다함은 스스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뜻이라 볼수 있다.

 

26장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 무거움의 힘

 

127. 가볍게 처신하면 그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히 행동하면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128. 사람은 땅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바로 땅의 무거움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30. 우리에게 그런 삶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묵직하고 조용하게 사는 삶, 어느 면에서 우직하기까지 한 삶이 결국 긴 안목으로 볼 때 그런 경박한 삶보다 훌륭하기 때문이다. 하상공이 이 장을 중덕(重德)’의 장이라 부른 것처럼, 이 장에서 우리에게 당부하는 것은 무거움의 위력을 알고 무겁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27장 정말로 잘하는 사람은 도에 따른 행동의 완벽성

 

133. 성인은 이렇게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동만을 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좋은 물건 나쁜 물건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어느 누구도, 어느 것도 무시하거나 버리는 일이 없다.

 

28장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양극의 조화

 

136.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유지하십시오.

너무 마음에 든다.

 

138. 칼 융도 중국인들은 모든 생명 있는 것 속에 생래적으로 내재하는 모순성과 양극성을 인지하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 반대처럼 보이는 것은 언제나 다른 편에 대한 균형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고급문화의 징표이다. 일면성은 비록 그것이 모멘텀으로 유도하기는 하지만 야만성의 표지이다.”라고 했다.

양극성의 중요를 나타내는 말로 느껴진다.

 

139. 성인은 이렇게 구체화된 의식 세계, 현상 세계의 사물을 사용하여 사람을 지도한다. 그러나 궁극적 이상을 말한다면 다시 원목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분석적, 이분법적 대립의 세계관에서 해방되어 근원으로 돌아감으로 양면을 동시에 보는 통전적, 비이분법적 의식 구조를 가지도록 하라는 이야기다.

 

29장 세상을 신령한 기물 외경의 자세

 

141. ‘무위를 말하고 있다. ‘세상을 휘어잡고 그것을 위해 뭔가 해보겠다고 설치지 말라는 것이다. 나라든 자연이든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라든 자연이든 그렇게 호락호락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44. 동서양 할 것없이 현재 우리에게 무엇보다 크게 요구되는 것은 나라나 자연을 대할 때 함부로 설치는 대신 차분한 마음으로 거기에 내재한 흐름과 리듬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겠다는 더욱 겸허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30장 군사가 주둔하던 곳엔 가시엉겅퀴가 -전쟁의 비극

 

147. 그러나 한가지 주목할 일은 <도덕경>에서 전쟁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부드러움의 길, 휘고 굽어짐의 길이 더욱 확실한 길이기는 하지만 당장 이웃 나라가 침략해 올 경우 가만히 앉아서 떼죽음을 당할 수는 없으므로 할 수 없어서하는 방어전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어전에서도 부드러움의 길, 휘고 굽어짐의 길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더 현명하고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나도 같은 의견이다. 군대의 필요성이 아닐까. 하지만 현대에서의 방어전은 엄청난 피해를 일으킨다. 국토를 초토화시킨다. 그래서 바다가 중요하고 오히려 공격의 기미가 보인다면 선제타격, 공격이 필요하다고 본다.

 

148. ‘()’으로만 줄달음치면 결국 쉬이 쇠망하고 만다.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31장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 무기여 안녕

 

152. 왜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인가?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 불길한 물건, 쉬운 말로 재수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도의 사람이 가까이 하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준비를 하고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유비무환

 

32장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도의 소박성은 지도자의 귀감

 

155.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도, 가공하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한 도, 이름도 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천하에 누구도 이를 신하 부리듯 함부로 부릴수 없고 오히려 모두가 거긴에 순복하는 것처럼, 이 도을 귀히 여기고 이를 지킬 줄 아는 사람도 겉으로는 이름도 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세상에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고 오히려 모두가 그에게 모여든다고 한다.

 

157. 위정자나 사회의 지도자가 사람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실적주의나 얄팍한 인기 전술 같은 잔꾀나 술수를 쓸 것이 아니라, 대우주의 기본 질서를 도와 함께하념 인심은 저절로 모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33장 자기를 아는 것이 밝음 참 자아의 발견

 

159, 자성, 내성, 극기, 자족, 견지역행 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남을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이기려면 정말로 강함이 있어야 한다....‘()’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는 덮어놓고 힘을 쓰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내면적 강함이다.

 

161. 삶과 죽음의 상대적 이원성을 초월하여 도와 하나됨으로 도에 따라 생성변화하고, 도에 따라 생성 변화함으로써 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도의 것이로다.”

 

34장 큰 도가 이쪽 저쪽 어디에나 도의 작음

 

163. 도는 홍수 때 물이 범람하여 사방에 퍼져 있듯 없는데가 없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어디에나 편만한 우주의 근본 원리다. 소위 무소부재(無所不在). 이런 도는 묵묵히 온갖 존재의 근원으로 모든 존재를 현존하게 하고 생성 화육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그 무엇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드러내거나 이것들을 지배하거나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64. 도가 이러니까 도를 따르는 사람, 특히 도의 원리에 따라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는 이런 식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이로움을 줄 뿐 공로를 주장하거나 이름을 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65. 무슨 일을 할 때 남이 알아 줄 것을 바라지도 말고, 처음부터 그런 것을 의식마자 하지 않고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렇게 할 때 진정으로 큰 것을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이다.

 

35장 도에 대한 말은 담박하여 별 맛이 - 진리의 단순성

 

167. 지도자가 위대한 상징의 참뜻을 터득하고 그 원리에 따라 다스리면 모든 사람이 그에게로 모일 것이다. 모두 모여들어 그 지도 밑에 살게 되면 해받는 일이 없게된다. 모두가 그의 지도 아래에서 쉼과 평안함과 만족을 얻게 된다. 훌륭한 지도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168. 도란 본래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도란 현상세계에 집착한 우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무엇이다.

 

36장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 변증법적 변화과정

 

173.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은 <도덕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기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다. 궁극적으로 무력이나 무기를 써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도의 자연적인 흐름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37장 하지 않으나 안 된 것이 없다 무위의 역동성

 

175. 도는 결코 억지로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안 된 일이 하나도 없다. 사실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런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세상에 안되는 일이 없다고 풀이하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무위가 가능할 때 불위(不爲)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38장 훌륭한 덕의 사람은 덕을 논함

 

180. 훌륭한 덕의 사람이란 자기의 덕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가 하는 훌륭한 일이 덕인 줄도 모르고, 덕이 쌓이는지 없어지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고 구김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있는 사람이다. 훌륭하지 못한 덕의 사람이란 자기가 가진 조그만 덕을 의식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뭐나 되는 것처럼 거기에 매달리고 그것을 더 쌓겠다고 안긴함을 쓰고 쌓는 대로 확대 선전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실상 덕이 없는 사람이다.

 

182. 피상적인 것에 신경쓸 것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것에 관시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39장 예부터 하나를 얻은 것들이 하나의 힘

 

184. 여기서 하나라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도, 모든 존재를 꼴지우는 힘으로서의 도를 말한다.

 

184. 하늘이 맑은 것도, 땅이 평정한 것도, 신이 신령한 것도, 골짜기가 가득한 것도, 여러 가지 사물이 생성변화하는 것도, 심지어 지도자가 훌륭하게 되는 것도 모두 이 하나덕택이라는 것이다.

 

186. ‘하나를 근본으로 하는 삶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것을 꼴지어 주지만 스스로 어떤 꼴을 취해서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수적으로도 그것은 모든 숫자의 시작이며 바탕이지만 동시에 모든 숫자 중에 가장 작은 숫자이다. 이런 뜻에서 하나는 자기 낮춤의 최고 상징이다. 인간도, 특히 지도자도 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고 한다.

 

40장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 순환 원리의 보편성

 

189. 도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도는 모든 것이 돌아가는 근원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 모든 것을 찾아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찾아감으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고 나아가 그 존재들로 하여금 각자의 특성을 가진 개체로 존재하게 해준다. 이런 뜻에서의 도의 근본적인 특성을 창조성이라 할 수 있다.

 

191. 어느 누구도 벼이삭을 빨리 자라게 목을 비틀 수도 없고, 가는 봄 오는 겨울을 붙잡을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이와 같이 약한 듯 은은하고 은근하게 돌아가는 도의 리듬에 맞추어 함께 돌며 의연하고 늠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삶이리라.

 

41장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진리의 역설성

 

194. 절대적인 실재에 대한 진리는 그것이 절대적이기 위해서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고, 동시에 가장 큰 것보다 더 커야 한다는 역설일 수 밖에 없다.

 

194. 일상적 상식인으로서 이렇게 한가지 사물이 정반대되는 두 특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상식적인 이분법의 단선적 사고방식에 지배받고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야말로 가소롭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크게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상스런 것이 어디 있는지 있으면 보여달라고 한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증거를 대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선느 그야말로 웃기지 말라고 한다. 어리석은 자는 심중에 하느님이 없다고 한다는 성서의 말을 연상시킨다.

내가 이랬다.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는 있는데 이 틀이 바뀌지 않는다.

 

196. 도는 숨어 있고’, 이름도 없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상식적인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모든 것의 존재 근원이요, 모든 것의 생존 원리로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눈 있는 자는 보라.

예전에 세례를 받기 위한 교육기간이 생각난다. 수녀님께 물었다. 하느님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러니 수녀님이 말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믿는 것이다. 거기서 출발한다고.

 

42장 도가 하나를 낳고 도가의 코스몰로지(cosmology)

 

199. 주객 미분의 무극 상태, 미발 상태에서 태극상태가 나오고 이런 원초적인 상태에서 양극으로의 분화현상이 생겨났는데 이 양극의 조화로운 상관 관계에서 만물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이런 뜻에서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가슴에 안았다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199. 음기와 양기가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고 했는데, 가만히 따져보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각자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거나 상대방에게 자기의 뜻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화는 어디까지나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마음, 자기 혼자서는 아무 일도 성사시킬수 없다는 의식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조화는 자기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겸손함을 전제하는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이다.

 

200. “강포한 자 제명에 죽지 못한다는 사실 좀 적극적인 표현을 빌리면 자기를 낮추어 겸손함으로 서로 조화스런 관계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 강함을 버리고 부드러움을 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기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는다고 공언하고 있다.

 

43장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부드러움이 머금고 있는 힘

 

204.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 억지로 뭔가 이루어 내겠다고 뻣뻣하게 나가거나 강제로 세상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요, 물처럼 묵묵히 설치거나 조급함 없이 순리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내는 것, ‘힘이 없는 함’, ‘무위의 위가 더욱 확실하고 유익한 방법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다고 하였다.

 

44장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더 귀한가? - 우선 순위의 확인

 

207. 우리 몸이 명성이나 재산보다 더욱 귀하고 중하니 몸을 해치면서까지 명성이나 재산을 위해 애태우고 감투와 돈을 찾아 신기루 쫓듯 하며 달려가는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45장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 고졸(古拙)의 멋

 

210. 고졸(古拙)이라는 말이 있다. 고풍이 돌고 뭔가 서툰 듯한 것, 그러면서도 내면에서 풍기는 어떤 멋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음을 이른다.

 

212. 하상공은 조급함이 승하면 추위가 오고 고요함이 승하면 더위가 온다.”고 새겨 봄여름의 왕성함이 지나면 추운 겨울이 오고 겨울의 고요함이 지나면 다시 따뜻한 계절이 온다는 뜻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는 날 뛰면서 부산을 떨면 열이 나서 추위를 이겨 내지만 이렇게 열이 나고 더워진 것은 고요함으로 이길수 있다는 것, 따라서 맑고 고요함이 최고이며 세상의 표준이여야 함을 가츠치는 것으로 푼다.

 

46장 족할 줄 모르는 것 부지족(不知足)의 위험성

 

214. 이렇게 비참한 전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도덕경>은 그것이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라고 본다. 족할 줄 모르고 계속 뭔가를 더 얻겠다는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모든 세계 전쟁의 시작은 족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상품을 팔아먹기 위한 식민지 건설, 자국민의 불만 분산 등을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216. 그러면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어떻게 생길 수 있는가?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도를 따를 때족할 줄 아는 마음이 가능한다는 것이다.

 

47장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내면적 성찰

 

220. 진리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외부 현상에 대한 정보만 찾는 데 온갖 신경을 다 쓰면서 돌아다니기만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아 버리면 사물의 밑바탕인 참된 근원을 간과하고 말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생각하면서 표면적 현상 세계를 찾아 쏘다니는 부질없는 일을 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서 우리 내면에서 발견되는 진리의 뿌리를 붙잡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48장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 일손의 길, 부정의 길

 

223.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견, 이분법적 사고방식, 일상적인 의식을 초월해서 특수한 인식능력의 활성화를 이룩함으로 도를 꿰뚫어보라는 것이다.

 

225.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없애서 우리의 이원론적 의식에서 얻어진 모든 생각, 궁극적으로는 이원론적 의식 자체를 완전히 씻어 낼 때 진정한 의미의 무지, 무욕,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이렇게 된 상태에서 일을 할 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려면 우선 이런 경지에 도달해야 할 것이고, 이런 경지에 도달해서 세상을 다스린다면 그런 사람이야 말로 플라톤이 말한 것과 같은 철인왕哲人王이 된다는 이야기다.

 

49장 성인에겐 고정된 마음이 없다 이분법적 경직성 극복

 

227. 융통성이 없이 무엇을 고집하는 일이 없다. 물이 자연스럽게 이리 저리 흘러가듯, 성인도 사람의 의사를 그대로 따라 흐를 뿐이다. 성인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한결같이 선하게 대한다. 선하지 않은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성인은 이런 쉽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230. 이분의 세계,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는 합일의 세계, 통전의 세계에 들어가면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는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마음이 없어지고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셈이다.

 

50장 그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기에 생사에 초연한 삶

 

232. 사람의 일생을 대체로 삼등분하여 처음은 삶에 대한 관심만으로 사는 삶, 끝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는 삶, 그 중간는 삶에 대한 관심만으로 사는 삶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삶으로 옮겨 가는 중간 단계의 삶 등으로 나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볼 수도 있다.

 

233. 우리가 삶과 죽음에 구애받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취하게 될 때 진정으로 자유스런 참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34.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연습도 중요하지만 죽어가는 연습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의연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젠 진짜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다. 정말 의연할수 있을까?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발버둥치지 않을까? 뻔히 죽을줄 알면서 그리고 그냥 기간만 연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수술을 해달라고 하는 사람을 봤다. 그만큼 생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보자

 

51장 덕은 모든 것을 기르고 - 玄德의 작용

 

236. 도는 만물을 낳고 덕은 만물을 기른다고 한다. 도와 덕은 물론 본질적으로 같지만 도가 본체론적 면을 가리킨다면, 덕은 도에서 나오는 내재적 창조력이나 그 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238. 도는 엄격히 말하면 모든 존재의 근원이지 존재 중의 하나일 수가 없다.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도의 으로 이루어지지만 도는 그것과 별개의 존재로 그것과 동일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그것을 붙잡고 꼼짝못하게 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도의 으로 자라지만 도는 별도로 만물 밖에서 만물을 의식적으로 좌지우지하며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2장 어머니를 알면 자식을 알 수 있다 근원을 아는 것이 영원을 배우는 것

 

240. 어머니를 알면 그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을 알 수 있듯이 도를 체득하여 알게 되면 도에서 나온 현상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자식을 알게 되었다고 거기에 몰입하여 그 근원인 어머니를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상계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여 현상계에만 집착하고 그 근원이 되는 도를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현상계의 모든 것을 통해 그 근원이 되는 도를 다시 받들고 그 원리를 입각해 살면 일생동안 위태로운 것, 두려운 것 없이 살아갈수 있다고 한다.

 

53장 이것이 도둑 아니고 무엇? - 곁길 감의 폐해

 

245. 우리에게 조금만이라도 이 있다면 이런 부조리를 보고 못본 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도덕경> 전체를 통해 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대 여기서만은 이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이란 이기심이나 자기 중심주의 같은 부정적이고 동물적인 심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삶의 내면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지혜, 명찰, 명지, 양심, 특수한 인식 능력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이 겨자씨만큼이라도 있다면 지금같이 야수처럼 물고 뜯으며 살아간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245.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범속한 인간은 이런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남보란 듯이 사는 것이 궁극 관심으로 되어 있다.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죽는 사람이 수두룩한데도 내가 번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다.

 

246. 도둑이 따로 없다. 노자짐에 의하면 한쪽에서는 굶어죽는데 우리가 이를 못 본 체 내 돈 내가 쓴다고 하여 흥청거리면 그것이 바로 도둑이라는 것이다....우리는 모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겠다.

커피 한잔에 이제 4,000원이상이다. 하루 커피한잔 줄이고 기부하자.

 

247.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도가 없는 사회에서 혼자 부하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인정하고 좀더 이웃을, 사회를, 전세계를 하나의 유기체적 단위로 생각하며 남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더불어 사는 삶을 이루는데 더욱 관심을 모아야 할 것 같다.

 

54장 대대로 제사를 그치지 않는다 바른 길 감의 보람

 

249. 도에 굳게 서고 도를 품은 사람은 도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이탈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 뿐 아니라 그 자손도 제사를 그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250. 개인과 가정과 지역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도를 수행할 때 순박하고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누릴 수 잇고, 이러한 상태가 결국 우리가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세계를 볼 때 추구해야 하는 궁극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라 보아도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55장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갓난아이 같은 삶

 

254. 갓난아이 상태란 어떤가? 갓난아이는 아직 인위적이고 이분법적인 의식을 갖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아직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나와 바깥 세상을 구별하지 않는다. 주관과 객관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주객 미분의 상태이다.

 

255. 아무튼 이렇게 자연과 합일되어 조화스럽게 살아가는 무위의 법을 체득한 사람은 영원을 향유하는 사람이고, 이를 아는 사람이 바로 사물의 궁극 이치를 깨달은 명찰과 지혜의 사람이라 한다.이를 깨닫지 못하고, 억지로 수명을 연장시켜 보려 하는 등 자연과 일치하지 않는 행위는 불길한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56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언어의 한계

 

257. 知者不言, 言者不知라는 말은 <도덕경>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도의 깊이, 그 신비스러움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함부로 도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가 없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라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259. 이렇게 도와 하나가 되고 만물과 하나가 된 사람은 가까이 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고, 이롭게 할 수도 해롭게 할 수도 없고, 귀하게 할수도 천하게 할 수도 없다. 왜 그런가? 사람이 가까이하려 한다고 해서 일부러 더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멀리하려 한다고 해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다....친소, 이해, 귀천, 영욕 따위의 구분에 관계하지 않고 그저 의젓하고 떳떳하고 늠름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세상에서 추앙받는 사람이 된다.

 

57장 백성이 저절로 통나무가 된다 억지로 함이 없는 정치

 

262. 나라를 다스리는 데 올바름이 있어야 한다. 전쟁에 임할 때는 그때그때 형편에 맞게 기발한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천하는 이런 식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하를 얻는 것같이 큰 일은 오로지 억지로 하거나 함부로 함이 없는 無事, 무위를 실천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58장 화라고 생각되는 데서 복이 나오고 - 새옹지마

 

266. 맹맹한 정치를 하면 사람이 모두 순박하고 독실해지기 마련인데, 정치를 똑똑히해보겠다고 설치는 사람 때문에 사회가 빤빤해지고 못되게 된다는 이야기다. ‘悶悶’, ‘察察이라는 말은 노자님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세상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267. “화라고 생각되는데서 복이 나오고, 복이라고 생각되는데 화가 숨어있다.”는 말은 맹맹하고 밋밋하고 어리숙한 정치를 화근으로 여기겠지만 사실 거기에서 복이 나오므로 그것은 복의 근원이요, 한편으로 똑똑하고 빈틈없는 정치를 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거기에 온갖 병폐가 숨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야말로 화근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불행이라고 생각되는 데서 다행이 나오고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데 불행의 씨앗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59장 검약한 일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아낌의 정치

 

271. 사람을 지도하고 하늘을 섬기려는 사람은 무엇보다 모든 일에 근검절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고를 낭비해도 안 되고, 인력을 낭비해서도 안 되고, 자기 몸이나 정력을 낭비해서도 안 된다. 이제 모든 것이 자기 소관이 되었으니 흥청망청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지도자일수록 모든 것을 아끼고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에만 써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60장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다 놓아둠의 정치

 

275. “작은 생선을 굽는것과 같다. 若烹小鮮(약팽소선)”는 구절은 <도덕경>에서 잘 알려진 문구 가운데 하나이다. 작은 생선을 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작은 생선을 구울때는 우선 칼로 배를 따서 내장을 뺀다든가 뼈를 추린다든가 하지 않고 통으로 굽는다. 그리고 구울 때도 쓸데없이 젓가락으로 이러저리 들쑤시지 않는다. 한쪽이 다 익기 전에는 이리저리 뒤집어서도 안된다. 그렇게 하면 작은 생선이 망가져 버리기 때문이다. 잘 익을 때까지 한참 동안 가만히 놓아 두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다. 특히 큰 나라를 다스릴때는 이와 같이 가만두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중앙정부가 지방의 일을 사사건건 간섭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통치 체제를 채택할 것이 아니라 각 지방 자치 단체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될 수 있는대로 스스로 되어가도록 놓아 두라는 것이다.

 

61장 큰나라는 강의 하류 대국과 소국의 관계

 

279. 큰나라든 작은 나라든 타국과의 외교관계, 국제 관계에서 명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일은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큰 나라는 솔선하여 작은 나라 아래에 스스로를 둬야 한다고 하고 있다.

 

280.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다. 조그만 지류가 모여들어 넓고 깊고 도도한 하류를 형성한다. 하류는 본성적으로 지류 아래에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아래에 두지 않으면 지류를 포용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여인과 같다. 조용히 스스로를 아래에 둠으로 세상을 그 품에 품을수가 있다. 큰나라도 이처럼 차분하고 의연한 자세로 스스로를 아래에 둘 때 작은 나라가 스스로 흘러 들어온다는 것이다.

 

62장 도는 모두의 아늑한 곳 도의 포용성

 

283. 말하자면 안온하고 아늑한 곳이다. 도가 바로 이렇다는 것이다. 만물을 따뜻하고 아늑하게 감싸주고 길러 준다는 뜻이다.

 

284. 도는 물론 선한 사람에게도 값지고 보배로운 것이지만 선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아늑한 안식처요, 피난처요, 은신처가 된다는 것이다. 도는 말하자면 선한사람, 선하지 못한 사람이 다 함께 비빌 언덕이다.

 

285. 도의 세계는 상식적인 세계에서 임의로 정한 선악, 미추 등의 대립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경지다.

 

285. 말하자면 취임식은 도에 입각하여 정치할 것을 다짐하는 예식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 대통령 취임식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해야 할 만한 행사인질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 대통령이니 국격에 맞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신화의 힘에서 캠벨이 얘기했듯이 그냥 행사가 아닌 의식으로 본다면 해야되겠지만 만약 내가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할 것이다. 다짐하는 의식이다. 초청해서 성대하게 벌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대대장 이취임식을 하지 않았다. 구임자가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지 대대원들 강당에 세워서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옳고 그름은 없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285. <도덕경>은 여기서 도의 구체적인 효용성으로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도를 가지고 있으면 구하는 바가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둘째 도가 있으면 죄가 있어도 모두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나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 제사를 지낸다. 희생 제물을 드린다, 굿을 한다 하면서 외부적 행위나 힘에 매달리는데 여기서는 도에 따라 사는 내면 세계의 재정립이 관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도덕경>은 이런 의미에서 비신화화운동의 기수가 아닌가?

 

63장 어려운 일은 쉬울 때 해야 실기하지 않는 자세

 

289. 첫째 해석을 따르면 작은 문제도 큰 것으로 생각하고 신중을 기하라는 말로 받아들일수가 있고, 둘째 풀이를 따르면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과 같이 아무리 크고 어려워 보이는 일이라도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처리하면 쉽게 풀릴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떤 해석이든 처음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 아니겠나. 우리의 과제도 마찬가지다. 과제가 과제가 아니기 위해서는 처음 시작을 잘해야 하는데 항상 막판에 닥쳐서 하니 과제가 과제로 다가오지.

 

290. 첫째 무위, 무사를 실천하는 사람은 우선 어떤 일이든지 그것이 시작될 단계에서 일을 처리한다고 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처음에는 쉬운 법, 아무리 큰 일이라도 처음에는 작은 법, 따라서 무위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미루지 않고 쉬울 때, 작을 때 해치운다. 따라서 남의 눈에 띄게 부산을 떨 필요도 없고, 외적 실적 같은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도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깨달음. 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290. 도에 입각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사건의 전말이나 사물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일이 확대되고 복잡해지기 전에 호미 하나로, 아니 손가락 하나로도 능히 막을 수가 있다. 따라서 무위, 무사는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실기失機하지 않고 일이 쉽고 작을 때 하는 일 없는 듯이 하는 일이다.

 

290. 둘째, 무위,무사라는 것은 일을 신중히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64장 천릿길도 발 밑에서 큰 일의 작은 시작

 

294. “기미가 보이기 전에 도모하기가 쉽다.” ‘천릿길이라고 생각하고 겁먹을 것이 아니라 우선 한 발짝을 떼어 놓는다는 생각으로 출발하면, 시작이 반이라고 할 일의 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295. 그 뿐 아니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일만은 이루고 말리라는 강한 집념과 집착 때문에 실패했을 경우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과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를 내려놓은 연습을 꾸준히 연습중에 있다.

 

295. 성인은 욕심이 없다. 있다면 다만 욕심을 없애겠다는 욕심뿐이다.....아무튼 성인은 욕심을 버리겠다는 욕심 외에 딴 욕심이 없기 때문에 남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도 귀히 여기지 않는다. 집념이나 집착이 없기에 뭐든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의연함이 있다.

 

65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 무지의 정치

 

299.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국민을 교육시켜 신사고를 채택하도록 하고, 사물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갖추게 하여 총명하고 아는 것이 많도록 하고......나아가 이런 방면으로 잘 훈련된 사람을 골라 지도자로 삼고 그들로 국민을 더욱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게 하고......그렇게 되면 개화된 사회, 문명 사회, 진취적이고 경쟁적이고 전향적인 사회가 이룩되어 사람이 그만큼 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도덕경>에서는....국민을 교육한다는 것은 결국 국민이 본래 가지고 있던 순박한 본성을 후패朽敗케 할 뿐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이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나. 이제 지방과 서울의 격차는 해소할수 없을만큼 커져버렸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은 나올수 없는 구조다. 그러나 교육방법은 똑같다. 애들 고등학생되면 야간자율학습시키고 무조건 시험공부시킨다. 내 아이들도 이런 교육과정을 받을까 걱정이다. 방법은 없는건가. 이 구조를 누가 깨주길 기다리고만 있는 내 자신도 답답하다.

 

300. <도덕경>에서 부정적으로 보고 잇는 은 교활하고 이기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얄팍한 앎이다. 이런 꾀나 지모로서의 앎이 없어지고, 도와 하나됨에서 얻어진 혜안의 경지가 바로 <도덕경>에서 찬양하는 無知의 상태이다.

 

66장 강과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수 있는 까닭은 - 스스로 낮춤

 

303. 개천과 계곡의 물은 강이나 바다로 흘러든다. 모든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과 바다로 모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강과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도자도 이렇게 스스로를 낮출 때 모든 백성이 절로 그에게로 모여든다는 뜻이다. 위에 있으려면 언행에서 자기를 낮추고, 앞에 있으려면 스스로를 뒤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304. 물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그 본성 때문이지 어떤 외부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애쓰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아무런 사심이 없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면 결과적으로자연히 위에 오르게 되고, 진심으로 자기를 뒷자리에 놓으면 결과적으로자연히 앞에 앉게 된다는 뜻이다.

 

67장 내게 세가지 보물이 있어 (), (),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

 

309. 도는 장사하거나 농사짓기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 못 된다. 도가 그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근본 원리로서의 도는 못 되고, 자질구레하고 지엽적인 짓거리에서 끝나고 말았을 것이라고 한다.

 

309. 삼보는 자애’, ‘검약’,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이라는 도가의 기본적 실천윤리를 말한다. 첫째 보물인 자애는 무엇보다도 어머니같은 마음을 뜻한다. 도는 세상의 어머니, 세상에 대한 도의 태도와 같이 낳고 기르고 감싸 주지만 그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대로 주기만 하는 마음이다. 둘째 보물인 은 아끼는 것이다. 셋째 보물인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겸손과 자기 낮춤의 윤리 강령이다.

 

310. 첫째 보물인 어머니 같은 마음, 남을 이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슨 일이든 감수하고 무슨 위험이든 무릅쓸 용기가 생기게 마련이다.

 

311.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용기만 있고, 검약하는 정신이 없이 쓰기만 하고, 뒤에 서려는 마음이 없어 앞서기만 좋아하는 이는 근본적인 데 뿌리내린 참된 윤리적 태도가 되지 못하고 오직 외양에만 치우친 표피적 행동 양식이기 때문에 사람을 망친다는 것이다.

 

68장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보이지 않는다. - 비폭력의 힘

 

315. 이렇게 무용을 보이지 않음不武, 성내지 않음不怒, 대적하지 않음不與, 자기 낮춤爲之下을 일컬어 겨루지 않음의 덕’, ‘사람 씀의 힘’, ‘하늘과 짝함이라 할수 있다고 한다. 겨루지 않으니 나무람받을 일도 없고, 겨루지 않으니 더욱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해낼 수도 있지만 지도자로서 사람을 써서 그들의 힘을 활용하면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69장 오히려 한 자 정도 물러서야 방어전의 불가피성

 

318. 도가라 하여 전쟁을 무시한 채 도도하게 호롤 살것만을 권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가에서도 전쟁을 완전히 기피하라고 권장하는 대신 어쩔 수 없을 경우에 한해 방어전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도의 원리인 무위의 전쟁을 수행해야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가르친다.

도가에서 전쟁에 대해 대비한 사상이 있었다니 놀랍다. 비록 방어전이라 하지만 한 나라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고 그에 대한 대비책이 항상 있어야 한다. 아마 공자가 병법에 능통했다면 그는 아마 모든 나라에서 중용되었을 줄 모른다.

 

319. 전쟁에 임할 때 가 되지 말고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21. 자애의 마음으로 전쟁에 임하는 쪽이 결국은 승리를 이야기한다는 뜻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쟁의 불가피성은 수납하지만 그 비참함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들의 행동이다.

 

70장 내말은 알기고 그지없이 쉽고 깨치지 못한 자의 무지

 

323. 첫째 대부분 사람의 경우 우선 먹고 살고 지지고 볶는데 바빠 상식 세계를 넘어서는 이런 진리 같은데 관심이 없을 것이고, 둘째 그 진리 자체가 너무 심오하고 원대해서 보통사람이 이해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셉캠벨의 이론에 의하면 위대한 정신적 영웅은 이렇게 일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엑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refusal to return’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영웅의 예에서 보듯 긴 영적 여정에서 이 마지막 고비를 넘어 결국 사람들에게 나아가 가르치게 된다.

 

325. 우리는 지금 겉을 다듬는데 신경을 더 쓰는가, 속사람의 자라남을 더 중시하는가?

 

71장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327. “知不知上, 不知知病이라는 문장은 <도덕경> 중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해석은 여럿이다. 첫째, 자기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둘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셋째, 알면서도 아는체하지 않는 것, 넷째, 알수 없는 것을 아는 것, 다섯째, 아는 상태에서 알지 못하는 상태로 되는 것 등이다.

 

329. 아무튼 여기서는 섣부른 앎이 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이런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모두 이런 섣부른 앎에 근거한 통상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는 이런 통상적인 이분법적 의식을 병으로 여길 줄 아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이분법 사고의 병을 병으로 알지 못하면 거기에 안주해서 인간사의 모든 면에서 지지고 볶는 일을 계속할 수 밖에 없지만 이를 병으로 아는 한 이 병에서 자유로워질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우리하고 다른 것은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병을 병으로 알고 이것을 넘어선 데 있다.

 

72장 생업을 억누르지 말아야 백성사랑이 자기 사랑

 

331. 아서 웨일리에 의하면 사람들이 그대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상관하지 말라. 결국에는 더 큰 권위인 하늘이 그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백성이 그대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들의 주거 면적을 줄이거나 생업을 방해하는 등 법적으로 다루려 하지 말라. 하늘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331. 장충웬 교수는 보통사람은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등 구체적인 문제를 두려워하는데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등이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는 장자님의 제물론식 달관에 이르면 , 이런 자질구레한 오만 가지 두려움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진정한 본질적 두려움의 새상이 되는 인간의 본성에 안주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333. 성인이 정치를 하면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에게 권위나 권력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과시하거나 휘두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되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사람들 앞에 치켜세우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333. 하상공은 이 장에 愛己라는 제목을 붙였다. 권력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길은 결국 백성에게 군림하는 일이나 강제하는 일을 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미움이나 싫증을 사는 일이 없도록 처신하는 일임을 지적하고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다.

 

73장 하늘의 그물은 엉성한 것 같지만 - 사필귀정

 

335. 형벌로 사람을 억누르거나 꼼짝 못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강제하지 않아도 사필귀정, 하늘이 알아서 모든 일을 처리할 것이니 하늘에 맡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337. 언뜻 보아 하늘의 그물은 너무나 커서 어쩔 수 없이 성기고 엉성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그것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하늘의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74장 위대한 목수 대신 나무를 깎는 일 사형은 하늘에 맡겨야

 

339. 여러 가지 법령을 만들고 형벌제도를 완비하여 거기에 따라 법을 집행하는 힘만 있으면 사회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질서가 회복될 것을 가르치는 법가적 강압 정치를 지양하고 형벌, 특히 사형은 하늘에 맡겨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341. 무위의 정치를 실시하여 나라가 평화롭고 조화스럽게 되면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에 일체감이 있게 되므로 사형 같은 제도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릴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75장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수탈 정치의 종식

 

343. 사람들의 굶주림, 반항성,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 등 사회의 모든 부정적 일이 위정자의 때문임을 다시 한 번 역설하고 있다. 어느 주석가에 의하면 <도덕경> 중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문헌 전체에서 이처럼 직접적으로 억압 정부의 억압정치, 수탈 정치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는 곳은 없다고 할 정도이다. 도가 사상이 본질적으로 억압받는 피지배자를 위한 사상이라는 것이 단적으로 나타나는 곳이라 볼수 있다.

 

345. 행복은 나비와 같다. 그것을 따라가 잡으려면 자꾸만 우리에게서 멀어지지만 그렇게 하는 일을 그만두면 나비가 살며시 우리 어깨에 와서 앉는다.

 

76장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생명의 원리로서의 부드러움과 여림

 

348.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도 강하면 꺽이고 만다.”고 한다. 도의 원리는 강함의 원리가 아니라 유약의 원리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349. 부드럽고 약한 것이 천성적으로 스스로를 낮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위에 오르게 되고, 강하고 큰 것이 스스로를 자랑하므로 결과적으로 아래에 처하게 된다는 뜻이리라.

 

77장 하늘의 도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 - 공평하고 균형잡힌 사회

 

351. 활줄을 당기면 활의 위쪽은 아래로 수그러지고 아래쪽은 위로 올라가게 된다. 하늘의 도가 하는 일은 그와 같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높은 산은 깎여 낮아지고 그 덕택으로 낮은 곳은 메워져 높아진다. 위쪽 연못에 물이 차 넘치면 그 물은 자연히 아래쪽 연못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채운다.

이렇게 남는 쪽에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쪽에 보탬으로 전체적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78장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다 물의 역설적 위력

 

355. 단단하고 힘센 것을 물리치는 데 물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단단하고 굳센 것을 무너뜨리는 데 물을 대신할 것이 없다고 한다. 물이 바위도 뚫고, 큰 배도 들어올리고, 산도 옮기고, 쇠도 녹이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생수가 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하고, 아무리 깊은 곳이라도 스며들고....이렇게 물처럼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물처럼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이다.

 

356. 물처럼 자기를 낮추고, 물처럼 부드럽고, 물처럼 약하고, 물처럼 자기 희생을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튼튼히 하고,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79장 깊은 원한은 한이 남는다. -척짓지 않는 삶

 

359. 원한 살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단 원한을 사면 화해를 하더라도 그 원한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는다. 이런 상태를 결코 좋은 상태라 할 수 없다. 그러니 처음부터 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원한을 사지 않으려면 지금까지 말한 대로 자기를 낮추고, 부드럽고, 포용성 있고, 함부로 하지 않고, 남의 허물을 자기의 것으로 감수하고, 자애로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

 

80장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 도가적 이상 사회

 

363. 춘추전국 시대 모든 군주가 전쟁을 하든 무슨 권모술수를 쓰든 세력을 키워 영토를 확장하고 인구를 증가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을 때 노자님은 이와 반대로 조그만 나라, 얼마되지 않은 인구로 서로 오순도순 조용하고 순박한 삶을 즐기면서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사회를 가장 아름다운 사회로 보고 있다. 말하자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 그대로다.

이게 가능한가. 곧 약소국인데 인접 강대국에 지배를 받고 말 것이다. 결국 이상향이네. 그러나 현재에 적용한다면 이것을 더 축소하여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81장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움과 변론과 박식함을 넘어서

 

368. 자기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아름답지도 않고, 멋있는 변론도 못되고, 박식에 근거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믿음성이 있고, 선하고, 진정으로 앎에 입각한 말임을 은연중 암시한다.

 

368. 첫째, 진리의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다. 진리의 말은 현란한 미사여구나 화려한 이론이 아니다. 도에 입각한 믿음직한 말은 아름다울 수가 없고, 아름다우면 믿을 만한 말이 못 된다.

둘째, 진리의 말은 변론이 아니라고 한다. 진리의 말은 지금껏 말한 것처럼 반대의 일치로서 양쪽을 다 같이 포용하는 이것도 저것도의 말이기 때문에 사물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분명히 딱 쪼개고 끊는 논리적인 변론일 수가 없다.

셋째, 진리를 아는 것은 박식이나 박학의 결과가 아니라고 한다. 도를 알고 체득하는 길은 우리가 가진 잡생각이나 편견을 하루하루 없앨 때 생기는 직관과 통찰에 있다. 이것이 박식이나 박학일수 없고, 박식이나 박학을 절대적인 뭐가 되는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달고 다니는 사람은 도에서 그만큼 멀 수밖에 없다.

 

370. 자기가 말한 하늘의 길’, 이 진리를 따르는 것은 세상만사에 득실이 함께 있는 것과 달리 오로지 이익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개인에게, 사회에, 나아가 세계에 평화와 평안을 가져올 뿐이다. 도에 입각한 성인의 길’, 이 진리의 길에서의 은 세상의 모든 인위적 행위와는 달리 함이 없음의 함無爲之爲이므로 경쟁이나 시비나 싸움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건강하고 조화롭고 참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이런 길로의 길감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보완이 필요한 점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도 마음의 눈, 하늘에 있는 우주거울 등 온갖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여기서도 명상을 통해 마음에서 더러운 것들을 씻어 맑고 밝은 마음을 갖도록 하라는 말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p. 62)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도가 없는 사회에서 혼자 부하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인정하고 좀더 이웃을, 사회를, 전세계를 하나의 유기체적 단위로 생각하며 남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더불어 사는 삶을 이루는데 더욱 관심을 모아야 할 것 같다.(p. 247)

 

저자의 문체 중에 ~~ 같다가 나온다. 이러한 문체는 글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종교학자가 쓰는 글에서 나오는 건 아닌 것 같다.

 

장점이자 단점인데 모든 내용을 종교와 결부시켰다. 어떤 독자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킬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예전에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지금은 이 과정을 통해서 유해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종교학자라 그런지 종교부분을 많이 가져와서 설명한 부분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이 책의 장점

중간 중간에 기독교, 불교 등 종교와 연결시켜 주었다. 신영복 교수가 얘기한 것처럼 노자의 사상은 동양에서 서양의 기독교처럼 종교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49.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74. 부처님은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종교학자라 노자의 사상을 세계의 많은 종교들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78. 힌두교에서 궁극 실재인 브라흐만을 두고 이야기할 때 쓰는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없다는 표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각 장 마다 제목과 부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저자의 고민과 생각을 엿볼수 있었다.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원문에 충실한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도덕경>은 하상공본과 왕필본을 기준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동안 발굴을 통해 추가된 원본이 있다. 그래서 발견된 순서를 보면 곽점죽간본 백서본 하상공본 왕필본의 순서라고 한다. 각 원서를 비교해가면서 내용을 해설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자는 캐나다 교수이므로 이 부분에 대한 외국 학자의 해설과 비교하여 서양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했는지를 비교 설명하면 좋겠다.

IP *.106.204.231

프로필 이미지
2017.06.20 11:30:12 *.124.22.184

경주 모임 준비하며 힘들었을까봐 걱정했는데 즐거웠다니 다행이에요. 그걸 도덕경과 연결시키다니 ㅎㅎㅎ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