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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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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4일 11시 5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대중의 언어로 고전 해설하는 게 국학자 역할

한시미학산책의 저자는 정민이 한 얘기이다. 그는 현재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다.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정민 한양대 교수가 고등학교 때부터 외우고 있다는 소동파의 적벽부일부이다. 고등학교때 이런 시를 외우고 있다는 자체가 특별해 보인다. 아마도 이런 류의 관심이 이런 책을 쓰게 했을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게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옛 우리 문인들의 지혜였을까. 그는 다함이 없는 보물같은 한문학 문헌들을 자기만의 것으로 가두지 않고 공유하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

 

정민 교수는 첫 책 <한시미학산책> 이후 지금껏 고전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 폭넓은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그는 예스러운 멋과 여운 있는 글쓰기로 인문학이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지웠다. 방대한 자료를 분류해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삶을 차 문화, 한 분야에만 몰두한 기인들, 꽃과 새 등 다양한 주제로 변주해 내는 그의 능력은 독보적이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고전을 쉽고 재밌게 풀어쓴 그의 책은 대부분 2만부 이상 팔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고전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난해와 고리타분함을 지워냈기 때문이다. 옛것을 그대로 따라해서도 안되고, 옛것과 완전히 달라서도 안된다는 그의 지론인 상동구이(尙同求異)’의 글쓰기 결과이다.

 

연구실 양쪽 벽을 메운 책꽂이의 맨 위에는 그가 한지에 먹으로 쓴 소동파의 적벽부가 띠처럼 둘러져 있었다. 붓글씨가 취미라는 정 교수는 연구실 안에 문방사우를 갖추고 틈틈이 다산과 연암의 글을 따라 적는 연습을 하고 있다.

 

저자는 700쪽이 넘는 책들을 1년 사이에 세권씩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도 3638권에 이른다.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짧은 기간에 내는 비결은 그가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서도 소개한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묶어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어망득홍법(魚網得鴻法·동시에 몇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하라)’이다. 정 교수는 하나가 끝나면 다음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가지 작업을 병진한다면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논문으로 발표하거나 잡지에 연재를 하고 그것들을 주제별로 묶어서 책을 낸다고 말했다. 그는 2006<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서부터 다산의 정보처리방식을 활용했다. 다산의 자료를 모으면서 차에 관한 자료들이 나오면 따로 빼고 또 다산의 제자 이야기는 따로 떼어 정리했다. 이 작업으로 올해 완성한 책들이 다산 문집에 포함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헌들을 모은 <다산의 재발견><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그리고 곧 출간될 <삶을 바꾼 만남>이다. 정 교수는 차와 다산이 전혀 관계없어 보이지만 책을 읽으면 하나의 주제에서 곁가지로 퍼진 것을 알 수 있다면서 주제들이 연결되어 있으면 시너지가 생기고 가속도가 생긴다고 말했다.

그의 작업방식이 마음에 든다.

 

자료를 수집하는 정 교수의 노력은 각별하다. 다산 친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바로 그곳으로 카메라를 들고 달려간다. 자료를 얻기 위해 소장자를 일년씩 설득하기도 했고 때론 끝끝내 보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저나는 자료를 정리하는 데도 나름의 방법이 있다. 소장자에게서 얻은 자료를 사진으로 찍은 뒤 컬러로 출력해 중국에서 수입해온 호접장(蝴蝶裝)’에 붙인다. 그는 새로 쓰는 책의 원고도 출력해 이렇게 호접장으로 만든다. 컴퓨터 파일로 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앞뒤의 내용을 순서대로 보기 어렵고 침을 박아 편철을 하면 두꺼워서 책장이 넘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두 명의 큰 스승이 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연암은 높고 깊고, 다산은 넓고 크다고 말한다. 그는 연암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화두를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스승이라면 다산은 제자들에게 따라야할 매뉴얼을 제시하고 그대로 따라오게 한다연암이 훨씬 더 무서운 스승이라고 평했다.

 

그의 글쓰기는 고전을 현대에 되살리기 위한 작업이면서 폐쇄적이고 고답적인 인문학 연구 풍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는 인문학이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료보다는 자료를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면서 대답을 바꿀 수 있는 질문이 아니면 새로운 게 나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암과 다산의 육성들이 이렇게 많이 남아있는데 연구자들이 출판된 다산 문집만 가지고 연구를 한다면 우리나라 대표선수에 대한 대접이 아니죠라고 덧붙인다. 있는 자료로만 연구하고 질문을 바꾸지 않으면 새것조차 구태의연하다는 말이다. 그는 학자는 관점으로 싸워야지 자료로 싸워선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글을 쓰면서 대중적인 것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고 한다. 실제 <다산의 재발견>이나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등은 모두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엮은 것이다. 그는 학술적인 책들도 고리타분하게 쓰지 않고 도판을 활용하고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과 언어로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중적이 된 것이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서 작업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한다면 오래가지 못할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글을 쓴 후 꼭 두 번 내지 세 번 원고를 소리내어 읽고 마지막으로 가능하면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소리내서 읽다보면 꼭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가끔은 해보는 방식인데 꽤 괜찮은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고 소리내어 읽는 것은 묵독과는 또다른 경험이다. 특히 이번 셰익스피어와 같은 대화체 희곡은 마치 내가 그 인물이 된 양 감정을 싫어서 연기한다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서 더 재미있다. 하지만 저자처럼 아내에게 부탁하는 것은 못하고 있다. 저자는 항상 글을 쓰고는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한단다. 같이 한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이다. 나는 왜 안할까? 아마 이 과정에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그리 좋게는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어려운 점을 이해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저자처럼 나도 내 글을 조금씩 보여주는게 좋을 것 같다. 그는 좋은 글은 글의 리듬이 읽는 것을 간섭하지 않는다소리를 내어 읽을 때 자연스러워야 그 리듬이 살아있고 내용도 전달이 잘 된다고 한다. 스스로를 고전의 트랜스레이터라고 정의내린 그는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맥락을 짚어주고 해설을 하는 게 국학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산 작업을 마무리한 뒤 그가 큰 스승이라고 평가한 연암 연구로 되돌아갈 계획이다.

 

 

정민의 주요 저서

 

정민 교수는 지금까지 3638(공저 포함)의 책을 냈다. <한시미학산책>을 데뷔작으로 출간 예정인 <삶을 바꾼 만남>에 이르기까지 모두 현대적인 관점에서 고전을 해석해 그때 여기의 삶에서 지금 여기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저작이다. <한시미학산책>(2010·휴머니스트)은 한시입문서로 한시의 세계를 풍성한 예화로 전하고, 한시의 다양한 형태미와 내용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 책의 어린이용이라 할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41만부가 팔리며 또래의 필독서가 되었다.

 

정민이라는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킨 <미쳐야 미친다>(2004·푸른역사)는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이덕무 등 그들만의 열정과 광기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18세기 지식인들의 마니아적인 내면을 탐구한 책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의미를 담은 강렬한 제목으로 화제를 일으키며 20만부 가까이 팔렸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2000·태학사)는 그가 학문의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연암의 대표 산문 40여 편을 25개의 주제로 나누어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의 연암 연구는 1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2010·태학사)으로 이어진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2006·김영사)18년 유배생활 중 다양한 분야에서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완성한 다산 정약용을 지식경영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했다. 8만여부가 팔렸다.

 

올해 내놓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는 조선 후기의 차 문화를 일으킨 다산과 초의, 추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차 관련 자료와 사료들을 연구해 쓴 조선 후기의 차 문화사이다. 지금까지 1만부가 팔렸다.

 

<다산의 재발견>(2011·휴머니스트)은 강진 유배 시기 다산의 육성을 담은 친필 편지를 발로 뛰며 찾아내 연구·정리하여 다산의 사람냄새나는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이다. 12월 중 출간되는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은 인간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꾸는 만남에 관한 책이다. 스승 다산을 만나 일생을 학문에 정진한 황상의 삶을 다산과 그의 자제들과의 교류를 통해 살핀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개정판 지은이의 말

 

4. 초판을 내고 15년이 지났다. .... 독자의 한시 이해는 폭과 너비에서 예전 같지 않다. 필자 또한 세월 따라 생각이 바뀌고 안목이 달라졌다. 젊어 쓴 글이라 과욕과 치기가 더러 보인다. .... 그래서 부족한 것은 채우고, 넘치는 부분은 덜어냈다.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애착이 강한 것 같다. 아마 첫 책이라 더 그런것일 것이다. 구선생님도 첫 책에 대해 개정판을 내셨다. 다 그런 이유 아니겠나.

 

4. 도판을 여럿 넣어 눈을 즐겁게 한 것이 특별히 자랑스럽다. 보기가 한결 시원하다.

한시는 그림이 있어야 제멋이지.

 

초판 지은이의 말

 

6. 한시는 전달의 특수성 때문에 오늘날 그 효용가치를 상실했다. ..... 그렇다고 한시가 추구한 정신의 깊이나 미학의 너비마저 덤불 속에 버려둘 수는 없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편에 방치된 채 날로 그 빛이 바래가고 있는 한시에다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고, 막힌 길을 새로 뚫어 현대적 의미를 밝히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책무다.

한시를 읽었던 적이 언제인가. 고등학교 시절 정철의 사미인곡외에는 생각이 잘 안난다. 그만큼 우리에게 잊혀진 과거이다.

 

6. 한시는 정말로 골동적 가치만을 지닌 퇴영적 문화유산에 지나지 않는 걸까?

예전에는 이 시대에 왜 한시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알 것이다. 좋은 책이다.

 

7. 바야흐로 새롭고 풍성한 담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작금이다. 새로움에 팔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의 정체성은 어디가서 찾을 것인가. 개중에는 저도 모르면서 떠드는 현학이 있고, 속임수도 없지 않은 듯하다.

 

7. 단지 우리 것이어서 소중하다는 말이 아니다. 낯설기까지 한 선인들의 안쓰러운 시 사랑에 한번쯤 귀기울여볼 여유가 이제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혀 새로운 담론의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7. 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시마(詩魔)에 붙들린 듯 다른 일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근원이 깊지 않고 보니 퍼가기만 한 샘에 고인물이 얼마 없다. 다시 저 원두로부터 용기를 채워주신 사백들의 성원을 잊을 수가 없다. 다만 옛말에 말을 듣기 전에는 그래도 알 만했는데 들을수록 아리송해진다.”더니, 자칫 이짝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47. 아내는 이 글을 처음부터 끝가지 꼼꼼히 읽고 비평해주었다.

부럽네. 무엇을 같이 한다는 것을 이래서 좋은 것이다. 나도 그녀와 머지않아 이렇게 하고 싶다. 연구원 과정을 응원해주면 좋으련만...

 

첫 번째 이야기

 

한시의 언어미학

 

17.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 <천자문>을 펼치면 처음 나오는 말이천지현황(天地玄黃)’이다.

 

17.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어찌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겠는가.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버린다.

 

17. 연암은 이렇듯 시인에게 죽은 지식이나 고정된 선입견을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한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세계와 만날 것을 요구한다.

 

18.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 된다. 시인은 천지현황의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선입견에 붙박여 간과하고 마는 까마귀의 날개 빛깔을 살피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생동하는 물상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비의를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언의의 사원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는 촌철살인의 미학이다.

시인이 그러하듯이 글을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런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대충대충 쓰고자 하는 나의 태도에 일침을 가해본다.

 

19. 시인은 천기를 누설하는 자이다. 시를 쓰는 능력은 누구나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하지 않고 절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말은 슬프다. 나는 뭐든 노력하면 되는 것이 좋은데. 아마 나는 재능이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재능을 가진 자들이 부럽다. 나는 안되는 것인가?

 

19. 무릇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 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 ; 어떤 일에 대한 깊은 맛. 그 일에 깃들여 있는 깊은 뜻)가 있다. 이치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하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19.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시라는 것은 성정을 읊조리는 것이다. 성당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흥취에 주안을 두어, 영양이 뿔을 거는 것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마치 공중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속의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19. 엄우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不涉理路(불섭이로) 不落言答(불락언답)’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덧붙인다. 언어에 끌려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하라는 주문이다. 시인이 한 번 사변의 늪에 빠져들면 생취는 간데없고 진부한 관념의 시체들만 뒹굴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구호다.

 

20. 표현의 기교에 지나치게 빠져도 안된다. 언어를 매만지며 단어들의 질량을 느끼는 일은 시인의 큰 기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시인의 정신을 본질 아닌 말단으로 쏠리게 한다. 그 결과, 시인의 정신은 간데없고 가공된 언어만 판치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암호이다. 옛사람은 이를 조충전각(雕蟲篆刻), 즉 벌레를 조각하고 글자를 아로새기는 교묘한 재주에 불과하다고 깎아 말했다.

 

20. 엄우는 시인이 지녀야 할 미덕을 흥취에서 찾는다. 앞에서 말한 생취와도 같은 뜻이다. 영양이 뿔을 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는 본래 선가의 비유로, .... 잠을 잘 때 외적의 해를 피하기 위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려 잔다고 한다. 그래서 영양의 발자취만 보고 따라가다가는 어느 순간 발자취는 끊어져버리고 영양은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양의 발자취뿐이다.

좋은 작가의 좋은작품은 전부를 다 설명하지 않는 것 같다. 항상 뜻의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20. 정작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문면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또한 영양의 발자취에 지나치게 현혹되거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시인이 쳐놓은 언어의 통발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 된다.

 

20. 흥취를 지닌 시는 어떤 시인가. 그것은 투철하고도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엄우는 이을 다시 몇 가지 비유로 제시한다. 공중지음(空中之音), 상중지색(相中之色), 수중지월(水中之月), 경중지상(鏡中之象)이 그것이다.

 

22. 그러나 물속의 달은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흔들려 사라지고 만다. 달의 실체는 하늘에 떠 있고, 물은 그 실체를 투영할 뿐이다. 공중으로 퍼져가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은 어떤가. 다만 짠 맛으로 소금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을뿐, 만지거나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다. 흥취는 또한 이와 같다.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22. 시는 독자로 하여금 읽는 행위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말로 읽는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의 언어는 젓가락으로 냄비 뚜껑을 두드리듯 해서는 안 된다. 범종의 소리와 같은 유장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

 

22.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시인으로 하여금 짓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나도 천지만물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23. “시는 만물이 사림에게 가탁하여 짓게 하는 것이다. 물 흐르듯 귀와 눈으로 들어와서 단전 위를 맴돌다가 끊임없이 입과 손을 따라 나오니, 시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물은 제 스스로 성색정경(聲色靜境)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입과 손을 빌려 언어로 형상화될 뿐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때 시인은 다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23. 겉으로 드러난 진술에만 집착하는 독자는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 행간에 감춰진 함축, 단어와 단어가 만나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취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읽으려면 내공이 필요하다. 그냥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마 이 책의 시도 저자의 풀이가 없었다면 90%이상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숨어 있는 뜻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24. 이른 새벽 들창을 열어 가만히 밖을 내다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 떠돌고 있는 법열의 생취, 이것을 무슨 언어로 부연할 수 있겠는가.

* 법열(法悅) :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와 같은 묘미와 쾌감에 마음이 쏠리어 취하다시피 되는 기쁨

 

26. 파란 가을 하늘과 빨갛게 익은 대추의 색채 대비, 커가는 어린 세대와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늙은 세대의 낙차,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정감 넘치는 시골의 정겨운 풍경이 마치 단원 김홍도의 붓끝에서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듯하다.

 

27. 물은 천 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구름은 어떠한가. 그것은 언제나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변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닌가. .... 주체를 시인으로 이해한다면 34구는 자연을 통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착잡한 심화를 노래한 것이 된다. .... 가을 풀은 여름날의 번화함을 뒤로하고 시들어간다. .... 천년을 쉼 없이 흐르는 물, 물은 흘러갔건만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28. 스무 자에 불과한 짧은 시인데 담긴 함축은 참으로 심장하다.

요즘 읽고 있는 하이쿠 역시 짧은 문장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래서 시가 어려운 것이다. 길게 설명하는 산문은 오히려 쉽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시는 무릇 이런 것일 것이다.

 

28. 시인이 글자로 말하고 있는 지시적 사실은 시에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 그런 울림이 아예 없거나 그런 떨림을 외면한 시는 화려한 수사로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교언영색에 지나지 않는다. 천진(天眞)에서 우러나오는 흥취가 없는 시는 독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28. 한시는 이미지의 구성이 탄탄하고, 언외의 함축이 유장하다. 그로 인해 한시의 감상은 매우 지적이고 감성적인 바탕이 요구된다.

처음에 나는 한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글이 아니고 중국의 글자이기에 그랬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한글과 한자를 병행하는 것을 이해할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어려운 법전이나 좀 어렵다 싶은 책은 다 한자용어로 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대주의를 했으면 됐지 아직까지 해야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한글이 탄생한 배경도 역시 한자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오늘날 영어가 범용적으로 쓰이는 것을 봐도 그렇다. 한자는 우리의 역사와 같이한 글자이다. 그것을 또한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29.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고, 속인은 왕도와 패도, 를 변별하지 못한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여, 눈과 귀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총명은 눈과 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조각 영각(靈覺)에 있다.

 

29. 알아들울 수 있는 귀, 바라볼 수 있는 눈 앞에서만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눈과 귀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신의 심층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일러 영각(靈覺)이라고 한다. <채근담>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오작 有子書나 읽을 줄 알았지 無字書를 읽을 줄은 모르며, 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無絃琴은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30. 오늘날 시 쓴다는 저들 무리는 爾來作者輩(이래작자배)

시의 바른 의미는 생각지 않고, 不思風雅義(불사풍아의)

겉으로만 꾸며서 치장 일삼아 外飾假丹靑(외식가단청)

뜻은 본시 하늘에서 얻는 것이라 意本得於天(의본득어천)

갑작스레 이루기는 쉽지가 않네 難可率爾致(난가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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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 시 삼백 편을 외운다 한들 誦詩三百篇(송시삼백편)

어디에나 풍자함을 보탤 것인가, 何處補諷刺(하처보풍자)

홀로 감도 괜찮다 말은 하지만 自行亦云可(자행역운가)

외론 노래 사람들은 비웃으리라 孤唱人必戱(고창인필희)

이규보의 시로써 시를 논한 <論詩> 작품이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31. 시의 참뜻을 벗어나 알맹이 없는 수식만 일삼는 당대 시단의 통폐를 매섭게 나무란 내용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세상, 현란한 기교로 대중의 기호에만 영합하는 시인들, 그들은 눈속임에만 급급하여 함축함양하는 공부는 내팽개친 지 오래다. 참다운 시정신은 이미 땅에 떨어져 회복의 희망도 찾을 길 없다. 어찌할 것인가. 이규보의 이러한 한탄은 오늘의 시단에도 여전히 유효할 듯싶다.

 

31. “....그 뜻을 온축하지 않는 것은 거름흙에서 맑은 샘물을 긷고, 고약한 가죽나무에서 기이한 향기를 구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죽을때까지 하더라도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번드르르한 거죽이 아니다. 속 알맹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알맹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32. 그러자 이명耳鳴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 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이명이 이 시대에도 있었구나. 꽤 오래되었는데도 아직 원인조차 모른다. 그저 스트레스가 원인이란다. 이명은 정말 괴로운 것이다. 나는 들리는데 그 누구도 들리는 사람은 없다. 이 같은 답답함이 어디에 있겠는가

 

32. 왜 연암은 난데없이 이명과 코골기를 들고 나왔을까. 이명은 자기만 알고 남은 결코 알 수가 없다. 코골기는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자기만 모른다. 사람들이 안목이 없어 나의 이 훌륭한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원망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이명증에 걸린 꼬마다. 남의 적절한 지적에도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사람은 코를 고는 버릇이 있는 시골사람이다. ..... 이명은 병인데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화이니, 만약 그가 병 아닌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 으스대는 양을 어찌 볼것인가. 코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먼저 안 것에 발끈하니, 정말 그의 병통을 지적해준다면 그 성내는 꼴을 또 차마 어찌 보겠는가.

 

33. 세상의 시인들이여! 그대들의 시는 정령위의 불로장생을 원하는가? 양웅의 기림을 받고 싶은가? 양웅의 성예聲譽를 정령위처럼 살아서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

 

寫意傳神論(사의전신론)

 

37. 시는 소리 있는 그림有聲之畵이요, 그림은 소리없는 시無聲之詩란 말도 있다. 특히 한시는 경물의 묘사를 통한 정의의 포착을 중시한다.

 

37. 화가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경물이 직접 말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사의전신寫意傳神이라 한다. 말 그대로 경물을 통해 뜻을 묘사하고 정신을 전달해야 한다.

 

37. 그런데 1등으로 뽑힌 그림은 화면 어디를 둘러보아도 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숲 속 작은 길에 중이 물동이를 지고 올라가는 장면을 그렸다. 중이 물을 길러 나왔으니 가까운 곳 어딘가 분명히 절이 있겠는데, 어지러운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절을 그리라고 했는데, 화가는 물 길러 나온 중을 그렸다. 화제에서 요구하고 있는 의 의미를 화가는 이렇게 포착했던 것이다.

 

39. “꽃 밟으며 돌아가니 말발굽에 향내 나네라는 화제가 주어졌다. ....... 달리는 말의 꽁무니로 나비 떼가 뒤쫓는 그림이었다. 말발굽에서 향기가 나므로 나비는 꽃인 줄 오인하여 말의 꽁무니를 따라간 것이다.

 

39.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홍일점이란 말의 연원이다.

 

40. 대낮 섬돌 위에 남녀 신발이 한 켤레씩 놓였고, 방문은 굳게 다혔다. 사방은 고요하고 인적도 끊겼다. 노골적인 남녀의 성애를 그린 것은 춘화도라고 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만 나타낸 것은 춘의도라 한다.

에로영화도 다보여주는 것은 재미가 없다. 보일 듯 말 듯 보여주는 그런 것이 더 수준높은 영화이다.

 

41.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42. 용을 다 그리면 미꾸라지나 도마뱁이 되고 만다. 구름 속에서 여기저기 끊겨야 변화가 백출하고 신령함이 살아난다.

 

43. 시인이 말하지 않고 말하는 수법 사이에는 공통의 정신이 있다. .... 요컨대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의 전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리로써 독자와 소통한다.

 

43. <시의 작법 Ars Poetica>란 시에서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A Poem should be equal to/not true”고 했다. 시는 이미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경意境을 전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44. 다시말해 시인은 할 말이 있어도 직접 말하지 않고 사물을 통해 말한다는 것이다. 아니,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게 한다. 시는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시는 언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생물체여야 한다.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독자를 외로움에 젖어들게 해야 한다. 괴롭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 그래도 독자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시인이 직접 나서서 시시콜콜한 자신의 감정을 죽 늘어놓는다면 넋두리나 푸념일 뿐, 시일 수는 없다.

그래서 시인이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인가. 시인이면 소설가를 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감정이 다른 것이다.

 

45. 시인이 200자의 할 말이 있으면, 그는 이것을 어떻게 20자로 줄여 말한 것인가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180자를 걷어낼 것인가로 고민한다는 말이다.

 

46. “옛사람은 시를 지음에 뜻이 말 밖에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얻게 하였다.” 시인이 다 말해버려서 독자가 더는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

 

46. 기왕의 집에서 늘상 보더니

최구의 집 앞에서 몇 번 들었나.

강남 땅 풍겨잉 정히 좋은데

꽃 지는 시절에 그댈 만났네.

필자는 이 시를 고등학교 시절<두시언해>를 배우면서 처음 접했다. 그때는 시를 읽고 나서 뭐가 이렇게 싱거워?“하는 생각뿐이었다. 기왕과 최구의 집에서 익히 만나 알던 이구년이란 가수를 강남에서 좋은 봄날 또 만났다는 것이 이시가 전달하고 있는 의미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슨 시적인 표현이 있겠는가. ....... 장안 시절에는 두보나 이구년이나 모두 당대의 귀족이었던 기왕과 최구의 파티에 초대받을 정도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한꺼번에 변해버려, 이제 두 사람은 지친 피난민의 신세로 하늘가를 떠돌다 낯선 거리에서 서글픈 상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47. 34구는 그저 평담한 듯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실로 침통하고도 무한한 감개라 서리어 있다.

 

48. 이렇듯 주변의 사소한 변화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시인이 고독할 뿐 아니라 몹시 권태로워서 변화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9. 겉으로 보기에는 쓸모없어 보여도 그 안에는 아직 쓸모를 간직하고 있다는 항변이다. 이 거문고와 화로의 원관념이 바로 시인 자신인 것을 알게 해준다. 시인은 결국 지금 세상이 쓸모없다고 자신을 버려도, 나는 아직 가슴 속에 경국제세의 포부를 간직하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49. 진흙탕 길은 곧 뜻있는 인사가 자신의 경륜과 포부를 펼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제한하는 현실의 정상황이다. .... 그가 제목에서 말한 홀로 앉아 있음의 참의미는 하수상한 시절에 때를 기다리는 오롯한 몸가짐과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49. 기병을 향해 힘껏 당겨 겨누고 있었다. 화살이 곧바로 발사될 곳을 보니 사람과 말이 모두 활에 응하고 있었다.

 

50. 이광의 화살이 추격병의 가슴을 꿰뚫어야만 그의 용맹한 정신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의전신의 본질을 해칠 뿐이다. 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 다 그리지 않고 그리기, 시와 그림은 이러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52. 화가가 살아 있는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일부 과장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52. 의자왕의 삼천 궁녀도 많은 수효의 범칭이지 꼭 세어 삼천 명은 아니며 천리마란 빨리 달리는 말이라는 뜻이지 정말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말은 아닌 것이다. ..... 그러므로 시를 읽는 독자는 시인이 쳐놓은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안된다. 그 대신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

 

54. 그녀의 답은 기실, ‘나를 향한 그대의 마음을 접수했노라는 의미다. 그대의 눈길에 내 마음도 철렁 내려앉았고, 그 내려앉은 무게만큼 노새만 더 무거워 괴롭겠다는 멋들어진 응수이다.

그 시절 시로 연애를 하는 것이 부럽다.

 

55. 12구에는 푸른 치마와 흰 목화밭, 부끄러워 돌아선 그녀의 붉은 뺨이 빚어내는 색책의 선명한 대비 속에 그녀를 향한 나그네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시인이 만일 34구에서 몹시도 수줍은 아름다운 그 모습,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라.’와 같이 표현했다면 시가 아니라 유행가의 가사가 되고 만다.

 

55. 그녀 또한 흰둥이와 누렁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두근대는 마음을 나그네에게 들켜버린 것만 같아 얼굴이 더 붉어졌을테고, 가슴은 두방이질 쳤을 게다.

 

56. “그림은 좋다만,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는 반드시 자기 입이 절로 벌어지는 법이다. 이 그림은 다물고 있으니 크게 실격이다.”

와우~ 나도 모르게 따라했다. 그렇지.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그리는 것이 좋은 그림일 것이다.

 

56. 두 그림 모두 기교로 보아서는 이미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다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목 뒤의 주름과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 대한 관찰을 화가는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화가가 놓친 것이 낙락한 소나무의 기상을 우러르는 선비의 마음과 손자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고 보니, 그것은 결코 사소한 실수라 할 수 없다. 호리毫釐의 차이가 천 리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이 이야기들은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 속에 예리한 관찰과 예술가의 정신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유몽인은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무릇 그림과 문장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번 본의를 벗어나면, 제아무리 화려하게 꾸민 문자이라 해도 식자는 취하지 않는다. 오직 안목 갖춘 자만이 능히 이를 알 것이다.”

 

59. 가짜와 진짜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없다. 가짜가 오히려 더 진짜같이 보인다. 관념화된 그림, 진정을 상실한 그림은 좋은 그림이 아니다. 정신은 간데없이 손끝의 기교만으로 그리려 드니, 난초를 그린다는 것이 파가 되고, 대나무를 그렸는데 갈대가 되고 만다. 화가가 형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거나, 시인이 대상을 방불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거기에 정신을 담는 일이다.

 

59. 대개 형상을 그릴 때는 반드시 정신을 전해야 하고, 정신을 전하려면 마음을 그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군자와 소인이 모습은 같지만 마음은 다른데, 귀하고 천하며 충성스럽고 사악한 것을 어찌 스스로 구별하겠는가? 겉모습이 비록 닯았다 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59. 시인이 정을 머금어 이를 펴고, 경물을 대하여 마음을 움직이며, 물상을 그려냄에 그 정신을 얻게 된다면, 저절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정신의 향기 없이 표현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성정의 천진함은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62. 강혼이 봄날의 경치와 직접 마주하여 떠오른 흥취를 노래했다면, 김류의 시는 강혼의 구절을 가공하여 인위적으로 합성한 것이다. 그래서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했는데도 시의 격은 크게 달라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가짜다. 그 차이는 종이 한 장밖에 되지 않는다.

저자가 그렇게 말해주니 그렇게 해석되어지지 말하지 않았다면 사실 나는 차이를 잘 모르겠다.

 

63. 판교板橋는 널빤지로 계단을 두어 만든 다리다. 다리 위엔 밤새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64. 떠나올 때는 가을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해를 넘겨 이역만리 타국 땅 여관에서 봄비 소리를 듣는다. 시인의 마음 속에는 절로 떠오르는 아련한 고향 생각이 묻어 있다.

 

66. 한 편의 훌륭한 시는 겉으로는 덤덤한 듯하지만 하나하나 음미해보면 그 행간에 감춰진 함의가 무궁하다. ...... 맹자는 아무리 서시와 같은 미인이라도 오물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지나간다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고 있어도 올바른 표현을 얻지 못하면 읽는 이들은 외면하여 돌아보지 않는다.

 

66. ‘대교약졸大巧若拙’, 정말 큰 기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졸렬해 보이는 법이다.

 

66. 좋은 시는 독자에게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허를 찔린 느낌을 준다. 이에 반해 화가의 정신이 들어가 있지 않은 그림은 이발소 그림, 목욕탕 벽화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과 똑같이 그려진 영화관의 간판은 결코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가끔 그 기교에 감탄할 뿐이다. 예술과 기술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세 번째 이야기

 

언어의 감옥

 

69.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그래서 널 보듯이 달을 보고, 달 보듯이 너를 생각한다는 사연이다.

 

71. 옛 글에는 야단스러움이 없다.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때로 아무말 않기로 한다.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72. 본래 동양의 예술 정신은 다변과 요설을 싫어한다.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소중히 여긴다.

 

72. 두 사람 사이에는 한마디의 말도 직접 오가지 않았다. 유명한 환이삼롱桓伊三弄의 고사가 이렇게 생겨났다.

 

72. 예전 토마스 칼라일과 랠프 에머슨이 처음 만나 30분가량을 아무말 않고 앉았다가는 오늘을 퍽 재미나게 놀았다며 악수하고 헤어졌다는 싱겁고도 이상한 이야기도 있다. 실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는 부질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예전 유튜브 동영상에서 화제의 영상을 봤다. 행위 예술가인 여자가 의자에 앉아있다. 맞은 편 의자에 사람이 앉으면 서로 쳐다보는 그런 영상인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떤 중년의 남자가 앉았을 때 서로가 웃다가 울었다. 알고보니 예전에 사랑하는 남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말이 없어도 눈빛으로 안부를 묻고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마치 이런 것일 것이다.

 

76.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글이다. 글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말에는 귀히 여기는 것이 있다. 말이 귀하게 여기는 바는 뜻이다. 뜻에는 따르는 바가 있다.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76. “비록 육경이 남아 있다고 해도, 진실로 성인의 겨와 쭉정이일뿐

 

77.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깨달음은 말로는 가르쳐줄 수가 없다. 마음으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우리의 연구원 과정또한 이런 것일 것이다.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다. 누구도 가르쳐 줄 수는 없다. 그저 자기가 가슴으로, 머리로 깨우쳐야 하는 것일 것이다.

 

77. 석가가 연꽃을 따서는 제자들에게 들어 보였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의아할 때 가섭迦葉만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하여 문자로 세울 수도 없고 가르쳐 전할 수도 없는 부처의 정법안장正法眼藏 미묘법문微妙法門이 그에게로 이어졌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가 바로 이것이다. 언어란 본시 부질없는 것이기에 큰 진리는 언제나 언어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깨달음은 언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77. “지붕에 올라간 다음에는 누가 쫓아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 유용한 진리는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다. 그래서 도연명은 시 <음주>에서 이 기운데 참다운 뜻이 있으나, 말하려 하니 이미 말을 잊었네라 했다.

 

78. 언어가 제아무리 불완전한 존재라 해도,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결코 살수가 없다. 그렇다면 옛 성인의 뜻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계사>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상을 세워서 그 뜻을 다하고, 를 세워서 참과 거짓을 다하며, 문사를 이어서 그 말을 다한다.” 여기에서 입상진의立象盡意의 말이 나왔다. 말로 뜻을 다할 수 없다면 형상으로써 뜻을 전달하라는 것이다.

 

79. 이처럼 사람의 마음도 뜻 없이 던지는 한마디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좋은 술잔이 있으면 여러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함께 술을 마신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언행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군자는 각별히 언행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79. 등에 짐을 져야 할 소인이 귀한 사람의 수레를 탔으니, 기강이 문란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외적이 이 틈을 타서 도발하려 함은 당연하다...... 말하는 이의 입상立象이 듣는 이에게 진의盡意되기까지는 이렇듯 몇 차례의 유추와 비약이 감행된다.

 

79. <토정비결>이 일러주는 점괘는 모두 입상만으로 되어 있다. 그 안에 담긴뜻은 그래서 사람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풀이된다.

 

80. ‘무등無等은 향찰식 표기이다. ‘무진武珍으로 적기도 했다. 향찰로 읽으면 둘 다 무돌이다. ..... 하지만 무등을 한자로 풀이하려다 보니, 하도 좋아서 등급으로 매길 수 없는 산이라든지, 산이 펑퍼짐하여 들쑥날쑥하지 않아서 무등이라 한다는 등의 그럴 듯한 부회를 낳는다. 모두 입상을 진의하자 못한 데서 온 오해들이다.

 

81. 상용이 노자에게 준 가르침은 자신의 본바탕을 잊지 말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기라는 것이었다. ..... 큰 가르침은 사람마다 일깨워 가르칠 수 없다.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준댔자 더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84. 화면 속 두 사람은 얼굴만 있지 눈, , 입이 없다. 그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음을 나타낸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네.

 

86. 그러나 세상과 어그러져 닫은 사립문은 밖에서 열기 전에는 스스로도 열 수가 없다. 사립문 속에서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고, 치열한 자기 갱신이 있다.

 

89. 경물 속에 몰입하면서 독자들은 마치 자신이 직접 숲 속을 거니는 듯한 흥취를 만끽한다. 벗과 헤어져 있음을, 봄이 떠나감을, 떠나감이나 헤어짐으로 인식치 아니하고, 꽃잎이 묻은 소매로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는 인식의 갱신에서 시인은 몰아의 희열 속에 빠져든다.

 

90. 시란 이와 같은 진공묘유의 세계와 닿아 있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버리는 느낌,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노래한다. 효용가치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저편에서 울려오는 떨림, 그 떨림의 미묘함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인간에게는 단지 입상을 통해서만 진의할 수 있는 묘오妙悟의 세계가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91. 시에서 입상진의를 귀히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막상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놓고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몇 줄의 교훈이거나,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하고 추상적인 느낌의 단편뿐이다. 마치 멀리서 본 산이 아름답지만, 막상 올라서서 보면 바윗돌 몇 개, 나무 몇 그루뿐인 것과 같다. 그렇다고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아름다움을 거짓이라고 거부할 일은 아니다.

 

91. 양파의 껍질은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가 나오지 않는다. 시를 낱낱이 해부하여 파헤치고 나면, 남는 것은 언어의 시체뿐이다. 멀리서 바라보이던 은은하고 아름다운 산의 모습은 간곳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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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22:41:00 *.124.22.184

"우리의 연구원 과정또한 이런 것일 것이다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다누구도 가르쳐 줄 수는 없다그저 자기가 가슴으로머리로 깨우쳐야 하는 것일 것이다."


스스로 깨닫는 것, 가슴으로 느끼는 것 이게 진짜라니 제대로 하고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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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22:52:45 *.18.218.234

천지만물이 이미 많은 걸 주셨는데 뭘 더 바라시는지(지력 체력 근성 기타 등등).

항상 꼼꼼함이 드러나는데 '대충대충 쓰는 나의 태도'라 함은 누구의 태도를 말함인지?

다소 투덜대는 투이기는 해도 그녀와의 관계에 대한 애틋함이 북리뷰나 칼럼 모두에서 느껴지네요.


그나저나 아래 글귀는 전문가의 평인디? ㅋ

에로영화도 다보여주는 것은 재미가 없다. 보일 듯 말 듯 보여주는 그런 것이 더 수준높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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