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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4일 11시 57분 등록

저자 연구

정민(鄭珉. 1961,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인이 되고 싶어 국문과에 진학했으나 대학교 4학년 때 <맹자>를 해석하지 못하는데 충격을 받아 한문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시에 대한 관심과 이후의 한문 공부를 결합해 한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석사학위 논문을 위해 권필(權韠: 1569~1612)의 시를 번역하던 중에 지도 교수로부터 간결한 문장 쓰기에 대해 꾸중을 듣고, 이를 체득하게 된다. 그날 간결한 글쓰기에 대한 대오각성을 하게 되고 이후 그의 글은 군더더기 없는, “어디를 찔러도 들어갈 데가 없는”, 글로 유명해진다.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지속적으로 한국학을 연구해왔는데 특히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적양용에 대해서는 최고의 권위자라 할 수 있다. 연암의 산문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비슷한 것은 가짜다>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저술했으며, 18세기 지식인데 관한 연구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어록청상>, <미쳐야 미친다> 등을 썼다.

1년에 3~7권 출간할 정도로 매우 다작을 하는 작가인데 저서로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성대중 처세어록>,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이 있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허공 속으로 난 길 한시의 언어 미학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 빛깔

17 그렇다면 내가 이를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어찌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겠는가.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버린다.

 

18 시인은 천지현황의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선입견에 붙박여 간과하고 마는 까마귀의 날개 빛깔을 살피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생동하는 물상 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비의(秘儀)를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는 촌철살인의 미학이다.

시는 관찰력과 촌철살인의 미학.

이래서 내가 시인이 되기는커녕 시를 읽고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것 같다.

 

영양이 뿔을 걸 듯

19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다. 이치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하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19 시인이 한 번 사변의 늪에 빠져들면 생취는 간데 없고 진부한 관념의 시체들만 뒹굴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구호다. 표현의 기교에 지나치게 빠져도 안 된다. 언어를 매만지며 단어들의 질량을 느끼는 일은 시인의 큰 기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시인의 정신을 본질 아닌 말단으로 쏠리게 한다.

현대의 많은 시들이 이 범주에 들지 않을까? 그래서 시가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고 점점 시답지 않게 되어 외면 받는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

 

허공 속으로 난 길

23 사물은 제 스스로 성색정경(聲色情境)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입과 손을 빌려 언어로 형상화될 뿐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때 시인은 사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시는 시인 뿐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도 어렵다. 함축된 걸 풀어서 이해하려니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29 시 지음에 특히나 어려운 것은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운 것.

머금어 쌓인 뜻이 깊어야지만 씹을수록 그 맛이 순수하다네.

뜻만 서고 그 말이 껄끄러우면 뻑뻑해 뜻조차 펼 수 없으리.

그중에도 나중으로 해야 할 것은 아로새겨 아름답게 꾸미는 것뿐.

 

이명과 코골기

32 정작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명에는 쉽게 도취되면서, 자기의 코 고는 습관만은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떤 이명에 도취되어 있을까? 사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은 콧소리 깨달음사건 이후로 어느 정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남들은 모르고 나에게만 보이는,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깨닫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림과 시 사의전신론(寫意傳神論)

그리지 않고 그리기

41 수묵으로 달을 그릴 때 달은 희므로 색칠할 수 없다.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법도 이와 같다. ‘성동격서(聲東擊西)’란 말처럼 소리는 이쪽에서 지르면서 정작은 저편을 치는 수법이다.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쎄수묵화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요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으로는 좀 안 어울리는 방법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가는 당장에 답답하다거나 요점만 말하라거나 하는 질책을 받을 듯.

 

말하지 않고 말하기

44 다시 말해 시인은 할 말이 있어도 직접 말하지 않고 사물을 통해 말한다는 것이다. 아니,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게 한다. 시는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시는 언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생물체여야 한다.

 

46 “옛사람은 시를 지음에 뜻이 말 밖에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이를 얻게 하였다.” 시인이 다 말해버려서 독자가 더는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뿐이 아니라 글이나 영화 등 다른 매체도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 말해야 정확한 정보(주장)이 담긴 좋은 글이라고 평한다. 시가 아니라서 그런가? 행간을 제대로 못 써서 그런건지, 행간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

 

49 소리가 안 나는 거문고와 불씨가 꺼진 화로는 제 기능을 상실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소리가 안 날줄 알았는데 나고, 불씨가 없을 줄 알았으나 남아 있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쓸모없어 보여도 그 안에는 아직 쓸모를 간직하고 있다는 항변이다. 이 거문고와 화로의 원관념이 바로 시인 자신인 것을 알게 해준다. 시인은 결국 지금 세상이 쓸모 없다고 자신을 버려도, 나는 아직 가슴 속에 경국제세의 포부를 간직하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왠지 내 얘기 같아서섬뜩하게 마음을 무찌르고 들어온다.

 

50 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 다 그리지 않고 그리기, 시와 그림은 이러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52 도대체 삼천 장이나 되는 백발이 어디 있는가. ~ 삼천 척이나 쏟아져 내리는 폭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여산폭포 아래서 귀가 멍멍할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주는 압도감은 삼천 장의 길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방불하게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시가 언어의 과장과 함축이다. ~ 세상에 어떤 말이 하루에 서울서 진주까지 달려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시를 읽는 독자는 시인이 쳐 놓은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

 

54 당신이 내 마음을 온통 가져가버렸으니 책임지라는 말에 그녀는 온통 나귀 걱정만 한다. 늙은 나귀는 등에 태운 미인도 무겁다고 연신 가쁜 숨을 씩씩 몰아쉰다. 그런데 여기에 한 사람의 넋을 더 얹었으니 나귀만 죽어나게 생겼다는 말이다. ~ 그녀의 대답은 기실, ‘나를 향한 그대의 마음을 접수했노라는 의미다. 그대의 눈길에 내 마음도 철렁 내려앉았고, 그 내려앉은 무게만큼 노새만 더 무거워 괴롭겠다는 멋들어진 응수이다. 일상적인 예상을 빗겨가는 이러한 비약에는 참으로 사람을 미혹케 하는 예술적 매력이 넘쳐 흐른다.

Flirting의 정석.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했구나. 재미있다. 나중에 써먹어 봐야겠다.

 

정오의 고양이 눈

56 호리(毫釐)의 차이가 천 리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이 이야기들은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 속에 예리한 관찰과 예술가의 정신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유몽인은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무릇 그림과 문장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번 본의를 벗어나면, 제아무리 화려하게 꾸민 문장이라 해도 식자는 취하지 않는다. 오직 안목 갖춘 자만이 능히 이를 알 것이다.” 예술 작품의 감상은 바로 이 호리의 차이를 변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

예술작품의 진가는 이렇듯 알아보는 안목 앞에서만 빛나는 법이다.

예술작품도 명품도 사람도 그렇다. 진가는 알아보는 안목 앞에서만 빛난다. 알아보는 눈을 키워야 물건이든 사람이든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과 가까이 해야 나를 알아볼 수 있겠지.

 

59 화가가 형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거나, 시인이 대상을 방불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거기에 정신을 담는 일이다.

핍진이 무슨 말인가 했다. 어감상으로는 빼앗다, 없어지다의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핍박에서 연상된 듯하고, 실제로 그런 뜻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매우 비슷하게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무리 화가가 핍진하게 묘사하려해도 카메라를 따라갈 수는 없다. 카메라와 경쟁하려면 핍진한 묘사가 아니라 정신을 담아야 한다. 다른 분야에서 AI와의 경쟁도 마찬가지겠지.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

66 한 편의 훌륭한 시는 겉으로는 덤덤한 듯하지만 하나하나 음미해보면 그 행간에 감춰진 함의가 무궁하다. 시인의 진실한 느낌이 없는 시는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해도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

좋은 시는 독자에게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허를 찔린 느낌을 준다. ~ 사진과 똑같이 그려진 영화관의 간판은 결코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가끔 그 기교에 감탄할 분이다. 예술과 기술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立像盡意論)

싱거운 편지

 

싱거운 편지

69 ‘월인천강(月印天江)’이랬거니, 달은 나 있는 안변이나 너 있는 한양이나 가뭇없이 비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널 보듯이 달을 보고, 달 보듯이 너를 생각한다는 사연이다. 그나마도 그 모습은 보일 듯 구름 사이로 숨기 일쑤이니 이 아니 안타까운가.

 

왜 사냐건 웃지요

71 옛 글에는 야단스러움이 없다.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때로 아무말 않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한자의 장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래도 의미가 분명한 한글 보다는 뜻이 두개 이상인 경우가많고 조사가 없어 여러가지로 해석 가한 한자가 행간 또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 같다.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된다는 점에서 단점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행간에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새로운 발견.

 

72 본래 동양의 예술 정신은 다변과 요설을 싫어한다.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소중히 여긴다. ~

예전 토머스 칼라일과 랠프 에머슨이 처음 만나 30분 가량을 아무말 않고 앉았다가는 오늘은 펄 재미나게 놀았다며 악수하고 헤어졌다는 싱겁고도 이상한 이야기도 있다. 실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는 부질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정말 친한 친구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헤어진 것처럼 별 말이 필요 없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어설프게 친할 경우에 침묵이 불편해서 말이 많아진다.

 

74 선잠을 깨어 바라보는 봄날 해질녘 광경의 황홀함 속에서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 마음 속에서 기심(機心), 즉 분별하고 헤아리는 마음마저 앗아가 버린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이 시는 이렇듯 모든 것이 기화해 버리고 남은 순수한 결정의 세계를 노래한다. 그래서 내가 봄 동산이 되고, 그 동산의 나비가 되어 봄날의 석양 속으로 훨훨 날아가 버리는 느낌을 노래한다. 필설로 옮기려 하는 순간 증발해버리듯 사라져버린 기심, 사물과의 순간적인 만남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생취를 설명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는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고 보면 언어는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76 언어란 이렇게 불완전하다. 이런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오해가 생하고, 시비가 생겨난다. 장자는 다시 덧붙인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글이다. 글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말에는 귀히 여기는 것이 있다. 말이 귀히 여기는 바는 뜻이다. 뜻에는 따르는 바가 있다.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77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깨달음은 말로는 가르쳐줄 수가 없다. 마음으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이른바 심수상응(心手相應)이다. 성련은 마지막 단계에서 백아가 강렬한 바람을 가지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함으로써 말로는 도저히 전해줄 수 없었던,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최후의 심법을 전수해주었던 것이다.

매우 좋은 말들이기는 한데옛날처럼 스승과 제자가 거의 1:1의 도제 시스템으로 가르칠때나 가능한 일이 아닐지요즘처럼 대량의 제자를 가르치는 경우에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77 언어란 본시 부질없는 것이기에 큰 진리는 언제나 언어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깨달음은 언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사벌등안(捨筏登岸)’의 법을 말한다. 언덕을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 장자는 득어망전(得魚忘筌)’을 말한다.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을 잊어라. 득의망언(得意妄言)’, 즉 뜻을 얻었거든 말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지붕에 올라간 다음에는 누가 쫓아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 유용한 진리는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이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다. ~”이 가운데 참다운 뜻이 있으나, 말하려하니 이미 말을 잊었네.”라 했다.

 

내 혀가 있느냐?

79 박지원은 <이중존에게 보낸 답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속담에 꿈에 중을 보면 부스럼이 생긴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가? 중은 절에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으며, 옻나무는 사람에게 부스럼이 나게 하니, 꿈속에서 서로 인하게 되는 것이다.” 중과 부스럼, 이 두 ()’ 사이에는 부스럼이라는 여러 단계의 유추가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이 여러 단계를 복원시켜야만 의미가 비로소 파악된다

그렇구나. 다른 상징을 해석하거나 꿈을 해몽하는 것도 이런 식으로 접근 가능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매우 많은 분야에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겠다. 쉬운 게 없는 듯

 

81 큰 가르침은 사람마다 일깨워 가르칠 수 없다.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말해도 알아듣고, 모를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준댔자 더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이게 본질인 것 같다.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듣는다.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88 가을날의 근심이 덧없이 스러진 청춘의 꿈을 애상하는 허탈한 독백이라면, 봄날의 근심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꼼지락대는 설렘을 동반한다. ~

꽃잎이 묻은 소매라서 맑은 향기가 가득하고, 벌은 꽃으로 오인하여 잉잉대며 쫓아온다. 가는 봄에 져버린 꽃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어 벌을 몰고 돌아오는 것이다.

 

89 경물 속에 몰입하면서 독자들은 마치 자신이 직접 숲 속을 거니는 듯한 흥취를 만끽한다. 벗과 헤어져 있음을, 봄이 떠나감을, 떠나감이나 헤어짐으로 인식치 아니하고, 꽃잎이 묻은 소매로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는 인식의 갱신에서 시인은 몰아의 희열 속으로 빠져든다.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89 둔덕 가득 흰 구름은 갈아도 끝이 없고 못 속의 밝은 달은 낚아도 자취 없네.

섬돌 쓰는 대 그림자, 먼지는 그대로요 못을 뚫는 달빛에도 물에는 흔적 없네.

푸른 바다 배 간 자취 찾기가 어렵고 청산에는 학 난 흔적 보이지 않는구나.

정확히 모르겠지만 뭔가 마음을 무찔러 들어온다. 그게 시의 묘미겠지. 내가 시를, 것도 한시를 좋아하게 될지는 정말 몰랐다. 저자의 해석이 좋아서 그런 것도 같다.

 

91 양파의 껍질은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가 나오지 않는다. 시를 낱낱이 해부하여 파헤치고 나면, 남는 것은 언어의 시체뿐이다. 멀리서 바라보이던 은은하고 아름다운 산의 모습은 간곳없게 된다.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당시와 송시

꿈에 세운 시의 나라

95 지은이가 시 왕국의 일상에 익숙해갈 무렵 난데없이 김시습의 반란 소식이 전해진다. 천자 최치원이 당시풍만 좋아하여 자기와 같이 송시풍을 즐겨 쓰는 사람들은 박대하여 등용치 않으므로 참을 수 없어 거병했다는 사연이니, 참으로 시 왕국다운 반란 이유다. ~ 소영비술이란 천지의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피리 부는 비술로 다름 아닌 시를 말함이요, 첨두노란 머리 뽀족한 하인이니 붓의 다른 말이다.

적진에 다다른 심의가 한 곡조 피리를 불자 반란군은 그만 간담이 서늘해지고 기운이 꺾이며, 두 번 불자 그만 몇 겹의 포위를 풀고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재미있다. 뭔가 요즘의 게임 시나리오로 사용해도 될 것 같은 매우 창의적인 이야기다.

 

작약의 화려함과 국화의 은은함

97 산은 늘 그 자리에 서 있지만,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날마다 그 모습을 바꾼다. 봄 산이 좋아도 여름 산의 짙푸름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가을 산의 조촐함과 겨울 산의 담박함은 또 그것대로의 매력이 있다. 사람마다 기호가 같지 않으므로, 꼬집어 어느 산이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시 또한 이와 다를 것이 없다.

 

98 시인이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시는 이해가 쉬운 반면 자칫 식상한 느낌을 주거나 거부감을 일으키기 쉽다. 반면 보여주기만 하는 시는 무슨 말인지 갈피 잡기가 쉽지 않고 자칫 추상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다. 또 이 경우 시인의 의도는 단지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므로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讀詩)가 요청된다. 말하는 시가 좋은지 보여주는 시가 좋은지는 순전히 읽는 이의 기호에 달린 것이다. 둘 사이의 우열을 갈라 말하기가 어렵다. 가을 산이 가장 좋다는 사람에게 겨울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타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기호도 변하나 보다. 아니 그때그때 달라지기도 하는 것 같다. 보통의 나라면 객관적이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가 좋다고 할 것 같은데, 지금 <한시미학산책>에 나와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는 말하는 시보다 보여주는 시가 더 좋게 느껴진다. 산을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겨울 산을 오르면서 그 매력에 빠진 것과 비슷한 것 같다.

 

100 작약이나 해당화의 화려한 색채는 화려하게 성장한 미인의 우아한 자태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당시이다. 반면 눈 속에 피어나는 배화나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의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는 화장을 하지 않고 소복 입은 여인의 얼음 같은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이것이 바로 송시이다.

 

당음, 가슴으로 쓴 시

103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하다. 이에 반해 송시는 머리로 쓴 시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깊이가 있다.

평소라면 당연히 머리로 쓴 송시가 내 취향일텐데 왜 지금은 가슴으로 썼다는 당시가 더 끌리는지…. 취향이 변덕스러워서거나 아님 지난번 애니어그램에서 발견한 것처럼 내가 사실은 감성적인이성의 가면을 쓴 감성적인 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니 평소의 나라면 시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107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 해도 흰머리의 어버이 근심할까 저어하여,

그늘진 산 쌓인 눈이 깊이가 천 장인데 올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적었다네.

역시나 이번 시도 마음을 무찔러 들어온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서 그런가? 부모의 늙음을 걱정하는 이런 시를 보면 가슴이 시리고 묵직해지는 것 같다.

 

송조, 머리로 쓴 시

112 그녀는 하루 종일 봄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산꼭대기 구름 위까지 가보았지만 봄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친 그녀는 생각을 접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의 코끝에 매화의 향기가 스쳐오는 것이 아닌가. 정작 봄은 자기 집 뜰 매화가지 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봄을 찾으려고 온 산을 헤매는 것은 도를 깨닫고자 구도의 행각에 나섬을 뜻한다. 그녀는 온갖 고행을 무릅쓰며 일념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온 산 어디에도 없는 봄처럼, 도의 실체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착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114 사람의 마음은 본디 순선(純善)하여 맑고 깨끗하기가 이슬 머금은 풀잎이나 일렁임 없는 수면과도 같다. 그러나 자꾸만 인욕이 끼어들어 순수를 잃게 만든다. 지금 시인은 제비가 물결을 차서 평정을 깰까 염려하듯 혹 자신의 삶에 인욕이 개입되어 본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셈이다. ~

송시풍의 시는 이와 같이 담담한 가운데 깊이를 지녔다. 또한 일반적으로 당시가 대상 그 자체에 몰입함으로써 자연스레 시인의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는 데 반해, 송시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를 대상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뱃속에 넣은 먹물

116 그러나 어찌하리.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그러고 보면 시란 까맣게 잊고 있던 신선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천상의 백옥루가 준공되었으나 상량문을 지을 사람이 없자 옥황상제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하(李賀)를 하늘나라로 불렀던 것처럼, 티끌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나 천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뱃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다만 깨어 노래할 뿐이다.

창의력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는 요즘 사람들보다 훨씬 창의적이다. 어떻게 뱃속에 찬 복수를 옥황상제가 준 먹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뱃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를 짓고 깨어 노래하겠다니 마음이 아픈 한편, 내가 뭐라고 그를 불쌍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행복을 멋지게 찾은 사람인데

 

버들을 꺾는 뜻은 한시의 정운미

남포의 비밀

123 눈물을 제아무리 많이 흘린다 한들 도대체 그것이 대동강의 유량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단말인가. 그렇다해도 이를 두고 허풍 좀 그만 떨라고 타박할 독자는 없다. 이 엄청난 과장은 시인의 슬픔이 그만큼 가눌 길 없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버들을 꺾는 마음

125 “말은 가자 울고 임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로다. 저 임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

 

129 이별하는 사람들은 재회에의 염원 때문에 날마다 대동강변에 나와서 떠나는 임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보낸다. 허구한 날 꺾다 보니 대동강 버드나무는 아예 대머리가 될 지경이다. 그래보았자 떠나는 임을 붙잡지도 못하고, 떠나신 임이 돌아오는 것도 못 보았다. 보내는 사람은 이별이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임이 오지 않아서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러고 보면 앞서 대동강 물이 마를 날 없다던 정지상의 말은 빈말이 아닐 성싶다. 그녀들의 하염없는 기다림이 안쓰러워, 강물 위엔 한숨인 양 안개가 짙어 있고 눈물인 듯 강물은 넘실거린다. 강물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도 수심을 보태고 있다.

왜 그렇게 시에 버들가지가 많이 등장하나 했더니 버들가지에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131 ‘가을 부채는 한시에서 으레 버림받은 여인을 상징한다. 부채는 더운 여름날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다. 하지만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면, 여름내 애지중지하던 부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혀진다. 마찬가지로 한때 내게 그토록 다정하던 임은 어느덧 나를 까맣게 잊고 돌아보지 않으신다. 시인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을 부채를 손에 쥐었다는 말만 가지고 이미 그녀가 임에게 버림받은 여인임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난간에 기대어

137 한시에서 무제를 표제로 내거는 것은 마땅히 붙일 만한 제목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목을 붙이지 않은 채 오히려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를 요구하기도 한다.

앞으로 제목이 무제인 한시는 눈여겨 보고 적극적으로 독시를 해야겠다. 그런데 이 책을 덮은 후에 내가 한 시를 볼 일이 있을까?

 

저물녘의 피리 소리

140 세상을 떠난 벗의 옛집을 지나다가 앞서 향수의 고사를 떠올렸다. 석양 무렵 쓸쓸히 가고 없는 옛 벗의 집을 찾았다. 주인 잃은 골목은 텅 비었고, 참새가 제 집처럼 떼를 지어 시끄럽다. 막막한 것은 봄 그늘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예전 같이 놀던 벗들은 찾아볼 길 없고, 집주인은 대답 없이 흙 속에 누워 있다. 나 홀로 여기 서니 이웃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 없어도 스산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143 특정 어휘가 특수한 정운을 띠게 되면 요즘 식으로 말해 사은유(dead metaphor)가 된다. 이것이 진부한 표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인은 늘 새로운 감성과 참신한 생각으로 이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148 내무대신이었던 김윤식은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네 글자를 썼다. 병합에 찬성한다는 말인가, 반대한다는 말인가? ‘불가! 불가!’로 끊어 읽으면 병합을 결사반대한다는 말이니 만고의 충신이다.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불가하다로 읽을 수도 잇다. 이 경우 병합은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는 역사의 필연임을 강조한 것이 되어 천하의 매국노가 된다. 불가불 가로 읽으면 어떨까? ‘불가불이나 부득불어쩔 수 없어서’,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의 뜻이니, ‘속으로는 반대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찬성한다.’는 의미가 된다. 회색분자, 박쥐의 언행이다.

그런 중대한 일에 이렇게 행동하다니 정말 박쥐같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사람이 위너. 이렇게까지는 아니라도 글을 쓸 때 중의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다. 일종의 pun의 개념으로. 다음번 칼럼 쓸 때 활용해 봐야겠다.

 

오랑캐 땅의 화초

150 어떤 면에서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모호성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이다. 시 속에서 이러한 의미들은 오히려 풍부와 함축이 된다. ~

뛰어난 시는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포용력과 융통성을 극대화한 시라고 말해도 괜찮다.

 

152 오랑캐 땅 화초야 없으랴마는 (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온 것 같지가 않네 (春來不似春)

 

개가 짖는 이유

156 시인은 결코 똑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다. 여운을 즐기려는 까닭이다.

 

158 이렇듯 모호성은 문화적 교양이나 문학 관습을 공유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즉각 손뼉이 터져 나왔을 대목도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외국 영화를 번역할 때 이런 일이 자주 생긴다. 분명히 원어로는 문화적 배경 때문에 또는 단어가 갖는 중의적 의미 때문에 재미있는 부분인데 번역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살릴 수 없거나 또는 문화를 몰라서 재미를 못 느끼는 경우가 많다.

 

무지개가 뜬 까닭

162 스무 글자 어디에도 춥다는 말은 없다. 그저 경물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제목마저 없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해질 법하다. 시인은 제목으로 분위기를 잡아놓고, 정작 시 속에서는 독자의 예상을 외면하고 딴청을 부렸다. 여기에서 의미의 단절이 온다. 단절을 채워 제목과 본문을 잇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겼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붓이 아닌가.

 

백발삼천장

162 흰머리 풀어헤쳐 삼천 장 됨은 근심으로 이다지 길어진 걸세.

해맑은 거울 속 그 어드메서 가을 서리 얻었는가 모르겠구나.

 

166 10년 세월 동안 고향 함양을 밤낮으로 그리며 돌아갈 꿈을 키워왔는데, 이제 다시금 상건수를 건너로 나니 도리어 병주가 고향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서울 사는 사람은 언제나 전원의 목가적 풍광을 사모한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면 며칠이 못 되어 다시 도회의 번화한 풍광과 따뜻한 커피 한잔이 그립게 마련이다.

나도 외국에 살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10년은 커녕 6개월간 다른 나라에 살면서 집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왔지만 막상 집은 내 집 같지 않고 왠지 손님으로 온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있는 내 집이 진짜 집 같아서 빨리 가고 싶어졌었다. 어디든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내 집이다.

 

168 과연 두 곳의 지명과 연관하여 상건수의 위치를 비정해보면, 지금까지 위 시에 대한 고금의 착각이 자못 통쾌하다. 또 병주란 말은 망향과 그에 따른 모순 심리의 정운이 담뿍 담긴 말이 되었다. 이제와서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설복시키기가 쉽지 않은 일이 되고 말았다.

 

뱃속 아이의 정체

170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남편의 생사조차 알 길 없어 막막하던 여인은, 마침내 마지막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고 한들 과연 찾을 수나 있겠는가.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모르고, 아들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얼굴도 모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아들과 그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미의 마음, 그 갈피갈피에 서린 애끊는 슬픔이야 어찌 필설로 미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시를 놓고 근엄한 유학자의 입에서까지 서슴없이 이런 외설적인 이야기가 시화될 정도로 고려 사회의 성 풍정이 타락했다고 지적하는 오독을 지하에서 포은이 듣는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

잘못 번역된 책이나 영화를 볼 때마다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오역이 많은 영화를 볼 때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을 다른 사람이 걱정될 때도 있다. 정말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172 한문이 갖는 언어의 함축과 정운, 그리고 시인이 행간에 감춰둔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이런 오역이 나왔다.

 

172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 위에 숨겨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진한 지적. 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도 즐겁다. 시인은 부러 말꼬리를 흐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독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코드를 찾아 나선다.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물과 자아의접속 정경론(情景論)

묘합무은, 가장자리가 없다

175 “()은 시의 매개이고, ()은 시의 배아다. 이 둘이 합하여 시가 된다. 몇 마디 말로 만 가지 형상을 부려서 원기가 혼성하니 그 넓음이 가없다.” 무심히 경물과 마주하여 마음속에 정이 일어난다. 경이 정의 매개가 되는 까닭이다. 가슴에 자욱한 정을 품고 경을 바라보면 무심한 경물이 내 마음의 빛깔로 물든다. 정은 경에 의미를 불어넣는 배아인 셈이다. 정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경만 가지고 시가 되는 법도 없다.

 

176 “빼어난 시는 정 가운데 경이 있고, 경 가운데 정이 있다.” ~ 어디까지가 경이고 어디부터가 정인지 그 가장자리를 찾기 어렵다. 정을 말하는가 싶은데 어느새 경을 묘사하고 있고, 경을 그려 보이는가 싶어 보면 다시금 정을 토로한다.

 

정수경생, 촉경생정

179 “시는 정을 일으키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편편마다 정을 마구 늘어놓으면 마침내 제멋대로가 된다. 시는 경이 핍진한을 높이 친다. 다만 작품마다 경을 펼치면 조잡하고 천박해진다.” 정과 경의 미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서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좋은 시다.

 

182 가을 새벽의 해맑은 경은 자연스레 자신을 돌아보는 시인의 정을 일으켰다. 돌아보면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남은 것은 늙고 병든 고단한 몸뚱이뿐이다. 손꼽을 만한 벗도 없다. 제 몸 하나 갈무리하기도 버거운데 세상일은 더하여 마음을 심란케 한다. 이때 동편 저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른다. 실망하지 말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위로해준다.

 

이정입경, 경종정출

184 문제는 언제나 정과 경의 조화다.

 

186 팔백 곡 후추를 쌓아두다니 어리석음 천 년 두고 비웃는도다.

어이하여 벽옥으로 됫박을 삼아 종일토록 명주 구슬 되고 또 되나.

 

정경교융, 물아위일

193 종일 누워 책을 읽는다. 꼭 어디까지 읽을 작정은 없다. 심심하면 차 마시고, 곤하면 가슴에 책 얹고 잔다. 돌솥에 여태 남은 차 향기가 잠 덜 깬 내 후각을 자극한다. 창박엔 사분사분 빗소리, 흐리멍하던 정신이 돌아온다. 누운 몸을 일으켜 주렴을 걷는다. 비에 씻긴 이들이들한 연잎들이 연못에 가득하다. 마음조차 푸르다.

시적 화자는 풍경 속의 일부로 놀아들어 버렸다. 한 폭의 그림 속이다. 주관 정의가 객관 경물에 완전히 녹아들어 차 향기를 맡고 빗소리를 듣는 주체가 시인인지 나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지수술경, 정의자출

193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곧장 말해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시인은 그저 경상을 묘사하면서 정의가 절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197 이상 몇 수의 시에서 보듯 시인이 아무리 경만 말해도 그 속에 어느새 정이 녹아든다. 시인은 눈앞의 여러 대상 중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춘다. 렌즈야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초점을 맞추는 시인의 선택에 감정이 스민다. 시 속에서는 어떤 경물도 포착과 동시에 주관의 색채로 물들고 만다.

 

즉정견경, 정의핍진

199 여덟 살에 일곱 해를 병 앓았으니 돌아가 누움이 외려 편하겠구나.

흰 눈이 펄펄 오는 오늘 이 밤에 어밀 떠나 추위 모름 가슴 아프다.

 

202 시는 찬 샘물이다. 시를 잘 쓰려면 물의 선변(善變)을 배워야 한다. ~ 그러나 그 강개는 어디까지나 돌에 부딪혀 난 여울의 소리였지, 악악대며 떠드는 왜가리 소리가 아니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의 법은 점차 시끄럽고 번다해져 옛사람의 정신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수다스럽게 말하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소리가 시의 내용이 되고 말았다. 심상(尋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라. 그러나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玄關)’이 있다. 그 현관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일자사(一字師) 이야기 시안론(詩眼論)

한 글자를 찾아서

205 서거정이 <동인시화>에서 말했다. “시는 묘함이 한 글자에 달려 있다. 옛사람은 한 글자는 가지고 스승으로 삼았다.” 호자(胡仔)<초계어은총화>에서 시구는 한 글자가 공교로우면 절로 빼어나게 된다. 마치 한 낱의 영단(靈丹)으로 돌을 두드려 금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원매가 <수원시화>에서 시는 한 글자만 고쳐도 경계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도 다 같은 뜻이다. ~

한 글자가 시를 죽이고 살린다.

 

207 소동파가 일찍이 <병든 학>이란 시를 지었다. 그중에 석 자 되는 긴 다리에 마른 몸을 얹었네(三尺長閣病軀란 구절이 있었다. 하루는 소동파가 ()’자를 가리고서 임덕장 등에게 적당한 글자로 채워 넣게 했다. 그들은 끝내 알맞은 글자를 찾지 못했다. 소동파가 천천히 가린 것을 떼자 ()’자가 적혀 있었다. ‘()’놓아두다또는 얹어놓다는 뜻이다. 이 한 글자를 써놓으니, 가뜩이나 위태로운 긴 다리에 병들어 수척한 몸뚱이를 얹어놓고 힘겨워하는 병든 학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서 있는 것만 같다.

 

209 하나하나 골라 써보고 거울에 비춰 비교하듯, 글자를 바꿔 넣었을 때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음미할 수 있어야 시안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뼈대와 힘줄

209 정말이지 시에도 눈이 있다. 시의 빗장을 옳게 열려면 시의 눈, 즉 시안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210 청나라의 유희재는 시안이란 시의 어느 글자가 좋고 어느 구절이 뛰어나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라, 전체 시의 핵심이 집중되어 신묘한 빛이 엉겨 붙은 지점을 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시안은 글자 그대로 시의 눈알이다. 시안은 시에서 가장 정채롭고 시인의 정신이 집약된 지점, 하나만 건드려도 나머지가 따라 움직이는 일동만수(一動萬隨)의 경락이다. ~ 시가 예술의 의경미(意境美)를 형성하는 핵심처인 것이다.

 

211 솜씨가 뛰어난 시인이 구절을 단련하는 것은 지팡이를 던지자 용으로 변해 꿈틀대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한 구절의 영활(靈活)함이 전편을 모두 살아 움직이게 한다. 또 글자를 단련함은 용을 그려 눈동자를 찍자 용이 번드쳐 솟아 올라가는 것과 같다. 한 글자의 빼어남이 시 전체를 기이하게 할 수 있다.

 

한 글자의 스승

일자사의 미감 원리

221 시는 중복을 꺼린다. 한 글자도 넘치거나 부족해서는 안 된다. ~ “풍부하되 한 글자도 남지 않고, 간략하되 한 마디도 빼먹지 않는다.” 한 글자만 더하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글, 그런 시를 쓰라는 주문이다.

 

229 일자사 이야기가 보여주는 한시의 미감 원리는 물론 이 세 가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경계에는 더 많은 변주들이 있다. 일자사는 한 글자를 놓고도 무게를 달아보고 섬세한 말결을 음미할 줄 알앗던 옛사람들의 시정신이 빚어낸 생각의 보석들이다.

 

시안과 티눈

231 시인은 시안을 연마할 때 집착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시안은 시안을 감추는 장안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통찰력 없이 그저 남의 눈이나 놀라게 만드는 수사적 기교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작시, 즐거운 괴로움 고음론(苦吟論)

예술과 광기

235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쳐야 미친다.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235 최흥효(崔興孝: ? ~ ?)는 조선 초의 명필이다. 그가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갔다. 답안지를 쓰는데 우연히 한 글자가 왕희지의 글씨와 같게 되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던 글자였다. 그는 답안을 쓰다 말고 자기 글씨에 도취되어 종일 가만히 앉아 그 글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글씨가 아까웠던 그는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그냥 품에 넣고 돌아왔다. 우연히 같게 써진 한 글자 앞에서 그는 입신출세의 꿈마저도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243 주홍사가 하룻ㅈ녁 사이에 <천자문>을 만들어 올렸는데 수염과 머리칼이 다 세어버렸다. 돌아와서는 두 눈을 한꺼번에 실명하고, 죽을 때에는 마음이 단전을 떠난 것 같았다. 사령운은 반나절 만에 시 100편을 짓고 갑자기 이가 12개나 빠졌다. 맹호연은 눈썹이 모두 떨어졌다. 위상은 <초사> 76권을 저술한 후 심혈이 다 닳아 죽고 말았다. <지봉유설>에 실려 있다. 창작은 이같이 피를 말리는 일이다.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244 일경이 다 가고 삼경에 이르도록 이별의 맘 읊으려도 구절을 못 이루네.

 

245 두 구절을 삼 년 만에 겨우 얻고서 한번 읊자 두 줄기 눈물 흐른다.

벗들이 만약에 칭찬 않으면 가을에 고향 산에 가서 누우리.

 

가슴 속에 서리가 든 듯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

252 인간의 시벽이 돈 욕심보다 더하니 애 졸이며 시구 찾다 몇 봄을 보냈던고.

주머니 빔 상관 않아 가난은 변함없고 시 읊어 새 시구 많은 것만 기뻐했네.

괴롭게 층층 하늘 만져보려 했을 뿐 곤궁 속에 저승 갈 일 따지지도 않았다.

 

253 아무 짝에 쓸모없는 줄 잘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시인이다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技癢)’이란 말로 표현했다. ‘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못 고친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기양이다.

 

개미와 이

257 그러고 보면 산꼭대기 시인의 산 아래를 향한 연민과 탄식, 조소와 비아냥거림도 아래쪽 사람들이 보기에는 같잖기 그지없는 일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한 사람은 위에서 아래를 보며 개미 같다고 하고, 훅 불면 날려가 버릴 것 같다고 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한다. 아래서는 또 위를 보며 머리카락에 붙은 이 같다고 하고, 저 혼자만 공연히 고상한 체한다 하고, 꼴 같지 않게 논다고 눈을 흘기니 말이다.

 

258 사실 세상에는 쓸모만으로 따지면 맥 빠지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른바 예술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람을 배부르게 해주지도 못한다. 마라톤 주자가 42.195 킬로미터를 달린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이봉주, 황영조의 우승에 마음 설렌다.

 

미워할 수 없는 손님 시마론

즐거운 손님, 시마

263 시마는 시 귀신이다. 시마는 어느 순간 시인에게 들어와 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 시마는 시인에게 즐거운 괴로움을 선사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

시마는 시인에게 제멋대로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리는 재미난 귀신이다. 일단 시마가 붙으면 잠시도 시를 떠나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시마가 훌쩍 떠나가면 시를 짓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 뿐 아니라, 제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없게 된다.

 

시마와의 논쟁과 시마 증후군

269 내 이목이 총명함을 빼앗아 보고 듣는 것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쑥대머리가 되어도 빗질하지 않고, 마음이 거칠어도 다스릴 줄 모른다. 성글고 게을러 의논을 자초하고, 교만하고 건방져서 허물을 불러들인다. 칭찬은 여러 사람의 뒤에 있고, 꾸짖음은 다른 사람의 앞에 있게 하니, 내가 굶고 내가 가난한 것이 모두 너 때문이다

 

시마의 죄상

271 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고 머리 빗기를 게을리 하며, 공연히 끙끙대고 인상을 써서 갖은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다. 시마만 붙으면 멀쩡하던 사람이 마치 부스럼 난 사람처럼 온 몸이 지저분하게 된다. 머리는 헝클고 수염은 빠지며 몸은 비쩍 말라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정신을 흐리게 하며, 가슴을 앓게 한다. 그 결과 근심을 불러들이고 평화를 해치고 만다.

 

272 결국 시마란 놈은 이마에 뿔 달린 귀신이 아니라,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귀와 귀시

278 그러고 보면 시 귀신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은 모두 시를 향한 시인들의 끝없는 몰두와 집착이 빚어낸 환영일 뿐이다. 꿈속에서 귀신이 들려준 시는 실상 귀신이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신의 입장이 되어 노래한 것일 따름이다. 시와 관련된 귀신들은 한결같이 무섭지 않고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는 법이 없다. 이들 귀신이 바로 시인 자신의 분신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귀신의 조화와 시인의 궁달

281 꿈에서 깬 뒤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옮겨 적어 벽에 붙여 놓았다. 그는 그 이튿날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이것이 귀신이 시로 사람을 죽인 이야기다.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282 시마는 한마디로 예사람의 시를 향한 열정의 다른 표현이다. 시귀는 사물의 비밀을 끝까지 꿰뚫으려는 시인의 집착이다. ~

시마가 떠난 시인들은 시 짓기를 그만두는 것이 옳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표현과 치열한 시정신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시인들이 어느 순간 침묵의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경우를 지금도 흔히 본다. 침묵은 그래도 보기에 아름답다. 이미 시마가 떠나버린 현실을 인정치 못하고, 이전에 벌어놓은 점수까지 죄 까먹는 조악한 시를 발표하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하다.

 

283 배부르고 따뜻함 속으로 시마는 깃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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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22:42:33 *.124.22.184

 "내가 시를것도 한시를 좋아하게 될지는 정말 몰랐다."


그러게요. 나도 의외에요. 수정씨 시, 특히 한시를 좋아할 것 같지 않았거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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